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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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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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고요한 새벽이다. 어제 부끄럽고 창피한 행위로 인해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계속 일어난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다. 몹시 흥분했기 때문이다.

 

매달 20일은 사무실 관리비를 결재하는 마지막 날이다. 납기를 넘기면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오천원이상 점심을 하지 않는다. 점심값이 조금 안되는 정도에 해당되는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관리비의 2-3프로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사람들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다. 그것은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줄 돈은 천천히 주자.”라는 것이다. 관리비도 그렇다. 납기 마감일이 되어서야 결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침 방송에서 마지막날이라고 해서 결재했다.

 

보통 결재하는 날은 말일이다.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날에 결재한다. 이는 “줄 돈은 천천히 주자.”라는 심리에 따른 것이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파악해서일까 관리비를 20일로 한정해 놓은 것 같다. 사무실관리비를 결재하고 난 다음 아파트관리비를 결재하고자 했다. 마감일이 같은 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틀 빠른 것을 알았다.

 

아파트관리비에도 벌금조항이 있었다. 납기를 어기면 일할 가산세가 붙어서 다음달에 청구한다는 것이다. 몹시 억울했다. 하루만 늦어도 벌금폭탄을 맞는 것이다. 마치 부가세를 제때에 내지 못해서 국세청으로부터 벌금폭탄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파트관리실에 전화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다. 모두 퇴근한 것이다. 당직자에게 관리소장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부했다. 이후 당직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왜 이렇게 흥분한 것일까? 가까운 요인도 있고 먼 요인도 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바쁘고 힘들고 언짢은 일의 연속이었다. 거기에다 아파트관리비 연체벌금이 10%가 된다는 조항을 보고서 흥분한 것이다. 애꿎은 당직자만 붙들고 늘어선 것이다. 지나고 나니 당직자에게 화풀이한 것이 되었다. 또한 갑질한 것이 되었다. 요즘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마구 대해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새벽이 되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더 했다. 아파트 당직자에게 미안했다. 차분하게 대응하는 당직자 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더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일어났다. 마음공부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의무적 글쓰기를 한다는 사람이 어제 사건으로 인해 한방에 무너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중적 태도가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경계에 부딪치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런 경우를 두고서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했을 것이다. 공부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았을 때 물거품이 되고 사상누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십년 글쓰기한다고 하여 글의 내용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전에 실려 있는 가슴 울리는 문구가 내것이 아닌 것이다.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결과는 처참한 것이 된다. 왜 그 순간의 느낌을 알아 차려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했는지 알 만하다. 알아차림 하기가 쉽지 않다.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습관 들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나아 가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학인의 다섯 가지 힘’에 대한 것이다. 오력과 비슷하지만 놀랍게도 ‘부끄러움을 아는 힘’과 ‘창피함을 아는 힘’이 있다.

 

오력은 신근염정혜(信根念定慧)라 하여 믿음, 정진, 사띠, 삼매, 지혜를 말한다. 학인의 다섯 가지 힘은 “믿음의 힘, 부끄러움을 아는 힘, 창피함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A4.163)을 말한다. 이런 힘이 있어야 도를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칠성재七聖財)라 하여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A7.7)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소중한 재물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부끄러움(hiri: 惭)은 내적 양심에 대한 것이다. 창피함(ottappa: 愧)은 외적 수치심에 대한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에게 창피한 것이다. 어제 사건은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고, 관리실 당직자에게는 창피한 일이었다. 앞으로 그 사람을 보면 피하게 될지 모른다. “들켜버렸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It.36, A2.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가 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세상을 수호하는 힘이고 더 나아가 우주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어떤 세상이 될까? 부처님은 동물세계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할 없을 것이고, 세상에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It.36)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일까? 한마디로 도덕이 무너진 사회이다. 개가 어미와 붙어서 새끼를 만들듯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 역시 도덕적으로 금하는 어떤 일도 서슴없이 자행할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는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와 같아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기가 된다.

 

오늘 새벽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참담한 마음이 되었다.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창피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들켜 버린 것 같다. 경계에 부딪쳐 무너졌을 때 마치 복서가 강펀치 한방에 넉다운된것 같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멀고도 먼 길이다.

 

다시는 쓰라림을 맛보지 않으려면 잘 관찰해야 한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머물지 않고 사라진다. 사라질 때는 행위(業)을 남긴다. 행위가 익으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니까야에서 늘 강조하는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라.”라는 말을 실감한다.

 

 

2020-05-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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