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팔훈(修心八訓) - 달라이라마 강설***(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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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Tibet불교법향

***수심팔훈(修心八訓) - 달라이라마 강설***(필독)

불심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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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길
도제 셍게 재빠의 『수심팔훈(修心八訓)』

(*역주: 원제는 『bKa' gdams pa'i bshes glang ri thang pa rdo rje seng ges mdzad pa'i blo sbyong tshig brgyad ma』이다.)

달라이 라마의 스위스 강설(講說)에서,



오늘 이렇게 늦은 오후에 우리가 모인 것은 법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티벳 불교에는, 정신적인 가르침을 주거나 설법을 하기 전에,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의 구절이나 진언(眞言, Mantra)을 염송(念誦)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들 중에서도 완전한 지혜에 대한 가르침인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 Prajñapāramitā)』을 염송하는데, 그 안에는 공성(空性)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깨달음의 길인 보리도(菩提道)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의 여러 경전들 중에서도 주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많이 염송합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염송을 하는 동안 공성에 대해 관상(觀想)하십시오.

 

공성은 모든 것이 연기법(緣起法)에 의지하는 것을 아는 깨달음입니다.

관상하는 것이 어려우면, 그냥 조용히 침묵하며 앉아 있어도 됩니다.

이제 일반적으로 불법(佛法, Buddhadharma)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설(講說)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서양에서 설립된 여러 나라의 불교 승원(僧院)과 불교 센터(center)에서 온, 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가르침을 전수 받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 때문에 많은 통역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리를 공부하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양한 언어와 국적을 가진 여러분 중에는 종교적 신념이 다른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서서히 이렇게 다양한 구분과 구별을 넘어설 것입니다. 본(本) 가르침의 핵심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가르침을 전수하는 동안, 나는 여러분을 개개의 인간으로 볼 것입니다. 또 여러분도 나를 개별적인 인간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차별 없는 마음으로 하나씩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는, 아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인관관계를 잘 맺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어서 아주 다양하게 보이고, 물리적으로도 서로 다른 특성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고통 속에서 자유나 기쁨, 행복을 추구합니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물리치고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이러한 소망을 이루어줄 방법이나 길을 찾습니다. 또, 이미 그러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방법이나 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시작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인 기구나 장치를 얻으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적인 방법을, 어떤 사람은 이익을 남김으로서, 어떤 사람은 전쟁이나 살인의 방법으로,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지배함으로서, 또, 어떤 사람은 자연을 경작함으로서 그 결과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강구합니다.


하지만 오늘 오후 이 자리에서 사용할 방법은 그것들과는 다른, 마음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아마 너무 쉽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으로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겁니다. 여기서 내가 의미하는 마음이란 의식(意識)을 말합니다.

 

누구나 이 의식에 대해 한 마디씩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마음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음은 하나의 물질입니까? 무게나 색깔이 있습니까? 특징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마음은 어떤 종류의 상상이나 생각도 떠올릴 수 있는 아주 강력하고 효과적인 면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의식은 우리의 말과 물리적인 행동을 직접적으로 움직이고 제어합니다. 주체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좋고 나쁜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원인입니다. 몸과 말과 마음 중에서, 우리는 보통 마음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즉, 말과 몸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몸과 말을 쉽게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조복(調伏)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은 놔두고라도 일시적인 행복만을 얻으려고 해도, 마음을 다스려야 가능합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행복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좋은 집과 주변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적인 성취나 만족이 없다면, 행복은 쉽게 느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내적 만족과 경쾌함이 있으면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직 마음만 중요하며, 외적인 상황과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과 외적 조건은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몇몇 경전들에서는 마음의 성품에서 생겨나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삼계(三界)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가장 높은 차원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마음의 속성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외적인 대상이나 실재를 주장하는 학파도 있습니다.


주관적인 마음과 객관적인 대상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주관적인 모습과 객관적인 모습에 대한 경험이 하나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이란 주로 정신적인 조건과 외적인 대상을 말합니다.

