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댓글수0 다음블로그 이동

▷ 인문기행/-상트페테르부르크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은행나무
댓글수0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은 성 이삭 대성당 앞 네바 강 왼쪽 제방에 위치해 있다.
1782년부터 1925년까지는 피터 광장(Peter's Square)으로
1925년부터는 데카브리스트 광장 (Decembrists 'Square)으로 불렸다가
2008년부터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상원'은 캐서린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 광장"으로 옮겨진
러시아 제국의 상원을 의미한다.

상원 광장은 동쪽의 해군성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상원 건물과 현재 러시아 헌법재판소 본부 건물이 있다. 
표트르 대제를 기리는 동상인 청동 기마상 기념비는 1782년부터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이곳의 공식 명칭은 '피터 광장'이다.

데카브리스트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상원 광장에서일으킨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 December)에서 기인했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인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파리를 점령한 것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4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1세는 비록 삽질을 거듭하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황제를 따라 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아래의 농노들이 
언젠가 들고 일어나 결국 지배층들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선제적으로 해나가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게 된다.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Alexander N. Muravyov)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Salvation union)이라는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Southern Society),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Northern Society),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된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1779~1831)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상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 대상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 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상원 광장에서 봉기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준비와 조직이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보기 꺼려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반란군 3천 명은 총격 끝에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에게 진압당했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장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져 다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00여년 뒤 결국 러시아 제정이 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당하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다 같이 망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 명인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어 가 본 적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center>

[영화] Union of Salvation 2019 (Decembrist revolt 1825)

한글 자막 제공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청동 기마상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를 기념하는 기마상이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서사시 <청동의 기수>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청동의 기수 / 푸쉬킨>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 (Bronze Horseman)>의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쉬킨은 그를 위하여 3장 476행으로 구성된 대 서사시를 썼다.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엄숙하고 정연한 모습을.

네바 강의 힘찬 흐름을.
강변의 화강암 둑을.
고운 문양 새겨진 철책을.

생각에 잠긴 밤들의 투명한 어둠을.
백야의 섬광을.

시에서 푸쉬킨은 네바 강의 심한 홍수 동안 가난한 사람 예브게니(Evgenii)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묘사한다. 
예브게니는 동상을 저주하고, 그처럼 부적합한 위치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사망시킨 표트르 대제에게 분노한다. 
기수는 살아나면서 도시를 통해 예브게니를 쫓는다. 
이 시는 강 가장자리에 떠 있는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끝난다.

1903년에 예술가 알렉산더 베노이스(Alexandre Benois 1870~1960)는 
그의 삽화와 함께 시집을 출판하여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것을 창조했다.
이 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라인홀드 글리에르(Reinhold Glière 1875~1956)는 이를 바탕으로 발레를 안무했고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 1881~1950)의 
교향곡 10번 심포니(1926~7)는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오른쪽에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로마노프 혈통과 결혼한 독일 공주 출신 캐서린(Catherine) 2세는 
궁전 쿠데타를 통해 왕좌에 올라 법적 권리가 없었으며 자신을 
표트르 대제의 정당한 상속자로 대표하고 싶었다.
그녀는 청동기마상의 건축을 주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한 러시아 통치자 계보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청동기마상에 문구를 새겨 넣도록 했다.

전 유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도록 거대한 청동 말의 앞다리가 번쩍 들려 있지만 
실제 동상의 무게를 오랜 세월 지탱하는 것은 뒤쪽의 말 꼬리가 
다리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낸 조각술에 있다고 한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표트르 대제(Pyotr Alekseyevich, Peter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 산업· 상업· 기술· 문화 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1770년 I. F. 쉴리가 조각하고 유리 펠튼이 그림

천둥 스톤(Thunder stone)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되는 천둥 석(Thunder stone)은 거대한 원석 돌 위에 
천둥이 내리쳐서 조각을 냈다는 현지 전설에서 이름을 얻었다. 
청동 기마상을 제작한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 1716~1791)는 
원래 위치에서 석재를 조각하고 이동하기를 원했지만 캐서린 대제는 
바위를 절단하지 말고 원형 그대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습지 지형으로 땅이 견고하지 않아서 러시아인들은 거대한 돌을 
운반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마리노스 하버리스(Carburis 1729~1782)그는 볼로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본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다. 
1770년 그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공병단의 장교가 되었다.
하버리스는 노동자들에게 땅이 얼어 붙은 겨울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큰 돌을 얼어 붙은 땅 위로 바다로 끌고 가서 도시로 운송하도록 했다. 
그는 직경 13.5cm (6 인치) 정도의 청동 구체 위를 궤도 위로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개발했다. 
이 과정은 나중에 볼 베어링 발명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위업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장소의 돌을 상원광장으로 가져 오는 데 동물이나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버리스가 그 방법을 고안 한 후, 400 명의 남자가 돌을 옮기는 데 9 개월이 걸렸다.

