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 조애영(趙愛泳, 1911~2002) - 조지훈의 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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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문화유적)❀

시조시인 조애영(趙愛泳, 1911~2002) - 조지훈의 고모

晛溪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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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조애영(趙愛泳, 1911~2002) - 조지훈의 고모

은촌(隱村) 조애영(趙愛泳) 아들 이병붕(李秉鵬) - 은촌내방가사집(隱村內房歌辭集)

목당가(牧堂家)는 아버지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이 자식들을 분가시킬 때 일정한 재산을 분배해 주고 있어서 4형제는 모두 자기 사재를 쌓아가고 있었다.

둘째인 홍(泓)은 일찍이 춘천에 본거지를 두고 독자적으로 제재소를 경영해 오다가 해방을 맞아 지방 유지들의 천거로 뜻하지 않게 강원도 산업부장이 되어 관계에 몸을 담고 있었고,

시골 송호정(松湖亭)엔 셋째 담(潭)의 가족이 아버지 석와 내외를 모시고 있었고,

넷째인 호(澔)는 지검(地檢) 검사로 혜화동에 거처를 잡고 있었으며,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해방 후로 계속 바쁜 몸이 되어 시골집을 거의 찾지 못했다.


은촌 내방가사집’에 실려 있는 결혼 생활 40년을 돌아보며 읊은 작품으로 그 속에는 마침 10월 폭동을 겪은 부분의 시편(詩篇)이 있어 여기 옮겨 놓아 본다.


경북일대 뒤집었다 폭동이요 민란이라

누구보다 큰피해를 이부자가 당했어라

큰집주인 찾는판에 낭군님이 나타나고

폭도들이 폭행할때 나도같이 당했어라

중구그날 아침부터 영천군수 타살한후

이부자집 습격해서 파괴하고 방화할때

부형대신 붙잡혀서 맞아죽을 변을했네

나아니면 영낙없이 황천으로 갔으리라

악몽같은 그날아침 이런욕을 보았나니

폭도에게 끌려나가 몽둥이로 매를맞고

개죽음을 당하는임 참아볼수 없는지라

이내목숨 내어놓고 가장목숨 구하려는

아녀자의 일편단심 천지신명 도우셨다

피투성이 가장머리 얼사안고 울부짖어

넘어지는 낭군님을 무릅위에 올려놓고

죽었다고 땅을치던 시월일일 십일사건

무서워라 무서워라 경북십일 폭동이라

불행이도 그날화를 이내혼자 당했으니

이씨가문 궂은일은 나혼자만 당할란가

남편목숨 건지려고 내목숨은 내던진날

요행이도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할때

폭도들이 난동하다 하나둘씩 헤어진일


조애영(趙愛泳)은 걍북 영양(英陽) 일월산사(日月山下)의 주곡동(注谷洞)에서 1911년에 조인석(趙寅錫)의 외동딸로 태어나 7세 때부터 내방가사(內房歌辭) 작법(作法)을 배웠고, 영양보통학교(英陽普通學校)와 배화여고(培花女高)를 나와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중퇴했다.

1930년 4월부터 시조작품을 [학생(學生)]지ㆍ[개벽(開闢)]지 등에 발표했고, 그 후 계속 내방가사와 시조작품을 창작, 발표했다. 1958년 시조집 <슬픈 동경(憧憬)>을 발간했으며, 그 후 여러 잡지ㆍ신문에 ‘은촌(隱村)’이라는 아호로 약간의 작품을 발표했다. 〈금강산기행가 金剛山紀行歌〉, 1971년 3월 <슬픈 동경> 재판 발행과 <은촌내방가사집(隱村內房歌辭集)>을 회갑기념(回甲記念)으로 발행했다.

조애영은 자연적 시관(詩觀)(에 의한 작품이 많고 또 이 자연 속에 몰입항려 자연과 인생을 자유로운 감정 속에 교감시키고 있다. 이 시인은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시의 소재로 선택할 수 있고, 그 소재에 대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시키고 있다.

<장안사(長安寺)>

장안사 깊은 밤에 소리도 많은지고

첫 새벽 목탁소리 나를 불러 깨우나니

아침상 산채나물은 절로 이를 닦아라.

<내금강(內金剛)>

날마다 새로 보는 별유천지(別有天地) 층암절벽(層巖絶壁)

떨어지면 황천(黃泉)이라 기어감도 장관(壯觀)이요,

단풍은 절세가인(絶世佳人)의 녹의홍상(綠衣紅裳) 같아라.

조애영이 갖고 있는 시정신은 엷은 서정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있는 서정의 시세계이다.



