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우복동 동천암 :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선승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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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우복동 동천암 :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선승의 흔적을 찾아서

하늘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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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일>

 

 

<표지사진 - 개운조사가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증거를 세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는 동천암>

 

 

 

2013년 여름 8월 초입. 하늘도깨비는 더위를 식히러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상주시 화서면 청계사 계곡을 마음에 두었다. 인적이 드물고 물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청계사

 

청계사 계곡의 기암절벽

 

 

계곡 물에 발을 담그니 천하를 얻은 듯하다. 허나 체질이 한곳에 오래 있지 못하여 이내 심심해진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고승이 손가락으로 직접 글을 새겼다는 바위 생각이 떠올랐다.

'이 근천데... 그래 그 바위를 한번 찾아가보자.'

생각이 이에 미치자 하늘도깨비는 청계사 부처님에게 하직인사도 없이 총알처럼 계곡을 빠져나간다. 예의 없기론 소문이 자자한지라 부처님도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겠지.

바위의 이름은 동천암이었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다. 당시는 바위에 글자를 새긴 개운조사의 이름도 가물가물해서 법력이 높은 고승 정도로 알았다. 당시 필자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동천'이라는 단어뿐이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동천'과 '선승'을 치니 동천암은 상주시 화북면 쌍룡계곡에서 문경 도장산 심원사 가는 길목에 있다는 신문 기사가 나왔다.

'그럼 심원사로 가야겠지.'

심원사를 검색하니 심원사주차장이 뜬다. 심원사 주차장은 쌍룡계곡 유원지 한복판에 있다. 쌍룡계곡의 32번 지방도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간신히 1차선만 남은 상태다. 반대방향 차들을 신경쓰며 조심스레 주차를 한다.

쌍룡계곡은 도가 아니라 사람들로 넘쳐났다. 심원사 가는 초입은 화장실 냄새와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로 파리가 들끓었다. 여름 피서철. 개운조사가 수도했다는 심원사 도량 초입은 도는커녕 욕계의 냄새로 넘쳐난다. 과연 '동천암'을 찾을 수 있을까? 회의감마저 일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랄까?

주차장에서 심원사까진 대략 3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5분여를 걸어가자 쌍룡계곡과는 딴 세상이었다. 원시 그대로의 풍광이 눈을 즐겁게 한다. 개운조사가 심원사에서 수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필자는 동천암이 주차장에서 심원사가는 도중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심원사에 도착할 때까지 동천암은 없었다. 결국 심원사에서 물어보았다.

"우복동식당에서 화북면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을 것이오."

"이런 된장..."

헛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개운조사가 법력을 닦은 심원사를 답사한 것으로도 족하다. 고승이 이끌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우복동 사적비. 동천암은 사적비 왼쪽에 있었다.

 

동천암. 32번 지방도 상에 있다. 심원사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 하긴 심원사가는 쌍룡계곡에 있다고 했으니 신문 기사도 틀린 정보를 제공한 것은 아니다. 필자만 동천암이 한적한 곳에 비장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한 것 뿐이다.

 

동천암 안내판

 

 

안내판에 따르면 송문흠의 <한정당병천기>에는 봉래 양사언 선생이 동천(洞天)을 각자한 것으로 나온다. 개운조사가 1790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송문흠이 개운조사보다 더 고인이고 "동천암' 바위는 개운조사 출생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안내판의 해설이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시대를 감안하지 않으면 개운조사도 양봉래 선생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개운조사의 속성(俗性)은 김씨(金氏)이고 어머니는 양씨(楊氏)였다. 그는 외동 아들로 세 살 때 아버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그러자 외삼촌 부부가 그를 데려다 양자로 길렀다. 외삼촌 부부는 아이가 없어 이때 그는 양씨 성을 가졌던 것 같다. 허나 그의 운명은 험난했다. 그는 다시 일곱살 때 외삼촌을, 아홉살 때 외숙모마저 여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3년상을 다 치룬 개운조사는 마을사람들에게 '양효동(楊孝童)'으로 불렸다. 그가 양씨 성을 사용했다는 증거다.

