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덕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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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유람록 <덕유산>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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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훈林薰,  「덕유산 향적봉 등정기登德裕山香積峯記」

 

 

 

정축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개가 잔뜩 끼어 산을 묻었고, 비 올 기세가 일어났으므로,

산에 올라 구경할 방도가 없었다. 성통性通 등은 비가 오기 전에 곧바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여러 날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봉우리 위에 오르려는 것이 내 뜻이네."

저녁 무렵에 구름의 음울한 기운이 흩어져 없어지고, 하늘의 햇빛이 먹장구름을 뚫고 새어 나왔다.

나는 내일 날이 완전히 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성통은 말하였다.

"산에서는 날이 늘 어둡습니다. 이런 정도면 족합니다.

내일 구름과 안개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침내 신발을 챙겨서 올라갔다. 혜웅惠雄에게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였다.

2리쯤 가서 산등성이에 이르렀고,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1리쯤 가서 봉우리 머리에 이르렀다.

암석이 무더기를 이루었고, 작은 돌로 틈새를 메워 마치 제단처럼 해두었다.

위에는 철마鐵馬와 철우鐵牛가 있으나 신주는 없었다. 혜옹은 말하였다.

"이것은 옛날 천왕당天王堂입니다. 천왕의 신이 처음에는 여기에 머물렀죠. 철물은 그때 둔 것입니다.

이 봉우리가 인간의 거처와 아주 가까우므로 지리산 상봉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고 널찍하며 두터웠다. 소요하면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니 이곳이 산꼭대기인 줄 모르겠다.

천왕당 앞에는 땅을 파서 오물 버리는 못을 만들어 두고 돌 벽돌로 에워쌌는데, 세월이 오래되서 못은 묻히고 말았다.

서쪽으로 안성소安城所가 내려다 보이는데, 밭과 들, 마을과 점사가 마치 무릎 아래에 있는 듯하다.

헤웅이 말한'천왕이 머물지 않았다' 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동쪽으로 큰 골짝에 임해 있다.

어제 건넌 삼계三溪가 합류하는 곳이다. 혜웅이 말하였다."이곳은 이른바 구천둔곡九千屯谷입니다.

지난날 이 골짝에는 불공을 이룬 사람이 구천 명이라서 그리 이름하죠.그 터는 어딘지 모릅니다.

간에서 말하듯 '산신령이 숨겨두어 보이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그러데 그 터의 동쪽에는 지봉池峯이 있고

남쪽에는 계조굴戒祖窟이 있으며 북쪽에는 칠불봉七佛峯이 있고 서쪽에는 향적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곡 안을 벗어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으니, 기괴하죠."

 

이른바 계조굴이라는 것은 백암白岩의 북쪽에 있는데, 바위 집이 큰집 하나를 들일 만하다.필시 계조가 거처하였

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을 것이다. 경사冏師가 하향적下香積에 거처하면서 늘 말하길"이곳이 구천둔 터다" 라고 하였다.

지금 이 계곡이 비록 으슥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자취가 이른 곳이므로남모르게 숨을 곳이 없다. 옛날의 일설에 이른

바 "사방의 자취는 다르지 않다" 라고 하였는데, 경사의 설이 옳을지 모른다. 삼계의 위쪽으로는 적목赤木이

대부분 이어서 올라갈수록 숲을 이루어 봉우리 밑에 이르극성하다. 이 나무는 몸뚱이는 붉고 잎은 노송나무

같으며, 크기는 서너 아름쯤 된다. 가지와 줄기가 기괴하고 구불구불하니, 평소 못 보던 것들이다.

이 봉우리는 이 산의 최상봉이어서, 황봉黃峰과 불영봉佛影峰 등이 모두 대적할 수가 없다. 나는 말하였다.

 

"등람登覽은 반드시 그 요령을 얻어야 하오. 어찌 먼저 이 산을 보고 다음으로 동남쪽을 보고

다음으로 서북쪽을 보아서 그 지세를 상세히 살피지 않겠소?"