내방가사에 나타난 사녀(士女)들의 삶과 생각


사녀(士女)란 '사대부(士大夫)집의 여인'이란 뜻으로 즉 양반여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규범에 묶여 살다간 인생이라 할 것이다.

조선조를 다스린 주자학(朱子學)의 이념은 분명히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지만, 종주국(宗主國)을 능가한 것이 조선조 가법(家法)의 혹독성이다. 물론 이 중에 인륜의 길이라든가 그밖에 자질구레한 처신의 예절은 오늘날도 계승돼야 할 것이 많지만 대여성관계(對女性關係)의 불합리한 규범은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규범'이라는 명분아래 얼마나 많은 우리 선조여성들이 서럽고 억울한 삶을 살다간 것인가, 그들이 남긴 노래나 글 속에는 피맺힌 사연이 많다.

이 가운데에서 지난번 전시회에서 선을 뵌 내방가사 몇편과 내간(內簡)을 중심으로 그 속에 담긴 조선조 및 조선조적 구세대 여인들의 삶과 생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내방가사'란 일명 '규방가사'라고도 하며 원래 영남지방의 사족촌(士族村)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조선조 가사의 한 갈래이다. 4.4조의 형식속에 조선조 양반사회의 규범을 바닥에 깔고 여인들의 삶의 희로애환을 엮은 것인데 요즈음은 호남,호서,간혹 가다가 경기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권영철(權寧徹)교수는 내방가사 3500수를 수집하여, 학위논문으로 발표했는데, 아직도 영남 구가촌(舊家村)에서는 다락안에 간직돼 있는 가사들이 더러 있는 것 같더라는 보고가 있다. 선산(善山)지방에 내려가서 곧장 3편을 수집해 가지고 온 어느 교수의 말인즉, 지금도 규방가사를 짓고 있더라는 것이다. 새삼, 그 전통의 영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실지로 조선조 내방가사의 맥(脈)을 잇고 있는 저명한 두 작가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기성세대중에서도 아주 기성세대 노년층인 70~80대 여류작가들의 것이다. 80대인 은촌(隱村) 조애영은 경북 영양(英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유학하여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에 입학했다가 결혼으로 중퇴한 신여성이다. 이후 서울에 눌러앉아 현재까지 명륜동에서만 50여년을 살고 있는 한양 여인이다. 또, 한 작가는 현재 전주에 거처를 두고 있지만 앞의 80내 은촌(隱村) 조애영(趙愛泳)과 사제지간인 소고당 고단(高 )이다. 두분 다 내방가사 뿐만이 아니라 서(書)에도 뛰어나며, 은촌은 시조작가로서도 이름이 나 있다.

'글은 그 사람'이라했으니 아래에서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거니와 두 작가 모두 문재(文才) 뿐만이 아니라 그 고장에서 행세하는 명문의 딸들로서 한문, 내방가사 등 탄탄한 가정교육과 넉넉한 교양을 바탕으로 가문의식이 투철하다.



◉ 은촌 조애영 ( 隱村 趙愛泳 )


제목으로 보건대, 울분가, 한양비가(漢陽悲歌, 4.19 義擧 등) 역사의식과 불의, 부정부패에 대한 정의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볼 때는 역시 조선조적 규범에 살아온 아내요, 며느리요, 어머니였다. 옜날 계녀가(戒女歌)의 여인들의 삶과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 애련가(哀戀歌)


이 내방가사의 '원작'은 8.15이후 소실(燒失)되어, 그 딸인 은촌(隱村) 조애영(趙愛泳)이 내용의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엮은 것이라 한다. 이 사실을 은촌 스스로가 '딸로서 다시 엮었다'고 후기에 밝히고 자신의 저서인『은촌 내방가사집』 자작(自作)작품 사이에 삽입시켰고 한편 더 '애련가'가 10여구도 아니고 200구에 이르는 장편이므로, 은촌 자신의 창작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싶다. 그러나 원작자 이호정은 문장이 유여(有餘)하고 명필이어서 '안내지방'(안 고을지방?)에서 유명했다하며, 은촌이 그 어머니에게서 내방가사를 배웠다고 하니, '애련가'의 원작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은촌의 작품이 많은데 하필이면 이것을 택한 것은 분량이 적당하고, 그 안에 펼쳐지는 옛 혼속도(婚俗圖)의 한 폭이 눈에 보이듯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련가'의 주제는 제목이 말하듯이 '애닯도록 그리워 하는 노래'로서, 그 대상은 유학간 남편을 기다리며 독수공방의 외로움과 슬픔을 호소하는 일종의 '규원가(閨怨歌)'이다. 그 이별이 처음에는 혼례(여기서는 신행가서 시부모께 폐백을 올린 예식을 의미함)를 치른 다음날, 남편이 산사(山寺)에 가서 과거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두 번째는 서울로 과거보러 가서 오래도록 오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처음에는 '수개성상(數箇星象)'이었고, 다음에는 '잔뼈가 굵어 돌아오더니(山寺에서) 이번에는 과거보러가서 편지도 자주 안하고 옷만(인편에) 붙여 오는 그런 이별인 것이다. 아마도 이 가사는 그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총 200구의 장편가사인데 앞부분 3분의 1이 시집올(신행)적인 추상(追想)이고 나머지 3분의 2가 본론인 '애련(哀戀)의 정한(情恨)' 풀이 이다.