두번씩이나 보모를 여읜 천애고아. 그가 끝없는 구도의 길로 나아간 것은 어쩌면 태생적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다함'을 '일래(一來)'라 하고, '아나함'을 '불래(不來)'라 부른다고 한다. 사다함과를 얻은 사람은 한번 더 욕계(欲界)로 온다는 뜻에서 일래(一來)라 하는 것이며, 아나함의 경지에 오른 이는 더 이상 욕계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불래(不來)라 부른다는 것이다. 개운조사가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그가 신선들이 머무는 봉래산(逢來山)에서 왔다는 의미로 양봉래(楊逢來)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운조사의 전생이 양사언이었던 것은 아닐까? 개운조사가 자신이 전생에 한 일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양사언이 각자한 것이 흐릿해져 그 위에 다시 손가락으로 '동천(洞天)'을 새긴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동천암은 묘연하고 신비롭다.

 

 

동천암

 

 

하늘도깨비가 개운조사(1790~1988)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다. 그는 무려 182살에 입적했다고 한다. 개운조사가 1790년생이니 182살을 살았다고 하면 1971년에 입적한 것이 된다. 그런데 실제 탄공선사(1881~1998)의 증언에 따르면 개운조사가 입적한 것은  무진년인 1988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개운조사는 199세까지 살았다는 얘기다. 필자는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농담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조선 정조 시절에 태어난 인물이 박정희 유신시대 직전 혹은 88년 올림픽까지 살았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 화자는 개운조사가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러 경북 문경(실제는 경북 상주다) 어느 계곡 바위에다 손가락으로 직접 글까지 새겼다고 했다. 당시 필자가 실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인물이나 사건이 있다. 개운조사의 일화도 그러한 얘기 중의 하나다. 개운조사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불가 일부에서는 선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개운조사의 일화를 거짓되게 유포한 것으로 의심한다. 개운조사가 편집했다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도 위작이 아닌지 의구한다. 동천암 일화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더욱이 필자처럼 천견한 사람이 이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금 정리해 볼 수는 있겠다.

개운조사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 에 나오는 '개운당유서(開雲堂遺書)'와 탄공선사의 증언에 의해 존재가 확인된다.

 

- '개운당유서(開雲堂遺書)' 원문 (인터넷 발췌)

 

