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작동 구조와 상상력의 교육 / 우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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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작동 구조와 상상력의 교육 / 우한용

사랑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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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像力의 作動構造와 想像力의 敎育

禹 漢 鎔 (서울대 사대)

 

 

 

 

Ⅰ. 상상력 교육에 대한 요구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교육적 가치는 교육과정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항존적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에는 문학과목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고 감상하게 함으로써 미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기르게 한다.”고 되어 있고, 이 항목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문학의 질서 속에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식의 능력과 비판의 능력을 포괄하는 세계 창조의 능력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통로와 공간에 의존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조응하고 창조하는, 세계 구성의 능력이다." 문학교육의 목표로 상상력의 형성은 제7차 교육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작품의 수용과 창작활동을 함으로써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른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러한 힘을 어떻게 길러 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뜻밖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상력에 대한 해명에 비하면 교육을 받는 학습자에게 상상력을 어떻게 길러 줄 것인가 하는 교육적 실천의 방법과 절차는 논의의 자리를 부여받지 못했다.

교육과정에 명시적으로 상상력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음에도 그 교육이 실효성을 띠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첫째 국어교육의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노선의 영향을 고려할 수 있다. 상상력이 실용성을 지니는 지적 능력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인해 교육적 가치가 부각되지 못한 것이다. 둘째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상상력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과 이의 실천이 제한되어 왔다. 셋째 상상력 교육의 결과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교육평가상의 문제점을 들어 상상력을 가르치는 방법 모색이 소홀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검증 가능성은 교육 목표 설정의 기준 가운데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증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교육목표로 설정될 수 있다면, 이른바 철학의 영역에 드는 학문은 아무 것도 교육목표로 설정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상상력 그 자체의 중요성을 고려할 경우는 물론이고, 상상력에 대한 학문적 논의의 수준으로 보아도 상상력은 학교 현장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 글에서는 상상력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따져 보고, 상상력이 작용하는 과정을 밝혀 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 상상력을 가르치는 구체적인 방법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Ⅱ. 상상력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비추어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북돋아 주기 위한 계획과 실천 그리고 평가의 전반적 과정이다. 실존철학자들처럼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기실 본질이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데올로기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의미에서 ‘인간답게 느끼고, 생각하고, 바라고, 행동하는 것’을 본질로 설정한다면 이는 교육에서 성취할 가치로 상정함이 마땅하다.

인간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상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 차원에서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넘어서서, 비가시적이고 비감각적 차원의 세계까지도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물질 세계에서 받아들인 감각적 소여를 기억한다든지 회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들을 변형하고 이를 자료로 하여 다른 세계를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상상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자신을 최대한 발양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일이다. 스스로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상상에 참여하여 공감하고 한 차원 높은 상상을 모색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상상하는 능력은 변용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자신이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에서도 유기적 작용을 생존의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유기적 작용은 주체가 환경을 변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이 밥을 먹고 소화하는 과정이라든지 삶의 여건을 마련하고 개조하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벌이는 유기적인 작용의 예들이다. 장 피아제의 개념으로 동화와 조절을 수행하는 가운데, 인간은 스스로를 변용하기도 하고 대상을 자신의 유기적 성질에 맞게 변용시키기도 한다.

변용의 힘은 대상 자체가 가지고 있으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가능성을 찾아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힘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꿈꾸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와 돌과 자갈과 모래와 유리는 그 자체로서는 사물일 따름이다. 이들 재료에는 어느 구석에도 집이라는 그림[청사진]이 들어 있지 않다. 집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그 밑그림에 따라 재료 가운데서 필요한 것들을 고르고 마름질하여 집을 짓는 힘은 변용의 능력인데 이러한 힘을 통틀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주변의 사물을 변용하고 형성하는 가운데 삶을 영위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변용하는 존재이다. 이는 실존철학에서는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는 점,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 등으로 인간의 본원적인 조건으로 거론하는 사항이다.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자기형성적 가능성으로 설명되는 점이기도 하다. 깨달음과 실천이 동반되기 이전의 자기는 사물 차원의 존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료 차원의 인간이 삶의 목적으로 세우고, 그 목적에 따라 자아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다른 차원의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인간의 내재한 가능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자기변형과 자기형성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조건을 부단히 부수고 새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의지의 실천을 거듭하는 가운데 문화를 이루어 살아간다. 그러한 점에서 문화는 능동성을 지닌다. 자신의 존재 현실을 수동적으로 긍정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한 인간은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그리고 자각된 의식으로 변화를 추구할 때라야 그 에너지가 문화 형성의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문화를 형성하고 향유하는 일 또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형의 의지와 기능으로 규정되는 상상력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인간의 인간다운 자기실현이다. 이는 평범한 말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유토피아의 꿈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지닌다.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는 모순 속에 꿈꾸는 존재로서 인간의 진실이 숨어 있다. 실현될 수 있는 것만 꿈꾼다면 이는 이미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서 과도한 자기한정이다.

