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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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역사 (8)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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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헌장

United Nations Charter · 2차 대전의 승전국들. 국제 연합 헌장을 만들다

1945년

 

 

 

 

1945년에 나온 유엔 포스터로, 헌장의 구호

"이해를 위해, 평화를 위해"를 선전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몇 주 동안 46개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맹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헌장(세계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국제기구)의 초안을 작성했다.

 

국제연맹이 제2의 전 지구적 분쟁을 막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부상한 승전국들은

평화를 유지할 효과적인 국제 정부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대통령 프랭클린 D. 주즈벨트가 1942년 추축국에

맞서 싸울 국가들을 집합시키면서 '국제 연합United Natons' 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독일의 항복 직후이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후인 1945년 6월, 46개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설

회의에 참석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면서 대표들은 지구 전역을 휩쓸 또 다른 폭력적인 전란을 막을

하나의 기제를 마련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그들이 직면한 많은 난제들은 1918년~1919년 국제연맹이 다루어야 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앞선 노력들을 파멸로 이끈 문제들의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국가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전국들도 그들 나름의 도전에 직면했다.

 

입안자들이 생각해낸 한 가지 기제는 다섯 개 주요 강대국, 즉 중국, 프랑스, 영국, 미국과 소련으로 구성되어

이들이 각각 하나의 거부권을 가지고, 그들이 원한다면 어떤 행동이든 차단할 수 있게 하는 영구 안전보장

이사회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주요 강대국들은 이 조직을 유지해야 할 지분 이상의 것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세계 평화 보장을 책임질 하나의 지도적인 기구로 지정된 안정보장이사회의 결정은 모든 회원국들에도 구속력을

갖게 했다. 유엔 헌장은 모든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총회라고 불리는 하나의 중심 기구를 요구했다. 그 문서는 국제

연맹보다 더 넓은 견지에서 국제 안보를 규정했고, 더 작은 국가들도 돕기를 희망했다. 이번에는 안보가 군사 보호,

경제 · 사회적 발전, 그리고 인권과 국제 저의의 지지를 포함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서문과 각 장으로 분류된 일련의 조항들로 구성된 유엔 헌장은 1945년 6월 26일 요란한 선전과 함께 공개적으로

조인되었고, 트루먼 대통령은  모인 사람들에게 "바로 지금이 행동할 때입니다!" 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8월 8일 인준된 조약에 서명했다. 같은 날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유엔 헌장은 1945년 10월 24일 효력을 발생했으며, 여전히 효력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

George Orwell's 1984 . 빅 브라더, 전체주의의 망령은 여전히 존재한다

1946~1949년

 

 

1949년 6월 세커 앤 바르부르크 사가 출판한 양장본 원본

 

 

타자기로 작성한 오웰의 원본 원고는 폭넓게 이루어진 수정에 대한 매력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현명한 편집이 없었다면, 도입부 문장이 그토록 인상적인 수 없었을 것이다.

 

 

병들고 가난하며 악에 쫓기고 있지만 결연한 의지를 지닌 한 작가가 스코틀랜드의 외딴 농장에서

전체주의 국가의 삶에 관한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완성하느라 분투하고 있었다.

그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고 경고한다. 그가 예언한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

 

에릭 블레어(1903~50)는 영국의 에세이 작가이자 언론인, 비평가, 소설가로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해

사회의식을 담은 글을 썼다. 그는 버마에서 영국의 제국 경찰로 복무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파시즘에 맞선

투사로 활약했지만, 만성 폐질환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1945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우화적인 단편소설 《동물농장》을 집필했다.

 

독일의 포격으로 집을 잃고 진료 도중 아내가 사망하자 오웰의 삶은 더욱 암울해졌다. 살아남은 그는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또 다른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에 '유럽의 마지막 사람' 이라는 가제를 붙였다. 친구 한 명이

스코틀랜드의 이너헤브리디스 제도의 주라 섬 암벽 정상에 위치한 빈집응 오웰에게 내주었고, 그는

그곳에서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오웰은 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질병과 기한의 압박에 맞서 낡아빠진 레밍턴 휴대용 타자기로 편지를 썼다.