외적인 대상과 관련된 마음은 이렇게 해서 서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기에 그냥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여 오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운송 수단을 이용하여 온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여러 가지 외적인 현상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더불어 외적인 현상을 활용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말고, 의식이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수많은 철학과 철학적 체계가 그러한 것처럼 다양한 종교들은, 생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포함하여, 마음의 내적 발전을 이루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내적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철학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상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이론과 반론들이 공존합니다. 어떤 사람이 희다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검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들은 이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아주 전문적인 용어상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각각의 존재들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스스로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는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아주 유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 모인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을 배우고 토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곳은 지금까지 불법이 꽃 핀 적이 없었던 곳입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인 만큼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너무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서로를 알아야 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불교도들에게도 이곳의 종교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히 기독교를 보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할 뿐만 아니라, 그 이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봉사활동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배워야할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는 서양의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불교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명상 수행이나 철학적 내용과 분석 체계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부분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계의 상황을 보면,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들도 그와 같이 정신적 통합을 위해 서로 교환하고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에는 수행의 방법이나 체계, 마음을 다스리는 법 등에 대한 다양한 구분과 구별이 있습니다. 소승과 대승 같은 구분 방식도 있으며,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과 같은 여러 가지 승(乘: 방법적 체계)들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좀더 예를 들어 보면, 이론적으로는 유부(有部), 경부(經部), 유식(唯識), 중관(中觀) 학파 등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 네 개의 학파들은 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적 체계와 주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법(佛法)이란 이 모든 이론적 체계와 방법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더불어 이들은 다양한 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발달하였으며 더 미세하고 더 정교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든 수준에 있는 모든 단계의 사람들에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낮은 단계는 좀 더 높은 단계의 이론적·수행적 토대를 구성합니다. 마치 수많은 강줄기가 모여 대양(大洋)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유식이나 중관 같은 학파들은 모두 인도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지금은 티벳에도 조금씩 다른 정신적 줄기들이 생겨서 닝마, 까규, 사꺄, 겔룩 같은 법맥(法脈)들이 있지만, 이들은 인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학파와 관련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티벳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스승들로부터 다양한 시기에 전해진 가르침을 토대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양한 법맥들은 소승이나 대승 또는 불교의 여러 학파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티벳의 주요한 네 개의 종파들은 모두 용수(龍樹) 보살의 전통에서 기원한 중관의 이론적 체계, 특히 귀류논증(歸謬論證) 중관학파의 이론과 수행 방법, 그리고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티벳의 사대종파(四大宗派)는 모두 똑같이 보리심을 강조합니다.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이 이들의 핵심적인 수행방법입니다.

 

일반적인 삶의 방식은 보살의 길을 따르고, 특별하고 내적인 수행방법은 밀법(密法, Tantra)을 따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보살도(菩薩道)와 특별한 비밀도(秘密道)를 하나의 길로 수행합니다. 모든 티벳의 사대종파는 이런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네 개의 종파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깔로 특징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티벳의 사대종파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전승 체계를 좀 더 미세하게 살펴보면, 닝마 종파에는 대구경(大究竟) 또는 대원만(大圓滿)이라고 부르는 족첸(rDzong-chen) 수행이 있습니다. 사꺄에는 도과(道果, ꇅ Lam-bras)가 있으며, 까규에는 대인(大印) 즉, 마하무드라(Māhamūdra)가 있고, 겔룩은 정광명(淨光明)의 단계적 수행을 강조합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제 자세히 그 깊은 뜻을 알고 나면 모두가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이론적 체계와 방법들은 인도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용수(龍樹) 보살의 중관 체계에서는 이제(二諦)를 바탕으로 한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수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포함합니다. 더불어 물리적 정신적으로 쌓은 공덕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다른 이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물리적인 몸인 색신(色身)과 부처의 마음인 법신(法身)을 동시에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길은 지혜와 방편을 포함한 이제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공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근본인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는 또 정신적 공덕을 많이 쌓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방편에는 다시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의 대안적 수행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보다 남의 이익을 위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입니다.

이것은 방편의 핵심입니다.

