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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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기록의 역사 (1)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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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조(AD 960~1279년) 시대의 학문적 주석으로 완결되어 있다.

 

 

역경

I Ching · 중국 철학의 전형 

기원전 2800년

 

8괘卦와 64괘의 문양을 사용하여 점괘를 뽑고 이를 음양의 원리에 따라 해석해

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했다.

학자들은 이 책을 중국 철학의 전형으로 여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호북성 곽점郭店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죽간본으로, 상하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서양인들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경》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1830년 독일에서 처음 라틴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죽간은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역》이다.

 

 

변화는 《역경》의 이면에 놓인 핵심 개념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이 가면 변하기 마련이고, 《역경》은 음양의 차원에서 그 변화를 규정한다.

음은 부정적이고 어둡고 여성적이며, 양은 긍정적이고 밝고 남성적이다. 또한 모든 변화를

음양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둘이 균형을 이룰 때 조화롭다고 전한다.

 

《역경》은 해당 행동이 행운을 가져다줄지를 알려주지만, 점서는 아니다.

이 책은 "큰 빛이 발하기 전에는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출중한 사람은 큰일을 도모하지만

군중 속에서는 어리석어 보이기 마련이다." 처럼 인생의 부침에 관한 기본적인 교훈을 전한다.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 · 법치 정의를 향한 더할 수 없이 깊은 의지

 기원전 1754년

 

 

 

 

회색 현무암으로 된 높이 2.25미터의 돌기둥은 커다란 검지 형태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바빌론에 세워졌다.

비석의 상부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함무라비 왕이 왕좌에 앉아 법과 정의와 구원을 관장하는 메소포타미아의 神

샤마시(Shamash,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으로 정의를 관장한다)를 맞이하는 듯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비석 양편에 긴 글이 새겨져 있다.

1901년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오늘날 이라의 후제스탄 주에서 그 비석을 발견했다.

 

정복자들이 기원전 12세기쯤엔가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 동편의 시파르(현재의 이라크)에서 옮겨온 것이 분명하다.

고대 아카디아어를 번역한 결과 그 비석은 신과 왕의 권력을 호소하는 긴 서문과 법조항을 나열한 목록과

결어結語로 구성된 하나의 포괄적인 법전, 즉 함무라비의 법을 공표한는 글이었다.

 

288개의 법 조항 가운데 거의 절반가량이 채무와 다른 사업상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나머지 3분의 1은 부권, 상속, 간통, 근친강간 같은 가정사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가정사가 상업적 이해관계에 지배되는 일이 빈번했다.

 

예를 들어, 결혼은 사업상의 협약으로 취급되었다. 근대의 법학자들은 특히 함무라비 법전에 포함된

'보복법 원칙(눈에는 눈)'이 모세의 율법, 곧 모세의 계명보다 2세기나 앞선 것이었기 때문에

함무라비 법전의 세세한 처벌 조항들에 특히 관심을 갖는다.

 

법전의 차등화된 처벌 체계는 노예 대 자유인의 등급, 그리고 다른 사회적

표식에 맞게 형벌을 적용했다. 함무라비 형벌은 가혹하다. 간통과 주술부터 강도와 살해에 이르는

총 28가지 범죄에 대해 사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함무라비 왕은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정의를 권장한다고 주장한다.

법령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벌금을 물리고

판사석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다른 법령들은 무죄 추정의 원칙

(서양 법전에서는 훨씬 뒤에나 나타날 보호책의 가장 오래된 예를 보여준다.)

1901년에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의 원본 비석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Homer's The IIiad and The and The Odyssey · 현재에도 유효한 3천 년 동안의 영감의 원천 

기원전 750년경

 

 

3천 년 동안 암송으로, 글로, 인쇄물로 전해온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위대한 서사시 두 편이 수천 년 동안

서양 문학의 근간이 되어 왔으며, 학자들은 시대를 초월한 이 고전의 저자가 한 사람의 천재인지,

혹은 여러 명의 천재인지를 두고 여전히 논쟁을 벌인다. 

 

 

 

 

 

 

 

 

손자병법

The Art of War ·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전략전술서

기원전 512년

 

 

손자병법은 13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각 장에는 전쟁의 중요한 측면에 관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증명된

현명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쉽고 명쾌한 언어로 쓰인 본문은 언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원칙과 전략들을 제시하면서 "강자와 약자를 모두 다룰 줄 아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 모든 계급이 한 마음

으로 움직이는 군대를 거느린 자가 승리할 것이다" 와 같이 중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은작산한간》으로 알려진 이 죽간은 기원전 206년에서 기원후 220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기원전 6세기 《손자병법》 원문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다.

