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수련법과 검가(劍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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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수련법과 검가(劍歌)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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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원 선도사

(사)동학민족통일회상임의장

 

 

 

 

 

 

 

 

 

 

 

강사 약력 소개

 

 

 

 

 

 

 

 

동학(東學) 수도법(修道法)

 

1. 좌법(坐法) : 궤슬단좌(跪膝端坐)

 

무릎을 꿇고, 허리는 곧추세우고, 턱은 당기고, 혀 끝은 입천장에 가볍게 대고,

어깨의 힘을 빼고, 얼굴은 긴장을 풀고 가벼운 미소를 띤다.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허벅지 위에 살짝 올려놓고 노궁(손바닥 정중앙)에 집중한다.

 

2. 구송(口誦)

 

① 강령주문(降靈呪文)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 

※ 빠르게 소리내어 읊는다.

 

3. 심송(心誦)

② 본 주문(本呪文)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思知)

※ 마음 속으로 읊는다.

 

4. 합송(合誦)

③ 3.7자 주문(강령주문 + 본주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 다 함께 4.4조의 박자로 빠르게 소리 내어 읊는다.

 

 

 

 

선비가 또 물었다.

"주문, 주문 하고 말씀하신은데, 주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오니이까?"

나는 대답한다.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공경하는) 글자를 가리키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주呪(divine chanting)라는 형식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주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글에도 있는 것이요, 옛글에도 있는 것이다."

(※ 여기서 '금문今文'  '고문古文'이라 하는 것은 한나라 때 생겨난 금 . 고문 경학의 문제와는 상관 없다.

그냥 예나 지금이나 주문divine chanting이라고 하는 것은 있었다는 뜻이다.)

 

선비가 또 물었다.

 

"강령지문降靈呪文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어찌하여 그렇게 지어진 것이오니이까?"

 ※ 여기서 '강령지문'이란 '영이 내려와 접신케 만드는 주문' 이라는 뜻인데 21자 전체를 가리키는일반명사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수운의 설명은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나누어 이야기하지 않고 21자 전체를 한 큐에 해설해

내려가고 있다, 이 해설이야말로 천하의 명문이요, 이를데 없는 지고한 사유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나는 21자 주문 전체를 해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至」라고 하는 것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뜻이다.「氣」라는 것은 허령虛靈하지만 창창蒼蒼하고,

매사에 교섭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사태에 기의 명령이 간여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형체는 있으나

그것을 형용하기는 어렵고, 들리기는 하나 그것을 직접 목도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적 견문의

인식체계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혼원渾元의 일기一期를 가리키는 것이다.

※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라는 것은 코스모스의 원형인 카오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혼이위일混而爲一' 이나

'유물혼성有物混成'  장자가 말한 '혼돈渾沌'  열자가 말하는 '혼륜渾淪' 과 상통하는 말이다. 수운은 코스모스의 질서 이면에

배어있는 카오스적인 혼원지일기의 홀리스틱한 생명력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것을 하느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지今至」라는 것은 우리 도에 들어와서 나의 몸에 지극히 허령창창한 혼원지일기가

접신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원위願爲」라고 하는 것은 청축請祝(청하여 빈다. ....이 되기를 원한다) 의  뜻이다.

※  '기화'는 내 몸의 기가 하느님의 기로 화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역으로 하느님의 기가 내 몸의 기로 화한다는

뜻이다. 맑고 깨끗한 하느님의 기로 내 몸을 바꾼다는 뜻이다. 표영삼 선생님은 비유하자면 창문을 열면

청명한 기운이 내 몸으로 스미는 것과도 같다고 세미나 도중에 말씀하셨다.

 

「시侍」라고 하는 것은 '받는다' '모신다' 는 뜻인데 그 궁극적 의미는 내 몸 안으로는 신령神靈이 있고, 내 몸

밖으로는 기화氣化가 있으니, 이렇게 모든 존재가 상호교섭되는 세계에 있어서는 당대를 사는 모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각자 깨닫는다는 뜻이다.

※ 어느 누구도 여기 구문의 '각지불이各知不移'를 명료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移' 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매우 소박한 의미이며,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소외Estangement, Alienation' 와같은 의미이다.