캐서린 대제는 그들의 작업을 독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천둥석이 바다에 도착하자 천둥석 전용으로 거대한 바지선이 건설되었다. 
이 바지선은 두 대의 대형 전함이 양쪽을 지원해야 했다. 

절단되기 전의 돌의 크기는 7×14×9m였다. 
화강암의 밀도에 따라 무게는 약 1500톤으로 측정되었다 .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는 이 부분을 
잘라서 받침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상당히 적어졌다.

19세기 전설에 따르면 청동 기마상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 
어떠한 적군도 이 도시를 정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의 이름이었던 레닌 그라드가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900일 동안 포위당하는 동안 동상은 모래주머니와 나무 보호소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보호하여 900일 동안의 폭격과 포병을 사실상 온전하게 유지했다. 

 

Opening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Engraving by AK Melnikov, drawing by A.P. Davydov, 1782
표트르 대왕 기념비 개관식. AP Davydov, 1782년 AK Melnikov가 조각하고 A.P. Davydov가 그림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가 디자인한 청동 기마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으며 도시의 설립자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거대한 대리석 위에 뒷다리로 서 있는 
청동 말의 등에 걸터 앉아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상징적인 표트르 대제의 동상과 동상이 올려져 있는 유명한 석조 받침대를 살펴보자.

기념물은 1760년대에 외국인 왕비, 예카테리나 2세가 옛 군주와 자신을 연결시키고 
러시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의뢰한 것이다. 
청동 기마상이 서 있는 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시민들은 힘겨운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에도 이 동상을 보호했고 
여전히 반석 위에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가까이 보면 말이 발굽으로 뱀을 짓밟고 있다. 
이 뱀은 반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각상의 세부 묘사, 특히 뒷다리로 서 있는 말 다리의 

불룩 솟은 근육을 눈여겨 보면 팔코네(Falconet)는 이 정도 수준의 사실성을 

구현하기 위해 말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조사했다.

 

1782년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모습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가 성 이삭 대성당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상에서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Ivan Ⅳ)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패기와 야심에 찬 젊은 표트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0년 간은 러시아에 또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보된 행정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문호 개방 등 강력한 국제적 지위를 다져가게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공국 표트르 대제가 과감하게 전개한 개혁 정책의 결과였다.

17세기 초 러시아 개혁의 주역이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여러 외국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세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말에 편자를 능수능란하게 박는 일, 주거 공간을 힘들이지 않고 짓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 부대들과 병정놀이를 하거나 기계 기구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정부는 흑해 진출로를 학보하기 위해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가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터키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터키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터키는 당시 그들의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다. 
그러므로 함대를 소유하지 않은 러시아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가 이처럼 함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 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 해군 병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를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터키와의 전쟁은 일단락지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터키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계획을 생각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 서유럽의 문화를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포병으로서 이 사절단에 합류해 행동을 같이했다.

1697년 봄, 기묘한 무리들이 서쪽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다. 
마부, 고적수, 나팔수, 행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으며 

관복 차림의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들 중 유난스레 남루하고 초라한 옷을 걸친 표트르는 
행렬 속에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7척이 넘는 장신이었던 그는 큰 키 외에도 턱 부분에 
독특한 혹과 유난스럽게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가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동 행렬은 스웨덴 지배에 있는 발트 해의 리가 항을 지나 프로이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표트르는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도 그의 탁월한 성격은 자주 노출되었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번은 보오르하베의 외과교실에서 해부학 강의를 받던 중 그의 일행이 
시체 관찰을 기피하자 표트르는 느닷없이 이렇게 명령했다.