 

 

18세기에 제작된 《손자병법》 죽간본으로,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사해문서

Dead Scrolls · 성경의 원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텍스트

기원전 408~기원후 318년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것과 히브리 문학에서 작성된 다른 글들 일부가 유대 사막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 글들이 누구의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 가운데 하나.

뚜껑이 덮인 이 토기는 사해문서를 보관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사해문서의 파편은 《전쟁의 책》의 일부다. 히브리어로 쓴 이 책은 기원후 20년에서 30년

사이의 것으로, 40년에 걸쳐 선과 악의 세력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 관해 들려준다.

 

 

 

 

마하바라타

Mahabharata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기원전 4세기경

 

 

이 화려한 삽화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마하바라타》 사본에 수록된 것으로,

이 문학적 서사시의 순환적인 성격을 담아낸다. 기원전 5세기에 최종적인 형태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원문의 완벽한 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힌두교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바가바다 기타》를

7개의 주요 시편Pava 가운데 하나로 담고 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의 하나이자,

2천 년도 더 된 인도 문화의 절정을 표상하는 작품이다.

 

《라마야나》와 함께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으며 모두 암송하려면 꼬박 2주가 걸리는 엄청난 분량이며,

10만 개 이상의 시문과 산문이 조합되어 전제 길이가 180만 개의 단어에 이른다.

'바하라타 왕조의 위대한 이야기'로 해석되는 제목과 함께 구루 족이 지배했던 왕국

하스티나푸르의 왕좌를 둘러싼 판다바와 카우라바 사이에 벌어진 암투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왕, 군주, 현자, 악마와 신에 관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지극히 철학적인 이 작품은 힌두교와 베다 전통의 윤리를 구현하고 있으며, 인도 문화의

신성한 역사를 들려준다. 또한 이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엄청난 범위와 웅장함은

다른 모든 서사시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 정도다.

 

 

 

 

카마수트라

Kama Sutra · 품위 있는 삶을 완성하는 사회적 기술의 지침서

기원전 400~기원후 200년

 

 

《카마수트라》에 묘사된 기교 가운데 하나를 묘사한 이 화려한 색채의 18세기 회화는

라지푸타나의 궁정에서 번성했던 자지푸트 유파의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 어느 시기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사본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오늘날엔는 교묘하게 뒤틀린 성교 체위의 지침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삽화 없이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된 원문은 관능적으로 충만한 삶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놀랍도록 현대적인 안내서다.

그 글에서 성교는 그저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마수트라'는 성적 쾌락으로의 안내를 의미한다.

이 제목의 고대 문학 작품은 통상 북부 인도의 현인 바츠야야나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독신의 수도사로, 깊은 명상과 묵상을 통해 여러 시대로부터 전해져 축적된 성에 관한 지식을

편찬했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사실 이 글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카마수트라》는 고대 인도의 역사에서

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는 유일하게 알려진 '철학적인' 글이다.

1천 205개의 구문을 포함해 3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그 자체가 쾌락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를 표상한다. 중심인물은 세속적이지만 고결한 남성으로,

구애와 로맨스에 관한 안내는 여성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남자는,

 

부모가 살아있고 자신보다 서너 살 아래인 좋은 집안의 한 여자에게만 사랑을 주어야 한다.

여자는 덕망 있는 가문 태생이어야 하고, 재산이 있어야 하며 좋은 인맥과 많은 친지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아름답고 성품이 좋아야 하고, 몸에 행운의 표식이 있어야 하고, 좋은 머릿결, 손톱, 이, 귀, 눈,

가슴을 지녀 넘치지도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병약한 몸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서도 안 된다.

물론 남자 역시 이 모든 자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

plato's Republic ·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묻다

기원전 380년경

 

 

895녀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든 이 《국가》의 사본은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으며, 펜으로 작성되었다. 플라톤 클라크본으로 알려진 이 책은 옥스포드대

보들레이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3세기에 만들어진 이 파피루스 문서에는 플라톤의 《국가》 가운데 5장의 일부가 담겨 있다.

