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북한검사 김중종의 증언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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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전 북한검사 김중종의 증언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이었다”

黃薔(노란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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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상, 『월간 말』 1991년 5월호


남로당 총책이던 박헌영과 온건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


**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된 '이정 박헌영 전집'에 나오는 『월간 말』 1991년 5월호 기사 발췌편집 내용입니다 **

【해제】 ‘박헌영 간첩사건’ 공판을 참관했다는 김중종의 증언을 정리한 문서이다. 김중종은 경북 안동 태생으로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는데, 1947년 남로당에 입당했으며 한국전쟁중 북한으로 넘어갔다. 공판 참관 당시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로 재직했으나, 박헌영 간첩사건을 직접 담당한 것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박헌영의 간첩행위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힘든데, 북한측 공식 문서로는 ‘간첩행위’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공간되어 나온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하 『공판문헌』)에서는 박헌영의 범죄 사실로, 

1.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 

2. ‘남반부 민주 역량파괴 약화행위’, 

3. ‘공화국 정권전복 음모행위’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부분 피의자들의 증언만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김중종의 증언도 대개 『공판문헌』에 적시된 혐의들을 다시금 제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다만 이승엽ㆍ이강국ㆍ배철ㆍ임화 등의 간첩행위를 알게 된 김경애를 임화 등이 살해하려 하다가 발각되었다는 것과 박헌영 거주지의 무전을 탐지한 것이 박헌영 간첩사건이 ‘드러나게’ 된 계기라는 증언은 『공판문헌』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또 이 자료에서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된 계기가 식민지시기 일제 간첩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공판문헌』과 일치한다. 다만 이 증언에서는 식민지시기 ‘일제를 위한 간첩행위’로 인해 해방 후 미국에 협력하게 된다고 진술되어 있는 반면, 『공판문헌』에는 1939년 출소 직후 미국인 언더우드 아래에서 미국의 간첩이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 점에 약간 차이는 있다. 


그리고 1939년 박헌영이 다른 사상범들과 달리 청주교도소 등에 다시 수감되지 않고 석방된 점에 의혹이 있다는 주장은 착오인 듯하다. 식민지시기 사상범들이 형량 만기 후에도 계속 구금된 것은 1941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이후이다. 박헌영이 형량 만기가 된 시점이 1939년이므로 당연히 예방구금령의 적용을 받지 않고 출소할 수 있었다. 다만 1936년 이후 시행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의 적용 대상이므로 출소 후 보호관찰 대상은 되었을 것이다.


김중종의 생애에 대한 더 자세한 상황은 『끝나지 않은 여정-한국현대사 증언록』(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대동, 1996)을 참조할 것. 이 책에도 박헌영 간첩사건에 대한 김중종의 증언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말』지에 실린 이 글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말』지 1991년 5월호에 실린 이 글이 좀더 앞서 나온 것이어서 본 전집에는 이를 수록했다.


박헌영 간첩사건에 대해 자세한 사항은 본 전집 7권에 수록된 박헌영 간첩사건 관계 자료들의 해제를 참조할 것.


입을 연 산 증인


“일반인 방청은 제한된 가운데 8백여명의 당과 각 기관 간부들이 평양시 창광산공원 내 내무성구락부에 설치된 공판정으로 모였습니다. 나는 최고검찰소 검사로서 뒷줄 맨 위에서 참관하게 되었는데 박헌영은 자기의 간첩행위에 대한 심문에 또렷또렷하게 답한 뒤 최후진술을 빌어 모든 책임을 최고 책임자였던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하더군요.”


1961년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어 임진강변 비무장지대에서 군에 체포돼 28년을 복역하고 지난 89년 출소한 김중종씨. 올해 66세인 그는 남파 전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로 재직하면서 1955년의 이른바 ‘박헌영간첩사건’ 재판을 참관했던 남한 내의 유일한 산 증인이다.