후학중에서 천견박식(淺見博識)사람이, 나의 근유(根由)를 오해하며 경(經)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서 비방하는 마음이 생겨 보리의 인연을 놓치고 악도에 타락될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을 지어 자주(自註)를 붙여 유시(遺示)하는 바이다.
나는 세속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의탁하였다가, 봉암사(鳳岩寺)에서 동년(童年)에 머리를 깎고, 그 후 10년 동안 스승을 구하여 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본사(本寺)로 돌아와 환적암(幻寂庵)에서 스승을 만나 법문을 들었고, 백련암(白蓮庵)에서 연금(煉金)하여 구슬을 얻고, 심원사(尋源寺)에서 보임출태(保姙出胎)하고, 유즙임경(乳汁林竟)한 다음 여가를 활용하여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원고를 초(抄)하였으나 연기(緣期)가 아직 일찍하고 면벽(面壁)이 가장 급하였으므로, 아직 보류하여 간행치 않고 여러 용자(龍子)로 하여금 교대하여 수호하게 하고 지리산 묘향대로 향한다.
백년 이후에 큰 인연을 가진 자가 이를 인쇄하여 널리 배포할 것이니, 그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필경에는 모두 보리(菩提)의 인과(因果)를 이룰 것이다. 후세(後世)에 이 경을 봉독하는 자는 경(經)과 송(頌), 그리고 주(註)와 토(吐)에 있어서 한 자(字)와 한 구(句)라도 신중히 하고 고치지 말아라. 또 비방하는 요망한 무리는 반드시 신사(神司)가 벌을 내릴 것이다.
희양산(曦陽山) 환적암은 선환화상(善幻和尙)이 입적한 곳이다. 오늘 도중(途中)에서 이 몸을 회고(回顧)하니 강개(慷慨)함이 무량하다. 후세의 제현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산중에 무엇이 있던가. 고개 위에 백운이 많아라. 다만 스스로 기뻐는 할지언정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니, 각기 스스로 깨달아서 각기 스스로 기뻐하라. 내가 스승을 만나 법문을 듣고서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의 실천공적(實踐功蹟)을 수련한 것을 대강 보여주어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수행하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죄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기(玄機)를 누설하는 것인데, 믿지 않고 수행치 않음은 그대들의 허물이다. 십여 년 동안 풍우에 젖어 있다가 홀연히 고덕(古德)의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동서로 분주하게 다니네.' 라는 글귀에 감동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환적암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나이 삼십이었다.
스승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침식까지 잊었다가 경배(敬拜)하는 기원이 잠시도 해이한 적이 없었는데, 미색이 앞에 나타나거나 천악(天樂)이 귀에 들리기도 하며, 맹호가 뒤따라 오거나, 큰 뱀이 몸을 휘감기도 하며, 황금과 비단이 방에 가득하거나 도적이 문을 부수기도 하며, 그밖에 기쁘고, 두렵고, 믿음이 가고, 의심이 가는 등의 마사(魔事)들도 있으나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도 동심(動心)하지 않고 정직(正直)만을 고수(固守)하면서 계(戒). 정(定)을 성실하게 수련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남짓이 하였을 적에 어떤 미친 듯한 중이 비틀 걸음으로 들어오는데, 신체는 수척하고 의복이 남루한데다 온 몸에 진무른 부스럼이 나서 그 냄새가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경히 맞이하여 성심껏 시봉하였는데, 꾸짓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였으며, 희롱도 하고 자비롭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남짓이 하면서 역시 동심하지 않고 정직만을 고수하며, 배나 더 공경할 뿐이고 한번도 의심하지 아니하였더니, 어느날 밤에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무심한 사람이구나. 꾸짖어도 괴로워하지 않으며 때려도 성내지 않고 희롱해도 싫어하지 않으며 자비를 배풀어도 기뻐하지 아니하니, 마음을 항복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반드시 득도(得道)할 것이다. 여러해 동안 불타 앞에서 기원한 것이 무엇인가?"

하므로, 눈물을 흘리며 공경히 절하고 말하기를,

"지극한 소원은 참다운 스승을 만나 불법을 듣는 것이고, 그밖에는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말하기를,

"내가 너의 스승이 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나는 곧 슬픔과 기쁨의 감회가 함께 일어나 백배하며 애걸하였더니, 말하기를,

"인걸(人傑)도 지령(地靈)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도(修道)도 그러한 것이다."
하고, 나를 데리고 희양산에 올라갔는데, 달이 낮처럼 밝고 안계(眼界)가 쾌활하게 전개되었다. 큰 반석 위에 정사(精舍)가 저절로 세워지고 음식이 제때에 마련되었다. 나는 이러함을 보고서 신심(信心)이 백배나 솟구쳤다.
사자(師資:스님과 상자)가 삼보 앞을 향하여 공경히 예배하고서 큰 참회와 깊은 맹서를 한 다음에 말하기를,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도(修道)를 함은 마음을 항복 받는 것으로 시작과 끝마무리의 절요(切要)함을 삼는다. 학자(學者)가 만에 하나도 성도(成道)하지 못함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我慢)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설법한 다음에 토굴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7일만에 첫 건혜지누진통(乾慧地漏盡通)의 인(因)을 증득하니, 우리 선사가 <정본수능엄경>과 <유가심인록>을 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보현존사(普賢尊師)에게 구결(口訣)로 받은 신(信). 해(解). 수(修). 증(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珍重)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하므로, 공경하게 배수하였는데, 또 다시 대승(大乘)의 묘결(妙訣)을 구두로 전해주므로 이를 하나하나 터득하고 깨달았다. 수수(授受)하기를 마친 다음에 공경히 백배하고 삼보(三寶) 앞에 사은(謝恩)하니, 우리 선사가 손을 잡고 고별한 다음 허공으로 날아가므로 공경히 백배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전송하고 돌아보니, 정사(精舍)가 없어졌다. 미증유의 일임을 감탄하고 백련암으로 내려와서 백일만에 십신(十信)의 수다원 누진통의 과(果)를 증득하고, 그리고 7일만에 초주분정도태(初住分定道胎)의 인을 증득하고서 도장산(道藏山)에 들어갔다.
어째서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 수도(修道)의 절요함이 되는가 하면, 성품이 움직이면 마음인데, 그 이름이 마음심(魔音心)이고, 마음이 안정하면 성품인데, 그 이름이 성품성(聖品性)이다. 그래서 성품을 따르는 자는 성인(聖人)이 되고 마음을 따르는 자는 마(魔)가 되는데, 마(魔)와 성(聖)은 두 종류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것을 자신이 도로 받는 것이다.
후학은 이를 알아야 한다. 마음을 항복받은 다음에라야 수도(修道)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을 항복받으면 도기(道器)가 되고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면 도기(道器)가 못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불타가 마음 항복받는 것을 먼저 제시한 것이다.
인연이 있는 제현이 이 경을 읽고 불법을 깨달아서 전일(專一)하게 정진(精進)하면 보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내가 고심(苦心)하여 스승을 구하고 도를 깨달은 본원(本願)이다.
오십 일세가 되는 경자년(庚子年 1840년) 8월 삼경일(三庚日)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여 뒤에다 덧붙인다.