상상력은 역사와 철학을 연계지어 준다.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지나간 시간을 재구성한 흔적이라면 철학은 시간적으로 미래에 속하는 불가능한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가능한 것만 탐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불가능의 탐구는 속성상 꿈의 영역에 속한다. 이는 문화의 방향을 조정하는 힘이다. 문화 그 자체는 실천적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시간의 축에서 수행된다. 반면에 문화적 실천으로 구현되는 삶의 방향을 모색한다든지 좌표를 설정하는 것들은 미래지향적인 속성을 지닌다. 시간적으로 현재에 속하는 문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는, 현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문화의 윤리가 문제되는 것은 이 국면에서이다.

불가능한 세계를 가능성으로 轉化하는 상상력은 언어를 통해 수행된다.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가능성 탐구의 작업 가운데 꿈과 가장 밀착된 것이 문학과 종교이다. 언어적인 자료의 이해와 창작은 글쓰기로 구현된다.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문제를 구성하는 일, 구성된 문제를 해결하는 일 등이 곧 상상력의 작업이다. 그러한 점에서 상상력은 문학의 창작은 물론 이해와 감상의 본질적 요건이 된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확인하고 세계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꿈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해 간다. 이러한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꿈의 작업에 함께 참여하는 윤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현실이란 超克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전제하는 관점을 취할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문학교육은 자신의 존재 초월을 도모하며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상상력을 통한 유토피아의 모색 과정에서 현실과 꿈이 통합되는 행복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는 꿈꾸는 존재로서 인간이 구가할 수 있는 극정경험의 하나이다.

 

 

Ⅲ. 상상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인간이 상상적 존재라는 점, 상상력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점을 밝혔다고 해서 곧장 상상력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작용 구조를 알아야 한다. 상상력의 작용 구조를 알아야 학습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다.

상상력을 가르친다는 것은 상상할 줄 아는 힘을 길러 준다는 뜻이다. 상상할 줄 아는 힘은 자신이 상상한 것과 남이 상상한 것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수용할 줄 아는 공감력을 포함한다. 이는 언어의 기능을 “타자와의 교제와 자아와의 교제”를 동시에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언어는 어떤 사람의 과거에서 현재로의 표현”인데, “공통 언어에 힘입어, 낱말들 속에 보존되어 있던 청자의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들은 화자의 정합적인 문장을 받아들이게 될 때 하나의 새로운 상상적 경험으로 재조직된다.”고 한다.

또한 상상적 공감력은 문화적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는 실천의 개념을 수반한다. 문화는 공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요망된다. 이런 차원은 윤리적 속성을 더불게 된다. 이 실천은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지식의 역동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문학교육에서 학생들에게 길러 주고자 하는 상상력은 언어적 상상력이다. 언어적 상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으로 대변된다. 언어적 상상력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언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 즉 언어관에 따라 다양한 관점을 상정할 수 있다. 문학으로 수행되는 언어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記號論的 實踐으로 보는 관점에 서야 한다. 언어의 구조나 인식 기능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하여 주체들 사이에 상징적 상호작용을 하는 능력과 활동으로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호론적 실천의 관점이다. 물론 언어의 구조라든지 언어를 통한 인식이라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수행하는 일은 언어능력과 연관되는 것이고, 언어능력이 실현되는 장은 문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意味를 共有하고, 意見을 調整하며, 理念을 摸索하고 實踐한다.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물을 명명하고, 그 명명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가운데 공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논리적이고 이지적인 공감이다. 주관을 가지고 있는 주체들이 주관적인 욕망을 서로 투여하는 경쟁과 투쟁의 장이 언어활동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언어활동은 상호주체적이고 따라서 각기 다른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주체들의 줄다리기와도 같은 힘겨루기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 의견이 조정되는 과정이 언어활동인 셈이다. 언어를 통해 이념을 모색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꿈과 결단을 언어로 표현하고 인간이 지향하는 전망을 모색한다는 뜻이다. 언어는 시간적인 단절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과거는 언어적인 기억으로 현재에 함입되어 들어오고 미래는 기대와 소망이라는 형태로 현재를 의미화하는 데에 작용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모색할 수 있는 힘이 상상력이다. 이념을 모색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상으로 바라는 유토피아를 언어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의 지적이다.