 

두 번째는 물리적인 공덕을 쌓음으로서 방편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이제 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길인 『수심팔훈(修心八訓)』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하겠습니다. 이 『수심팔훈』은 게쉐(Geshe) 랑리 탕빠(gLangri Thangpa)(*역주: 이 『수심팔훈(修心八訓)』의 저자인 게쉐(Geshe) 랑리 탕빠(gLangri Thangpa, 1054-1123)은 겔룩의 전신인 까담(Kadampa)의 학자(Geshe)이며, 랑탕(Langthang) 승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티벳에는 법이 융성하던 두 시기(*역주: 티벳의 랑 다르마(Lang darma)왕이 불법(佛法)의 암흑시기를 주도한 10세기를 전후로, 그 이전을 불법의 전기(前期) 전파 시대 혹은 구파(舊派, ꇅ rNying-ma)의 시대, 그 이후를 불법의 후기(後期) 전파 시대 혹은 신파(新派, ꇅ gSar-ma)의 시대로 나눈다.)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시기는 아띠샤(Atiśa) 존자(尊者)님을 비롯한 여러 위대한 인도의 스승들이 티벳에 법을 전하고 꽃피우던 시기입니다. 뛰어난 불교 학자였던 랑리 탕빠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수심팔훈』의 처음 일곱 게송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상대적인 깨달음의 길인 세속적 보리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게송은 절대적인 보리심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승의(勝義) 보리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게송입니다.

1. 내,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하여
여의주(如意珠)*보다 더
고귀한 뜻을 이루고자 하나니,
언제나 진정한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역주: 진흙 속에 여의주(如意珠)는 언제나 탁한 것을 정화하여 세상에 이익을 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남과 나의 관계입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 것, 혹은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는 큰 흥미를 보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피해 행복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로 자신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이 직접 그 짐을 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도 점점 멀어져 별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이때가 바로, 자신의 이익 만큼이나 남들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황을 바꾸어서 보는 정신적 훈련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중요시 여기는 것에서 다른 사람의 이익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이러한 전환을 이루기 위한 정신적인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너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수행을 하고 싶다면, 이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경전들을 요약해서 간단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이에 관련한 적절한 경전에는, 먼저 용수 보살의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王譚寶鬘)(약칭 寶鬘)』이 있습니다. 또, 좀 더 분명한 실천 방법을 담고 있는 샨띠 데바(寂天) 보살의 『입보리행론』이 있습니다.

 

이들 경전에서 보면, 모든 중생은 똑같이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이유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거기에 남과 나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나”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나”가 고통에서 자유로워져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는 자의식을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고통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얻기 위한 우리의 잠재적인 상태도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크기로만 봐도 나 보다는 다른 이들의 이익이 훨씬 크고 중요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내 자신 보다 더 편안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로 똑같습니다.

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똑같지만, 여전히 나는 하나이며 남들은 무한합니다.

 

하나가 정말로 객관적이라면 이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상거래에서 보면, 한 단위 한 단위의 돈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종합적인 금액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소들 하나하나는 똑 같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순간이 오면 하나 보다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많은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수에는 관심이 없고 일개인인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와 자신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다른 많은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 어느 쪽이 더 유일할까요? 분명히 나중의 것이 모두를 위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불합리한 일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 중 밀교(密敎)의 수행법인 분노존(忿怒尊)에 대한 관상(觀想)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이제 관상(觀想)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한번 살펴 해보십시오. 먼저 자신을 중심으로 오른 편에는 무한히 펼쳐진 모든 중생들을 관상하고 왼편에는 수백 명의 중생들을 관상합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편견 없이 관찰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다 버리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겠습니까? 아니면 내 자신을 버리고 이 무수히 많은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까? 다시 오른쪽에는 자기 한 사람을 두고 왼쪽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두고 관찰해 보십시오. 일반적인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결국 다수를 생각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식에 적용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결정을 할 때, 단 하나가 됐든 수백만이 됐든, 어느 쪽이든 많은 쪽이 선택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고 편견 없이 살펴보면,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인지 살펴보았습니다. 무언가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쏟는다면, 아마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하고 고귀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게쉐 랑리 탕빠의 게송들에서 키워나가야 합니다.

 

관심은 결국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고 무가치한데에다 쏟았던 관심들을 여의주(如意珠)처럼 가치 있고 소중한 데로 돌려야 합니다.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소망을 키워야 합니다.

 

이기적인 관심을 버리고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더라도
내 자신 누구보다 부족하게 보게 하시고,
남을 위한 진심어린 생각으로
지고지순한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이 게송은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무시하던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모든 중생을 올려다보고 내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헌신하여 남들을 행복하게 해야 하며, 모든 유정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회향해야 합니다.