그 자신이 해방 직후 박헌영이 당수로 있던 남로당 산하 경북도당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당 총수의 ‘간첩사건’에 관련된 증거 보따리를 남한에서 최초로 풀게 되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남에 내려왔다가 30여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줄곧 생각한 건데 의지가 약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검사로서 당시 박헌영 재판을 참관할 때만 해도 과거 남로당 활동 중에 제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물증들에 대해서는 ‘당수가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하는 의구심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 물증들을 하나하나 검토ㆍ확인해 보고, 남쪽에 내려와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냄으로써 ‘아하! 바로 그랬었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박헌영간첩사건의 진상을 밝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현재 박헌영과 남로당에 관한 남한의 역사적 시각이 무척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든지 전쟁 실패 책임을 뒤집어씌워 처형했다는 식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거의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분단과 남한정부의 정보 차단으로 인해 결정적 증거들이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중략:편)


애국자 가족이라 하여 간부로 발탁


김중종씨는 1926년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서 태어났다. (중략:편) 해방 후 대구사범대학 재학 중에는 학생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해방된 우리 민족의 모든 현실조건으로 볼 때 사회주의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해 남로당에 들어갔습니다.”


독립국가의 권력구조를 둘러싸고 대규모 격돌이 그치지 않았던 해방공간에서 그의 삶도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48년 단독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그는 수배령 속에 대구사대에서 쫓겨났다. 이후 경주에서 남로당 경북도당 학생분과 소속으로 지하활동을 벌이던 그는 48년 말 남로당의 모든 조직이 드러난 가운데 토함산 아지트에서 붙잡힌다.


49년 3월에 석방된 김씨는 이미 남로당 세포조직이 완전히 파괴돼 도저히 지하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6ㆍ25를 만났습니다. 나는 6월 28일 남로당으로부터 고향 경북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고 떠났다가 낙동강 전선이 뚫리지 않아 의용군으로 마산전투에 참가했어요. 50년 8월 그곳에서 국방군의 박격포탄을 맞고 서울로, 함북 주을로, 다시 만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지요.”


김씨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51년 1월 상처가 아물자 평양으로 내려왔다.
이후 그의 진로는 일제 때 항일운동으로 옥사한 조부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한다.


“평양에서 여러 가지 심사를 하더니 ‘애국자 가족이고 대학을 중퇴했으니 공부를 더해 간부로 일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더군요. 그 길로 신의주에 있던 법률학교에 입교했지요. 당시는 전쟁 중이라 신의주에 중앙간부학교, 중앙당학교, 법률학교 등 간부양성기관이 있었어요. 1년 교육과정을 마치고 52년 평북 용천지구 검찰소 검사로 배치받았다가 53년에 평양 최고검찰소에 소환됐습니다.”


남한의 검찰기능이 형사소추에만 국한된 것과는 달리 북한의 검사는 형사소추, 법령감시 두 기능으로 나뉘는데 그는 법령감시를 담당했다고 한다.


남로당 지도부의 미심쩍은 행적들


1953년 3월 5일, 평양의 최고검찰소로 출근한 김중종 검사는 두 가지의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다. 당시는 미군기의 맹폭으로 평양시가 초토화됐던 터라 모든 국가기관은 가건물을 지어 사용했는데 최고검찰소도 현재의 김일성광장 터에다 급조한 2층 가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다.


“평소와는 달리 그날 따라 중앙당에서 조직부 권 부부장이 우리 최고검찰소에 아침회의를 지도하러 나왔어요. 좌중이 긴장되어 있는데 그는 ‘여러분이 검찰기관에 종사하니까 먼저 이 사실을 공표하게 되었다’며 두 가지 사건 얘기를 꺼냈습니다. 소련국가원수 스탈린이 오늘 사망했다는 것과 ‘이승엽ㆍ이강국 등 12명의 간첩사건’을 적발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나 이날 박헌영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습니다.”


당시 주요 체포자들을 보면 이승엽(당 검열위원장, 정치국원), 이강국(무역사 사장), 배철(대남연락부장), 조일명(당 선전부 부부장), 임화(해주인쇄소 사장), 윤순달, 이원조(연락부 부부장), 백형복, 설정식(연락부) 등이었다.