1897년 이집트의 옥시링쿠스에서 발견된 이 문서는 현재 예일대 바이네케 희귀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아테네의 사상가 플라톤은 지금까지 쓰인

철학과 도덕 · 정치 이론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하나를 저술했다.

대화편으로 저술된 그 작품은 정의의 의미와 영혼의 불멸성 같은 중요 쟁점들을 검토한다.

35개의 대화편과 13편의 편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국가》다.

 

이 책에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동료 아테네인들과 외국인들에게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묻는다.

칼리폴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국가로 묘사되는데, 부분적으로 철학자 왕이 통치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왕이되어야 비로소,

 

혹은 이 세계의 왕과 군주들에게는 철학의 정신과 권위가 있고 정치적 위대함과 지혜가 하나로 만나고

상대를 배제하려 드는 평민 기질을 지닌 자들이 밀려나야 비로소 비판자들은 그들의 적으로부터 편안

해질 수 있을 것이다.(인류 역시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나면 오직 우리의 이 나라만이

삶의 가능성을 갖고 낮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칼리폴리스의 정부 형태, 다시 말해 귀족정치(Politeia. 귀족에 의한 통치)가 금권정치(timocracy.

명사에 의한 통치), 과두정치(ollgarchy. 부유한 소수의 통치). 민주정치(democracy. 인민의 통치)나

참주정치(yranny. 일인 통치)같은 다른 접근법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각 국가 유형의 성질과 그에 상응하는 통치자들의 성격을 분석한다.

오늘날 플라톤의 작품은 그 관념 못지않게 소크라테스적 분석 방법과 고대 그리스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서도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지는 수백 편의 필사본 파편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그를 인용한 고대의 여러 주석자들이 없었다면, 서양 사상의 정전에서 플라톤이

그만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여러 사본들은 고대의 원문을 적은 초기 사본들로 만든 것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아랍의 필경사들이 만든 것으로 중세에 뒤늦게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아테네식 그리스어, 다시 말해 아테네를 포함한 고대 아티카에서

사용된 그리스 본토의 방언으로 쓰였다.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이어 플라톤의 수기본 《국가》의 사본들과 다른 작품들이

결국 이탈리아로 향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르네상스를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

 

 

 

 

간다라 불교 경전들

Gandharan Buddhist Texts ·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기원후 50년

 

 

1994년 영국도서관이 확보한 간다라 두루마리 파편들.

자작나무 껍질에 잉크로 쓴 이 1세기 필삽몬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이 1세기 말의 간다라 조각상은 가장

오래된 불상 가운데 하나이다.

 

 

2천 년 전 자작나무 껍질에 적혀 아프가니스탄 동부 사막에 묻혔던 불교 승려들의 경전으로

현존하는 남아시아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해문서에 필적하는 인도의 불교 경전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1세기에 간다라는 활력이 넘치는 고대 인도의 다민족 왕국으로, 오늘날 파키스탄 북부,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걸쳐 있는 인도, 이란, 중앙아시아 문화의 교차로였다.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던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200년 사이에 그곳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 등지로 전파되던 출구였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했던 시기부터 간다라는 인도와 서양 세계의 중요한 접촉점으로

철학 · 예술, 상업에서 많은 교류를 낳았다.

 

이 두루마리들은 대체로 1세기 중반 사카 통치자들의 치세 동안 쓰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인도유럽어로 된 현존 필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불교 경전으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쿠란

The Quran · 이슬람의 시작과 끝

기원후 609~632년

 

 

사냐의 양피지본(671)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쿠란이다.

 

 

23년의 기간에 걸쳐 알라신의 말씀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신성한 문구의 형태로

계시되었고, 나중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전해 들은 말을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추종자들에게 암송해 들려주었다.

오늘날 이슬람의 신성한 경전을 믿는 신자는 세계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기원후 609년 12월 23일에 마흔 살의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메카 출신 아랍인이 

히라산에 홀로 은거하고 있을 때 동굴에서 한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 가브리엘(지브릴)은

환상과 함께알라(신)의 말씀을 계시했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632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받게 될 많은 계시의 시작에 불과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글을 모르는 사람umml' 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경전들을 읽거나 그 사진의 설명을

쓸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알라신의 말씀을 충실히 전했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기도로 그 말씀들을 기억하고 암송하도록 가르쳤다.