"저 시체의 힘줄을 입으로 물어뜯어라."
신분노출에 대한 염려보다는 신하들에게 서유럽의 선진 과학을 
많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이처럼 가차 없이 명령했던 것이다. 
그는 과학적이고 지적이며, 나름대로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표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가 영국을 여행할 때 영국은 그를 위해 스피트헤드 앞 바다에서 

대규모의 모의 전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상당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가 영국에 체류할 때 겉옷 하나만 걸치고 월리엄 3세를 방문했으며, 
그가 묵었던 곳은 전쟁 중의 야영장 같았고 고급 식기의 사용법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표트르가 서유럽 여행을 하던 중 169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약 14개월 간의 여행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 유럽에서는 표트르 대제에 관한 갖가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여행 중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후에 그의 신분이 드러났음에도 
유럽 사람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비쳐졌다. 


여러 곳을 다니며 큰 술잔치를 벌이는 습관이나 호색적인 일면 때문에 
그는 우스갯거리로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관찰력을 가졌던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표트르 대제를 '지혜로운 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권력 투쟁으로 보낸 청년기
표트르 1세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이었다.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사람으로, 그에 대한 평가도 가지각색이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후진성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웅이자 동시에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킨 폭군이기도 했다. 
그는 잔인한 숙청이라는 면을 기준으로 하면 이반 4세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Pyotr Alexeyevich Romanov)는 열 살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은 이복형 표도르 3세(Fyodor Ⅲ)를 계승해서 

차르가 되어 43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렇지만 그의 치세는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Alexei)는 두 부인으로부터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알렉세이가 죽고 나서부터 명문가 출신이었던 부인들의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결국 유혈 충돌을 불러왔다. 
표트르의 외가 친척 두 사람이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만성질환으로 인해서 사실상 황제의 직위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던 표트르의 형 
이반 5세(Ivan Alexeyevich Romanov)가 표트르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고 
표트르의 외가인 나르시킨(Narshkin) 가는 권력에서 제외되었다. 
심신이 허약한 청년과 열 살 먹은 소년을 명목상의 차르로 세워 놓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표트르의 이복누나인 소피아(Sofia Alexeyevna)였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을 일반인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알렉세이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표도르 3세가 차르를 계승했을 때 그는 세 살이었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으며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트르는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장난꾸러기였다. 
그는 부근의 상가와 수공업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인쇄, 석공, 목공 일을 배웠다. 
그는 특히 외국을 오가는 항해사들과 무역상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차르가 된 이후에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장난감 무기로 아이들을 무장시켜서 군대를 조직하여 병정놀이를 하는 데 열중했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세 살 위의 아름다운 

에우도키아 로푸키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소피아는 당시의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그녀는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을 쓰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활했던 표트르는 러시아 민중들의 고통과 
러시아 사회 자체의 후진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선진 유럽 국가를 모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바다를 이용한 교역의 확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발트 해와 흑해로의 진출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그런데 이는 각각 스웨덴과 오스만튀르크가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695년이다. 
차르가 아니라 오스만튀르크와 벌어진 전쟁에 포병 장교 신분으로 종군한 것이다.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돈 강 하구의 튀르크 요새 아조프를 포위하고 거센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고 버텨 냈으며 러시아 군은 상당한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 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러시아 군보다 
특별히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의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과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추진한 개혁에서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1696년에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하자 
그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곧바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표트르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고 나서 유럽으로 파견할 사절단을 조직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 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표트르 자신도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로 
신분을 위장해 함께 장기간의 해외 순방에 나섰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203m)가 넘는 거인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Glaisher Street, Deptford의 표트르 대제 기념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표트르 대제는 1698년 몇 달 동안 영국 런던 남동부 지역 
뎁트포드(Deptford) 왕립 조선소에 머물면서 조선 공부를 하는 동안 꽤 잘 해냈다.  
뎁트포드는 템즈 강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표트르 대제의 체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사절단은 유럽 최고의 산업 현장을 돌면서 필요한 기술을 흡수하고 
뛰어난 외국인 기술고문들을 여러 명 고용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대튀르크 동맹을 결성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후계자가 없는 스페인의 왕좌를 놓고 
계승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와는 제대로 협상을 
해 보지도 못하고 표트르는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본국에서 스트렐치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분쇄되었으나 14개월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표트르는 1699년 그동안 사용하던 러시아식 달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선언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그동안 러시아가 고수해 오던 폐쇄적인 
전통주의를 포기하고 유럽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흑해와 발트 해를 확보해야 하는데, 표트르는 먼저 
튀르크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흑해로의 진출을 뒤로 미루고 
스웨덴이 지배하고 있는 발트 해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스웨덴은 열여덟 살이던 카를 12세 (Karl Ⅻ)가 통치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자신도 스물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 어린 카를 12세를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와 그의 아조프 점거를 인정하는 선에서 평화 협정을 타결한 다음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시 '잉그리아(Ingria)'라고 불리던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영토로 자신만만하게 진군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카를 12세는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스웨덴 군의 전투력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에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된 허약한 러시아 군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1700년 최초로 대회전이 벌어진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은 불과 1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에게 격파당해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력이 전사했다. 
이 승리 이후 카를이 표트르를 계속 추격했다면 후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카를은 공격 방향을 돌려 폴란드를 침공했다. 
카를은 폴란드를 상대로 한 일련의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폴란드에 입성했으나 이후 그들 사이에 벌어진 내분에 말려들었다. 
그동안 표트르는 잃었던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전투는 여러 해 후에야 속개되었다. 
폴란드 문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4만 4,000명이라는 대군을 몰아 선공을 가했다. 
이번에 그는 곧바로 모스크바를 향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 군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표트르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카를의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스웨덴 군 병력을 도중에 요격해서 격파해 버렸다. 
그러자 카를은 퇴각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곳의 코사크 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으나 보급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문제였다. 
표트르는 스웨덴 군이 진군하는 방향의 앞쪽으로 넓은 지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펼쳐 
스웨덴 군의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보급도 거의 끊어진 상황에서 1708년 겨울을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서 보낸 스웨덴 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다음 해 여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남쪽에 있는 폴타바 요새를 포위했다. 
스웨덴 군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으며 동맹군인 코사크 기병대는 
러시아 군 기병대의 교란 작전에 말려 자신들의 근거지까지 내주고 멀찌감치 후퇴했다. 
표트르는 폴타바에 4만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병력의 열세와 기병대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에도 
스웨덴 군은 꼬박 이틀 동안 눈부신 선전을 했다.