 

「주主」는 '님'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존경의 칭호를 붙임으로써

부모님 처럼 똑같이 섬기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것은 아마도 모든 종교학의 교과서가 되어야 할 명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 부분은 '하느님' 즉

천주天主를 해설하는 대목인데, 수운은 '천주天主' 에서 '천天'을 빼놓고 있다. 즉 천은 해설이나 언어적 규정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천을 해설한다는 것은 수운이 말하는 종교체험 그 전체를 어느 특정한 제도

종교적 틀 속에 가두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은 언어적 규정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천지라는

싹의 하나로서의 천이 아니다. 그것은 도가도비상도道可度非常道처럼, 항상 열려 있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천이다. 단지

수운이 하느님을 '님' 화 한 것을 해설하고 있는데 '하느님'이란 하늘을 님화 한 것인데, 이것은 서양종교가 말하는 인격신

화人格神化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말하고, 어머니를 어머님이라 말하듯이, 부모처럼 친근하게

느껴보고 싶다는 그 느낌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있어야 진정한 '섬김'이 가능하게 된다. 수운에서

서구적인 초월적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지자연 속에 내재하는 생명력을 '님화' 하는 것은 종교적 경건성의

제1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군림하는 초월자만 '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산천초목의 모든 존재 그 자체가 [하이데가가

말하는 자인Sein] 님이 되는 것이다. 꽃님, 나비님, 햇님, 달님처럼, 그들은 나의 부모처럼 느끼고 섬길 때 '시천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님'은 단순히 초월자에게만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를 포섭하는 융합적인 것이다.

이 수운의 메시지는 앞으로 인류의 지고한 이상이 될 것이다.

 

「조화造化」라는 것은 무위이화貿爲而化이다.

※ '무위이화'라는 것은 조적적인 인위성에 의존하지 않고 함이 없이 스스로 화한다는 의미인데, 앞서 말했듯이

문자 그대로 창조하고[조造] 변해가는[화化] 우주의 프로세스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조화는 대자연의 조화가 있는가 하면

또 동시에 내 인생의 조화, 즉 천天과 인人의 양면이 있다. 주문의 주체는 아무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삶의 방향성과

관련하여 이 '조화'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다.

 

「정定」이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다' 라는 말인데, 그것은 내 존재의 덕성이 하느님의 덕과 합하여지고,

또 내 마음을 바르게 하여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여기 "정기심正其心" 은 경진초판본을 따른 것이다. "정定" 의 해석을 논하는 문장 속에서 "定"이라는 같은 글자를

반복할 이유가 없다. "正"이 더 적합한 글자이다. 이 초판본의 正이 목천판에서 定으로 잘못되었고 그 뒤로 모든 판본에

 "定"으로 되어 있다. 두 세기에 걸친 오류가 이제 바로 잡히게 된 것이다. 초판본의 가치는 의심할 바 없이 소중한 것이다.

여기 "합기덕合其德"을 말한 것은 《주역》 「문언」에서 대인을 언급할 때, "부대인자夫大人者,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 이라고 했는데, 그 대인의

특성을 말한 것을 빌어, 여기 "조화정"의 "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천주를 모시게 되면 조화가 정해진다는 의미는,

내 삶의 방향이 대인처럼 "여천지합기덕" 하게 되어 정해진자는 뜻이다. 이상적인 헌인합일의 방향으로 내 삶의

가치가 전환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정기심正其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세永世」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한평생을 말하는 것이다.

※ 기독교의 '영생'이니 '천당'이니 '영원'이니 하는 엉터리 없는 과장이 수운에게는 없다. 너무도 소박한 시간관이다.

영세 즉 Eternity라는 것도 사람의 한평생이면 족하다. 사람이 한평생 위대한 삶을 살게 되면 영원한

위대성이 영속되는 것이다. 한평생은 다음 세대의 한평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불망不忘」이라는 것은 한평생 잊지 않고 생각이 난다는 뜻이다.

※ '영세불망'이라는 거창한 듯 보이는 말에 대한 수운의 소박한 해설은 진실로 충격적이다. 영세불망이란 영원한

존재성[불멸]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평생 기억된다'는  뜻이다. 정말 내 존재가 한평생 내 아내에게 기억된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사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종교적 진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진실로 한평생이라도 하느님을

내내 잊지 않고 살았다면 나는 위대한 종교적 실천을 한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의 요청인

영혼불멸을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대재 수운

 

「만사萬事」라는 것은 '모든 일'인데, 이것은 숫자가 많다는 단순한 의미이다.

「지知」라는 것은 '만사를 알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정도正道를 정확히 알고,

그 아는 바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아! 이로서 일단 '천天'을 제외한 21자의 모든 해석이 끝났다. 이것을 총괄해서 말한다면

밝고 밝은 하느님의 덕성(명명기덕明明其德'은 《대학》 1장에서 따왔다)을 순간순간 늘 잊지

않고 생각하면 지극히 맑고 깨끗한 하느님의 기로 내가 화化하는 데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지극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21자 주문의 총결론이 신선이 되거나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되는 것이다. 유학은 우리 배움을

'위성지학爲聖之學'이라 규정했다. 즉 성인이 되고자 하는 배움이라는 뜻이다. 율곡도 《격몽요결》에서 배운다는

것은 뜻을 세운다는 것이며[입지立志], 뜻을 세운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동학의 최후결론은 '지어지성至於至聖'인 것이다.