"나는 이 빌어먹을 책의 마지막 단계와 씨름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웰은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1948년 11월 30일에 오웰은 탈고 했다.

 

"맑고 차가운 4월의 어느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알리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지작했다. 

"각 층계참마다 거대한 얼굴이 담긴 포스터가 벽에서 지켜보았다."  "그 그림들 가운데 하나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눈이 따라 움직였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문구가 그 밑에 적혀 있었다".

 

《1984》는 1949년에 출간되었고, 곧바로 걸작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에는 희생이 따랐다.

오웰은 1950년 1우러 21일 결핵으로 사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싹한 그의 매래주의 전망은 '20세기의 결정적

소설' 로 폭넓게 인정받았다. 6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고, 수많은 예언자적 개념

들이 포스트모던 담론에 도입되었다.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노예제다. 무지가 힘이다." 정치 못지않게 언어에서도

'이중적 사고'  '뉴스피크'  '빅브라더'와 같은 단어들은 이제 '오웰리언' 같은 용어와 함께 누구나 아는 정치적

어휘의 일부가 되어, 이데올로기적인 완곡 어법에 포함되어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1984》의 복사본이 1984년에 출간되어 최종 출간된 판본과 함께 오웰의 원본 원고에 나타난

격앙된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현재 이 소설의 원고는 브라운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웰의 독특한 제목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끝의 두 자리는 책이 완성된 굴곡진 해, 실제로는 현재에 근거한

무시무시한 미래를 반영하기 위해 뒤바뀐 것일까?

 

 

 

 

마셜플랜

Marshall Plan · 서유럽을 재건하고 소련을 견제하며 국익을 취하다

1947년

 

 

마셜플랜은 1948년 4월 3일에 경제원조법으로 법제화되었다.

 

 

마셜이 1947년 6월 5일 유럽의 경제적 재건에 관한 연설을 위해 하버드대학교에 도착한 모습.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비롯된 유럽의 철저한 파괴를 설명하면서 미 육군 사령관 출신으로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은 미국의 유래없는 재정적 원조를 포함해서, 유럽의 재건을 위한 야심찬 청사진을 제안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조지 마셜 장군(1880~1959)은 육근 참모총장으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주역 가운데 하나

이자, 당대 최고의 군사 조직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찬사와 신뢰를 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 직후 마셜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을 지내며, 유럽의 재건이 시급한 가운데 미국의 위상을

높이는 임무를 맡았다. 1947년 6월 5일에행한 연설에서 그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원조 계획을

제안했다. 마셜은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조언자들

은 미국의 납세자들이 그런 계획을 지지할 리 없다고 믿어 국내 언론 취재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필요한

외국의 지지를 얻어낼 방법으로 BBC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유럽 청취자들에게 그 연설을 전하도록 주선했다. 1천

200자 길이의 연설은 직설적이었고, 정곡을 찔렀으며, 수사적 장치 없이 전달되었다. 내용은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

정치적 수입에 관한 것이었다. 마셜은 유럽의 기간시설들이 파괴도어 재건 노력들이 방해받고 있으며, 이는 그 지역의

건전성과 안전성을 몇 년 쯤 더 늦출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마셜은 이렇게 주장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경제적 건전성 회복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분별 있는 일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정치적 안전성도 그기고 어떤 확실한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겨냥하는 바는 어떤 나라나 신조가 아니라 굶주림, 가난, 절망과 혼란입니다. 자유로운

제도들이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 · 사회적 조건들이 조성될 수 있도록 세계에서 실용적인 경제를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의 정책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셜은 미국의 대규모 해외 원조라는 하나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주문했다. 황폐해진 지역들의 재건, 무역장벽 제거,

산업의 근대화, 즉 이는 새로운 번영의 달성을 겨냥한 프로그램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으나, 소련은 거부했다. 이 프로그램이 진행될 경우 공산 진영 국가들의 문제에 미국이 지나치게 많은 발언권을

갖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플랜을 채택했고, 의회로 보냈다. 의회에서 안이 통과되었고,

1948년 4월 3일 경제협력 법으로 법제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제공한 경제 원조는 대부분 미국 상품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미국은

서독을 포함해 서유럽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 1천 700억 달러를 제공했다.