그렇지만 6월 28일 정오 무렵에 스웨덴 군은 결국 와해되고 카를은 
가까스로 1,500명의 병력만 수습해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 탈출했다. 
표트르가 막강한 스웨덴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그때까지 표트르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유럽 각국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710년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의 도약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가 꾸준히 그를 부추긴 결과였다.

1711년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발칸으로 남하했다. 
그는 강적 스웨덴을 격파한 기분에 들떠서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정교도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발칸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항복을 선택했다.

아흐메드 3세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아조프 요새를 돌려받고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흑해 함대를 인수받는다는 조건만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스웨덴의 카를 12세도 고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Petropavlovskaya Fortress,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스웨덴과의 전쟁 도중에 시작되었다. 
이 도시가 들어선 네바 강의 하구는 원래 대단히 척박한 지역이었다. 
황량한 습지는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는 지역으로, 
스웨덴 군이 건설한 요새 니엔스칸스(Nyenskans)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표트르는 이 척박한 습지에 미래 러시아의 수도를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1703년 이 지역을 확보하자마자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이전의 표트르는 다혈질이기는 했어도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의 잔혹한 일면이 드러났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석조 건물의 건축을 금지시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여기에 퍼부었다.

그가 투입한 자원에는 스웨덴 출신의 전쟁 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만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하다 죽어 간 

수만 명의 목숨과 바꾼 거대한 위령비였다. 
그는 사람들을 무기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고된 노동을 시켰다. 
질병과 과로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한겨울에 수백 명 단위로 죽어 나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선언되던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상태였으며 스웨덴과의 전쟁도 마무리되지 않아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점이었지만 
표트르는 그다음 해에 수도 이전을 강행했다.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이미 러시아와 전력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전쟁을 지속하다 

1718년 겨울, 노르웨이 원정 중에 전사했다. 
이로써 비로소 두 나라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1721년 표트르는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는 새로운 수도가 들어선 지역에 대해서 장차 스웨덴과의 
소유권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전체를 사들이는 형식을 취했으며, 
핀란드의 점령 지역은 스웨덴에 모두 돌려주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전략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핀란드와의 접경 지역은 
제국의 명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1721년 스웨덴과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표트르는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방의 황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에게 붙는 '대제(the Great, le Grand)'라는 칭호에는 절차가 수반된다. 
어느 나라든 먼저 국내에서 국민들에게 선출된 대의기관의 의원들이 먼저 의결하고 나서 
다른 국가에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표트르의 경우는 스웨덴과 폴란드가 즉시 이 칭호를 승인했고 점차 유럽 각국이 따랐으며 
마지막까지 승인을 보류하고 있던 프랑스는 그가 죽은 지 25년 후에 외교문서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 칭호를 사용하여 국제적인 공인 절차를 마쳤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근본부터 바꿔놓은 인물로 충분히 
'대제'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뿐 아니라 즉위 초기에 그의 권력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통치 기간 내내 분리주의자들이나 
그 자신의 강압 정치에 반발한 민중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여러 차례의 반란 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는 