 

결국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점토판에, 뼈에, 잎에

그 말씀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1192~93년에 손으로 작성된 《쿠란》

이라크에서 만들어진 이 사본을 2004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구입했다.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첫 번째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 634년 사망)는

그 말씀들을 모아 하나의 권위 있는 책으로 만들어 영원히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

는 자이드 이븐 타비트(Zayd ibn Thabit, 635 사망)를 선택해 그 임무를 맡겼다.

자이드는 필경사들과 함께 신성한 문구들을 모아 아랍어 최초의 필사본을 만들었고,

몇년 후 표준 사본의 제작을 위임받았다.

 

'쿠란'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경전은 모두 114개의 짤막한 수라(suras, 장)로 구성되었고,

총 7만 7천 개의 아야트(ayas, 시)로 구성되었다. 시는 기도자들이 암송할 수 있게 고안되었다.

 

'쿠란' 은 그 자체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척도' '안내자' 그리고 '계시'로 묘사하며

역사적 사건들의 도덕적 의미에 관한 주석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 중심 교리에는 강력한 하나의 신,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어디에 있든 신은 너희 모두를 부활시킬 것이다."

 

문구의 3분의 1가량이 사후의 삶과 최후의 심판 날을 다룬다.

그 문구들은 또한 추종자들에게 성전聖戰을 요구한다.

 

《쿠란》의 언어는 '운을 맞춘 산문'으로 묘사되어왔고, 시작, 중간, 끝이 없는 구조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이례적인 비선형적 접근nonlinear approach이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힘을 강화하는 한편,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1143년에 처음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1649년에 영어로 번역된 쿠란은

이제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972년에 신성한 문구의 필사본이 예멘, 사나의 한 모스크에서 발견되었다.

그 필사본은 671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면서 가장 오래된 사본이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 왕의 권리를 법으로 제한하다

1215년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원본으로 네 개의 사본만이 남아 있다. 링컨 성당에 하나,

솔즈베리 성당에 하나, 그리고 런던의 영국도서관에 두 개의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 판본은 1297년 에드워드 1세 치하에서 발행된 것으로, 의회에서

승인되어 법률이 되었다. 사본은 2007년 2천 13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1215년에 작성된 중세의 대헌장은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자유민에게 부여된 일정한

자유를 보장한  최초의 문서로서 잉글랜드 만민법의 토대로 여겨진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라는 뜻의 라틴어)는 본래 1215년 6월에 라틴어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1215년 6월 5일 템스 강변의 러니메드에서 왕의 선서 아래 봉인되었다.

당시 이 헌장은 왕과 그의 강력한 귀족들 사이에 평화를 촉진할 목적이었지만, 오히려 전쟁을 촉발했다.

사실 이것은 법적으로 단 3개월만 유효했다. 그리고 이 조항들은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13세기 동안 다른 형태로 여러 차례 공포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법으로 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그 신민에 의해 잉글랜드의 왕에게 강요된 최초의 기록이었다.

왕권을 세속법 아래에 둠으로써, 이 헌장은 잉글랜드와 그 너머에서 일정 기간 지속되며 헌법의 지배를

이끌어낸 역사적 과정의 시작이었고 대의제 정부, 만민법, 출정영장, 그 밖의 다른 재판권과 같은

기본적인 보호책들을 등장시켰다. 예를 들어,

 

자유민은 누구도 체포되거나 구금되어서는 안 되며, 그의 권리나 재산을 박탈하지 않으며

법익을 박탈하거나 추방당해서도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그의 지위를 빼앗아서도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그 동료들의 적법한 판단이나 그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군대를 동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보내 그런 사람에게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권리와 정의를 팔지 않으며, 누구도 정의를 부정하거나 유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 헌장은 60개 이상의 조항이 있어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포함해 국가 생활의 많은 영역을 포괄한다.

존 왕이 러니메드에서 귀족들과 평화조약에 합의한 후 곧바로 몇 개의 대헌장 사본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이 사본들은 왕의 결정을 입증하는 것으로 전국에 보내졌는데 전문 필경사가 양피지에 라틴어로 작성했다.

 

이 기록의 중요성은 지속되었고, 법의 초석이 되기에 이르렀다. 마그나 카르타는 잉글랜드 시민의 자유를 

최초로 법제화 하면서 정의, 공평,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 법은 미국의 식민화에도 중요했다.