 

이 프로그램의 설계자이자 옹호자로서 마셜은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마셜플랜'이라는 용어는 대규모 재건 프로그램을 표상하게 되었다.

 

 

 

 

세계 인권 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 인류에 대한 최초의 전 지구적 선언

1948년

 

 

엘리너 루스벨트는 국제인권위원회 의장으로,

영어로 인쇄된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서로 다른 국적과 배경을 지닌 활동가들이 2년 동안 함께 일하며 전 인류의 기본권을 명백히 규정하기 위해

지방적인 정치, 종교, 문화, 이데올로기적 믿음을 초월한 전례없는 하나의 보편적 인권 선언을 도출해냈다.

 

1946년에 전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위원장으로 하며 다양한 배경의 열여덟 명으로 구성된 국제인권위원회가 

유엔 내부에 결성되었다. 루스벨트 여사는 다양한 세계 기구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국제적 인권장전의 초안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캐나다의 법학 교수 존 피터스 험프리에게 맡겼다.

 

험프리와 그의 팀원들은 그들의 작업을 안내할 수 있는 408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권리에 관한

이전의 다른 문서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런 다음 프랑스 출신 위원 르네 카생이 험프리의 자료를 사용해

초안을 작성했는데 나폴레옹 법전을 따라 구조를 만들었다.

 

소위원회의 최종 원고는 나중에 위원회에서 논의되었고,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다. 투표는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있었다. 지지 48표에 반대는 없었으며, 결석 2표, 기권 8표였다.

 

초안을 작성한 칠례 출신의 소위원회 위원 에르난 산타 크루즈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정말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 모든 지위의 남성과 여성

사이에 진정한 연대와 형제애의 분위기가 있었다. 어떤 국제적 배경에도 다시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세계 인권 선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의견이나 기타 의견, 국적이나 사회적 출신, 빈곤,

출생이나 신분 같은 어떤 차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부여받았다."

이 30개 항목은 생존권, 자유, 신변 안전 같은 기본적인 개인의 자유를 세계 모든 개인에게 부여한다.

이 선언은 노예제와 고문을 금하며, 법 아래 동등한 정의를 요구한다. 모든 사람이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으며,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것을 허락 받는다. 이를 위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특별 구제책들이 제공된다.

 

인권에 대한 최초의 전 지구적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유엔의 인권 선언은 설사 완전하게

지켜진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기록이다.

 

원문은 유엔 누리집에 439개 언어로 번역되어 게시되어 있다.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 날은 매년 '세계 인권 선언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제네바 협약

Geneva Convention · 지속적 논란의 원천이자 동시대 국제법의 초석

1949년

 

 

그 조약들은 공식적으로 '제네바 협약'  '1949년 합의'로 불리지만, 1864년, 1929년에 체결된

이전의 조약들을 새롭게 조정한 것으로 흔히 제네바 협약으로 언급된다.

 

 

제네바 협약 조인식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미증유의 잔혹 행위가 진행되는 중에 점령지역에서

비전투원인 민간인들의 처우를 다루기 위해 기존 조약들을 새롭게 했고, 196개국이 비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앞서 세 개의 국제조약(1864년, 1906년, 1929년에 채용된)은 부상당하거나 병든 병사와 해병들에

대한 보호책을 확립했고, 전쟁 중 전쟁포로의 기본 권리를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적십자사

국제위원회의 후원 덕분에 이 합의는 제네바 협약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잔혹한 학대 행위에 충격을 받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의 전권대사들은

4개월 동안 함께 작업하면서, 이전에 만들어진 세 개의 제네바 협약을 재확인하고 확장하고 새롭게 조정했으며,

또 다른 부류의 피보호자들을 추가한 제4차 제네바 협약 본문을 승인했다. 제4차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에 민간인

보호를 위한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확립하고, "무장 세력에 속하지 않고 적대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채 적이나

점령군의 수중에 있는" 모든 개인을 포괄한다.

