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 Paul K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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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Paul Klee

금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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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Paul Klee

 

출생사망국적
1879년 12월 18일,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1940년 6월 29일, 스위스 무랄토로카르노
스위스

요약 20세기 스위스의 추상화가로 주요 작품은 <세네치오>와 <죽음과 불>. 독일에서 태어나 음악을 전공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미술에 관심을 가져 바그너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좋아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이후 프랑스 화가들과 만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러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만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종류도 드로잉, 수채화, 판화 등으로 다양했다. 이후 히틀러의 독재정권이 시작되면서 기반이 약해지고 진혼곡이라 불리는 <죽음과 불>을 그린 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클레(Paul Klee)

스위스 화가이다.

ⓒ Alexander Eliasberg/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매우 독창적인 회화 언어로 사물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전하려고 한 천재적인 추상화가로,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공상적인 상형문자와 자유로운 선묘로 말미암아 때때로 아동 미술을 연상하게 한다.

초기생애와 교육

클레의 어머니 이다 마리아 프리크는 스위스인이었으며,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한스 클레는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그만두고 음악을 가르친 독일 출신의 교사였다. 클레는 일찍부터 음악과 미술에 몰두했다. 그는 4세 때 자기가 종이조각에 휘갈겨 그린 악마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일 때면 어머니에게로 도망치곤 했다. 그는 삼촌 에른스트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대리석 탁자 윗면의 꾸불꾸불한 무늬들을 보면서 공상에 잠기곤 했는데, 이것들은 그에게 환상적인 디자인을 연상시켰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도 소년 클레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7세 때부터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클레는 주의깊은 학생이었지만 일찍부터 기존의 질서와는 대립된 독특한 성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소년시절에 받은 교육을 '끝없이 높지만 기슭이 없는 산맥'이라고 표현했다. 청년시절 그는 특히 그리스어와 소묘(소묘로 가득 찬 12권의 공책이 베른의 클레 재단에 보존되어 있음)를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매우 뛰어나서 베른 시립 교향악단에서 대리 연주자로 활동했을 정도였다. 또한 클레는 10대에 제법 세련된 시와 단편소설들을 썼다.

1898년 중학교를 졸업하자 오직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리 대신 뮌헨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바이에른의 수도에 있는 예비미술학교에 다녔다. 1900년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가 우의화들로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인 프란츠 폰 슈투크 밑에서 공부했다.

슈투크는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강요했으며 회화보다는 소묘에 전념하도록 했다. 클레는 스승에게 순응하기를 거부하며 1901년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는 잡지 〈유겐트 Jugend〉와 풍자신문인 〈짐플리치시무스 Simplicissimus〉 등 독일의 전위적인 간행물들에 열광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미술적·지적 관습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음악회에 다녔으며,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모차르트의 작품들에 매혹되었다.

1899~1900년 사이의 겨울 어느 음악회에서 뮌헨의 저명한 의사의 딸인 릴리 슈툼프와 알게 되었고 1906년 그녀와 결혼했다. 1901년 6월 클레는 뮌헨을 떠나 잠깐 베른으로 돌아갔다가, 훗날 20세기초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가 된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헤르만 할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밀라노·제노바·로마·나폴리·폼페이를 여행하면서 클레는 특히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틴토레토·핀투리키오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성숙기

그는 1902년 5월 베른으로 돌아갔으며 결혼 전까지 뮌헨부흐제에 있는 어린시절의 집에 살았다.

미술면이나 지적으로 이 시기는 클레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는 그때까지 거둔 그림의 성과를 접어두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해부학이나 다양한 매체의 미술 기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계속 왕성하게 책을 읽었다. 1905년 5월 31일부터 6월 13일까지 클레는 파리를 방문해 미국의 화가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1834~1903)의 대규모 회고전시회를 보았으며,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미술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베른으로 돌아와서 예전에 만든 15점의 에칭 판화를 모아 뮌헨 신분리파 전람회의 심사원단에게 제출했다. 그 가운데 〈나무 위의 처녀 Jungfrau im Baum〉·〈날개 달린 영웅 Der Held mit dem Flügel〉 등의 10점이 그 전시회에 채택되었다.

이 에칭들에서 클레는 공격적이고 환상적인 형상들을 통해 거의 위협적인 유머를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풍자와 세부까지 꼼꼼하게 그린 기괴한 형상을 통하여 베른의 단조롭고 답답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에칭 판화인 〈서로 상대방이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 Zwei Männer, einander in höherer Stellung vermutend, begegnen sich〉이었다.