그러면 당시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는 어떤 증거로 먼저 이승엽ㆍ이강국 등을 간첩혐의로 체포했을까?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에서는 이미 6ㆍ25 전부터 박헌영ㆍ이승엽ㆍ이강국 등 남로당 지도부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적발했지만, 미국의 간첩활동이라고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분파주의의 극단적인 폐단으로 알고 비판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같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어보자.


“미군정기에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박헌영 등 지도부가 월북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해주에서 대남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남도부ㆍ김달삼 부대 등 유격대를 남쪽으로 내려보내면 가다가 도중에서 속속들이 사살ㆍ체포돼요. 그러자 평양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당시 제3군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오진우(현 인민무력부장)를 부대장으로 한 유격대를 태백산까지 내려보냈다 돌아오게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또 6ㆍ25 직후 서울시인민위원회(현 서울시청) 지하실에서 밤에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정보가 있어 내무성 제1국장 박정만이 변장해 조사를 나와 보았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당비서 이승엽이 서울시 임시토지조사위원장으로 일을 보고 있었는데 별 하나짜리인 내무성 국장은 드러내놓고는 얼씬할 수 없었던 곳이지요. 박정만은 거기서 38명의 공산주의자가 죽어 나갔다는 사실만을 발각하고 돌아갔어요.


또 전쟁 전 경기도당 위원장이었던 안영달이 서울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 이주하 두 사람을 피신시켜 두고 있었는데 당시 이승엽 측에서는 직접 보호할 테니 두 사람의 은신처를 알려달라 했습니다. 안영달은 그러기에는 위험한 시기라 하여 계속 거절했으나 상부지시를 끝내 막아낼 수는 없었지요. 김삼룡ㆍ이주하는 이승엽측에 넘어가자마자 체포됩니다. 전쟁이 나고 이승엽은 안영달의 입을 막기 위해 백의종군시킨 후 낙동강전선 칠곡 부근 나루터에서 사살했습니다. 안영달에 대한 사살은 대남사업부에서 파견한 유격대 제6지대장 맹종호를 시켜 이뤄졌는데, 이 장면을 인민군이 사진으로 잡아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됐어요.”


그러나 이같은 사건들은 당시까지 남로당 지도부에 가해졌던 풀 수 없는 의심사항들이었을 뿐 누구도 간첩행위로까지 인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발각된 간첩행위의 진상


이승엽ㆍ이강국에 대한 간첩혐의를 탐지한 결정적 계기는 1952년 당 전원회의에서 채택했던 ‘당의 조직ㆍ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비판사업과정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의 여러 가지 의혹들을 검토ㆍ공개하고자 개최된 이 비판사업은 당 조직부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러 방면에 걸쳐 과오를 점검하던 중 경기도 여맹위원장 김경애가 급히 중앙당으로 피신해 들어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으니 살려 달라고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남사업 관계는 개성에서 남로당이 취급했는데 그 내부에서 사건이 들통 났던 것입니다. 해주에서 대남연락부 인쇄소 사장으로 있었던 임화(작가, 작가동맹위원장 역임)가 자신들의 죄과를 거론하는 경기도 여맹위원장 김경애를 죽이려 하자 중앙당에 긴급히 피신해 구명을 호소했었지요. 그러자 중앙당에서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했는지 임화를 불러 조사하니 이승엽, 이강국, 배철, 임화 등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김경애가 알고 있었기 때문임이 발각됐어요.”


당시 김경애가 알아챘던 해주의 대남사업담당 남로당 간부들의 간첩행위는 남파되는 유격대 및 공작원의 통로와 접선지, 명단 등을 미국 정보기관에 넘겨준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지도부는 발칵 뒤집혔다. 노동당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즉시 이승엽, 이강국, 임화, 배철, 조일명, 이원조 등 관련자들을 체포해 수사에 착수했다. 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 성격상 53년 3월 5일까지는 대외비로 처리됐고, 박헌영(외상, 정치국원)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밀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면 박헌영에 대해서는 어떤 증거를 잡아냈을까?