민중봉기의 성격이 강한 '불라빈의 반란'이었다. 
대북방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707년에 발생한 이 거센 봉기는 
원인도 표트르였으며 목표도 표트르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표트르의 강압 정치는 강력한 개혁 정책과 맞물려서 고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들의 삶 자체를 위협했으며 지방은 물론이고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조차 도망치는 농노들이 속출했다. 
표트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고수했다. 

그가 도망친 농노들을 추격하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고용하자 농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코사크의 지도자 콘드라티 불라빈(Kondrati Bulavin)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불라빈이 농노를 추격해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기습해 
전멸시키면서 시작된 이 반란은 비참한 상황에 있던 러시아 농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급격히 번져 나갔으며, 여기에 표트르의 개혁에 불만을 가진 성직자와 분리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러시아 남부 지방 전역이 2년 이상 표트르의 통치를 벗어난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었던 개혁 자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표트르의 개혁은 제도, 행정 조직, 군대, 법률 같은 분야뿐 아니라 
권위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린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개혁과 같은 
예민한 분야에서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방법론에서도 
오직 힘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개혁에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남성들이 기르던 수염을 밀어버리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밝은 미래가 약속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트르의 개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나 개혁에 대한 저항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러시아에서 
관습화되어 버린 권력형 부패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수많은 인사들이 부패 혐의로 처형되거나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표트르의 신임을 받는 
동지나 친구 들이 채웠지만 그들 역시 쫓겨난 사람들만큼이나 부패한 인물들이었다. 
표트르의 측근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개혁의 동지였던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였다. 
멘시코프는 야전에서도 이름을 날려 최종적으로 대원수(Generalissimo)까지 
오르는 인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점령 지역에 새로 만들어진 이조라 공작령 (Izhira, Dukedom of Ingria)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권력형 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했으며 영지에서 가혹한 착취로 원성을 샀다. 
1711년에 표트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사실 표트르로서는 이러한 경고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치였다.

그러나 멘시코프 공작은 2년 후에 다시 10만 루블의 공금을 횡령해 
대형 부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멘시코프가 중병에 걸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표트르는 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투옥했을 것이다. 
그가 극적으로 병에서 회복된 후 부정 행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표트르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트르는 실질적으로 차르가 되었던 스물네 살 이후로 혼자서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표트르의 심신은 젊은 시절부터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는 술에 의존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알코올은 야금야금 그의 정신과 육체를 먹어 들어갔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나타나면서 표트르는 점차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잔인하고 괴팍한 사람이 되어 갔다. 
명석했던 판단력도 급속도로 빛을 잃었다. 
정신적인 결함은 육체적으로도 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면 신경통에 시달리는가 하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시로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했다. 
위험한 상태로 간신히 버텨 오던 상황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는 첫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가 낳은 왕자로, 표트르의 열다섯 자녀 가운데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셋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유일한 아들이었다. 
강제로 왕궁에서 쫓겨난 어머니와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 밑에서 
반동주의적인 성직자들에게 교육받은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러한 아들에게 표트르는 가혹하게 황태자 수업을 강요했다. 
알렉세이는 열세 살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해서 그다음 해에 실제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열여덟 살에는 모스크바 시의 성곽 공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 이후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수행하기 쉽지 않은 임무를 계속 맡겼으며 
어린 알렉세이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면 표트르는 열정이 부족하다며 아들을 비난하고 알렉세이는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알렉세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과 어울리다 
아예 이마저 포기하고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재되어 있던 부자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알렉세이의 결혼이었다. 
1710년 표트르는 스무 살의 알렉세이를 그보다 네 살 연하인 독일의 명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둘째 딸 샬로트(Chalotte Christine Sofie of Brunswick-Wolfenbuttel)와 결혼시켰다. 
샬로트의 언니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의 카를 6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혼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혼 생활은 당연히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샬로트가 1715년 둘째 아이인 후일의 표트르 2세(Pyotr Alexeyevich)를 낳고는 며칠 만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의 장례식 날 표트르는 아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알렉세이의 반응은 해외 도피였다.