잉글랜드의 법률 체계는 많은 식민지에서 그들의 법률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하나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세 가지 조항은 아직도 잉글랜드와 웨일즈 법률의 일부로 남아 있고, 여전히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입헌 기록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박멸에 관하여

Ad Extirpanda · 고문을 합법화하다

1252년

 

 

인노켄티우스 4세의 교황칙서는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사용할 권위를 부여했다.

이 칙서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가톨릭교도 이외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할 권리를 주었다.

칙서는 1816년 교황 피우스 7세가 폐기할 때까지 5세기 반 동안 이단자의 처벌에서 고문을 합법적으로 만들었다.

 

 

1330년대의 필사본에서 인용한 그림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두미니쿠스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의 선교사들을

타타르인들에게 파견하는 모습을 담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중세의 이단 심문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단자들로부터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재판소의 고문을 허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유죄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던 듯하다. 유죄를 선고받은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고백해야만 했다.

39개의 법 가운데 26번 조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국가의 수반이나 통치자는 죽이거나 팔다리를 부러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보호하고 있는 모든

이단자들은 영혼의 강탈자이자 살인자들로서 그리고 신의 성체와 그리스도의 신앙을 훔친 자들로서, 

그들이 알고 있는 다른 이단자들을 고발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며 그들이 유혹했던 자들과

그들을 수용하고 보호했던 자들을 고발하게 해야 한다. 이는 물건을 훔친 도둑과 강도들이 공범을 고발

하고 그들이 저리른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252년 5월 15일, 인노켄티우스 4세는 "이단자와 그들의 공범과 보호자들에 맞서 치안판사와

세속 관료들이 따라야 할 선언"을 공표했고, 수 세기 동안 이어질 고통의 길을 열었다.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 미완성인 채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섬세한 교본

1265~1274년

 

 

1471년에 제작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15세기의 수기手記 주석을 곁들여 완성되었다.

 

 

데미도프 제단의 장식물(1476)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자신의 신성한 학문에 둘러싸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전성기의 가장 위대한 가톨릭 철학자이자 신학자다.

그의 걸작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가장 섬세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책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책은 서양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신의 존재에 관한 증거는 무엇이며, 신의 본질은 무엇일가?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신에게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의 판단은 분별 있고, 침착했으며, 성경을 다루는 솜씨는 노련했다. 그는 또한 독자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교리 이상의 것들을 가르쳤다. 스콜라 철학의 전통 위에 그는 이슬람, 히브리,

이교도의 전거들 역시 인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 보에티우스, 플라톤, 마이모니데스,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와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사상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법이란 공동선을 위한 이성의 칙령이며,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분명해졌듯이, 인간의 정신은 오직 사유를 통해서만 진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1724년 토마스의 죽음으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남았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3천 500쪽에 이르는 지면에 빼곡히 적혀 있다.

그는 1323년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로 시성되었다.

 

 

 

 

헤어포드 세계 지도

Hereford Mappa Mundi · 중세의 정보 지도

1280년~1300년

 

 

세계 지도에 세밀하게 그려진 세계의 풍경은 직경 52인치의 원 안에 담겨 있다.

그 지도는 중세 영국 교회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다른 나라와 해양은 지도에 맞게 줄이거나, 늘였다.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홍해를 보여주는 세계 지도의 일부.

 

 

커다란 양피지 위에 그려진 백과사전과 같은 헤어포드 세계 지도는 세계를 13세기 말에 학식을 갖춘 유럽인들이

보았던 대로 묘사하면서, 지리와 성경 속 이야기에서 이국적인 동물, 외국의 낯선 민족들, 고전 신화의 이미지

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지도로 표현된 중세 지식의 보고가 되었다.

 

웅장한 잉글랜드 헤어포드 성당에 부속된 신설 도서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시각적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헤어포드 세계 지도로, 중세 지도로는 가장 크다. 가로 52인치 세로 62인치의 그 지도는 떡갈나무 틀에 끼운

양피지 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지도는 하나의 원 안에 들어 있다. 글은 대부분 잉크로 썼고, 몇 가지 색을

첨가했다. 예컨대 홍해는 붉은 색으로, 다른 강들은 파란색이나 녹색으로 표현했다.