 

송(頌)
손으로 동천(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한좌(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이 물렁한 흙처럼 부드러워서 나의 현명(顯名)을 받아드리네.
맑은물 흐르는 반석(磐石)위에 용자(龍子)를 놀게 했노라.
나의 조그마한 희적(戱跡)도 천추만추(千秋晩秋)에 전할 수 있는데 더구나 간경(看經)의 공덕(功德)이랴!
복해(福海)는 한이 없다네.

수학(修學)하는 제현(諸賢)들은 사생(死生)에 벗어나리.
위대하여라.

이 경의 공덕은 일컫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고 사의할 수도 없는 것이니라
자광(慈光)이 변만하여 험로를 비추며 혜검(慧劍)이 주류(周流)하며 죄근(罪根)을 끊네.

공경하고 공경하라.
초심으로서 천박한 무리는 이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들어라.
대장부가 진결(眞訣)을 만나면 모름지기 그 뜻을 지키고 영원히 물러서지 말지어다.

 

- '개운당유서(開雲堂遺書)'는 위작인가?

 

<개운당유서>의 일부를 인용한다.

 

"후학중에서 천견박식(淺見博識) 사람이, 나의 근유(根由)를 오해하며 경(經)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서 비방하는 마음이 생겨 보리의 인연을 놓치고 악도에 타락될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을 지어 자주(自註)를 붙여 유시(遺示)하는 바이다."

 

<개운당유서>에 따르면 후학 중에 천견박식(淺見博識)한 인물이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을 오해할까봐 개운조사가 스스로 주를 달아 남긴다고 했다. 천견박식(淺見薄識)이 아니라 천견박식(淺見博識)이다. 견해가 얕고 지식도 좁은 사람이 아니라 지식은 박사급이나 견해가 얕은 인물이 경의 출처를 오해한다는 말이다. 개운조사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출처를 오해하지 말라고 <개운당유서> 초입부터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이 경을 봉독하는 자는 경(經)과 송(頌), 그리고 주(註)와 토(吐)에 있어서 한 자(字)와 한 구(句)라도 신중히 하고 고치지 말아라. 또 비방하는 요망한 무리는 반드시 신사(神司)가 벌을 내릴 것이다."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경(經)과 송(頌), 그리고 주(註)와 토(吐) 고쳐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경을 비방하면 신사의 벌을 예고하고 있다. 경을 믿어라는 것이다. 믿고 정진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를 두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개운조사께서 무엇이 연민되어 이런 무시무시한 경계의 글을 남겼을까? 고승의 글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고승도 경계할만큼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잘못 깨치면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인가?

