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백선엽의 휴전회담 일지 "국군은 강해져야 하고, 힘만이 모든 걸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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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學 常識/6,25 이야기

전쟁영웅 백선엽의 휴전회담 일지 "국군은 강해져야 하고, 힘만이 모든 걸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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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왼쪽에서 넷째)과 함께 한 유엔군측 휴전협상 대표. 왼쪽 셋째가 백선엽 장군. [중앙포토]

6ㆍ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오랫동안 보필한 지인이 연락해 왔다. 1주기(7월 10일)를 앞두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남긴 기록물들을 정리하던 중 백 장군이 1951년 휴전회담에 참석했던 무렵에 쓴 육필 일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한 월간지가 발췌 보도한 적이 있으나 원본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였다.

북한ㆍ중공군 대표단. 짙은 군복을 입은 왼쪽 두 사람이 중공군 대표다. [중앙포토]

A4 메모지 229쪽에 연필로 쓰인 일지에는 휴전 회담장에서의 날선 공방과 팽팽한 신경전, 회담에 임하는 각 측의 전략과 대표들의 인물 됨됨이 등 기왕에 알려진 내용 이외에도 새롭게 조명해 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았다. 특히 부산 임시수도의 이승만 대통령과 경기도 문산 막사의 백선엽 장군이 긴밀하게 교감해 가면서 최대한 군사 전략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펼친 노력과, 그 노력의 좌절에 대한 울분, 우리 땅에서 일어난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약소국의 한계 등이 손에 잡히듯 생생하게 읽힌다.

1주기 앞두고 육필 일지 발견
북진론자 이승만과 긴밀한 교감
미국 반대에 막혀 이루지 못한
연안반도, 금강산 탈환 계획

백선엽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백선엽(이하 경칭 생략)이 51년 8월 22일 이 대통령에게 인편으로 보낸 편지는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다.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정서할 경황이 없었던 듯 줄을 긋거나 검정칠로 지운 흔적과 휘날려 쓴 필체가 긴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최근 미국 측은 휴전회의 정돈(정체)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종래의 주장으로부터 양보할 기색이 농후합니다. 즉 비무장지대 설치에 있어서 군사분계선을 현 접촉선에서 쌍방 수 킬로미터씩 이격하여(거리를 둠) 합의에 도달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연안지구는 우리
측이 상실하게 됩니다. 이 점 극히 우려됩니다. ”
연안지구는 황해도 연안반도 일대를 말한다. 예성강이 지척인 곳이다. 그는 왜 분망한 필체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긴급히 보고하였을까.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선 휴전회담 초반 백선엽의 일기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발발 1년을 지나면서 6ㆍ25전쟁은 교착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낙동강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을 종단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동안 입은 타격은 피아 가릴 것 없이 막대했다. 이심전심으로 휴전협상 논의가 나왔고 1951년 7월 10일 첫 회담이 개성의 한옥 고택인 내봉장에서 열렸다.

다부동 승전과 평양 최초 입성, 서울 재탈환 등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백선엽도 야전을 뒤로하고 회담에 합류했다. 유엔군 대표 5명 가운데 유일한 한국군이자 최연소 대표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회담을 반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통령 뜻에 반하는 회담에 나가게 된 백선엽의 번민이 일지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그는 대통령에게 신고하러 간 자리에서 “(반대하시면) 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노련한 정치인 이승만은 휴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과 협조하는 의미도 있으니 참석하라”면서 “중요 문제는 (나의) 허가를 받으라. 군인으로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되 정전대표로서는 정부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이후 76세의 노정객과 31세 청년 장군의 긴밀한 교감이 이어진다. 때로는 직통 전화로, 때로는 한국군 메신저를 통해 수시로 휴전회담 상황을 보고하고 지침을 내리는 장면들이 일지 여러 곳에 등장한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휴전회담 초미의 관심사는 경계선 획정이었다. 북한은 38선을 경계선으로 삼음으로써 6ㆍ25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했다. 휴전을 서두르던 미군의 입장은 분명했다. 강화~양양을 잇는 ‘캔자스 선’을 북진의 한계로 보고 당시 전투가 벌어지는 선을 그대로 휴전선으로 삼으려 했다. 북진론자 이승만은 물론이고 백선엽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7월 27일 전화로 백선엽에게 보다 더 구체적인 지침을 전한다. “선(線)에 관하여 토의할 때만 참석하고 선에 대한 결정을 지을 때는 참석하지 말라.” 한국 정부가 원하지 않는 경계선은 수용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백 장군은 즉시 터너 조이(미 극동해군 사령관) 수석대표에게 이런 입장을 전하고 “한국 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휴전협상 대표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뜻까지 비치며 언쟁을 벌였다. 그러자 조이 대표에게서 이런 말이 돌아왔다. “남한은 (정전에 반대함으로써) 미국의 원조를 잃을지 모른다.” 조이의 발언은 워싱턴의 방침 그대로였다. 일지에는 “미 국무차관이 양유찬 주미 대사에게 정전을 보이콧하면 원조는 중지하겠다고 하였다”(8월13일)고 적혀 있다.