 

그 지도에는 '할딩엄과 라포드의 리처드, 링컨 성당의 라포드 성직자' 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는 그 지역의

우주론자이자 시도 제작자였다. 전문가들은 그 지도가 1280년에서 1289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많은 학자들은 그 기록이 본래 제단 장식으로 만들어졌고, 교구민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릴 때

세상의 모든 영광과 위험성을 지역 회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착안되었다고 믿는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지도의 지리는 교회의 교리와 일치하고 성서에 등장

하는 수 많은 중요 장소들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천상을 보여 주며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에

시켰다. 지도의 중심 부근 바빌론은 바벨탑 근처에 위치한 여러 층의 요새 도시로 표시된다.

그 위에 황금색 글씨는 인도를 용이 있는 이국적인 땅으로 표시하고,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에덴의 낙원으로 그린다.

 

영국 해협은 실제보다 크게 표시되었다.

오늘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그 인근 섬들로 불리는 지역들의 묘사 역시

13세기 잉글랜드가 가진 지식의 기본적인 상태를 요약하고 있다.

500곳의 도시를 보여주는 데에 더해 표시된 상당수의 항목들을 이국적인 민족들, 동물들, 식물들을

명성에 따라 묘사했다. 이를테면 최음제인 흰독말풀은 그 시절 견문이 넓은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사람의 머리칼을 닮은 뿌리를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지도는 1천 편 이상의 전설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정 국가, 강, 도시, 다른 자연물의

명칭들을 그 특징이 담긴 이미지들과 함께 열거한다.

설명은 라틴어로, 리고 옛 프랑스어의 노르만 방언으로 기재되었다.

 

 

 

 

 

구텐베르크 성경

Gutenberg Bible · 정보혁명에 불을 댕긴 인쇄기술의 대변화

1450년대

 

 

42행으로 된 구텐베르크 성경 원본.

새 문단이 시작할 때 공간을 남겨두어 빨간색이나 파란색 손글씨를 써넣을 수 있게 했다.

 

 

1377년에 처음 인쇄된 고려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최초의 발명은 한국에서 훨씬 더 일찍 있었지만 금속활자를 활용하는 인쇄기를

용한  근대적 인쇄물의 탄생은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에서 찾는 것이 옳다.

그 성경은 기록을 만드는 일의 본질을 바꾸었고, 세계를 변화시켰다.

 

한국은 개별 문자를 위한 금속활자를 고안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리고 그 기술은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언어의 복잡성 때문에 금속활자는 서양 알파벳 인쇄에 활용하기에 더욱 적합했다.

 

일정한 정도의 잉크 압인, 지면 배치의 조화와 다른 특징들로 주목할 만한

1천 286짜리 구텐베르크 성경은 걸작으로 환영받았다.

오늘날 학자들은 구텐베르크 성경이 어딘가에서 160부에서 185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 48부가 현존한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인쇄술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고,

정보 혁명에 불을 댕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Leonardo da Vinci's Notebooks · 시대를 넘나든 천재의 아이디어를 훔쳐보다

 

 

위쪽 그림은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수록된 다 빈치의 비행시계를 위한 설계도다.

 아래는 《코덱스 해머Codex Hammer》로 알려지기도 한  《코덱스 레스터》에서 발췌한 그의 과학 노트다.

그 노트는 1994년 빌 게이츠가 3천 80만 달러에 사들여 경매에서 판매된 가장 값비싼 필사본이 되었다.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던 다 빈치는 말년에 자신의 관심과 아이디어들을 매일 기록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트에 가득 상세한 삽화와 메모는 그가 시대를 앞서 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는

노트에 담긴 많은 부분을 비밀스러운 방법(다 빈치 코드)으로 은밀히 기록했다.

 

무한한 창조적 재능,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과 '열정적인 창의적 상상력'을 지녔던 다 빈치.

그의 정신은 자궁 속의 태아, 헬리콥터, 잠수함, 식물의 내적 작용,

그리고 끝없이 많은 다른 현상들에 대한 통찰을 뿜어냈다.

 

그럼에도 다 빈치는 자신의 생각이 도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권좌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도 자신을 희생시킬 정도의 위협이 될 것을 알았기에

시대의 무도한 헤게모니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래서 다 빈치는 자신의 궤적 가운데 일부를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미술과 자연철학에서 그가 추구하던 것들 가운데 일부를 기록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메모와

그림을 그렸지만, 다 빈친즌 도둑ㄷ과 이단 심문관 등의 적들을 따돌리기 위해 고안한 거꾸로 흘려 쓴

독특한 흘림체 글자를 사용해 자신의 기록들을 감추곤 했다. '거울에 비춘 글씨' 라는 다 빈치 고유의

서체는 그가 왼손잡이이기 때문에 쉬웠겠지만, 방해꾼들을 광기로 몰아갔다.