혜웅이 아주 상세하게 차례차례 말하였다.

이 산의 뿌리는 조령鳥嶺에서 속리俗離를 거쳐 직지直指를 지나 대덕으로부터 초재의 서쪽에서 이르러 솟아

나서 거창의 삼봉이 되니, 곧 이 산의 첫 번째 봉우리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뻗어가서 대봉臺峯이 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서 지봉池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서 백암봉白巖峯이 되고 서쪽으로 뻗어서 불영봉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서 황봉이 된다. 백암으로부터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이 봉우리가 된다. 이 봉우리가

가장 높고 황봉이 다음이며, 불영봉이 또 그 다음이다. 이것이 이 산의 대강이다.

 

이 봉우리로부터 북쪽을 달려서 예현曳峴이 되고, 또 북쪽으로 가서 무주茂朱의 상성산裳城山이 되어

산세가 다한다. 상성산은 도징道澄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봉우리에서 반 舍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거늘

도징이 속세의 굴레를 못 벗어나서 나의 초청을 사절한 것이 한스럽다. 그의 거처를 바라보면서 그에 관해

거듭 말하였다. 산세는 예현에서부터 서쪽으로 내달려서 용담龍潭의 고산鼓山에 이르러 다한다.

또 예현에서부터 동쪽으로 내달려서 칠불봉이 되며, 횡천橫川에 이르러서 다한다. 삼봉으로부터 북쪽으로 

달려서 육천에 이르러 다 한다. 그 동쪽은 무풍현茂豊縣이고, 그 서쪽은 횡천소橫川所이다. 지봉으로부터 

북쪽으로 달려서 횡천에 이르러 다한다. 이것이 산의 북쪽이다.

 

대봉臺峯에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갈천葛川 · 황산黃山· 무어리無於里 · 진산鎭山이 된다.

무어리로부터 북남쪽으로 달려서 악천惡遷 고성봉古城峯이 되어 그친다. 동쪽은 거창현이다. 서쪽은 안음 영송촌이다.

백암白巖에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갈천 사라봉에 이르러 그친다.  불영봉에서부터 남쪽으로 달려 월봉이 된다.

또 동쪽으로 달려서 금원산金源山 · 황석산黃石山 등의 산이 된다. 황석산에서 동남쪽으로 달려서 함양咸陽 사근성

沙斤城이 되어 그친다. 또 월봉에서 남쪽으로 달려서 안음安陰의 산성山城이 된다. 이것이 이 산의 남쪽이다.

삼봉의 동쪽은 거창居昌에 속한다. 황봉의 서쪽은 장계長溪에 속한다. 이것이 이 산의 동쪽과 서쪽이다. 

그 가지 봉우리와 손자뻘의 골짝은 가로로 세로로 뒤얽혀서, 일어서서는 봉우리를 만들고 물을 흘려서는

전야를 이루었다. 혹은 접첨접첨 주름처럼 감추고, 혹은 두각처럼 드러낸다.

그러한 형상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무릇 이 산은 남쪽은 안음安陰이 전적으로 근거하고 북쪽은 안성安城과 횡천橫川이 전적으로 근거하되, 

이 봉우리는 안성에 속하니 곧 금산錦山 땅이다. 안성과 횡천은 금산에 속하되, 그 사이에 무주현이 하나 있어서

사이를 벌려 놓아서, 명주실이나 머리칼처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기괴하나. 멀리서 바라보면 선산善山의

