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계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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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계룡산>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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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조속趙涑, 《조창강화집趙滄江畵集》 중 <추흥秋興>

17세기, 22.4×32.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본래 문인 화가 조속이 중국의 명문을 소재로 하여 그림과 제사題詞를 함께 엮은

《조창강화집趙滄江畵集》 가운데 들어 있다. 창강은 조속의 호이다. 제목으로 보아 구양수의 <추성부抽聲賦>를

모티프로 삼은 듯하다. 다만 가을 산의 풍광을 감상하는 두 인물을 중심에 두었으므로

<추성부> 본래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송상기宋相琦, 「계룡산 유람기遊鷄龍山記」

 

 

나는 전에 벌써 동학사의 이름을 들었지만 한 번도 구경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8월 20일 후에 아우 지경持卿(송상유宋相維)이 환煥 등을 데리고 가서 노닐고는 편지로 그 수석과 암자와 절간의

승경을 알려, 마음으로 더욱 쏠렸다. 중양일(음력 9월 9일)에 귀성을 하고는 그대로 공암孔巖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그곳을 방문하였다. 처음에 동구에 들어서자, 한 줄기 시냇물이 바위와 수풀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혹은 바위에 부딪혀

격하게 튀어 뿜어나오듯 흩어지기도 하고 혹은 널찍하게 깔려서 잔잔하게 흐르기도 하며, 빛깔은 하늘처럼 푸르다.

바위 빛깔도 역시 창백하여 사랑스럽다. 좌우의 단풍나무 붉은색과 소나무의 비취빛은 그림처럼 점철되어 있다.

 

절에 들어서자 계룡산의 석봉이 땅에서 뽑혀 나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삼엄하게 서서는 죽 늘어서 있다.

혹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혹은 사람처럼 서 있다. 절은 뭇 봉우리들 사이에 위치하는데, 면세面勢가 좁고 옹색하다.

절의 앞에는 수석이 아주 아름다워, 매달려서는 작은 폭포가 되고 모여서는 맑은 못이 되었다.

정각암은 절의 뒤에 있는데, 아주 높고도 험하다. 암자에는 서너 승려가 있으며, 선실이 깔끔하다.

상원암이 또 위에 있으면서 절정에 위치해 있다. 계악(계룡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발아래 있다.

동쪽과 남쪽의 두 면에는 일천, 일만 봉우리들이 구름 하늘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시력이 미치지 않아서

어느 땅 어느 산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암자에는 옛날에 지은 것과 새로 지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옛날의 암자 앞에는 쌍탑이 있고, 탑 앞에는 대臺가 있어, 정결하기가 비로 쓴 듯하다. 정감암에서 여기까지

서너 리는 되는데, 물방울이 부딪혀 소리내는 벼랑(빙애砯崖)이 갑자기 뚝 끊어져 걸음걸음 위태롭기 짝이 없어,

등나무 등걸과 칡뿌리를 부여잡고 오르며 가까스로 사람의 발을 디뎌놓게 한다. 한 늙은 승려가 암자를 지키고 있다.

 

쌍탑과 대臺로부터 바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아주 위태롭고 기울어져 있어서 견여를 타고 갈 수가 없다.

한 고개를 넘어 4, 5리쯤 가니, 이곳은 계룡산의 뒷산이 달려가 흩어진 곳으로 산의 형상이 아무 기특함이 없다.

이어서 천장암을 방문하였다. 암자는 돌길이 갑자기 끊어지고는 하여 가까스로 걸어서 지나갈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산의 형세가 조금 내려가고, 암자도 특이한 경관이 없다. 석봉암이 그 아래 있는데, 수석이 아주 아름답다.

맑은 샘이 졸졸 흘러 메아리가 수풀을 뚫고 울려난다. 사찰의 단벽丹碧(단청)이 시내와 골짝에 휘황하게 비춘다.

석양이 산에 걸리자, 보라색과 초록색이 천태만상이어서, 유연悠然하게 돌아갈 뜻을 잊어, 어두운 빛이 가까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적멸암과 문수암의 두 암자가 또 그 위에 있으나, 저물녘이라서 미처 가보지 못하였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사찰로 돌아와 묵었다.

 

초 10일, 아침 일찍 귀명암을 방문하였다. 벼랑을 따라서 작은 길이 있고,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교대로 그늘을

이루고 있다. 가파르게 대치한 봉우리를 하나 건너자, 암자가 계룡산 제1봉의 뒤에 있다. 그 아스라하게 높은 것은

달리 비할 것이 없다. 앞마루에 앉자 기이한 봉우리와 아스라한 벽처럼 막아선다. 손으로 가리키고 돌아보고 하여

눈에 들어 오는 것이 모두 계룡산이니, 그 진면목을 한 번의 조망으로 다 거둘 수가 있다. 일천 수풀과 일만의 골짝

에 단풍잎이 어지러이 흐드러지고 있느니, 정말로 아름다운 경치이다. 암자에는 작은 기문記問이 있다. 숭정갑진

崇禎甲辰(1664, 실제로는 숭정 연호의 갑진년은 없으나 조선에서 명나라 숭정 연호를 계승해 사용했다)에 벽암碧巖

이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오송대五松臺는 서쪽 봉우리의 절정에 있어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으니, 송담松潭(송남수宋枏壽) 할아버지께 노닐면서 감상하시던 곳이다. 지난날에는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

가 되었다. 저녁 늦게 절에 이르러, 그대로 회천으로 향하였다. 이 행차에는 공주목사 정무鄭務 · 영장營將 윤숙尹淑 ·

성환 찰방 송도석宋道錫이 따라왔다. 면천의 종형과 익경翼卿 씨 두 사람도 역시 와서 회동하였다.