 

그러나 그 대가는 낱장의 종이에 신속하게 스케치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살찌웠다.

간혹 허리춤에 넣어둔 작은 종잇조각들을 활용하곤 했다. 그는 나중에 풍부한 내용을 담은

메모들을 주제에 따라 정리했고, 노트에 그것들을 순서대로 채워 넣곤 했다.

 

다 빈치 사후에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프란체스코 멜치는 1만 3천 쪽 분량의 노트 50권을

받았고, 그것들을 밀라노로 가져갔다. 멜치가 죽자 그 기록의 많은 부분이 결국 팔려 나갔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분실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책으로 엮였다.

그들은 《다 빈치 코드》(낱장의 지면들을 묶은 장정본이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알함브라 칙령

Alhambra Decree · 종교 박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장

1492년

 

 

죽음의 고통 아래 재판도 없이 모든 유대인은 즉시 에스파냐를 떠라나고 명령한 문서

 

 

에스파냐에서 에밀리오 살라의 유대인 추방(1889)에

자비를 구하는 유대인 남자

 

 

 

2세기 이후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에스파냐의 가톨릭 연합 왕국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왕국 안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모두 축출하겠다는 칙령을 공표했다.

불관용의 역사에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다.

 

1491년에 에스파냐 군대는 그라나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서 780년에 걸친

이슬람의 통치를 끝냈다. 에스파냐의 왕 페르디난드 2세와 여왕 이사벨라가 무어인들 치하에서 그곳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 주민들을 몰아내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 지역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은 끝났다.

 

1942년 3월 31일(이사벨라 여왕의 주도로) 왕과 여왕은 칙령에 서명했고, 유대인들이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범죄

목록을 발표했다. 에스파냐 이단 심문의 핵심 쟁점이 개종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하한 사람

들 가운데 일부느 여전히 유대교를 은밀히 믿고 있었다. '우리의 성스러운 가톨릭 신앙에 큰 타격, 손상, 불명예를

초래한 '사악한' 관행이라고들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죄목을 들의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일시에 그 나라

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숨겨주는 이들은 누구든지 간에 재산과 상속의

특권을 몰수당하게 될 것이었다. 추방은 에스파냐 왕국과 그 영토 전역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그들의 하인,

조력자들도 해당되었으며 25만 명가량으로 추산되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세계를 바꾼 또 다른 사건이 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항해를 지시한 바로

그 시기에 칙령을 발효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자신도 유대인 조상을 두었을 것이기 때문에 칙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알함브라 칙령은 4개월 안에 발효되도록 지시 되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짧은 기간이었다. 그 결과의 하나로 도미니쿠

스회 사제들은 개종을 강요하며 유대인들을 몰아세웠다. 수천 명이 유대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 와중에 수만 명의 난민들이 죽음을 맞았다. 10만 명이나 되는 망명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포루투칼로

향했다. 4년 후 그들은 그곳에서도 다시 추방될 것이다. 또 다른 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북아프리카로 넘어가거나

배를 타고 터키 등지로 도주했다. 바티칸은 결국 1968년에 알함브라 칙령을 철회했고, 2014년에 에스파냐 정부는

14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들에 대한 '유감스러운' 대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알함브라 칙령은 역사에서 종교 박해라는 수치스러운 장으로 기록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편지

Christopher Columbus's Letter · 신대륙으로 가는 최단 거리 항해

1493년

 

 

1493년에 출간된 콜럼버스 편지의 인쇄본 가운데 하나로 도입부 목판화에 담긴 콜럼버스의 '해양함대' 

지도 제작자 후안 데 라 카사는 1492~93년 콜럼버스의 항해에 동행했고, 1500년에 이 지도를 제작했다.

 

 

신세계를 발견한 첫 항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의 발견을

설명하는 한 통의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유럽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1492년부터 1493년 사이 역사적 사건에 관해 1인칭의 설명을 담은 유일한 글이다.