클레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실물을 기초로 드로잉·수채화·유리그림도 그렸으며, 점토로 몇 점의 작은 조상을 만들었다. 클레는 1906년 결혼한 뒤 1920년 가을 바우하우스에 교수로 초빙되기 전까지 미술가들이 모여 사는 뮌헨의 슈바빙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1907년 11월 30일 아들 펠릭스가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인 릴리가 음악을 가르쳐 식구들을 부양했으며, 클레는 1914년까지 그림을 팔지 않았다.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베른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편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신선한 당대의 미술에서 자극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고 다양한 전시회와 음악회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1~12년 클레는 18세기 프랑스 작가인 볼테르의 풍자적인 작품 〈캉디드 Candide〉의 출판(1920)을 위해 가는 펜으로 삽화들을 그렸다.

또한 그해에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이들 전시회는 스위스의 취리히·베른·바젤·빈터투어에 있는 미술관에서 열렸다. 1912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및 프란츠 마르크와 알게 되었고 그들의 전위파 그룹인 '청기사파'(Blaue Reiter)의 2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쾰른의 존더분트 화랑과 베를린의 데어 슈투름 화랑 등을 비롯하여 유명한 사립미술관에서 수많은 전시회 초청을 받았다.

독일의 주요한 수집가인 빌헬름 우데는 1912년 4월 파리에서 16일 동안 머무르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주요한 입체파 화가들에게 클레를 소개했다. 클레는 특히 오르피즘의 창시자인 로베르 들로네의 다채로운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고흐의 선구적인 표현주의 작품들에서 클레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작품들의 강렬한 표현 이면에 있는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을 느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또 다른 선구적인 표현주의 미술가인 제임스 앙소르의 판화들도 이 무렵 그의 관심을 끌었다. 클레는 북부 유럽의 표현주의 미술에 강하게 끌렸지만 폴 세잔을 가장 높이 평가했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중에서는 20세기 프랑스의 뛰어난 화가인 앙리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914년 4월 클레는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 및 청기사파 동료 화가인 아우구스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다. 이들은 제각기 이 북아프리카의 여행 경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클레는 튀니지의 케라반에서 수채화를 그리면서 색채의 성질을 깨닫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색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나를 지배할 것이다…… 지금 행복한 시간을 누리는 것은 바로 색채와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우 12일 동안 튀니지를 여행했지만,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추상 경향의 미술로 바꾸어놓았으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을 기초로 한 추상 미술"로 변화시켰다.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클레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아우구스트 마케는 9월 26일 프랑스의 샹파뉴 전선에서 죽었다. 독일 표현주의를 개척한 또다른 친구인 프란츠 마르크는 1916년 3월 4일 베르됭에서 전사했다. 마르크가 죽은 지 며칠 후 징집되어 독일군에 들어간 클레는 뮌헨 근처의 여러 곳에 배치되었는데, 그중 슐라이스하임의 비행장에서는 비행기들을 닦고 칠하는 일을 했다. 군대 생활이 그에게 큰 두려움이나 방해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에게 군대 생활은 그런대로 견딜 만한 것이었으며, 그 속에서 그는 '공상적인 꿈'을 꾸었다.

그의 상사들은 그의 명성을 존중했으며, 그래서 그가 민가에 살면서 가족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또한 상사의 허락하에 프란츠 마르크의 작품 전시회를 위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여가 시간에는 수채화를 그리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 그는 제대하여 뮌헨의 슐뢰스헨 수레스네스에 작업실을 빌렸다. 베른의 부유한 수집가인 헤르만 루프는 그의 수채화를 몇 점 샀으며 파리의 미술상이자 입체파의 지지자인 칸바일러에게도 몇 점 건네주었다.

1919년부터 그는 주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점점 색을 두텁게 칠했다. 그는 외부 세계의 색조를 모방하지 않고 내면의 변화에 조응하여 색을 창조했다. 독일의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건축이란 미학적 현상이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이다'라는 원칙에 따라 설립한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1920년 11월 클레를 회화 교수로 초청했다.

클레는 그 초청을 받아들여 이듬해 1월 뮌헨을 떠나 바이마르로 갔다. 바우하우스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은 미술의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술의 이상은 '미술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실용적인 미술, 즉 장식 사업이나 기념 사업에 쓰여지도록 주입된 기술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이상대로라면 '새로운 건축물이…… 수많은 손을 거쳐'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내면적이고 시적인 개성을 지닌 클레가 어떻게 이러한 집단적 분위기에 끼어들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광학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독특한 교육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는 스스로 터득해 〈교육적인 스케치북 Pädagogisches Skizzenbuch〉(1925)에서 상세히 기술한 방식에 따라 회화를 가르쳤다.