냉산冷山과 금오金烏 · 대구의 공산公山 · 성주星州의 가야伽倻 · 현풍玄風의 비슬 · 의녕宜寧의 도굴 · 삼가의 횡산 ·

거창의 감악 등이 그 동쪽에 뻗어 있고 , 지례의 수도가 가야 안에 있다. 사천의 와룡, 진주의 지리 · 구례의 반야봉이

그 남쪽에 뻗어 있고, 함양의 백운이 반야봉 안에 있고, 입괘산이 지리산 안에 있다. 순천의 대광산 · 진안의 중대 ·

금구의 내장 · 부안의 변산 · 전주의 어이 · 임피의 오성과 함열의 함열 · 용담의 주즐 · 임천의 보광 · 청홍의 성지가

그 서쪽을 에워싸고 있으며 용담의 고산이 주줄산 안에 있다. 고산의 대둔산과 용계 · 공주의 계룡 · 옥천의 서대 ·보

은의 속리 · 상주의 보문 · 금산의 직지오 갑장이 그 북쪽에 비껴 있다. 그리고 금산의 진약이 계룡산 안에 있고, 옥천

의 지륵이 서대의 안에 있으며, 황간의 아산은 속리산 안에 있고, 지례의 대덕은 직지산 안에 있다.

 

혜웅과 빙 둘러 바라보면서 위와 같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켜 보았다. 나는 표질 이칭李稱에게 붓에 먹을 묻혀

적도록 시켰다. 산의 바깥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겹겹이 모여 있고 첩첩히 비껴 있어서

조금도 틈새가 없는데, 혜웅이 변별한 것은 이와 같았을 따름이고, 기록한 것은 그 3분의 1에 불과하다.

먼 산의 바깥에 비록 다시 산이 있기는 하지마 구름과 남기가 비껴서 흐릿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잘 살펴 보았으나,

그 형태가 곧 변하였다. "이것은 과연 구름이구나.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산이다.

하물며 그 이름과 땅을 분별하였음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곧바로 서쪽으로 바라보니, 오성의 남쪽, 임피의 북쪽은 구름과 안개가 평평하게 깔려

혹은 얕기도 하고 혹은 깊기도 하며 혹은 푸르기도 하고 혹은 희기도 하였다 혜웅은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옥구의 바다입니다. 해가 기울면 바다색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구름과 안개가 높이 걷혀 하늘 끝이 드넓게 펼쳐지고 땅의 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방의 산이 모두 은폐되어 있을 수 없되, 유독 지리산의 천왕봉만이 구름 속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으니,

지리산이 뭇 산들 위로 높이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처하는 곳이 높으면 바라보는 곳이 먼 법이다.

시야가 다하여서 더 시상 명확히 볼 수가 없었으나, 유독 가야산의 청수淸秀함과 금오산의 우람한 모습만은

시선을 뻗어 거듭 바라보면서 옛분들에 대한 초모의 상상을 오랫동안 하였다. 대개 최학사(최치원)의 풍모와

길태상吉太常(길재)의 절의는 마음으로 늘 흠모하여 우러러본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서성이면서 우러러 보느라 해가 저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혜웅은 "산길이 험하고 비스듬하므로, 깜깜해지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내게 돌아서 내려갈 것을 재촉하였다.

 

 

 

 

 

 

 

덕유산 德裕山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위치한 해발고도 1,614미터의 산.

향적봉을 주산으로 삼고 무풍의 삼봉산(1,254미터)에서 시작하여 남덕유(1,508미터)에 이르기까지

장장 100리 길의 대간을 이루며 영남과 호남을 가른다. 북으로 가깝게는 적상산을 아래로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운장산 대둔산 남쪽은 남덕유를 앞에 두고 지리산 주능선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가야산 금오산이 보인다.

 

 

 

 

 

 

이 글에서 덕유산에 올라 승려 혜웅이 지세를 설명한 부분은 얼핏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또 그 긴 이야기를 혜웅이 말하였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다.

지세를 논한 서술이 없다면 덕유산의 지세는 알 길이 없다. 정확한 서술이 덕유산의 지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임훈林薰(1500~1584)은 1552년(명종 7, 임자) 중추 그믐에 「덕유산 향적봉 등정기」를 작성하였다.