남북 지도

백선엽에게는 군사전략적 차원에서의 마지노선이 있었다. 그는 서부전선에서는 개성 이서(以西)지역, 즉 옹진반도와 연안반도, 예성강 언저리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강화도 코앞인 연안반도가 북한의 수중에 남아 있으면 한강 하구가 기능을 못하는 ‘죽은 강’이 되고, 서울 방어가 위험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7월 13일자 일기를 보자.

“14:00 회의. 연안반도 입수(入手)를 강조. 건의서 작성. 해군 및 공군의 전략적 가치에 입각하여 실질적 대가 및 한강 방어 능력 등을 입증.”
‘실질적 대가’란 말은 한반도 전역의 제공권·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 해ㆍ공군이 북한 지역 활동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대신 지상에서 공산군의 양보를 받는 협상안을 뜻한다. “연안 개성 포기 불허”“우리 해·공군이 적에게 주는 손실은 지상군보다 많다”는 등의 표현이 일지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유엔군 대표들에게 연안 확보를 설득한다. 하지만 유엔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는 번번이 그의 말을 일축했다. 현재의 전투선에서 전쟁을 매듭지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북상을 바라는 이승만과 이를 거부하는 리지웨이 사령관이 결국 충돌한다. 서울 동숭동 임시 미8군 사령부에서 7월 16일에 열린 회의를 백선엽은 이렇게 기록했다.

“(미군 측 브리핑을 들은 뒤) 이 대통령은 ‘왜 좀 더 전진하지 아니하냐’고 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그러면 우리는 포위당하라는 것인가? 이 이상 전진하면 부대가 분산되고 보급로가 없다’고 했다.”
동석했던 존 무초 주한 미 대사는 “당신의 잘못(Your Mistake)”이란 말을 세 차례 반복하며 이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는 백선엽의 반론은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대통령의 고충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눈물을 금할 수 없었음.”
동부전선에서 백선엽의 목표는 금강산 탈환이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8군사령관과 의견이 일치했다. 두 사람은 휴전회담 시작 전 강원도 고성 북부의 고저(庫底) 지역을 공격하는 ‘고저 상륙작전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16군단 예하 2개 사단을 고저에 상륙시키고, 한국과 미국의 3개 군단이 참가해 경원선 이남 지역에 포위된 북한군 주력을 격멸하고 북위 39도선까지 올라간다는 계획이었다.

회담이 벌어지는 동안 밴 플리트는 몇 차례 문산으로 와서 백선엽과 작전을 숙의했다. 백선엽은 휴전회담 중에도 1군단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일기에는 8월 17일 관련 기록이 나온다. 밴 플리트의 요청 때문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09:00 문산을 L19(경비행기)으로 출발, 원주~강릉을 거쳐 속초에 도착. 부군단장 이하 막료와 면담 약 2시간.” 곧이어 부산으로 날아가 국방장관을 찾아가 “개요를 설명”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백선엽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승인을 얻지 못해 취소된 것”이라는 게 국방부 공식 전사의 기록이다.

백선엽은 싸우면 이기는 ‘상승(常勝)장군’이었지만 휴전회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한계가 분명했다. 그는 아군 내부에서부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던 백선엽은 물론 대통령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신생 대한민국의 한계였다. “전쟁은 이 정부의 영토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정부는 전쟁에서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중국의 전쟁사가 왕수쩡의 냉혹한 평가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후임자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51년 8월 말 1군단장으로 복귀하면서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7월 31일자 일기에 “국군은 강해야 한다”고 적었고, 8월 2일자에는 “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썼다.

[출처: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전쟁영웅 백선엽의 휴전회담 일지 "국군은 강해져야 하고, 힘만이 모든 걸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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