그는 핀란드 출신 정부와 함께 동서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로 피신했으며 
카를 6세는 알렉세이의 말만 듣고 표트르가 아들을 암살하려 한다고 굳게 믿어 
그를 나폴리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부자의 오랜 갈등은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1718년 알렉세이의 측근이나 친구들은 모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반역자 처형 방식에 따라 긴 창으로 꿰어 매달아 놓는 페일 형(Pale)이나 
바퀴에 묶여 온 몸이 부서지는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세이의 어머니 에우도키아는 근거 없는 간통죄로 기소되었으며 
알렉세이도 법정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알렉세이가 정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기필코 옛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끝이 갈라진 채찍으로 등을 맞는 나우트 형(knout)에 처해져 
두 번에 걸쳐 마흔 대를 맞고 나서 이틀 만에 사망했다.

알렉세이의 처형은 망가진 표트르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721년 힘겨웠던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표트르가 대제의 칭호를 받을 무렵 그는 이미 
세상사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 (Yekaterina I)

표트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인물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Yekaterina I)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의 
유일한 방향타인 표트르를 움직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표트르에게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친구 멘시코프가 그에게 선물로 보낸 '성적 노리개' 정도의 존재였다.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人)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핀란드 만 부근을 시찰하던 도중 물에 빠진 병사를 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가운 물에 뛰어든 것이 병세를 악화시킨 것이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표트르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후계 절차가 매끄러웠더라면 
러시아는 훨씬 더 일찍 개명한 강대국으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표트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인들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억압적이고 권위적인데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통치자를 섬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표트르는 오직 자신만이 보고 있던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방해가 된다면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처형하거나 생존조차 어려운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아예 그 뿌리를 뽑아 버렸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표트르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
표트르는 그의 개혁의지를 밀고 나가는 데 정말로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국민의 무지와 

용감하게 싸운 기사 정신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이반 뇌제와 비교할 때 잔인성에서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를 화나게 만들면 그의 손에 잡힌 모든 물건이 곧 무기였다. 
상대방의 코를 쇠꼬챙이로 쑤셔 찢어버리는가 하면 

고문이나 사형을 시킬 때도 사람을 몹시 괴롭혔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죽어간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잔인성은 혈육이나 친지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에브드키아 로푸히나가 고풍스럽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1698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세이도 그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가해 옥에서 죽게 했다. 

그리곤 아들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자신이 설계한 
선박의 진수식에 참여하기 위해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당시 표트르는 리투아니아 농민 출신의 예카테리나라는 여자와의 사이에 
또 다른 자식을 낳고 수년 동안 함께 지냈다. 
1712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후 칭호까지 주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뒤에도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표트르는 죽을 때까지 안면신경통에 시달렸고 때로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병과 유사한 병을 앓고 있었으며 중년이 되었을 때는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후에 그는 합병증이 생겨 1725년 2월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의 업적과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과 20세기 스탈린주의자들이 저마다 표트르 대제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부 역사가들은 표트르 대제를 혁명가로 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역사가들은 점진적인 개혁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표트르가 러시아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통치 형태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슬라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적 풍습과 문화를 경시한 배신자였고 
서구주의자 시각에서는 시대를 바꿔놓은 진정 위대한 영웅이었다. 
이처럼 표트르 대제를 놓고 붙여볼 수 있는 수식어, 정의어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진정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200년 이상이 된 지금도 그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전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업적 중 일부분에 대한 것만 일방적인 견해로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표트르 자신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러시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러시아가 운명의 전환점에 있을 때 공을 세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에 기독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한 키예프 대공 

블라지미르도 분명히 나라를 구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이반 뇌제도 당시 국가를 

몰락의 구덩이에서 구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표트르 대제가 유난스럽게 두드러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러시아가 

세계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으며 조야한 농담을 즐기기는 했으나 즐겁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통치자로서 표트르는 전제적 영주의 방법, 즉 채찍과 자의적인 지배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제군주로 늘상 행동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 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있고 근면했으며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 교역· 교육· 과학· 문화· 대외 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center>

[영상]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맨위로

https://blog.daum.net/choemh/16143458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