3. 모든 행동을 자신의 흐름(自相續)으로
헤아리게 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나와 남을 해롭게 하리니,
강력한 방편으로 처음부터 막아내게 하소서.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것에서 남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전환하려면, 다양한 자신의 번뇌 망상을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즉, 번뇌 망상이 지금까지 우리를 이기심 속에 가두어 두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이 게송은 이렇게 해로운 번뇌 망상을 처음부터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마치 자신의 소중한 집을 지키는 것처럼,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분석하여 구분하는 분별(分別)과 조심스럽게 깨어 있는 억념(憶念)으로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는 내면의 마음을 지키는 경찰과 같습니다. 이들이 마음에 있으면, 나쁜 일이나 해로운 일은 저절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외부의 경찰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별과 억념이라는 내부의 경찰을 잃고 나면, 외부의 경찰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경찰을 피해 제 멋대로 일을 저지르는 테러범과 같습니다.


이 게송은 또 나와 남들이 항상 맞서 싸우고 있는 위험인 번뇌 망상을 제대로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내부의 보호자인 관찰의 힘을 잘 유지하면 집착과 분노 등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자마자 강력한 힘으로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즉, 번뇌 망상이 자신과 남들에게 끼치는 해로움을 기억함으로서 번뇌 망상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안정과 평화를 잃고, 이성과 균형을 잃고 맙니다.

 

번뇌 망상에는 분노, 집착, 시기, 질투, 자만, 의심, 무지 등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여섯 가지의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으며, 더불어 스무 가지의 부차적인 번뇌인 수면번뇌(隨眠煩惱)가 있습니다. 번뇌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로운 번뇌들 안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분노와 증오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결과를 몰고 오며,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오늘 난 정말 화가 나, 그래서 난 행복해! 화는 나를 착하게 해.” 이것이 말이 됩니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말합니다. “아, 당신은 병이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화를 내는 것이 당신의 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화는 오직 파괴적인 결과를 몰고 올 뿐입니다.



4. 성품이 사악(邪惡)한 유정(有情) 중생이
강력한 죄업(罪業)에 굴복하는 것을 볼 때,
보물(寶物)의 창고*를 만난 것처럼
얻기 힘든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역주: 나와 남이 다르지 않는 경지에서는 남의 모든 허물이 나에게 숨겨진 잘못이 된다. 이 숨겨진 허물을 찾아내어 수행하고 극복하면 깨달음의 길 보다 가까워지듯이 남의 허물은 나의 모든 허물을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며 보물의 창고처럼 소중한 수행의 원동력이다.)

이 게송은 식인종이나 아주 악독한 사람 등 특히 혐오스러운 중생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생들을 만나면 우리가 남들을 해롭게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고 해도 저절로 그들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눈을 돌리고 접촉을 꺼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 역시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런 중생들에게도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지. 이들의 짐을 덜어 줘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중생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보석이나 보고(寶庫)를 만난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5. 나를 남이 시기하니,
욕설과 비웃음 등의 부당한
피해는 내가 받고
승리는 남에게 돌리게 하소서.


따라서 남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봉사하는 자세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나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서도 모든 것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나를 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든 상관없이,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수행을 위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악의에 찬 사람들을 만나도 모든 피해는 스스로 감당하고 그들이 승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6. 누군가 내가 도와주며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아주 부당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스승)으로 보게 하소서.


수많은 중생들 중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에 열심이고, 상대방을 극진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고귀하고 올바른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사랑과 친절을 다시 되돌려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오히려 화를 내거나 거칠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사랑과 자비를 잃고, 흥분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 경우 보살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 매우 중요 ----------------------

 

 

보살은 사랑과 자비로 대하던 누군가가 거칠게 반응하더라도, 그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보고 대합니다.

이런 좋은 수행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인내와 관용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의 자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수행해 나갑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보살은 인내를 바탕으로 수행합니다.

 

즉,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인내를 기르면 기를수록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정신적 바탕은 더욱 자라납니다.