(이하 작품 본문은 필자가 현대문으로 고쳤음)

야월삼경(夜月三更) 적막한데 독수공방(獨守空房) 이내신세

뉘를 위해 살아가며, 뉘를 따라 예 왔는고.

우리부모 날 키울제 금지옥엽 같이 길러

남의 가문 보낼적에 눈물짓고 안고나와

오색유리 사인교(四人矯)에 고이 태워 보내면서

라는 내용에서 우선 시집가는 딸을 가마타는 데까지 '부모가(아버지인 듯) 눈물짓고 안고 나왔다'는 대목이 애절하다. 운명적인 이별 순간의 모녀상(母女像)이 비디오라도 보듯이 눈에 떠오른다. '안고 나왔다'는 사실은 아주 어린 신부가 연상되지만 사실은 18세라면 전통사회 혼인풍토로 보면 절대로 어린 편은 아니다. 지금 이 길이 '신행'이라는 사실에서 그 몇날 전인지 혹은 1년전인지 알 수 없지만 초례(醮禮)는 이미 올려놓고 있는 상태이므로 조금 더 성숙해진 나이가 18세인 것이다. 그래서 18세 처녀를 안고 나왔다는 것이 부모 애정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처사인가 했더니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고장 풍속이 크든, 작든, 시집가는 딸을 가마타는 데까지 안고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 따님의 말이다. 다음은 결혼행렬도(結婚行列圖)로 이어지는데 옛날 전통혼례를 그린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한님셋이 말을 타고

가마뒤에 딸케하고

새 신랑은 앞에 소거

상객(上客)손(손님)은 뒤에 따라

바리바리 실은 짐은

신행(新行)가는 의농(衣籠)이라

왈강잘강 방울 소리

동네 사람 부르듯이

간곳마다 구경꾼이…

몰려들어 부끄러움을 참았다는 것이다. 시댁에의 노정(路程)은 '첫날 걸음 60리요, 새날(다음 날) 걸음 30리'라 했으니 90리길, 서로 신분만 상적(相敵)하면 서울에서 강릉으로도 시집가고, 대전에서 서울로도 오는 풍토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차로 몇시간'을 생각하면 안된다. '걸어서'도 어렵지만 여자의 외출은 내외법으로 인해 힘들었던 시절이라 가마 대절이나 개화이후라 할지라도 '인력거값이' 가난한 처지로서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된다. 거의다 가서 5리쯤 남았을 때 신랑측에서 '한님'이 마중나왔다고 했다.

'한님'은 하님(下任)의 족칭, 하인여자를 일컫지만 유독 결혼식 때, 신부를 따라가는 하녀(下女)들을 '하님'이라고 하였다. 이 하님은 '신랑 집에서 마중나온 여인'이라는 사실에서 결혼행렬 참가자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집대청 마루 끝에 가마채가(를) 대자마자

유리영창 주름(주렴, 珠簾)걷고 대려 내다 시피하여

이리저리 끌려가며 대례청에 나갈 준비

초일부터 말이 많고 부산하기 한량없이 이렇게 해서 어른에게 폐백드리기 위한 신부의 장속(裝束-복식)을 고치는 것이다. 연지, 곤지, (여기서는 '월연지'라고 했다.) 머리모양은 첩지머리 댕기매어 큰 비녀로 바꿔꽂았다고 하고 거기에 낭자(娘子)로 목을 눌렀고, 눈을 풀로 붙이는데 눈썹까지 붙였다고 했다. 폐백드리는데 새색시가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불경(不敬)스럽다는 뜻에서이다.