 

1949년 조약은 그런 보호를 받는 민간인들은 "모든 환경에서 인간적인 취급을 받아야 한다. 인종, 피부색, 종교나 신

념,성별, 출생이나 재산 혹은 다른 어떤 기준에 근거한 역차별도 없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귿르은 폭력 행위나 위협,

"개인의 존엄에 대한 공격, 구체적으로 모욕적이고 비열한 취금"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부상당하거나 병이 들었

다면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보호받는 개인들은 인격, 명예, 가족의 권리, 종교적 믿음이나 실천, 그들의 태도와 관습을 존중받아야 한다". 보호

받는 민간인에게는 사적인 종류의 가족 소식 교환이 허용되어야 하며, 분쟁으로 인해 집을 잃고 쫓겨났을지 모르는

 다른 가족의 소식을 듣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자기 신앙의 영적 지도자들과 함께 종교 생활을

할 수 있게 허용되어야 한다. 억류된 민간인들은 전쟁포로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가능한 곳이면 어디서든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하며. 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편의 시설이 제공되어야 한다. 부상당하거나 병든 민간인들, 민간 병원

과 직원, 육지, 해양, 공중을 통한 병원 후송은 특별히 존중되어야 하며, 적십자사나 전신월사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

이다. 피보호 민간인들은 인간 방패로 사용되거나 인종, 종교, 정치적 의견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집단 처형, 문, 신체 절단, 강간이나 다른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유엔 안정보장이사회는 제네바 협약과 관련된 모든 쟁점들을 다루는 최고 법정이다. '중대한 위반'으로 알려진

가장 심각한 위반은 전쟁 범죄로 간두될 수 있다. 최근 여러 논쟁과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행위의 

물결이 입증하듯이 그 적용이 여전히 지속적인 논란의 원천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제네바 협약은

여전히 동시대 국제법의 초석으로 여겨진다.

 

 

 

 

DNA

DNA ·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아들에게 전하다

1953년

 

 

크릭이 아들에게 보낸 7쪽짜리 편지 가운데 1쪽과 3쪽

 

 

크릭이 거칠게 그린 DNA 구조는 나중에 그의 아내 오딜이 그려

<네이처> 1953년 4월 25일 자에 실렸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혁신의 발견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생명의 비밀'에 대해

최초로 설명한 글이라고 알려졌다. 편지를 마무리하기 전에 그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이걸 이해하려면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네가 집에 오면 모형을 보여주마."

 

1953년 초에 분자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1916~2004)과 제임스 왓슨(1928)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

의학연구협회분과의 연구원이었다. 두 사람은 DNA, 곧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와 여러 바이러스의 '생명의 청사진'을

담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분자의 구조를 알아내겠다는 떨칠 수 없는 열망을 따르고 있었다.

 

1953년 3월 19일에 크릭은 과학을 좋아하는 열두 살난 아들 마이클에게 편지를 썼다. 아이는 영국의 기숙사에서 감기

로 고생 중이었다. 편지에서 크릭은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짐 왓슨과 내가 더없이 중요한 발견을 한 것 같다"고 썼다.

두 사람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막 알아낸 참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D.N.A. 로 불리는 디옥시리보 핵산(조심해서 읽어라)의 구조를 위한 하나의 모형을 만들었다"라고

크릭은 DNA를 "일종의 암호와 같은" 것으로 묘사했고, 어떻게 그 기초물질(구아닌, 아데닌, 티만, 시토신)이 짝을

이뤄 꼬여 있는 두 가닥의 분자선을 이루는지 설명했다. 크릭은 또한 DNA가 어떻게 스스로를 복제하는지 명확히

설명했고,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를 그렸다. "이걸 이해하려면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집에 오면

네게 그 모형을 보여주마. 사랑하는 아빠가."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썼다.