“이승엽 등을 조사하니까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렸어요. 지금의 평양 대성산동물원에 있던 3층짜리 일제 건물 별장에 박헌영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지하실에 대남사업용 무전시설을 두고 있었지요. 바로 그 시설이 간첩행위에 이용된 것입니다. 무전시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정전회담 도중이었지요. 정전회담 안건 준비를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남일, 박정애 등 5명이 모여 했는데 수석대표인 남일이 UN군 측과의 회담장에 나가면 다섯 명이 한 얘기를 미군이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해요. 한 예로 포로교환 관련으로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면 미군측은 즉석에서 부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항상 상대방의 안건에 대해서는 오랜 토론을 거쳐 답변을 주던 미군의 태도에 비춰봤을 때 ‘아하! 이거 샜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남일이 돌아와 보고를 한 것이지요.”


당시까지 북한에서는 전파탐지시설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북한측은 소련으로부터 긴급히 전파탐지기를 들여와(소련은 49년에 처음 개발) 박헌영 집 주변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전파탐지기를 설치하기 전에도 대남사업과 관련된 모든 무전은 내무성에 보고된 무전이 전부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비밀리에 전파 탐지기를 설치하고 나니 승인되지 않은 무전이 계속 나가고 있음을 잡아냈지요.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됐습니다. 당시 박헌영이 거주하던 대성산 가옥 무전수는 나중에 조사해 보니 49년 서울에서 치안국 대공중앙분실장을 지냈던 백형복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백형복은 치안국 근무시절 김삼룡ㆍ이주하를 체포ㆍ수사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전쟁 직전 ‘의거입북’으로 가장해 평양에서 활동했던 것이지요.
대남사업이 특수한 임무라 해서 아무도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탓이었습니다.”


미국이 이용한 박헌영의 일제협력 전과


한 나라의 공산당 당수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간첩’역할을 했는지에 가해질수밖에 없는 당연한 의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박헌영이 일제 때부터 정보원 역할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1925년 두 번째 투옥됐던 신의주형무소에서 그는 7년을 선고받았지만 만 2년을 살고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의주형무소에서 같이 징역을 살았던 황태성씨에게 제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같은 일은 공산주의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제 경찰과 짜고 벌인 연극이다’는 것이었어요. 게다가 세 번째 징역을 살았던 대전형무소에서는 불가사의하게도 박헌영만 풀려납니다. 당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면 전향을 하더라도 거물급은 서대문형무소와 청주형무소로, 일반활동가들은 각 도마다 설치된 대화숙으로 이감해 계속 구금시켰거든요. 그러나 박헌영은 이때 총독부 사법국과 밀약해 겉으로는 전향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정보원으로서 일경에 도장을 찍어준 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석방된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다고 강조하며 증언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과거를 털어버리고 공산주의자의 길로 나아가려던 박헌영 앞에 가로놓인 장벽은 미국 CIA가 일본 총독부로부터 입수한 바로 그 비밀 일제 첩보선 명단이었지요. 공산당 당수직을 버리고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거쳐 백의종군하느냐, 미국과 타협하느냐 갈림길에서 그는 뒷길을 택했던 셈입니다.”


김씨는 이같은 사실을 박헌영의 최후진술 과정에서 직접 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로당 결성 당시에도 이같은 박헌영의 과거행적과 관련해 당수로서의 자격시비를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경북도당의 권영대 위원장과 훗날 진보당 당수로 있다가 56년( 59년:편)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된 조봉암씨 등이 그 장본인들이었다는 것.


