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옥재 서적과 고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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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집옥재 서적과 고종 (1)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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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集玉齋 소장 중국 서적 

 

아래 내용 모두는 윤지앙 著 <고종, 근대 지식을 읽다>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근현대 부분의 '서지학'과  '역사'에 관한 이내 시각을 정돈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면서,

 먼저 저자의 '서문' 일부를 간추려 본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高宗은 경복궁 안에 집옥재集玉齋를 짓고 서재 겸 집무처로 삼는다.

 선대 정조正祖의 유훈을 계승하여 규장각奎章閣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기존의 규장각 소장 서적들을 정리했으며,

새로이 서적들을 사들인다. 고종이 새로 사들인 중국 서적 가운데 조선 시대에 수집된 것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고종이 수집한 총 1,942종種으로 전체의 약 30%를 차지하고, 조선 시대에 수집된 것이면서

원 소장자를 알 수 있는 서적 중에서는 약 55%를 차지한다.

 

 정조가 수집한 것을 포함하여 고종 이전에 수집된 중국 서적을 다 합쳐도 고종이 수집한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 셈이다.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중국 도서를 사 모았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향한 고종의 열망이 컷음을 잘 보여 준다.

이들 12종의 서적은 전채 집옥재 소장 중국 서적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집옥재 소장 중국본들을 살펴보면서

고종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의 생각이 이전의 생각보다는

고종의 실제 모습에 더 다가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망국의 군주' , '암약한 군주'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다.

고종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수구파와 개화파의대립에 휘둘리며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일본이 조선 침략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군暗君으로 폄하한 역사 왜곡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자주적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개화에 앞장섰던 고종의 치적을 선도적으로 알렸고,

최근에는 고종의 근대화 성과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서재를

구경하는 일은 고종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우리 스스로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집옥재 소장 중국 서적을 살펴봄으로써 개화기 중국으로부터의 지식 유입 양상을 살펴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부터의 지식 유입이라고 하면 대부분 유학儒學 등 전근대 시기의 사상을 떠올리고,

개화기의 근대 지식은 당연히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근대 형성 과정에 있어서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축소하여 보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마치 개화기 국내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이제는 중국책은 그만 보고, 서양책과 일본책만 보기로 결정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근대 전환기 국내 지식인들이 동시대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일례로 청말 사상가 양계초梁啓超(1873~1929)의 방대한 저술이 국내에 유입되어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최근에는 한국 근대 소설 형성의 중요한 동인을 중국 소설에서 찾는

연구도 이루어져 일본과 서양 소설의 영향만을 중시하는 인식이 편견임을 밝혔다.

 

특히 중국 서적은 근대 과학지식 등 서양의 문물이 국내에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강남기기제조총국江南器機製造總局의 번역서는 국내에 서양의 근대 학문을 소개하는 주요 창구 역할을 했고,

1876년 상해에서 발간된 과학 잡지 《격지휘편》의 기사는 <대죠션독립협회회보>, <한성순보> 등 국내

신문에 꾸준히 수록되며 국내에 서양 과학을 전파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근대 전환기 일본과

미국의 영향이 압도적 이었고, 중국의 영향은 이전보다 크게 감소되었다고 보는 것은

관련 연구의 부족이 불러온 그릇된 인식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일본에 비해 뒤처졌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조선 말부터 중국 서적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근대 지식이 유입되었음에도 이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지적 기반과 물질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고, 이미 우세를 점한 서구 열강과 일본의 무력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적 · 군사적 실력을 기르기에는 그러한 지식의 유입 시점이 너무나도 늦었다.

그 결과 집옥재의 서가에 놓였던, 서양의 근대 지식을 담은 중국 서적들은

이뤄지지 못한 꿈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화 사업을 위한 노력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고

개화사상의형성과 구체적 실천에 일조했던 집옥재 소장 중국 서적에 대한 연구는

그러한 작업에서 빠뜨릴 수 없다.

......

 

 

 

 

 

 

 

집옥재 도서가 규장각에 소장되기까지

 

집옥재 도서의 대부분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

겼었다. 본래 경복궁의 집옥재에 소장되어 있던 집옥재 도서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그소장 · 관리

기관이 바뀌었다. 먼저 1908년 9월 일제 통감부는 규장각에 도서과를 설치해 규장각, 홍문관, 집옥재, 시강원, 춘추관,

북한산성 행궁 등의 도서들을 합쳐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분류하고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라는 장서인을 압인

했다. 한일합병 이후 집옥재 도서는 여타 조선 왕실의 도서들과 함께 잠시 이왕직 도서실에 보관되었다가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에 강제로 인수되었다. 1912년 취조국에서는 새로 설치한 참사관실에 도서 관련 사무를 이관했고, 참사관