언어의 이러한 층위에 대해 N.프라이는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언어의 용법을 분류한다. 인간이 자기가 처한 세계에 대한 의식과 자각을 표현하는 자기표현의 언어가 하나이고, 세계에 대한 작용 혹은 역할을 하면서 작업을 수행하는 언어로서의 실용적 감각의 언어가 다른 하나이다. 또 마음 속의 비전 혹은 모델을 구축하는 언어를 문학적인 언어라고 하여 한 층위로 설정한다. 이들은 각각 의미의 공유와 의견의 조정 그리고 이념의 실천이라는 언어의 층위와 대응된다. 프라이는 언어적 소통의 문제 즉 기호론적 실천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언어를 통해 실용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꿈꾸기를 동시에 수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문학교육에서 문제삼는 상상력은 언어를 통해 의미를 공유하고, 의견을 조정하며, 이념을 실천하는 변형의 능력으로 구체화되는 구성능력일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폭넓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상상력의 본질을 변형의 의지나 능력으로 보는 관점은 바슐라르에게서 확인된다. 그는 상상력이 이미지를 그대로 기억에 떠오르게 하는 기능으로 규정하는 관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상력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상상력이란 오히려 지각작용에 의해 받아들이게 된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며, 무엇보다도 애초의 이미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능력인 것이다. 이미지들의 변화, 곧 이미지들의 예기치 않은 결합이 없다면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상상하는 행위 또한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상력은 이전의 관념체계 내에서 환기되는 이미지를 수정하고 해체하는 작용을 한다고 보아야 된다. 이는 칸트의 상상력 이론에서 ‘창조적 상상력’ 개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코울리지의 경우 이차적 상상력이라는 것과 상통한다. 이는 일차적 상상력의 창조적 활동을 바탕으로 “재창조를 위하여 용해하고, 확산하고, 분산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러한 견해는 프라이의 상상력론으로 이어진다. 프라이는 상상력을 ‘인간적 경험의 가능한 모델을 구축하는 능력’으로 규정한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는 그다지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의 관심은 인간이 자연을 재료로 하며 건설하려는 세계에 있으며, 그들이 호소하는 상상력은, 비록 이성과 정서라는 두 요소를 다 포함하고는 있으나, 이성도 아니고 정서도 아닌, 구성적 능력(constructive power)이다.”

상상력을 구성적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성과 정서를 포괄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상상력은 행동으로 구현되는 의지는 물론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열망까지를 포함하는 역동적인 힘이며 구성적 능력이다. 따라서 상상력의 범위는 매우 폭넓은 것이 된다.

상상력의 가장 높은 단계에 해당하는 내용인 인간적 경험의 모델이나 비전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거친 연후에라야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축할 수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와 살고 싶은 사회가 동일한 여건으로 구성될 때, (그런 세계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세계에 대한 비전은 생겨날 수 없다. 결국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불충분함을 깨달으면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데서 비전은 만들어진다.

프라이가 제시한 언어의 용법은 결국 세계에 대한 인식, 인식을 통해 발견된 세계의 실상에 적응하기 위한 세계와의 상호작용,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재검토하면서 가능한 모델을 구축하는 지향적 단계에 각각 대응되는 용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을 정리하면 인식적 상상력, 조응적 상상력, 초월적 상상력 등이 된다. 상상력의 많은 부분은 문학의 허구성과 관련된다. 문학이 실생활과 관련하여 현실을 조응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문학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된다. N. 프라이는 ‘문학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력밖엔 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인 것’이라고 전제하고, 문학에서 현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참된 현실이란 것은 우리의 경험을 직접 상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격분이나 오델로의 질투와 같이 다만 우리의 상상력의 속에서만 정작 그것을 통해서만이 이룩될 수 있는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한 경험인 것이다.