“46년 9월 남로당이 결성되고 박헌영이 당비서가 되려 하자 경북도당 권영대 위원장이 강력하게 반발했어요. 일제 때의 투쟁경력을 엄밀히 검증하지도 않고 당비서직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권영대 등 반대파는 박헌영 주도로 평양으로 소환된 가운데 열성자대회를 통해 박헌영 파벌 중심으로 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이승엽을 조직부장으로 기용했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이승엽 역시 일제에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일제 때 인천에서 식량영단 이사를 지냈던 사람이 바로 이승엽이었거든요. 이런 과정을 보고 같은 인천 출신으로 그 내막을 잘 아는 조봉암이 강력하게 반발, 탈당 성명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결국 김씨의 증언에 의하면 박헌영은 해방 직후 미국 첩보기관에 발목이 붙잡혔고, 이승엽은 포고령 위반으로 46년 12월에 체포되어 종로서에 수감된 과정에서 역시 과거의 친일행적을 들어 협박하는 미국 CIA의 공작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어쨌든 53년 3월 5일 일단 ‘이승엽ㆍ이강국 등의 간첩사건’이 발표되고, 박헌영은 이 무렵부터 평양시 외곽 산골에 연금되어 1년에 걸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소는 다시 1년이 지난 55년에 이루어졌다. 박헌영에 대한 조사와 기소 과정이 이처럼 길었던 데 대해 김씨는 당시의 북한 지도부가 처해 있던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를 놓고 당 지도부는 고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당시 남쪽 산악에서 고군분투하는 빨치산들에 대한 사기도 고려해야 했고, 빨치산 상급자 중 누군가 박헌영 간첩사건과 연관되어 있지나 않은지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밖에도 박헌영의 지시를 받던 수많은 활동가들 중 책임자의 의도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담당활동에 위험스런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지 여부를 가리게 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일단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53년 8월 3일부터 사흘간 평양시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공판을 받았다. 약 3천여 명의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당시 공판은 피고인 모두가 혐의사실을 순순히 시인한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한다. 마지막날 언도에서 이승엽ㆍ이강국ㆍ배철ㆍ조일명 등 10여명은 사형이, 이원조ㆍ윤순달 등 2명에게는 징역 12년에서 15년이 각각 확정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형의 집행은 박헌영에 대한 정밀조사가 끝날 때까지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있을 박헌영 재판에 증인들로서 대질신문을 벌이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박헌영이 재판받던 날

1955년 12월 15일, 김중종 검사는 평양시 서문동 집을 떠나 창광산공원에 있는 내무성 구락부로 향했다. 오전 10시부터 박헌영이 법정에 서게 되어 있는 날인데 내무성 최고검찰소 검사들에게 방청권이 주어졌던 것. 김씨는 그날의 재판 과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법정은 평소 때 내무성 간부회의 장소로 사용하던 단층건물로 약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요. 8백명정도가 방청했는데 일반인은 허용이 안됐습니다. 맨 앞줄에는 군 좌급 간부들이 수십명 앉았고 그 뒤로 내무성 간부들, 철도기관의 정복 입은 사람들로 채워졌어요. 지금 기억나는 방청인으로는 현재 총리로 있는 연형묵도 봤고, 당시 중앙도서관장이던 권오직, 적십자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웅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최원택, 경공업성 부상 김광수 등 남로당 출신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0시경 박헌영이 입정했지요. 연한 연두색 양복 차림으로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깔끔하고 건강해 보였어요. 그러나 얼굴에는 침통한 표정이 서려 있더군요.


재판장은 최용건이었는데 그외 임해, 조성모, 방학세, 김익선 등 4명의 판사가 더 있었습니다. 검사총장은 이송운이었고요.


곧바로 최용건이 재판을 시작했어요. 박헌영은 재판부가 과거 행적을 죽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하는 편이었지요. 오후 다섯시 반까지 진행된 재판과정에서 이승엽ㆍ이강국ㆍ배철ㆍ이원조 등이 증인으로 나와 증언하던 기억도 납니다. 이승엽은 심문이 있으면 ‘예! 예!’하고 비굴한 자세를 보였고, 이강국은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박헌영과 같은 뜻으로 일하지는 않았다’는 요지를 근엄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 외 이원조는 ‘매우 억울하다’는 답을 해 재판부가 ‘왜 거절하지 못했느냐’고 묻자 ‘눈치챘을 때는 이미 직책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방청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이강국은 형식을 차리는데 이승엽은 비굴해서 참 대조적이다’는 수군거림이 오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은 미국첩보기관에 무전을 친 사실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틀간의 심리를 마친 후 박헌영은 최후 진술에서 이런 요지로 말했다고 한다.