이 이상의 위대한 아폴로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수운은 결국 유생들의 모함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성인지덕화聖人之德化

 

천지의 도를 밝히고 음양의 이치를 통달하여 억조창생으로 하여금 각각 그 직업을 얻게하면

어찌 도덕문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성인의 덕행은 춘풍태화의 원기가 초목군생에 퍼짐과 같으니라.

한울님은 마음이 있으나 말이 없고, 성인은 마음도 있고 말도 있으니, 오직 성인은 마음도 있고 말도 있는 한울님이니라.

아이가 난 그 처음에 누가 성인이 아니며, 누가 대인이 아니리오마는 뭇 사람은 어리석고 어리석어 마음을 잊고 잃음이 많으나, 성인은 밝고 밝아 한울님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언제나 성품을 거느리며 한울님과 더불어 덕을 같이하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크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화하나니, 천지가 하는 바를 성인도 할 수 있느니라.

성인의 교화는 가물던 한울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아서 만물이 각각 스스로 기쁘게 번영하고, 성인의 절개는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와 같아서 홀로 봄빛을 띠고, 성인의 법도는 가을 서리같이 엄숙하여 만물이 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성인은 세상 사람에게 항상 온화한 기운으로 덕성을 베풀어 훈육하나니, 거듭 일러 친절히 가르치고 돌보고 돌보아 알아듣게 타이르고, 가혹하게 꾸짖는 말씀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느니라. 성인의 덕화는 자기를 버리어 사람에게 덕이 되게하고, 세상 사람의 사사로운 마음은 자기만 이롭게하고 사람을 해롭게 하느니라. 요순의 세상에 백성 이 다 요순이 되었다 하나, 백성이 어찌 다 요순이 되었겠는가. 이것은 요순의 덕화속에 훈육되었기 때문이니라. 

 

 

 

 

 

성범설聖凡說

 

사람이 묻기를「성인과 범인이 특히 차별이 있습니까.」

대답하시기를「한 나무에 꽃이 피니 꽃도 같은 색깔이요, 한 꼭지에 열매가 맺혔으니 열매 또한 같은 맛이라.

성품은 본래 한 근원이요, 마음은 본래 한 한울이요, 법은 본래 한 체이니 어찌 성인과 범인이 있으리오.」

 

묻기를 「성인은 밝고 범인은 어리석으니 어찌 차별이 없습니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성품은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고, 마음도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고, 몸도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으나, 그러나 다만 이 마음을 쓰는데 작은 차별이 있으니 성인은 내 성품을 물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을 변치 아니하고, 내 도를 게으르게 하지 않는지라,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하나라도 거리낌이 없으며,

마음을 가지고 도를 쓰는데 선이 아니면 행치 아니하며, 바른 것이 아니면 쓰지 아니하며, 옳은 것이 아니면

행치 아니하며, 밝은 것이 아니면 하지 아니하느니라. 범인은 내 성품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도를 내가 알지 못하여,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스스로 외도를 쓰며 악을 행하고 패도를 행하며

정의가 아닌 것을 행치 않는 바 없느니라.」

 

묻기를 「성인과 범인의 성품과 마음이 한 체에서 나타난 것이라면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어찌 가히 다름이 있다고 말합니까.」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태어난 그 처음에는 실로 한 티끌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다만 보배로운 거울 한 조각을

가진 것 뿐이라, 허공에 도로 비치우니 왼쪽 가에 한편은 여여적적하고 바른쪽 가에 한편은 티끌이 자욱하고

자욱하니라. 그 두 사이에 살면서 비로소 위위심이 생기었고, 위위심이 비로소 생기니 천지가 생기고,

세계가 생기고, 도가 또한 반드시 생기었느니라.」

 

고금의 현철이 다만 이 한마음으로 항시 쉬지 아니하고 오래오래 끊기지 아니하며 천지만물을 다 위위심두에

실었으나, 범인은 위위심이 없어 다만 오늘 보는 것으로서 오늘 마음을 삼고, 또 내일 보는 것으로서 내일 마음을

삼아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자기 천성의 소관 아님이 없으나 본성의 본래를 알지 못하고, 모든 일이 자기 마음의

소관 아님이 없으나 자기 마음의 용도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범인의 마탈심이니라.

성품은 본래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으나, 그러나 마음을 쓰는데 반드시 어질고 어리석음이 있느니라. 

 

성인의 위위심은 곧 자리심(스스로 이로운 마음)이니 자리심이 생기면 이타심(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고, 이타심이 생기면 공화심이 저절로 생기고, 공화 심이 생기면 자유심이 저절로 생기고, 자유심이 생기면

극락심이 저절로 생기느니라. 

 

범인은 마탈심이 한번 생기면 한 몸이 반드시 망하고, 한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한 세상이 반드시 망하고,

천지가 반드시 망하나니, 사람은 마탈심을 두지 말것이요, 위위심을 잃지 말 것이니라.

 

 

 

 

 

 

 

 

 

 

검가 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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