그에게 덕유산은 고향의 진산이며 자기 집의 뒷산이다. 어릴 때 산방으로 책 상자를 지고 가서 공부한 이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임훈은 경상우도 안음安陰에서 기반을 구축한 사림파 지식인으로 아우 임운林云(1517~1572)과 함께 효성으로

유명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명종 연간에 육현六賢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었다. 임훈과 임운 형제는 정여창의

학문을 사숙하여 산림에서 수양을 쌓았으며 이후 조식과 교유하면서 사회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1540년 생원시

에 합격하여 사직서참봉과 군자감주부 · 광주목사 · 장악원정 등을 지낸 후 1582년 장예원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길렀다. 그가 마학동에 열었던 서당은 당초 중산 마을에 있다가 갈계리로 옮겼으며

이후 경상우도의 주요한 학문 전당이 되었다.

 

덕유산의 상봉은 황봉黃峯 · 불영봉佛影峯 · 향적봉香積峯이다.

그는 어려서 영각사靈覺寺에 묵으면서 황봉에 올라보았으나 향적봉은 오래도록 올라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임자년 중추에 아우 언성彦成과 효응孝應이 두류산 유람을 떠나려고 약속하자, 자신은 쇠약하여 함께

하지 못하고, 삼수암 승려 혜웅, 성동性通 그리고 무주 상성산 승려 도징道澄과 함께 향적봉에 오르기로 하였다.

언성과 효응은 두류산 유람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도징은 오지 못하였으나 임훈은 음력 8월 24일(갑술)에 표질

이칭李稱을 데리고 탁곡암卓谷庵으로 가서 삼수암 승려들과 모였다. 이튿날 25일(을해) 탁곡암 승려 옥희玉熙와

인선一禪에게 행구를 갖추게 하고 성통에게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해인사解印寺 터, 지봉의 서쪽 허리춤, 향적봉

의 세 번째 시내, 두 번째 시내, 첫 번째 시내, 향적암 터에 이르고, 향적암의 동쪽에 있는 판옥에 묵었다. 다음날 26일

일출을 보고, 수풀 사이에 소요하고 채소를 뜯으면서 시내에서 탁족을 하였다.

저녁에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올까 봐 염려하였다.

 

그 다음 날 27일(정축)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비가 올 듯하였으므로 성통은 비가 오기 전에 하산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저녁에 구름 기운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산에 올라 멀리까지 조망하였다. 윗글은

바로 27일(정축)에 등람한 기록이다. 28일(무인) 지봉에 올랐다가 저녁에 탁곡암으로 왔다. 29일(기묘)에 하산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 언성 등이 산놀이에서 얻은 바를 묻기에 임훈은 그믐말 갈계의 자이당自怡堂에서

유람록을 썼다. 임훈은 덕유산이 유명한 이들의 자취가 닿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기되, 산의 유람은 남의

자취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관을 발견하여

자기 마음에 얻는 바가 있으면 족하다고 하였다.

 

 

이 사의 청고淸高함과 웅대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가되, 세상에서 망혜와 죽장을 갖추어 등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두류산과 가야산을 언급할 뿐 이 산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산들은 옛 현자들이 남긴 풍모와 지난날의

자취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하게 만드는 것이 그러하거늘, 이 산은 아직 그런 현자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애당초 이 산이 볼 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사물이란 저절로 존귀한 것이 아니라" 조비曺丕가

말하였듯이 "사람에 의해서 존귀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적절한 사람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 하는 것이 어찌 산에 중요한 문제이랴. 진실로 산의 승경을 보아 마음에 얻는 바가 있다면

어찌 반드시 다른 사람이 남긴 자취에 의존할 필요가 있겠는가. 세상에서 그저 다른 사람의 자취를 따를 뿐이고

산의 승경은 버려두는 것은 잘못이다.

 

 

임훈은 덕유산에 옛 어진 이의 유적이 없다고 하였으나

이 산에는 실은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자취가 있다.

정온은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김상헌金尙憲(1570~1652)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서 5년 후에 죽었다.