 

인내는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수행에 큰 도움을 주는 정신적인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생활 방식 즉, 보살의 수행은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애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수행해 나가면, 결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적이나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불행의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소리치고 화내는 대신에 애정과 감사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기름으로서 항상 일어나던 답답하고 힘든 감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간단한 조언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마음을 길들이는 수행입니다.

 

마음을 바꾸고 발전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무언가 조금씩 해나갈 수 있습니다.

 

내 자신, 대단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나는 마음을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가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단 한달이든 일년이든 시도해보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하고 시험해 봐야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전환하는 일이 가능한 일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내면의 세계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전환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이 강론의 여덟 게송 중 여섯 번째 게송이 끝났습니다. 일곱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 요약하면, 직접 간접적으로 [생긴]
이익과 안락은 모든 어머니들께 드리며,
어머니들의 모든 손해와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내가 받게 하소서.


이 게송까지는 아직도 세속적인 보리심(菩提心)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자신보다는 다른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이며, 그들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비심은 자(慈)와 비(悲)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즉, 사랑(慈)과 연민(悲)의 마음입니다.

 

자비심은 자신보다는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근본입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이익과 안락은 모든 어머니들께 드리며, 어머니들의 모든 손해와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내가 받게 하소서.”라는 게송의 내용처럼, “주고받기(ꇅ gTong-len)”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실제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직접 대신 받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전생부터 자신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자신이 대신 고통을 받거나 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마음을 훈련하겠습니까? 그것은 최소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리심(菩提心)을 개발하기 위한 자신의 수행을 극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주고받기”같은 수행을 시작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불행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들의 애처로운 상황을 그려보는 관상(觀想)을 말합니다. 지금 당장 그러한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것까지 함께 그려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바로 이전에 지은 업(業)의 원인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지은 업이 바로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의 상황을 그려봄으로서 마침내 그들의 고통스런 상황에 진심어린 애정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하려는 급박한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짓고 있는 업이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모든 중생들의 다가올 고통의 원인과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을 제거하고 싶은 급박한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혐오감 없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그려 보는 수행입니다. 실제 이 수행은 마음에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깊은 집중의 상태에서 그려 보는 특별한 수행의 방법인 관상법(觀想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대신 받는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충만한 행복을 주려는 적극적인 원(願)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원을 세우고, 이 수행의 두 번째 단계인 “주기(ꇅ gTong)”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줍니다.

즉,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 생각과 말과 몸으로 가진 모든 것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편안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관상(觀想)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과 연민인 자비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은 모든 행복을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수행입니다.

 

다음은 마지막 여덟 번째 게송입니다.



8. 이 모든 것 역시 세간팔풍(世間八風)**으로
분별하는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제법(諸法:현상)을 환몽(幻夢)으로 아는 지혜***로
애착 없이 [윤회의]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역주:세간팔풍(世間八風)이란, 『불지경론(佛地經論)』 第八에 보면, 세상에서 마음을 흔드는 여덟 가지 요소를 바람에 비유한 말한다. 즉 이득, 손실, 뒤에서 비난 하는 것, 뒤에서 칭찬하는 것, 앞에서 칭찬하는 것, 대 놓고 비난 하는 것, 고통, 즐거움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역주: 분별의 객진번뇌(客塵煩惱)란 본래 분별할 것이 없는 청정한 성품에,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사유가 얽히고설키어 마치 먼지가 쌓인 것처럼 번뇌로 그 본성을 가리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역주: 즉 모든 현상계가 꿈속의 허깨비와 같은 것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마지막 게송에서는 절대적인 승의(勝義) 보리심을 개발하는 방법에 대한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앞의 일곱 게송들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방법들과 관련한 것입니다.

 

자신보다는 남들을 더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을 개발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월을 번뇌 망상에 물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법(法)을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입니다.

 

명예와 재산, 욕망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법을 수행하는 사람조차도 “나는 종교인이야, 난 법을 수행하는 수행자야.”라는 자만심이 생겨 마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처럼 행세하거나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아래로 내려다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모든 번뇌 망상은 모두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됩니다.