문학에서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현실의 강력한 힘을 강조하는데, 이는 강력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중요한 일은 실생활을 바라보는 수평적 전망이 아니라, 수직적(vertical) 전망인 것이다.”라고 수직적 전망으로 표상되는 초월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현실을 초월한다는 것은 이상세계에 대한 지향이며 ‘현실에 대한’ 비전 혹은 ‘가능한 모델’의 제시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면은 문학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문학은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현재의 奔流로부터 몸을 물러나게 해서 ‘인생’에 대한 광범위한 일반론을 말하려고 하는 특징”이라고 하는 콜린 윌슨의 지적도 여기에 타당한 것이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면서 현실적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학의 이러한 현실연관도 결국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문학이 현실을 복사하여 ‘너무나도 정말인 것처럼’ 보이고 실생활과 같아져 버리면 이는 문학의 자기파멸을 초래하는 행위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학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수익체감의 법칙이라고 하는 이상한 작용이 문학 안에 일어난다. 이러한 점은 문학이 상상력을 통해, 분열된 인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man as a whole)을 형성해준다는 설명의 반증이 된다. 결국 상상력은 갈라져 나가는 나의 자아를 또 하나의 거대한 자아에 합류하도록 하는 삶의 마름질이다. 그러한 점에서 상상력은 미세 차원과 거대 차원의 구성력을 의미한다. 이렇게 차원을 달리하는 능력이 개인의 주체 안에서 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학교육이 상상력과 관련하여 맡아야 할 소임이다.

 

 

Ⅳ. 상상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언어적인 상상력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데서 실현된다. 그런데 ‘읽는다’는 말은 두 층위로 되어 있다. 대상적 차원과 텍스트 차원 두 차원에 읽는다는 말이 적용된다. 대상을 읽는다는 것은 대상을 발견하는 일, 발견한 대상의 속성을 보아내는 일이 포함된다. 또한 대상과 대상의 관계를 읽어내는 일도 포함된다. 이를 사물 읽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읽는다는 말의 다른 층위는 ‘글을 읽는다’는 뜻이다. 이는 텍스트에 주체가 언어를 매개로 연계되면서 거기서 상상차원의 대상을 발견하고,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추출하는 등의 작용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까지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텍스트 읽기는 대상의 발견, 발견된 대상의 관계 인식, 대상에 대한 의미 구성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읽는 일의 한 과정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쉽게 말하자면 독서의 단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과정을 고려해 보기로 하자. 소설 본문의 첫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읽은 다음에 책을 덮는 데서 그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허구적 상상물인 소설 읽기를 끝내고 현실로 곧바로 돌아오는가? 그리고 소설의 내용이나 이미지를 단박에 잊어버리고 마는 경우, 그리고 그 후에 기억에 떠올릴 기회가 전혀 없는 경우도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소설을 잘 읽은 경우라면 그렇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지는 않는다. 일상 경험으로 보더라도 읽은 결과 어떤 부분이 반추되는 것이 사실이고, 읽고 나서 반추되는 내용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기도 한다. 다만 그 내용을 조직하여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거나 글로 쓰는 경우라야 결과가 뚜렷하게 남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읽는다’는 말의 단위는 읽은 내용을 다른 차원의 텍스트로 표현하는 행위를 내포한다. 텍스트에서 어떤 대상을 발견하고 대상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찾아내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말로 나타내지 않은 경우는 독서의 한 과정이 완성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읽은 내용을 언어로 전환한 것, 즉 독자의 내적 언어로 정리한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옮기면 그것이 쓰기가 된다. 그렇다면 쓴다는 말 속에는 ‘읽은 것을 쓴다’는 뜻이 함축된다. 이렇게 하여 읽기와 쓰기는 동일한 과정에 대한 다른 명칭을 부여한 것이 된다.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쓴 시를 역추적하여 자기 글을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발견한 것을 글로 옮긴 텍스트에서 독자는 시인의 자리를 빌려 시인과 함께 텍스트 차원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텍스트 차원에서 읽은 대상들을 재구성하고 의미화하는 것이 시를 읽는 과정인데, 이는 반드시 언어적 구성을 전제한다.

시를 읽는 과정이 곧바로 시를 쓰는 과정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이 사물을 언어로 옮기는 것이라면, 독자가 시를 읽어서 다시 쓰는 것은 시를 대상으로 하는 메타차원의 글쓰기가 된다. 다만 시를 읽는 과정을 시인의 시작 과정에 대한 추체험이라는 점을 전제할 필요는 있다. 과정상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할 때라야 상상력이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발견과 경이감

상상력은 발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발견은 경이감으로 연결된다. 발견과 경이감은 순서적이라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발견해 놓고 보니 놀랍고, 놀랍기 때문에 눈에 띤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해석학적 순환의 관계처럼 맞물려 있다. 그리고 발견과 경이감은 사물에 대한 해석을 유도한다. 깊은 해석은 다시 경이감을 더욱 밀도높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주체의 성숙이 이루어지고 성숙된 주체는 보는 깊이를 더욱 확보하게 된다.

다음은 김명수의 <찔레 열매>라는 시이다. 상상력이 작용하는 절차를 잘 보여주는 시이다.