그래서 신부는 좌우하님의 부축으로 절을 하면서 '앞못보는 장님같이 시댁일도 모를레라'고 했다. 또한 수모(手母)는 신부를 대신하여 시부모님께 폐백을 올렸다고 했는데 그 폐백풀이가 재미있다. 시부친께 올린 것은 고기 다져 만든 폐백이며 소주 안주 하시라고 갖은 양념을 다했다고 했고, 시어머니께는 엿폐백을 드렸다고 하며 그 것은 '입다 물고 계시'라는 뜻이라고 했다. 엿을 폐백으로 썼다는 풍속도 재미있거니와 그 의미가 엿이 쩍꺽 붙어서 입을 다물게 한다는 얘기도 기발하다. 원래 폐백의 뜻은 돈가 비단(옷감) 즉, 재물을 말한다. 매매혼(賣買婚)시절의 유습(遺習)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말이지만 며느리가 시부모께 처음 뵙는 인사로 약주와 안주를 드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두 안주는 원래 쟁반(놋)에 담았기 때문에 대추와 밤을 담은 것을 조율반(棗栗盤), 고기를 섭산적해서 담은 쟁반을 단수반( 修盤)이라고 했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단수가 단수(段數)와 음이 같아서인지, 반대어로 바꿔서 하수반(遐壽盤)이라 한 것 같다. 그런데 양념해서 익힌 고기가 아니라 '육포(肉脯)'를 의미한다. ( 은 마른 고기, 修는 생강과 계피, 즉, 생강과 계피로 양념해서 말린 고기, 사슴고기와 쇠고기를 많이 썼다.)

시댁식구가 너무 많아서 눈을 풀로 붙인 상태라 폐백드리다가 신부가 꾸벅꾸벅 졸아서 좌우 하님들이 꾹꾹 찔렀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목이다.

한밤자고 이튿날에 떠날 행장(行裝) 배별상(拜別床)에

비오듯이 솟는 눈물 금치못해 작별이라.

드디어 '애련가'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산도 설고 물도 설고 뉘를 따라 예 왔는고'한탄하지만 (속으로), 초립동(草笠童)이 새서방은 혼자 기뻐 벙글벙글 했다는 것이다. 이 이별은 잠시의 중단은 있었지만 3~4년은 걸린 듯,

남의 딸을 끌고와서 사대봉사(四代奉祀) 맡겨 놓고,

절에 가서 글 공부에 수개성상 보이더니

잔뼈굵어 어른되자 과거보러 서울가서

그 이별기간 동안 지은 가사임이 드러난다. '입던 옷을 부쳐오면 땀내 맡고 울어새웠다'든가 누에쳐서 짠 명주를 거울같이 다듬어서 새옷지어 보냈는데 '그 정성이나 아실른지'했다. 그런가 하면 행여나 바람을 피울까(油頭粉面 찾아가서 허송세월 하시는가) 걱정도 한다.

그리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대담하기 그지없게 육감적 회포도 노정(露程)한다. 즉 자기의 육체가 무르익듯이 성숙돼 가는 데 님은 언제 오시려나 하는 소망과 부디 장원급제(壯元及第)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시라는 간절한 기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밤낮으로 쌓인 회포 엮어보니 졸필(拙筆)이라,

지필묵(紙筆墨)이 없었던들 이내 벗이 뉘가 되며,

공산명월 아니더면 이내속을 뉘 알리요.

라고 끝을 맺었다. 8.15이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자기가 '작가의 딸로서' 다시 엮었다는 실토는 후기에 나와 있다. 기억에 남은 것을 되살렸다 하더라도 일이십구(句)도 아니고 이 장편을 완성시켰다면 그 복원자의 문재(文才)는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자 이호정이 안내지방에서 명필, 명문장으로 유명했다 하니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 할 것이다. 그 따님, 조애영의 실력은 다음 그의 작인 가사로서 볼 수 있다.



□ 귀거래사(歸去來辭)


이 가사는 작가자신이 '결혼생활 40년에 부부지간 억울했던 일, 한심했던 일등을 돌이켜 보고 대강 엮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 우울한 때는 이 가사를 읽어 본다고 했다. 그러나 이같은 완곡한 표현을 하지 않고 현대 젊은 여성들이라면 어떻게 표현할까. '이것은 봉건시절 부자집 아들들의 남존여비적(男尊女卑的) 횡포를 고발한다!'고 쓸 것이다. 나이도 동갑에 이미 결혼 40년이 지났어도 그같은 솔직한 고백을 꺼리는 데에 우리는 '사부(事夫)의 도(道)'라는 '규범(規範)에 묶인 조선조 여인드르이 삶'을 보는 것이다.