이들은 또한 보리심을 개발하는데도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소위 “세간팔풍(世間八風)”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분별심(分別心) 즉, 남과 나를 비교하여 따로 구분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 세간팔풍에는 이득, 손실, 뒤에서 비난 하는 것, 뒤에서 칭찬하는 것, 앞에서 칭찬하는 것, 대 놓고 비난 하는 것, 고통, 즐거움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기르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게송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제법(諸法:현상)을 환몽(幻夢)으로 아는 지혜로 탐욕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중생과 부처,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등을 담고 윤회하는 이 모든 현상계가 나타나는 대로 혹은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단지 서로 의지하여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집착과 분노 같은 수많은 번뇌 망상 즉, 번뇌의 때가 잔뜩 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현상계의 특성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확실히 현상계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것과 슬픈 것이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언제나 그렇게 독립적으로 본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바른 마음을 키우는데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런 구분을 통하여 남을 위한 마음을 바르게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이며, 그에 따른 수행의 방법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언제나 그렇게 같은 상황과 조건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게송의 두 번째 구절은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은 원인과 조건의 결합일 뿐 본래 그러한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은 단지 세속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자칫 정신적인 수행을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구분은 단지 세속적인 것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하나의 이해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게송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현상을 환몽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양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즉, 인간과 현상을 미세하게 관찰해 보면, 꽉 차 있는 실체가 아니라 무언가 비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상태를 공성(空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인간이나 현상에 본래의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막론하고 아주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밀교에는 “환광(幻光)”이라는 의미의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 역시 현교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합니다. “환(幻)”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항상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게송에서 의미하는 것은 현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마치 본래 그러한 성품(自性)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현상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 자세하게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환(幻)”이며 환상과 같습니다.

 

모든 현상이 실재(實在)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반야바라밀경(般若婆羅蜜經)』에서는 일체의 근본 지혜에서 생긴 다양한 현상의 유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유형들을 다시 세세하게 살펴보면, 본래 그러한 모습(自性)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부서진 시계에는 원래 시간을 보여주던 시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수행에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실제 현상에서 이것을 점검하면 모든 현상의 성품이 결국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행으로 돌아와, 모든 현상이 비추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면, 존재의 궁극적인 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전의 수행 중에 경험했던 것을 적용하여, 이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 보이는 현상계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 역시 꿈과 다르지 않은 환상으로 인식합니다. 즉, 환몽(幻夢)의 경험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현상의 궁극적인 존재 형식을 깨달음으로써, 공성(空性)을 깨닫고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은 단지 세속적으로 이름 붙인 것임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지울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고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와 편견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무지와 편견이 사라지면, 윤회 속에 다시 태어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는 현상의 실제 자성(自性)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속박에서 벗어나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애착 없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것이 게쉐 랑리 탕빠께서 지으신 『수심팔훈』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한 구절입니다.

이상은 까담빠(*역주: 티벳 불교의 한 종파인 까담빠(bKa' gdams pa)는 신파(新派)의 막을 연 학파이기도하다. 개조는 아띠샤(Atīśa) 존자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방법을 아주 체계화 하였다. 겔룩 종파는 이 까담빠의 후신이다 그래서 겔룩을 신 까담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쉐 랑리탕빠(glang ri thang pa)께서 지은신 『수심팔훈(修心八訓)』으로, 다른 모든 로종(blo sbyong, 修心) 문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내용을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을 참고 하여 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위의 내용과 관련한 두 가지의 가르침을 더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더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려는 마음을 개발하는 것 즉, 친절한 마음을 개발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자세와 관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적인 측면으로, 계율을 지키는 행위에서 시작합니다.

 

방편이 완전해지도록 보충해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갖추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현상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지혜와 방편은 항상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즉, 합일(合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방편의 수행은 바른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또, 바른 지혜는 자비심 등을 포함한 방편을 실천함으로서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보충해 줍니다. 서로 완전한 정신적 완성을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혜와 방편의 합일에 대한 문제는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의 이 만남이 여러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많은 고생으로 이루어진 결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중에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이미 여러 번 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가르침이 아주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새로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상황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잠시,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가르침을 여기에 조금만 덧붙이겠습니다. 비록 오래 전에 시작된 가르침이지만 지금 현재 21세기에도 똑같이 가치 있고 유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가르침과 수행들은 대부분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아주 어렵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 누구라도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인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내 생각에는 이 이상의 대안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군비를 축소하거나 무장을 해제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긴장을 해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정신적 수행이 값진 결실을 맺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가르침의 기회를 얻게 된 건 내 자신에게도 큰 행운입니다. 가르침이 진행되는 동안 이중 삼중의 통역으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을 겪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드셨지요?