 

12월 어느 날

싸락눈이 내린 오후

어린 아들 함께 산에 오르다가

얼음 덮인 골짜기에

빨간 열매를 보았네

 

황량한 골짜기에

풀잎들은 서걱이고

마른 나뭇가지들도 정적에 싸였는데

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이제 겨울 깊어

흰 눈 쌓이면

모이 없는 멧새들이 와서 따 먹으리

 

인적 없는 골짜기

빨간 그 열매

모이 없는 꿩들에게 모이가 되리

 

때로는 눈물짓던 내 영혼아

네 바람 어디에 두고 있느냐

 

어느 날 내가 죽어

깊은 겨울 오면

인적 없는 골짜기 모이라도 되랴

 

긴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이 시의 1, 2연은 사실의 발견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 연의 “12월 어느 날/ 싸락눈이 내린 오후/ 어린 아들 함께 산에 오르다가/ 얼음 덮인 골짜기에” 까지는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 정황을 그리고 있다. 그러한 정황에서 시적 대상인 “빨간 열매”를 발견[보았네]했다는 것이다. 2연에서는 1연의 발견이 다소 구체화되어 있다. 빨간 열매를 발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 열매가 눈부신 열매가 된 과정을 볼 수 있다.

발견한 대상을 다른 맥락에 놓음으로 해서 다른 의미를 얻게 하는 것이 3, 4 연이다. 이는 시간적으로 미래를 앞당겨, 현재 대하는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여기까지는 대상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구성이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못하다. 그러나 5연 6연으로 가면 주체가 대상과 맺는 관계의 밀도가 높아짐으로 해서, 즉 주체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짐으로 해서 의미의 밀도가 증폭된다. 마지막 연은 처음 상황으로 다시 돌아감으로 해서, 발견의 기쁨과 경이감, 그리고 의미의 증폭을 마감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미적인 평정작용을 하는 부분이다. 이는 시를 미적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시적 장치의 하나이다. 이러한 형식개념은 시의 예술적 본질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2. 창조와 완성의 충일감

모든 시를 발견과 경이감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를 읽는 상상력의 동원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경향을 달리하는 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한다.

다음은 널리 알려진 이육사의 시 <曠野>이다. 이 시를 읽는 데에 어떤 상상력이 작용하는가 하는 점을 따져 봄으로써, 문학의 이해가 상상력과 어떤 연계성을 지니는가 하는 원리가 드러날 것이다. 우선 원문을 제시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보기로 하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끓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梅花 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앞에서 예를 든 <찔레 열매>는 정태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대상의 발견과 거기 따르는 경이감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 즉 상상력을 작동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광야>는 대상의 발견보다는 대상을 창조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역동적 이미지가 연속되는 가운데 시가 구성된다. 물론 ‘이 곳’, ‘지금’, ‘여기’ 등 물질적 대상이 지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시인이 만들어낸 역동적 이미지의 어느 국면이나 속성을 지시할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구체적인 대상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광야’라는 소재는 물질 차원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의 발견보다는 대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시인의 자아를 투사하여 의미를 엮어내는 방식으로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지금 시인은 광야에 서 있다고 상정한 다음 상상력이 작동되는 방향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창작주체로서의 시인은 광야에 서 있다고 상정해야 하고, 또 독자는 그렇게 상상해야 한다. 여기서 광야는 시인의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광야라도 좋고, 이념상의 광야라도 상관이 없다. 시인이 제공하고 독자가 변형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인은 이 광활한 땅을 시간의 연계성 속으로 이끌어 들임으로써 생성의 근원을 추구한다. 이는 분절된 시간을 연결지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양질부분을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천지가 창조되던 무렵, 인적은 고사하고 어디 닭 우는 소리나 들렸을 것인가? 암암한 혼돈을 벗어난 그 아득한 세월 저편의 일을 오늘의 여기로 연결짓는 상상력이 발휘된다. 산맥들이 바다를 향해 뒤틀어 나가면서도 광야는 비껴 나갔다. 산맥 따위야 광야에 비하면 사소한 돌출에 불과한 것. 광야에는 그만큼 위엄이 서려 있다.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빛과 그늘[光陰]의 반복은 쉼 없는 운동이라서, 광야에 비로소 강물을 대고, 강이 흐르면서 길이 열리게 된다. 길이 열렸다는 것은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광야의 역사에 비한다면 인간의 역사란 하잘것없는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사 일반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雜踏과 喧騷로 가득찬 것이라서 광야의 위용에 비한다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앞세우지 않고 인간의 움직임이 흔적으로 남은 길을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방향으로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광야에 인간이 나타나기까지 걸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동안 주체의 자기인식이 돋아오른다. “지금 눈 내리고/ 梅花 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치고 버겁고 고단하지 않은 데가 있을까만 시인은 그 고단한 현실을 황홀경으로 전환하는 상상력을 작동한다. 지금 내리는 눈과 매화 향기가 홀로 아득한 모순의 통합은 천지의 창조와 맞먹는 창조의 씨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난과 황홀을 통합하는 상상력 속에서 시인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가난하지만 노래로 염원을 읊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이고, 노래의 씨가 싹터 무성하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이 염원은 현실이 가파를수록 더욱 절절한 것이 된다. 광야의 위엄은 위엄을 그대로 지닐 것이기 때문에 천고의 뒤에도 광야는 의연할 것이다. 거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다면, 아니 분명히 있어서 시인이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목놓아 부르면서 의연한 광야의 전설을 다시 노래할 것을 꿈꾸어도 좋지 않겠는가. 이는 천지의 창조가 인간을 통해 거듭되고, 그것이 시인의 상상력으로 반복 재생되는 생성의 희열과 다름이 아니다.