 

1492년에서 1493년 사이에 첫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오기 전, 제노바의 탐험가 크리스토발 콜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은 1493년 2월 15일 그의 선박 니냐호를 카고 카나리아 제도를 나서면서부터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아시아로 향하는 항로를 찾아 여행하는 동안 발견한 것을 묘사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다가 33일째 되는 날 첫 번째 섬에 도착했고, 그 후 다른 섬들에도 차례로

도착했다. 그때 콜럼버스는 (동)인도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만난 원주민들을 '인도인(인디언)' 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그는 쿠바, 아이티, 그리고 도미티카 공화국은 물론이고 현재는 산살바도르 섬으로 알려져 있는 바하마의 카리브

해 섬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원주민들로부터 전해 들은 본토는 카타이(중국)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콜럼버스가 에스파냐로 돌아온 직후 에스파냐어로 쓴 인쇄본 편지가 바르셀로나에서 베포되었다.

거의 동일한 판본의 라틴어 번역본이 한 달 후 로마에서 나왔고, 교회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많은 섬들을 발견했다. 나는 더없이 운 좋은 우리의 왕을 위해 왕의

기준을 선포하고 설파함으로써 그 섬들을 모두 차지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편지는 또한 쉽게 정복되는 원주민들의 취약성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무기라는 것이 없고, 무기를 전혀 알지 못하며 익숙하지도 않다.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육체는 멀쩡하지만,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아서다" 라고 썼다.

이 탐험가는 몇 명의 인디언을 포로로 데려왔는데, 그들이 얼마나 이상한 민족인지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여행 중 25명의 인디언 가운데 8명만이 살아남았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이국적인 생물과 풍부한 과일, 향신료, 황금의 낙원으로 묘사했다.

그 풍요로운 땅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주민들은 쉽게 정복할 수 있었고, 노예로 삼을 수 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떠벌렸다. 그의 설명이 너무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왕은 그에게 곧바로

1492년 9월 24일에 출항한 대규모 함대와 함께 왕복 항해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그 뒤로 두 번 더 왕복 항해를 했다.

 

콜럼버스의 편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서 역사가들은

1493년 기록의 여러 인쇄본들에 의지해 콜럼버스의 발견을 재구성했다.

 

 

 

 

페트루치의 하르모니체 무지체스 오드헤카톤 A

Petrucci's Harmonice Musices Odhecaton A · 최초로 대량 생산된 악보

1501년

 

 

페트루치는 최초로 활자를 활용해 대량 생산한 악보를 우리에게 남겼다. 인쇄된 악보는 깨끗하고

읽기 쉽고 우아했지만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오선, 음표, 가사를 담기 위해 인쇄기를

세 번이나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1535년에 나온 실베스트로 가나시의 음악 지침서에서 발췌한 이 목판화는

인쇄된 악보를 사용하고 있는 리코더 연주자 무리를 보여준다.

 

 

르네상스의 선구적 화가는 복잡한 다성악곡의 악보를 인쇄하는 데 활자를 도입했고 그로써 자기 시대에

국제적으로 중요했던 레퍼토리를 보존했다. 그의 가장 세련된 악곡집은 미술과 기술의 승리다.

 

오타비아노 페트루치(1466~1539)는 활자를 활용해 정교한 악보를 인쇄하는 일에서

그가 한 발명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포좀브론으로 나고 자란 페트루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베네치아로 가서 인쇄술을 익혔다. 몇 년 후 그는 베네치아 상원에 가치 있는 새로운 발명을 판매할

특권을 청원하며 활자를 활용한 악보의 인쇄법을 고안해냈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48년에 베네치아 공화국 전역에서 20년간 악보의 인쇄화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페트루치는 방대한 악보집을 출판했다. 주로 그 시절 최고 작곡가들이 쓴 플랑드르의 샹송들로 구성된

그 악보집에 페트루치는 '하르모니체 무지체스 오드헤카톤 A'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선곡집에는 세속적인

다성곡이 96곡 포함되었다. 곡들은 3부 혹은 4부의 성악부를 담고 있으며 엄격하게 정해진 형식으로 지어졌다.

그의 작품은 가장 복잡한 악보의 출판을 정교한 미술로 바꾸어놓았다. 그의 인쇄술은 매우 정교한 서체와

여러 섬세하고 훌륭한 특징들에 의해 멋지게 실행되었다. 가끔은 쇄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엉망이 된 악보 때문에 음악가들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헌정 일자가 1501년 5월 15일인 오드페카톤의 초판본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고,

1503년과 1504년에 인쇄된 재판과 삼판이 남았다. 오드헤카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청중들은 페트루치 시대의 음악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 옮김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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