 

 

 

 

 계룡산 삼불봉 일대와 상신마을

 

 

 

계룡산鷄龍山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사이에 있는 산.

차령산맥의 연봉으로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다. 주봉 천황봉 845미터에서 연천봉, 739미터 · 삼불봉, 775미터

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볏을 쓴 용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 외에도 쌀개봉, 828미터 · 문필봉,

관음봉, 막적봉, 수정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들이 연속으로 늘어서 있다.

 

 

 

 

 

 

 

 

송상기宋相琦(1657~1723)는  중양절(9월 9일) 계룡산을 유람하고 이 글을 적었다.

그는 송담松潭 할아버지가 노니시던 옛일을 추억하고, 그 덕을 사모하였다. 선인들은 산에 노닐 때, 조상과 친족의

유람 사실을 환기하고 그 덕을 추모하는 일을 잊지 않았는데, 이 글은 대표적인 예이다.

송상기는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 아들로 대대로 회덕懷德(현 대덕구 읍내동)에 거처하였다.

1653년(효종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삼사의 언관을 두루 거치고, 1663년(현종 4) 용담 현령을 지내 후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 후 일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숙종이 즉위한 후 그의 두 스승인

송우암과 동춘당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와 1676년(현종 2) 제월당霽月堂을 지었다. '제월' 이란 그의

선조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가 주돈이周敦頤의 인물됨을 흠모하고 추구하여 북송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높이 평가해 논평하였던 '광풍제월光風霽月' 이란 말에서 취해 온 것이다. 송규렴은 대제학과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 송상기는 다시 독오재玉吾齋를 지었다. '옥오' 란 인상여藺相如의 완벽完壁 고사에서 나온 말로,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玉을 택하겠다는 소신을 뜻한다. 즉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말과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를 담은 말이다. 송상기는 부수찬 때,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파면되었다. 그 후 장씨가 왕비에 오르고 송시열과 외삼촌인

김수항 등이 사약을 받고 죽자 통탄하며 두문불출, 고향에서 6년이나 머물러 있었다. 갑술옥사(1694)로 민비가 복위되자

다시 출사하여 장령 · 사간 · 교리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승지가 되고,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경종 초의 신임사화(1721~1722) 때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사망하였다.

 

계룡산은 당초 조선 도읍의 후보지였을 만큼 길지로 유명한 곳이다.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면 조선 태조가 개국한 후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의지세를 살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에다 정도하였다고 하다.

변계량卞系良(1639~1430)이 1410년에 지은 「조선국朝鮮國 왕사王師 묘엄존자妙嚴尊者 탑명塔銘 병서幷書」

에서도 계룡산과 신도新都 순행巡幸할 때의 일을 기록해 놓았고, 선조 때 정여립의 도참 등을 언급한

《혼정편록混定編錄》 등 계룡산 과 이에 따른 여러 사안이 지금에 전한다.

 

영조 때 회인현감을 지낸 강재황姜再恒은 계룡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계룡산의 꼭대기는 황화黃華라고 한다. 산은 개태開泰에서 부터 서쪽으로 달리고 북쪽으로 꺾이며 동쪽으로 서리고

남쪽으로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물은 황화의 남쪽에서부터 동쪽으로 흘러서 용연龍淵을 이루고 만송萬松의 서북쪽

을 지나 신탄新灘에 이르러 금강錦江으로 들어간다. 지난날 태조 강헌대왕이 천명을 받아 이곳에 국도를 두려고 정한

적이 있어서, 시냇가의 석축과 궁실을 경영한 터에 초석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산은 남북의 요충지를 차지하

여 지세가 편중되고 조운도 널리 할 수 없으므로, 한산(북한산)이 임진강을 등지고 한수(한강)를 향함으로써 땅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서 사방으로부터 공물을 올릴 때 노정이 균일하여 운수하기 편한 것만은 못하다. 태조가 한양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성군의 마음(두뇌)을 틔워주어 자손만대토록 뽑히지 않을 기틀을 만들도록 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황하의 서쪽은 금선대金仙臺로, 금선대의 북쪽에는 뭇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바위가 모두 백색이므로

설봉雪峯이라고 한다. 설봉의 동쪽은 오송대五松臺로, 고려 승려 나옹懶翁이 솔씨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설봉의 서쪽은 사련四連으로, 하늘에 잇닿아 있는데, 오송대의 경승이 가장 뛰어나다. 사찰로는 마명馬鳴 · 귀명歸命 ·

북사자北獅子 · 상초암上草庵  · 군장신원軍藏新院  · 동학東鶴  · 갑사甲寺 등이 있다.

 

 

대개 계룡산의 지세를 칭송하면서도, 국방과 조운의 관점에서 볼 때, 한양만 못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지세를 논할 때에는 생활의 측면을 더욱 고려하여야 함을 잘 알 수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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