 

3. 삶의 논리와 상상력

앞에서 시에 작용하는 상상력을 보았다. 그런데 문학에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포함하는 서사문학이 기본장르로 존재한다. 서사문학은 이야기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문학의 근대적인 양식인 소설을 가장 범박하게 규정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고 쓰는 데 동원되는 상상력은 시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상상력을 구성적 능력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시와 소설에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시에서 상상력이 작용하는 방식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소설에서는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구성적 능력이 작동하게 된다.

인생의 이야기는 하도 다기해서 일괄하여 성격을 규정하기는 지난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고 가정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아득한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도무지 핵심을 포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몇 십 년을 살아 왔다고 해도 그 동안의 체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극히 어렵다. 정해진 인생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변용하고 구성해 가기 때문에 인생의 앞길은 언제나 열려 있는 터이기에 그러하다. 인생사를 변용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 놓인 사건을 간추리는 데서 시작된다.

인생을 아주 잘 정리한 이야기가 있다. 불교의 초기 경전 󰡔�阿含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이야기라는 점에 바탕을 두고 상상력을 고려해 보기로 한다.

어떤 사람이 미친 코끼리에 쫓기다가 우물 안으로 내려진 덩굴을 타고 그 속으로 내려갔으나, 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시 오르려 해도 코끼리가 입구에 버티고 서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의지할 것이라곤 잡고 있는 덩굴뿐이었다. 이것을 흰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나타나 머리 위에서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절박하기 짝이 없는 순간에, 덩굴에 달린 벌집에서 흐르는 꿀의 단맛에 취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을 주체로 하고 있다.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은 앞에서 본 시와는 다른 상상력을 작동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대상이 사람일 때, 그것이 우리들 삶의 알레고리가 된다는 점을 일단 상정하게 된다.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를 통해 내 이야기를 재구성하게 한다. 소설을 비롯한 이야기문학의 본질적 요건 가운데 하나는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남의 이야기는 상상력의 작용 방식을 독특하게 규제한다. 이는 남의 이야기를 위해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서술자의 역할 때문이다. 서술자가 개입함으로써 행위주체와 서술주체의 시각이 분화되고, 그 분화된 시각에 따라 상상력이 작용하는 방향이 규정된다.

시의 상상력은 압축과 응축을 기본으로 하는 은유적 상상력이다. 서사에 작용하는 상상력은 풀어내기를 바탕으로 하는 환유적 상상력이다. 환유는 잘 알려진 바처럼 인접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의 인접성이란 그 이야기가 우리 인생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평범한 사람의 일생이 압축되어 있다. 그 압축의 과정에 여러 단계의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야기를 평명하게 읽어 보도록 하자. 이야기를 평명하게 읽는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우리들 삶의 알레고리라고 전제하는 관점이다.