 

"여가를 활용하여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원고를 초(抄)하였으나 연기(緣期)가 아직 일찍하고 면벽(面壁)이 가장 급하였으므로, 아직 보류하여 간행치 않고 여러 용자(龍子)로 하여금 교대하여 수호하게 하고 지리산 묘향대로 향한다. 백년 이후에 큰 인연을 가진 자가 이를 인쇄하여 널리 배포할 것이니, 그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필경에는 모두 보리(菩提)의 인과(因果)를 이룰 것이다."

 

<개운당유서>의 예고처럼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개운조사가 원고를 초하고 백년 이후에 널리 유포되는 일이 일어난다.

1950년대의 일이다. 양성(陽性)이란 스님이 심원사에 들러 잠시 머물게 되었다. 심원사에 온지 며칠 안 지나 양성스님은 아주 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이상한 환상(幻像)이 보이는 것이었다.
환상은 점차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다음에 두툼한 책이 나타났다. 나중엔 노인이 양성스님을 향해 받으라는 듯이 책을 내밀었다. 양성스님은 왜 헛것이 보일까 의아해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튿날에도 똑같은 환상이 나타났다. 양성스님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천장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어 천장을 열어 보았다. 천장 속엔 개운조사라는 인물이 주석을 단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있었다. 개운조사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다.

양성스님은 책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베꼈다. 그런 다음 원본은 천장에 도로 넣어두고 필사본만 가지고서 심원사를 떠났다. 양성스님이 심원사를 다녀간지 사흘만에 심원사에는 큰 불이 났다. 모든 건물이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 개운조사가 쓴 책도 건물과 함께 재로 변했다. 양성스님은 개운조사가 당부한 대로 이 책을 출판하여 널리 전했다 .
결론은 원본은 사라지고 사본만 남았다는 말이다. 이 대목이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위경이고, <개운당유서>가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 부분이다.

 

"어째서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 수도(修道)의 절요함이 되는가 하면, 성품이 움직이면 마음인데, 그 이름이 마음심(魔音心)이고, 마음이 안정하면 성품인데, 그 이름이 성품성(聖品性)이다. 그래서 성품을 따르는 자는 성인(聖人)이 되고 마음을 따르는 자는 마(魔)가 되는데, 마(魔)와 성(聖)은 두 종류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것을 자신이 도로 받는 것이다."

 

허나 <개운당유서>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 또한 일반적인 <수능엄경>과 마찬가지로 그 요체는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위 인용문이 그러함을 말하고 있다. 다만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도인들의 실천적인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스승 없이도 도에 정진할 수 있는 교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비인부전의 책을 그대로 믿고 정진하기란 자못 망설여진다. 두려운 일이다. 암튼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란 비서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지금의 세상에는 부합한다고 본다. 산중지도(山中之道)가 시장지도(市場之道)로 급변하는 세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과거에는 명산대찰의 조그만 암자에서나 비인부전할 책이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탄공선사의 증언

 

개운조사의 존재 여부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나 <개운당유서>만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탄공선사가 개운조사를 만난 일화를 보면 개운조사의 존재는 확실히 확인된다.

 

* 탄공선사가 말씀하신 개운조사의 일화 (인터넷 발췌)

 

탄공선사께서 학가산에서 밀행중 노상에서 처음 개운조사님을 친견했을 때 칠배를 드렸더니, 조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가에 잘 입문했으니 마음 바꾸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 하시면서, “너는 백세상수(百歲上壽)할 터이니 백살이 넘거든 벽사서(辟邪書)와 벽사화(辟邪畵)를 그려 인연 있는 중생에게 보시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리고 탄공선사께서 과거 전국화공백일장(국전의 전신)에서 장원을 해서 고종임금으로부터 수상한 사실도 아시고 계시더랍니다.