나는 티벳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티벳에 대한 설명이 조금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내가 갑자기 비행기에서 내린 줄 아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내가 태어난 티벳은 유명한 히말라야(Himalayas)에서도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낮은 지역은 이곳 스위스(Switzerland)와 풍경이 비슷하지만, 좀 더 높은 지역인 북쪽 고원 지대는 야생의 불모지입니다. 티벳은 광물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600만입니다. 티벳 민족은 긴 역사와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티벳인의 육체적 특징은 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원래 종교는 뵌포(Bonpo)라는 종교가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아주 오래 전에 시작한 종교인 것은 분명합니다.


나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이 티벳에 들어와 널리 퍼지고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소승과 대승 그리고 금강승(金剛乘)의 경전들이 티벳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 금강승은 또 네 가지나 여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이 완전한 형태로 들어 왔습니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은 주로 소승 불교가 꽃을 피웠고, 대승 불교는 중국에서 꽃을 피워, 나중에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금강승은 일부는 전해지고 일부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하급 밀교인 행요가(行瑜伽) 작요가(作瑜伽) 요가(瑜伽) 등의 계열입니다. 무상요가(無上瑜伽) 계열의 수행 방법은 티벳에만 남아 있는 걸로 보입니다.

 

티벳에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완전한 체계로 전해졌고, 그대로 꽃을 피웠습니다. 다양한 불교의 학파들과 다양한 차원의 가르침이 전해졌지만 이론과 수행의 체계를 모두 보존 전승한 곳은 티벳뿐인 것으로 압니다. 티벳에는 또 종교예술, 점성의학, 범어(梵語) 등 많은 지적 분야들이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범어는 인도에서 기원한 언어로 당시에 수많은 지식을 기록한 중요한 언어입니다. 이 모든 지식들이 거의 티벳어로 번역되었고, 티벳 대장경 안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티벳인의 주식(主食)은 보리를 볶아서 가루를 낸 짬빠(tsampa)이며, 유목민들은 고기, 버터, 치즈 등을 함께 먹습니다. 기후와 환경 때문에 티벳인의 대 부분이 불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먹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의 비폭력과 관련하여 고기를 먹는 티벳인의 풍습은 항상 질문거리가 되고는 합니다. 복장은 몽골의 영향이 많이 받았습니다. 또, 야채를 사용하는 요리는 거의가 중국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티벳인들은 여러 가지로 다른 문화의 영향을 잘 조화해 왔습니다. 끝으로 철학은 심오한 인도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티벳의 인구에 관해서는 120만이나 170만이라는 기록도 가끔 보이지만, 그것은 한 지역이나 부분적인 통계입니다. 티벳의 전체 인구는 대략 600만 명입니다. 티벳이 점령당한 이후 약 20여만 명의 티벳인이 망명 중에 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인도에 정착하였으며, 이 곳 스위스에도 약 1300여명이 정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망명 티벳인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주신 이곳 스위스 국민과 스위스 적십자 그리고 스위스 정부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듯함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종교도 점점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이런 상황은 아주 고무적인 일입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좀 더 나은 인간의 삶과 정신적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가 이 부분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열린 시대는 이들 종교가 각자의 정신적 깊이와 방법을 교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종교 간의 비교 연구나 서로의 가르침을 교환하는 일은 아주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발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먼저 초심자들에게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에 대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네 가지 진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진리인 속제(俗諦)와 절대적 진리인 진제(眞諦)의 이제(二諦)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상대적 진리인 속제의 차원에서 이것과 저것, 나와 남 등은 각각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절대적 진리인 진제의 차원에서는 모든 대상과 존재는 오직 다른 것에 서로 의존하여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 차원에서 오는 것으로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관찰의 결과입니다.

 

현상의 이러한 궁극적인 특성을 공성(空性)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다른 두 가지 차원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속제와 진제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 진리인 이제에 대한 이해는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의 바탕입니다.

 

서로 의지하여 발생하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사물의 본래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조건이 함께 모이면 현상이 생겨나고, 특정한 현상의 조건이 사라지면 그 현상도 소멸합니다. 그 현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상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과정입니다.