우리 일상이 그렇듯이 業苦를 짊어지고 사는 인간은 늘 쫓기며 불안에 시달린다. 지혜를 얻지 못한 無明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업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물에라도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독사가 우글거리는 무간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다. 진퇴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한 기대로 명철한 판단을 얻지도 못한 채 현실에 얽매여 지낸다. 살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듯이, 인생살이에 그 나름의 자잘한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물에 드리워진 줄기에는 꿀이 든 벌집이 달리기도 하는 법이다. 거기 미련을 두다 보면, 구미에 당기는 것에 애착을 가지고[貪] 속아 사는 것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내고[瞋], 미련하여 미친 듯이 행동하고[痴] 하는 三毒의 미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그러는 중에 밤과 낮이 속절없이 바뀌면서 무간지옥으로 떨어질 시간만 차곡차곡 다가오는 것이 인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인생사에 조회할 때, 사실이 그러한 터라 공감되는 바 크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상상력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사실을 압축하고 있다. 인생을 이렇게 짧은 이야기 속에 압축할 수 있는 힘이 곧 상상력의 위대한 변용력이다. 인생살이에서 사람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다. 흰 쥐와 검은 쥐로 상징되는 시간의 흐름이 인생을 갉아먹는 것이다. 이는 시간에 의해 구속된 삶의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을 이 이야기는 보여준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상상력의 본원적인 속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고, 우리의 삶은 상상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시 현실로 가져와 현실의 문제점과 모순을 따져볼 수도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음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가, 그리고 나는 어떠한 자세로 인생을 요량해 나가는가, 우리 시대 사람들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영위해 나가는가 하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조율할 수 있다면, 이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비판하는 정신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인생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태도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면, 이는 이야기 자체에 대한 비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러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따져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가 실용적 감각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조응적 상상력의 언어이다.

그 다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는 사실의 인식과 현실의 비판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볼 수 있는 수직적 전망이다. 삶의 수직적 전망은 삶의 현실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삶의 지표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사실의 인식과 현실의 비판 그리고 삶의 지표를 마련하는 이러한 큰 구도 속에 꿈꾸는 힘은 자장을 형성하는 가운데 고도의 긴장력을 유지해 간다. 그러니까 상상력은 존재 자체의 전환과 변용에 관련되는 제반 정신작용이 되는 셈이다.

소설의 경우는 위의 예보다 상당히 복잡한 상상력의 작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상상력의 세 차원만 문제삼는 것도 무리가 수반된다. 소설의 양식과 상상력의 관계, 양식과 시대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상상력의 방향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Ⅴ. 상상력의 교수-학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시와 이야기[소설]을 상상력이 작용하는 구조를 따라 읽어 보았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 과정에서 이러한 절차를 반복하는 데서 상상력이 길러진다고는 하기 어렵다. 학습자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고 출발한다. 교수-학습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상상력이 작용할 수 있는 기본 에너지를 기르는 일과 상상력이 작용하는 방향을 조율하는 일, 그리고 상상력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는 일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문학교사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문학교사는 학습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능동적인 태도를 길러 주어야 한다. 학습자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텍스트를 읽는 가운데 상상력의 작용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상상력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상상적 공감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정신적인 자유를 성취하는 데서 상상력의 체험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문학교사는 이러한 과정을 교수학습의 장으로 이끌어들여 설계하고 실천해야 함은 물론이다.

상상력은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직관적 경이감에서 비롯된다. 이 느낌은 “위대한 문학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감동력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거나 계획에 따라 길러지는 그러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잠재적 교육과정의 영역에 해당한다. 상상력의 원천인 관심은, 화이트헤드 식으로 말하자면 중요성과 사태의 관념을 포괄하는 이해를 지향하는데, “광범한 일반성과 완강한 개별성”을 지닌 의식적 경험을 통해 추구된다. “중요성이란 느껴진 사물들의 우주에다 하나의 전망을 부여하는 느낌의 한 측면”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의 순환적 속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요성은 관심을 낳는다. 관심은 식별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관심은 증가된다. 그리고 관심과 식별이라는 두 요소는 서로를 자극한다. 궁극적으로는 의식이 서서히 그리고 단속적으로 발달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의식은 자극의 또 다른 作因이 되기에 이른다.”