1924년 여름 클레는 시칠리아에서 6주일을 보냈는데, 그 섬의 타오르미나에서는 수채화를 그렸으며 시라쿠자에서는 그곳 풍경에 감탄하여 그 자체가 '추상 풍경'이라고 느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잇따른 공격을 받고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극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격려에 힘입어 학교를 데사우로 옮겨 1926년 그로피우스가 지은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7월에 클레의 가족은 데사우로 이사했는데 이웃에는 칸딘스키가 살았다. 클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수업도 하고 음악회도 열었으며 강연도 하고 잡지 〈바우하우스 Bauhaus〉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1928년 12월 20일 클레는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이집트로 갔다. 그는 며칠 동안 카이로·룩소르·아스완을 방문했는데, 이 여행도 예전의 튀니지 여행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클레는 1931년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작품을 팔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었지만 천성적으로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말년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자 독일에서의 클레의 생활은 불행해졌다.

클레는 나치의 비판을 받아 미개하고 타락한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를 여행했다. 클레는 히틀러 정권을 극도로 혐오해 정치적으로 중립인 스위스로 다시 돌아가 1933년 베른에 정착했다. 1934년 클레는 처음으로 런던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베른과 바젤에서는 1935년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그해 여름 홍역을 수반한 기관지염에 걸려 폐병과 심장병의 합병증이 일어났다. 그의 병은 점막을 마르게 하여 심장까지 파고드는 희귀한 병인 공피증(鞏皮症)으로 진단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클레는 처음에는 태연했다. 그는 활동을 계속하면서 타라스프에서 치료를 받다가 건강을 되찾기 위하여 스위스의 발레 주에 있는 몽타나쉬르시에르로 갔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려는 그의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1937년 그는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렸으며 짧은 산책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작품에 매달렸다. 그당시의 그림에서는 파스텔화인 〈정원 속의 인물 Figur im Garten〉에서 밝고 강렬한 색채를 보였다. 그해에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나치가 타락한 미술로 비난하며 압수한 현대 미술의 많은 걸작들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클레의 작품도 17점이 들어 있었다. 1939년 클레의 60회 생일을 맞이해 그는 독일의 공식 관청을 제외한 세계 각지로부터 축전과 선물을 받았다. 1940년초 클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비극적인 길에 접어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가 그린 수많은 소묘들이 이미 그 길을 가리켜왔으며 '이제 때가 되었노라'고 한다." 클레는 그해에 일련의 천사들을 그렸는데, 그것들은 그리스도교보다는 이슬람의 천사들에 더 가깝다.

그는 또한 〈죽음과 불 Tod und Feuer〉을 그렸는데, 그의 '진혼곡'(Dies Irae)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하다. 5월 10일 오르셀리나-로카르노의 요양소에서 앓아누운 그는 무랄토로카르노의 성아그네스 병원에 입원한 지 몇 주 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7월 1일 루가노에서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1942년 9월 베른의 쇼스할덴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음과 불(Tod und Feuer)

1940년 클레의 작품

ⓒ Paul Klee/wikipedia | Public Domain

묘비에는 그의 일기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지상에서 나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에게서만큼이나 죽은 자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스위스 베른의 파울 클레 박물관

ⓒ w:de:Benutzer:Florian.Arnd/wikipedia | CC BY-SA 3.0

클레에 대한 평가

클레는 보통 지금까지의 가장 뛰어난 몽상가들 중 한 사람, 즉 우주 변화의 비밀을 깨달은 미술가로 예찬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회화적 환영에 대한 그의 놀랄 만한 지식을 보여준다. 환상적인 클레의 미술은 겉보기에 현실을 마술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시적인 주문을 전달하고 있다. 표현주의를 '개인적인 감정의 직접적인 시각화'라고 본다면, 클레는 아마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색채와 형태 및 공간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은밀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클레는 또한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그래서 그의 작품 체계는 상당 부분이 음악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클레에게 '미술은 지구가 우주의 모습을 예증하고 있듯이 창조의 상징이었다'. 그는 평범한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그림들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현실을 창조했다.

그는 사물의 현재 상태가 단지 순간적이고 우연적인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과거의 세계나 생성중에 있는 세계를 전달하려고 했다. 미술 작품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장식품 이상의 것일 수 있다면, 또한 통찰력을 주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클레가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손꼽히는 미술사의 한 부분에서 가장 존경받는 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옮겨온글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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