개운조사님께서는 산속에서 약초를 캐서 한약방에 갖다 주시고는 많던 적던 한약방 주인이 주는 대로 두말 않고 약초값을 받아서 용채로 사용하셨답니다. 몇날 며칠씩이나 금식하시기가 일쑤이고 가끔씩 한 번 공양을 드실 때에는 보통 성인의 7~8배 가까이 되는 양을 드셨답니다. 개운조사께서는 당시 150살이 훨씬 지났는데도 조사님의 용안이 세수 50세 초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답니다.
탄공선사께서 교통사고가 나서 온몸을 다치는 큰 중상을 입으시고 대전 소재 병원에서 입원을 하셨던 적이 있는데, 당시 주치의가, 탄공선사는 노인이 턱뼈와 골반을 다쳤기 때문에, 3년 정도가 경과해야 완쾌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탄공선사께서는 입원 며칠 만에 한밤중에 몰래 병원에서 사라져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후 20여일 만에 청주에 사는 보은성보살집으로 기적같이 온몸이 완쾌되어 찾아오셨더랍니다.
후일 탄공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원에서는 치료 불가능하여 개운조사께로 갔더니 개운조사께서 토굴 앞 계곡물에서 18일 만에 치료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양성(暘星)스님과 그 제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 양성스님이 계신 곳으로 개운조사께서 한 번 오셨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저 멀리 산 중턱에서 허공을 타고 오시더랍니다.
문도 제자들이 재세시 뵌 바에 의하면 탄공선사님도 상상을 초월하는 도인이신데 탄공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개운조사님은 정말 대단하셨지. 개운조사께서 그리신 벽사서나 벽사화를 지니면 금방 죽을 사람도 최소 30년은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 중생들은 모르지. 대단하신 어른이셨지.”라고 하셨습니다.
탄공선사께서 “개운조사께서는 무진년(戊辰年) 가을에 182세로 지리산에서 소나무가지를 잡은 채 선 채로 입적하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탄공선사님의 유일한 도반이던 임덕기(林德基)스님과 함께 지리산에서 직접 다비해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탄공선사는 11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입적하기 직전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출 정도로 정정하였다고 한다. 즉 탄공선사 스스로도 높은 경지의 고승이었다. 그런데 탄공선사가 증언하고 있는 개운조사의 일화는 더욱 놀랠 놀자다. 한마디로 개운조사는 전설적인 법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 남겼다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진경이라면 누구라도 읽고 싶지 않겠는가?

 

* 참고

 

불법의 밀지(密旨)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본존불로 하여 비밀한 법을 보현보살께서 친히 들으시고 남천축의 철탑 속에 모신 것을 용수보살께서 꺼내어 불교의 밀법을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 탄공선사

탄공선사의 제자들은 이 소중한 불교의 밀법이 개운조사님으로부터 ‘무주상보시의 보리’를 근본으로 한 선법맥을 이어 받으신 탄공선사님에 의해서 세상에 법신(法身)을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 

 

 

 -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어떤 책인가?

 

1) 중인도 반자밀제 사문이 번역한 <능엄경>

 

한국 불교에서는 중인도 스님인 반자밀제(般刺蜜帝)가 705년에 중국 광주의 제지사라는 변방 절에서 번역한 <능엄경>을 저본으로 하여 보고 있다.

타 경전들은 중국 황실의 비호 아래 번역된 반면, <능엄경>은 변방의 절에서 비밀리에 번역이 되었다. 이는 능엄경이 나란타사<大道場經(대도량경)>라고 하여  당시 인도에서 왕명에 의해서 나란타사 석실에 깊이 보관하고 열쇄로 봉인하여 놓고 열람이 꼭 필요한 이에게만 보게 하고는 이 경을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한 비밀한 경전이기 때문에 당나라 이후 705년에서야 비밀리에 번역된 것이다. 이것이 <능엄경>이 밀교의 중심 경전인 이유이다.

 

2) 중국(송나라) 계환 스님이 주해한 <수능엄경 요해> 10권

 

계환(戒環)은 중국 송나라 온릉(溫陵) 개원련사(開元蓮寺)의 스님이다. 그는 휘종(徽宗) 선화(1119~25년) 연간에 <묘법연화경 요해> 20권, 반자밀제가 번역한 능엄경의 <수능엄경 요해>10권을 지었다.

반자밀제가 <능엄경>을 번역하고 이를 기초로 계환이 지은 <수능엄경 요해>는 조선 세조 때 국역장경(國譯藏經)으로 번역 되었고 한국불교는 주로 계환이 지은 <수능엄경 요해>를 지침서로 삼고 있다.