 

 


이제 사성제(四聖諦)를 어떤 하나의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이 세계 공동체 또는 인간 사회의 전체적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진리인 고제(苦諦)에 대한 설명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두렵고 심각한 것은 전쟁입니다. 세계의 상황은 이제 한 개인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전 인류 공동체인 이 지구 전체의 문제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다음은 눈물나는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집제(集諦)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특히 정신적인 요소인 집착과 분노, 시기와 질투 등에서 오는 번뇌 망상들입니다.

분노나 증오 등은 고통의 실질적인 원인들입니다.

 

물론 외부 세계의 무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적인 무기들은 문제의 원인이 아닙니다. 이 무기들은 인간이 조작하지 않으면 스스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무기들을 작동하기 시작할 때는 그에 따른 동기가 있습니다. 이 동기들은 주로 집착과 증오입니다. 특히 증오입니다. 증오는 마음이 아주 격앙된 상태입니다.

 

만족과 행복, 평온함이 있다면 내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없이 어떻게 외적인 평화가 있겠습니까? 내적인 평화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찾으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장애를 제거하는데 외적인 무기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따라서 길은 한 가지,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멸제(滅諦)입니다. 분노나 시기 같은 번뇌 망상을 소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미래를 위해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다름 아닌 바로 번뇌 망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분노 같은 번뇌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분노를 일으키는 조건들인 자존심이나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 마음의 상태에 익숙해지면, 자만이나 시기, 질투 등은 마음의 적절한 상태가 아닌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번뇌 망상을 확실히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고통을 멸하는 길인 도제(道諦)자비심을 근본으로 합니다.

자비심은 마음에 자(慈: 사랑)와 비(悲: 연민)를 개발하는 것이며,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고통을 멸하는 길의 핵심입니다.

 

자비심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인종, 문화, 정신적 전통 등을 편협하게 구분하는 이기적인 생각과 행위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 이러한 구분은 인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가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신도(信徒)든 신도가 아니든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입니다. 즉, 같은 종류의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에서 형제애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이기심은 줄어들며, 남들에 대한 관심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힘든 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질문: 마음은 그 자체가 인간의 힘입니다. 마음 그 자체는 무언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 자체가 인간의 힘이라면 한 사람의 생각도 마음의 힘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달라이 라마: 아마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 안에는 무언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개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이러한 개념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 잘못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또 다른 유형의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마음이 이러한 개념에 영향을 받는다면 잘못이 없을 겁니다. 실제 전쟁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즉 누군가의 마음 안에 적에 대한 관념이 생긴 겁니다. 그 적대자에 대한 관념이 마음 안에 생긴 거지요. 그래서 마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합니다. 한쪽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같은 차원의 마음입니다.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질문: 마음 안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서구인들은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것을 구분한다면 어느 것을 피하고 어느 것을 따라야 합니까?

달라이 라마: 내 생각에도 마음에는 실제로 알려지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아마 이것을 무의식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 안에도 좋은 성향과 나쁜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아주 복잡합니다. 이것을 분석한 복잡한 설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 안에는 마음, 정신적 요소, 의식, 감각기관의 의식, 의식적인 마음, 잠재적인 마음, 드러난 마음, 감춰진 마음 등이 있는데, 이것은 보다 전문적인 불교 용어로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모든 측면을 상호 연관성 속에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 두 문장으로 답하는 건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좀 더 전문적인 공부의 기회를 함께 가지기를 바랍니다.

질문: 마르크시즘(Marxism)과 불교는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닙니까?

달라이 라마: 이 질문은 관찰과 연구를 필요로 하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무언가에 대한 누군가의 견해를 말할 때는 그 견해와 실제로 관련이 있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실질적인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상적인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냥 무언가를 상상한다거나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단순한 생각은 실질적인 것과 별다른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질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생각은 ‘유효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것이 성립합니다. 이것이 유효하고 실질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단순히 상상과 생각만으로 하는 행위를 실질적인 것과 관련한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 즉, 불교는 이성적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점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근본 마르크시즘(Marxism) 안에서 보면, 확실히 몇 가지 점은 불교와 관련한 비교 연구의 주제로 아주 관심을 가질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승 불교의 체계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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