이 지점에 오면 상상력은 분별력과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문학적 인식으로 통하는 것이고, 따라서 학습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자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인식, 그리고 자신의 전망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 우회로를 거칠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직접 동원하는 것이 순리라고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항목을 예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을 발견하는 체험에서 오는 중요성과 사태의 인식을 유도한다. 이는 주로 인식적 상상력에 해당한다. 재생적 상상력과도 관계되는 부분이다. 중요성을 바탕으로 현실세계에서 대상을 발견하는 것도 기쁨과 경이를 가져오지만, 텍스트 안에서 발견하는 대상도 이미지의 변형을 통해 상상력을 작동하게 한다. 그리고 소설처럼 산문으로 되어 있는 경우, 현실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다음 차례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에 바탕이 된다. 그리고 텍스트 내적인 요소들을 사실 차원에서 확인하는 작업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술의 영역에 드는 문학은 형식 개념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의 상상력이 길러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리듬의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된다. 하나의 시작품 내에서 어떤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는가,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는가 하는 점 등을 확인하는 것도 유용한 장치가 된다. 시에 동원된 비유를 찾아 그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 시가 어떤 이야기구조[myth]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 어떤 시점에서 서술되어 있는가 하는 점 등을 이 영역의 상상력을 통해 발견해 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소설에서라면 우선 어떤 인물이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된다. 그 인물의 행동을 이야기로 압축하기, 이야기 가닥이 교차된 양상을 파악하기 등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첫 관문이다. 때로는 이야기 늘리기를 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모든 이야기를 다 쓸 수 없고 선택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는 압축된 이야기를 풀어 보는 것도 상상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발견한 대상을 자료로 하여 넓은 의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은 구성적 능력으로 규정되는 상상력의 본질적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照應的 想像力의 발휘 양상이다. 텍스트 내적인 요인과 텍스트 외적 요인의 대비를 통해 발견한 대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때, 이는 글을 쓰는 사람이 발휘하는 상상력과 구조상 동일성을 보여준다. 텍스트의 내용을 비판할 수 있고, 그 근거를 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상상력 작동여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텍스트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통한 해석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는 텍스트의 내용을 두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경험과 일치하는가, 그 경험을 남에게 들은 적이 있는가 하는 등의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최종 단계로 설정한 것이 초월적 상상력이다. 이는 삶에 대한 비전을 마련하는 일로 규정된다. 발견과 대비적 비판이 이 영역에서 하나의 완전한 총체성으로 형성된다. 이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학습자들의 자율적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텍스트와 대결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상상력이다. 그런 점에서 초월적 상상력의 작동은 상상력을 동원하는 학습자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는 능력으로 전환된다. 자기이해를 거쳐 자기형성을 스스로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 상상력의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면, 이는 교육의 양질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라 해야 한다.

읽은 결과를 말로 정리하거나 글로 쓰는 중에 발휘되는 상상력은 그 자체가 자아인식과 연관되며, 이를 통해 상상력의 최고 경지인 정신의 자유에 도달하는 통로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지성의 임무가 완성되었다고 느낄 때보다 우리 자신이 통찰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우리는 더 완전한 자아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문학적인 장치를 동원하는 실천에서 얻어지는 예술체험으로서 상상력은 자아인식, 자기형성과 연관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두고자 한다.

 

 

Ⅵ. 상상력은 어떤 교육적 효용이 있는가

 

문학교육을 상상력의 교육이라고 전제하고 출발했다. 상상력은 정서와 지력 어느 하나만을 가리키거나 둘이 종합된 양상이라기보다는 종합적인 구성적 능력이다. 구성적 능력이기 때문에 인식과 전망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는 현상 뒤에 있는 형성적 에너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학습자와 교사 양편에 동시에 작용한다. 문학교사는 학생과 더불어 문학작품에 자발적으로 공감하며, 작품을 비판해 보고,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전망을 마련하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꿈꾸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꿈꾸기가 왜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으며 자신이 보편성을 지닌 인간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인류의 정신사와 맞물려 있다.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지혜를 쌓아 올리는 데에 공헌한 성인들은 대체로 이야기꾼이거나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이야기를 구연하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선지자들의 정신능력 또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인류의 지혜가 뒤에 전해진 것들 치고 열도 높은 상상력의 도가니를 거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문학교육은 이러한 상상력의 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꿈꾸기를 가르치는 과정이다.

상상력은 장르에 따라 작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러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장르교차적(trans generic)이다. 문학을 시, 소설 등으로 한정하는 관습을 벗어나, 인간의 꿈을 다루는 언어로 되어 있는 일체의 것을 문학의 범위로 넓게 잡아야 한다. 그리고 문학교육의 범위 또한 꿈과 연관된 언어적 형상의 세계 전반으로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문학은 인간 정신의 가능성, 상상력의 높이와 깊이,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에 상당하는 지점까지 이르는 수직적 경험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프라이가 문학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을 ‘정신의 상상적 습관, 다시 말하면 옛것을 숭배하는 대신에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본능을 문학의 실험실로부터, 인류의 생활로 옮기는 것’이라고 한 것은 문화에 대한 창조적 체험을 통한 초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문학교육은 상상력을 세련시키고 세련된 상상력을 텍스트에서 현실로 가로지를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길러 주는 교육이다. 과거와 미래는 상상력의 용광로에서 녹아나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의 자아는 형성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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