 

과학자들은 1869년 스위스의 한 연구자가 고름 속에서 신비스러운 물질을 발견한 이래 DNA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827년에 니콜라이 콜초프는 "각각을 하나의 원형으로 사용하는 부분 보존적 방식으로 복제하게 될 두 개의 똑같은 선"

으로 구성된 "거대한 유전자"를 통해 속성들이 유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과학계에

DNA 이해와 관련해서 과학계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크릭이 쓴 7쪽 분량의 편지는 그와 왓슨이 DNA의 구조와 발생학적 함의들을 알리기 위해 <네이처>에 게재해 유명

해진 글을 발표하기 한 달도 더 전에 쓴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 8일에 벨기에에서 열린 단백질에 관한

솔베이 학술대회에서 자신들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언론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보다

5일 전에 왓슨은 동료 생물학자 막스 델브뤼크에게 편지를 써 보냈지만 거기서 그는 주로 DNA 구조를 다루었고 DNA

가 어떻게 자기복제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를 적지 않았다. 그래서 프랜시스 크릭의 아들 마이클 크릭은

나중에 아버지의 노트를 "생명이 생명이 되는 법"이라고 부른 것에 관해 글로 쓴 최초의 설명"이라고 묘사했다.

 

2013년 이 편지는 53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경매에서 낙찰될 편지 가격으로는 기록적이었다.

 

 

 

 

로마 조약

Traty of Rome · 유럽경제공동체를 만든 백지문서

1957년

 

 

조약의 문서와 팔라토 데이 콘제르마토리 대연회실에서 있었던 조인식

 

 

 

언어, 문화, 역사로 나뉜 유럽 대륙의 국가들이 공동의 경제 연합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면에 놓인 문제들은 때때로 가장 기본적인 업무조차

함께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두 차례의 세게 대전으로 절정에 이른 갈등의 세기에 유럽의 지도자들이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대재앙에서 벗어나는 일은 더디고 고통스러웠으며 평탄치 않았고 이 때문에 몇몇 국가들은

공통된 경제 공동체의 확립을 원했다.

 

이 문제를 두고 일련의 국제회의가 열리고 그로부터 함의가 도출된 후에 공동 시장과

유라톰(유럽 원자력공동체)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1956년 6월 벨기에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6개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대표들이 협정서를 작성하기 위해 부뤼셀 외곽의

웅장한 저택, 샤토 드 발 뒤셰스에 모였다. 영국도 초청을 받았지만. 영국 수상 해럴드 맥밀런은 "넷을 나머지

둘로부터 구해내야 하는 6개국" 클럽에 가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참가국들은 몇 가지 관심사를 공유했다. 그 국가들은 전쟁 중에 침략, 패배, 외국의 점령, 그리고 그로 인한

장기적인 고통을 겪었고, 따라서 미래의 점령에서 민주적 제도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경제 협력이 열쇠였다.

입안자들은 최종 판본이 나오기까지 9개월 동안 비밀리에 작업했다. 그런 다음 비준을 서둘렀다. 조만간 프랑스의

맹렬한 민족주의자 샤를 드골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조약의 비준이 어려워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로마 팔라초 데이 콘제르바토리 궁의 역사적인 대연회장에서 공식적인 조인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재난이 닥쳤다.

회담에 필요한 모든 도구와 보급품(타자기, 등사기, 무늬가 새겨진 공식용지)의 공급이 스위스와 이탈리아

접경에서 지체되고 있었다.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이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대한 루벤스의 그림들 때문에 조인식이 열린 예정이던 공간이 폐쇄되어 있었다. 공간이 준비될 때까지

중요한 자료들을 지하실에 보관해야만 했다. 그런데 청소원들이 실수로 조인식에 사용될

용지와 등사지를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시간이 되자, 겁에 질린 주최자들은 서둘러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들은 조약문서 대신 국가수반들이 서명할 수 있게 백지를 준비했고, 취재진의 접근을 막았다.

 

1957년 3월 25일 상당히 호화로운 대장관 속에서 각국 수반들이 로마 조약에 공식 서명하고,

유럽경제공동체TEEC를 설립했다. 결국 유럽공동시장과 유럽공동체를 형성하게 될 합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명지로만 구성된 문서였다.

 

이 유명한 '백지' 문서 서명에 관한 이야기는 2007년에 폭로되었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 김지혜 譯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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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hyangto202/873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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