돌아왔네 돌아왔네 봄과 같이 돌아왔네

잔디밭에 푸른 싹이 예년같이 돋아나고

담장위에 가시덤불 다시 싹이 돋는 이 봄

이것이 서장(序章)의 머리구(句)이다. 그의 '귀거래사'란 남편이 미국에서 복부수술(腹部手術)을 받고 6년만에 완쾌돼서 귀국하자마자 요양차 고향집으로 온 것을 기점으로 지은 가사이다. 그래서 그 기쁨을

돌아왔네 돌아왔네 우리다시 와서사네

고목 에 꽃피듯이 우리부부 재회하니

가시돋친 이마음에 찔레꽃이 핀듯하다

고 했다. 그리고 정원에 핀 꽃들 칭송, 매미 울음소리 해설- '시집살이 맵다더냐, 고초당초 맵다우냐'라고도 했다. 그런데 실생활로 들어가자 보통고민이 아니다.

임의 식성(食性) 까다로와 산채야채 다 싫다니

육해건물(陸海乾物) 바꿔가며 하루전에 추켜두고

냉동어물 녹기전에 술안주로 회를 떠서

약주상을 먼저들어 취하도록 잡수어야

잔치상이 무사하게 통과된다는 이야기이다. '까닥하면 짜다, 맵다 노발대발 호령이라, 그래서 '일평생'을 같이 사는 '家長 시집살이'가 어렵구나' 새삼스럽게 실감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계절이 여름이라 덥다고 야단해서 선풍기 2대를 양편에서 켜 놓아야 했고 밤에도 '사면 칠야(漆夜) 암실에서 고이 잠이 들어야지', 문소리나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깨는 날이면 큰일난다고 했다.

또 어려운 일은 이 밖에도 밤중에 술상 차리기라고 했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엎어지며, 자빠지며 얼핏 갖다 바쳐야지 꾸물대면 야단난다는 것이다. 그것뿐인가.

추상같은 호령앞에 깨진접시 줍느라고

방구석을 헤매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자기 신세가 말이 아니지만 뛰지도 걷지도 못하니

'무슨 죄가 지중해서 아녀자로 태어났노'

이런 한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시대 여성들의 여난가(女難歌)이다. 또 한번 먹은 반찬을 두 번 다시 싫어해서 한가지를 '하루에'가 아니라 '한철'에 한번 밖에 드질 않아서 솜씨 자랑도 두 번 해 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만일 어제 놓았던 같은 반찬을 보면

첫가락을 휘두르며 반찬그릇 뎅뎅칠 때

말한마디 못해 보고 얼핏집어 너주어야(넣어야?)

되기에 가장(家長)의 위신을 세우는 것으로 자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을 인 자(忍字) 실천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했고 '이내 간장 달달 볶아 누구더라 보라할꼬'하면서 결국 '여자 됨이 원통하다'고 한탄한다. 그밖에도 영감님은 옛날 전제군주(專制君主)같이 철저해서 자기 나이가 60고개를 넘어가는 오늘에도 대문밖에 나간 즉시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五里霧中) 이어서 이 나이까지도 남자의 세계를 모른체로 살아왔다는 술회이다. 이것은 '밖의 일 안에서 모르고 안의 일 밖에서 모른다'는 철저한 남녀유별 사상의 실천이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 옷을 새로 지어 바쳤더니 아침 저녁 갈아 입었는데, 어느때면 말문이 갑자기 막혔는지

손짓눈짓 그것으로 얼핏알아 못들으면

정신 나간 할망구라 소리소리 지르는데

정말 혼이 나가는 듯 심장마비 일겠구나

그래서 속으로 '염천(炎天)에는 영덕 대계(大 ), 엄동(嚴冬)에는 잉어회나 낭군님의 입에 맞아 술안주가 될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결국 이런 가운데 추석은 돌아와서 가족이 다 모여

서로 서로 사랑이요, 장미 같은 사랑이라

돌아왔네 돌아왔네 봄과 같이 돌아왔네

로 끝을 맺는다.


위 여러 가지 남편의 횡포가 작자는 앞에서 '왜정치하 부호아들'이라 이런다고 했지만 '왜정치하'라 함은 시대를 말하므로, 바꿔 말하면 '전통사회'의 뜻이 되겠고 병후라서가 아니라 6년전의 수술 받았다는 사실에서 병자라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부자집 아들의 통성(通性)으로 본 것이다. 60세 부부인데 이러하니 이 영감님은 미국에서 오랜만에 귀국해서가 아니라 일생을 부인에게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많이 배운 부인이라도 구시대의 아내의 남편관(觀)은 규훈류(閨訓類)에 있듯이 '남편은 하늘'이라는 사상에서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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