또한 덕유산을 사랑한 인물로는 허목許穆(1595~1682)이 있다. 허목은 23세 되던 1617년(광해군 9, 정사)에 부친의 

임지인 거창에 있으면서 모계茅溪(1555~1632)를 따라 공부하였고, 용주龍州 주경趙絅(1686~1669)과 서로 어울려

지냈다. 이 무렵 그는 성주星州로 한강寒岡 정구를 찾아가 뵙고 스승으로 섬겼으며 그로써 훗날 정구로부터 허목으로

이어지는 남인의 학맥을 확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허목은 덕유산을 유람하고 「덕유산기德裕山記」를 지었다.

 

 

남방 명사의 절정으로는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다. 구천뢰九千磊 위에 칠봉七峯이 있고 칠봉의 위에 향적봉이 있다.

산은 감음感陰 · 고택高澤 · 경양景陽의 서너 고을 땅에 있다. 곧바로 남쪽으로 천령 · 운봉이 천황산 절정과 맞서

있으며, 열 지은 봉우리와 안개 노을이 300리에 걸쳐 뻗어 있다. 봉우리 위에는 못이 있고, 못가에는 흰 모래가 깔려있다.

그 나무는 기이한 향을 많이 뿜는데, 겨울에도 푸르고 몸통이 붉으며 잎은 삼나무 같다. 높이는 서너 장丈에 달한다.

맑은 못과 깨끗한 모래밭 위에는 수목이 깊어 신이한 향이 난다. 산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감음에서부터

촌천渾川을 거쳐 구천뢰까지로, 60리이다. 또 하나는 경양에서부터 수력水䃯을 거쳐 사자령에 올라 이르게 된다.

 

 

한편 이만부(1664~1732)는 무풍의 상산으로부터 덕유산 동쪽을 유람하고 「덕유산기」를 지었는데,

덕유산의 지세에 대해서는 허목과 같은 말을 하였다.

 

 

1566년 전국에 기상이변이 있자 명종은 뇌물의 횡행, 수령의 약탈, 백성의 위무와 안집, 부역의 균등이

시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시정 방안을 널리 구하였다. 1567년(명종 22) 언양현감으로 있던 임훈은 민본사상을

토대로 하여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할 수 있다는 대민관을 제시하였다. 조선왕조실록(국역본)에서

그의 상소 일부를 취한다.

 

 

<시경>에 "나무가 넘어지려면 뿌리부터 먼저 뽑힌다." 고 하였습니다. 저는 뿌리부터 먼저 뽑히는 일이 언양현에서

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언양헌의 쇠잔함은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심합니다. 지금에 있어서 예사로 보아 일반적

으로 논해서는 안 됩니다. 예사롭지 않은 병을 치료하려면 반드시 예사롭지 않은 약을 써야합니다. 언양현의 폐단을

구제함은 또한 지난날의 에사로운 대책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역>에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탠다" 는 교훈

이 있고 <서경>에는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해진다" 는 훈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뢰는 바가 비록 백성

을 우선시하고 국가는 뒤로하는 것처럼 언뜻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따라 의도를 살펴보면 또한 결과적으로 위를

보태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무릇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쇠잔하게 만드는 경우에 대해

서는 옛사람이 갖옷을 뒤집어 입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이 말은 가죽도 보존하고 털도

보호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송나라의 신하 범조우는 "한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백성의 가난은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숨겨 둔 재산이 있는가 의심하여 착취를 그치지 않거나, 백성의 노고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남은 힘이 있는가 의심하여 부리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는 망하는 도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언양현 백성의 경우 재물은 이미 바닥이 났고 힘도 벌써 다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착취는 그치지 않고, 사역 또한 끝이 없으니,

아! 누가 정협鄭俠의 <유민도遊民圖>를 올려 전하께 한 번 보일 수 있겠습니까.

 

 

임훈은 백성에 대한 착취와 부역을 그치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야는 넓고 깊었다. 그것은 그가 평소 사물을 깊고 넓게 보아왔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점은 덕유산 등람에서 멀리까지 시야를 뻗어 지세를 상세히 논하였던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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