 

3) 해동(고려) 보환스님이 산보한 <수능엄경환해산보기> 2권

 

중국(송나라) 계환스님의 <수능엄경 요해>는 해동(고려)에 와서 다시 보환(普幻)스님에 의해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刪補記)> 2권으로 다듬어졌다.

보환은 호가 한암(閑庵)으로 공주 태화산 마곡사 스님으로 고려 고종 32년(1245) 12월에 <수능엄경>을 널리 펴기위해서 '홍전도능엄경발원문(弘傳道楞嚴經發願文)'을 짓고, 고려 충렬왕 2년(1276)에는 범계사에서 능엄도량을 열었으며,백련사에서 능엄법회를 개최하고, 계환의 <수능엄경 요해>를 산보(刪補)한 <수능엄경환해산보기>를 저술하였다.

참고로 보환스님은 경북 문경 봉암사 환적암에서 입적하였다. 훗날 개운조사의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이곳에서 나온 사연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4) 해동(조선) 개운스님이 합편한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

 

<능엄경>은 반자밀제가 초역하였다. 그런데 <능엄경>은 손오공으로 유명한 불공삼장(삼장법사)이 다시 번역하게 된다. <능엄경>은 중역본이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조선 봉암사 스님인 개운이 30세 나이인 1820년 경에 불공삼장으로부터 친히 역본을 받았다는 것이다. 불공삼장이 중국 당나라 시대 인물인데 어찌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에 개운스님에게 친히 역본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개운당유서>를 보면 미친 스님 얘기가 나온다. 그가 불공삼장의 화신이었던 것 같다.

개운스님은 이 불공삼장의 번역본을 가지고 다시 주해하였는데, 이때 <능엄경>에 대한 계환의 요해(要解)와 보환의 환해산보기(環解刪補記) 참조하여 토(吐)와 주(註)를 단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여러 스님들의 염송을 붙여서 합편하였다. 반자밀제의 초역과 불공삼장의 중역, 그리고 계환의 주해와 보환의 산보는 서로 변증론적인 인연관계가 있다. 따라서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이 모든 것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능엄경>의 결경(結經)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 결과 일각에서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이 대승(大乘)의 밀경(密經)에 대한 신해(信解)와 수증(修證)의 도리를 밝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비밀한 법을 제시한 위대한 경전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瑜伽心印 正本首楞嚴經)>에 보면 반자밀제의 역본과 같이 제목을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고 하였고, 당나라 서천축 사문 바라밀제가 초역하고, 당나라 서천축 사문 삼장불공이 재역하였으며, 송나라 비구 온릉계환이 주해(註解)하고, 해동 비구 한암보환이 산보(刪補)하고, 해동 비구 개운대성(開雲大星)이 합편(合編)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연원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다른 <능엄경>과는 달리 '유가심인(瑜伽心印)'이란 글자가 부가되어 있다. 이것이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특색이자 위경으로 의심받는 대목이다.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보환스님이 입적한 경북 문경 봉암사 환적암에서 개운스님이 불공삼장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금강살타인 보현보살로 부터 전수받은 구결(口訣)인 유가심인(瑜伽心印)의 법과 <정본수능엄경(正本首楞嚴經)>을 받아서 이를 염송과 합편하여 탄생한 것으로 경의 연원을 추적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불과 선이 종국에는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거나 천축과 중국, 해동에서 선과 불이 서로 습합되고 융합한 부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무튼 어려운 대목이고 장차 궁리해 볼 문제다. 필자의 견성이 부족한 것이 한스럽다.

 

 

 

 

 

 

 

 

 

 

 

 

 

 

 

 

 

 

글을 마치면서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과 '동천암'에 대한 소회를 적어본다. 개운조사가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을 도장산 심원사 경가(經架) 천장에 두고 백년 후를 기약하였듯이, 이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진가 또한 다시 백년을 기약해보는 것이 어떨까? 수많은 실천가나 도인들이 이를 수증해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7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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