“내가 왜 일제 경찰의 앞잡이가 됐는가. 하도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서였다. 해방이 되고는 그것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미국이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된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온갖 매국적 죄악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매국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경고가 되길 바란다.”


심리가 모두 끝난 후 재판부는 박헌영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을 언도했다.


사건 후 박헌영의 아내와 두 아들의 행적


박헌영간첩사건의 전모는 재판 후 곧바로 당 문건 등 각종 학습자료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부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별다른 이의제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북에 남아 있던 수많은 남로당 출신들이 그 뒤에 처한 입장은 어떠했을까.


“사건 후 남쪽에서 올라간 사람들은 과거 남로당 지하활동의 모든 과정을 재음미했습니다. 왜 그리 지하사업의 원칙인 비밀이 보장되지 않았던가에 대해서였지요. 사실 한동안은 남로당 출신 입장이 무척 딱했습니다. 책임자가 반당ㆍ반국가행위를 했으니 어디 말발이 섰겠어요. 합법생활에만 젖어 있던 사람은 지하활동을 이해하지 못한 데다가 그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난감한 처지였지요. 그러다가 차차 여러 비판의 기회를 통해 해소됐습니다.”


사건에 직접ㆍ간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지방으로 내려가 재교육 과정을 거친 후 60년까지는 대부분 복권되었다고 한다. 사형당하거나 실형을 산 경우는 30명 정도였다는 것.


한편 김씨는 박헌영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들려주었다.


“박헌영은 결혼을 세 번 했지요. 첫 부인과는 북에 올라가기 전 이혼했고, 두 번째 부인과는 북에서 살다가 사건 당시 19살 난 딸까지 있었지만 일찍이 이혼해 부인만 모스크바로 옮겨갔습니다. 사건 당시에는 세 번째 부인과 어린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재판정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58년경 내가 평남도검찰소 검사로 있을 때 관할 구역이었던 순천에서 세 모자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어쨌든 박헌영간첩사건 이후 북한의 대남사업은 한동안 공백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대남사업의 성격상 과거 지하활동 경험이 있는 남로당 출신이 적격이었지만 사건에 연루된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남한에 내려와 얻은 물증들


김씨는 3년간의 최고검찰소 검사 생활을 마치고 56년부터는 평남검찰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전쟁중이던 52년 교원으로 일하던 신의주 출신 여성과 결혼해 아들 둘과 딸 하나도 두었다. 전쟁과정에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될 정도로 참혹하게 파괴됐던 평양도 급속하게 복구가 이뤄져 김씨도 58년에는 평양시 인흥동에 지어진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0년 대남연락부로부터 남파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분단 극복의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고자’ 쾌히 남파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중략:편)


어쨌든 그는 스스로 표현하는 ‘적극적인 분단극복사업’에 손도 못 댄 채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군 정찰대에 체포된다. 61년 1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 상고심까지 거쳐 징역 15년을 확정받아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김씨는 바로 그곳에서 박헌영간첩사건의 새로운 물증들을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50년부터 53년까지 대남사업으로 남파되었다가 붙잡혀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어요. 그들의 얘기가 기막힙디다. 이득윤씨, 임흥순씨, 안학섭씨 등이었는데 그들이 당시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남쪽에 내려오니 접선장소에 특무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음! 아무개 왔구나. 도민증 XXX번이지?’ 하면서 잡아가더라는 거예요. 다음에는 누구누구 나온다는 명단까지 제시했다고 그러더군요.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북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간첩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지요. 그저 지하사업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미칠 지경이라고들만 털어놓더군요. 현재 그 증인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기자에게 최초로 공개한다며 이로써 그가 처음에 가졌던 의문들도 풀리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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