실은 분실을 만들어 도서 정리를 전담했다. 분실에서는 1915년 12월에 그간 인수한 조선 왕실의 도서에 '조선총독부

도서지인' 이라는 장서인을 압인하고 도서 정리 사업을 시행했다. 이때 도서번호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와 관련한 사업은 1922년 다시 총독부 학무국으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조선총독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세차례(1928년 10월, 1930년 5월과10월)에 걸쳐 총 161,561책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규장각이라는 관부는 1910년에 일찌감치 폐지되었고, 규장각 건물들은 서서 소장처로 기능하다가

이들 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지면서 수난을 겪게 된다. 서적을 보관했던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 건물들은 모두 헐렸고, 이문원摛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으며,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

 

광복 후 규장각도서는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에서 인수해 관리하다가 다시 1975년 새로 설치된 규장각도서

전담 관리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로 이관했다. 1989년에는 규장각)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용 건물이

준공되었고, 1990년 6월 규장각도서들을 이 건물로 옮겼다. 그리하여 현재는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도서를

서울대학교 내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소장처가 여러 차례 바뀌다 보니

집옥재 소장 도서를 펼치면 '집옥재'라는 장서인 외에도 '제실도서지장', '조선총독부도서지인', '경성제국대학

도서장', '서울대학도서' 등 여러개의 장서인이 압인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서의 권券과 책冊

 

고서의 수를 셀 때 '권'과 '책'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다.

규장각 서가에서 《설악전전說岳全傳》이라는 책을 꺼내 보자. 이 책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포갑包匣 안에 들어 있다.

꺼낸 책들을 포갑 옆에 두었는데 모두 아홉 책冊이다. 원래 전체 10책으로 되어 있었으나 제 5책이 일실되고 아홉

책만 남았다. 여기서 '책'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책들을 '한 권, 두 권 ···' 하고 셀 때의 '권'의 개념과 비슷하다.

이처럼 천체 세트에서 빠진 것이 있을 때 '결질缺帙' 이라고 부르고, 빠진 부분이 더 많을 때는

남아 있는 책을 '영본零本' 이라 부른다.

 

《설악전전說岳全傳》의 1책을 펼치면 목차가 나오는데, 이 목차를 통해 이 책이 전체 20권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완전한 세트의 경우 전체 10책,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 책에 두 권씩 수록되어 있다. 제1책에는

제1권과 제2권이, 제2책에는 제3권과 제4권이. 제3책에는 제5권과 제6권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서에서

'책'과 '권'의 개념은 다르다. '책'은 물리적으로 하나의 책으로 묶인 단위고, '권'은 내용적으로 나눈 개념이다.

 

 

 

 

한 책에 한 권이 수록될 수도, 열 권이 수록될 수도 있다.

같은 서적인데도 몇 책으로 출간할 것인가는 출판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몇 권으로 출간할 것인가는

대채로 달라지지 않는다. 《설악전전說岳全傳의 경우 또 다른 출판사에서 5책 20권으로 엮거나, 1책 20권으로

엮어서 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저자가 책의 내용을 바꾸는 경우가 아니라면 20권이었던 책이

30권이나 10권으로 바뀌는 일은 없다.

 

고서의 권수券數와 책수冊數는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고서의 형태사항을 표시할 때 가장 앞에 둔다.

《설악전전說岳全傳》의 경우 '18권 9책(全 20권 10책 중 9, 10권 5책)' 과 같이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체 책수는 고서의 청구기호를 보고 확인할 수도 있다. 《설악전전說岳全傳의 청구기호는

奎中 6144 -v.1-9인데 'v. 1-9' 라고 한 것을 통해 전체 9책임을 알 수 있다. 

 

 

 

 

고서의 형태적 측면에서는 책수가 중요한 정보지만, 이는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고 편집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전통 시기에 어떤 책에 대해 언급할 때 보다 중요시한 것은 전체 권수다.

그래서 어떤 고서를 언급할 때 그 제목을 적고 그 뒤에 전체 몇 권으로 되어 있는지 적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채鋑彩는 《설악전전》 20권을 저술했다' 와 같이 말이다.

 

만약 《설악전전說岳全傳》이 규장각에 두 질(帙, 세트) 있는 경우에는 '《설악전전說岳全傳》이

2부部 있다' 고 하면 된다. 집옥재에는 같은 책이 2부 이상 소장된 경우가 종종 있다.

 

 

 

 

고서의 제목은 어떻게 정할까?

 

고서의 경우 책 곳곳에 적힌 제목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고서의 제목에는 그것이 적힌 위치에 따라 권수제卷首題, 권말제卷末題, 표제表題, 이제裏題, 판심제版心題,

목록제目錄題, 포갑제包匣題, 서근제書根題, 서발제序跋題, 난외제欄外題 등이 있다. 이들 제목을 모두 갖춘

경우도 있고, 이 중 몇 가지만 갖춘 경우도 있으며, 제목 중 몇 가지가 서로 다르게 적혀 있거나 모두 다른

경우도 있으며, 제목 중 몇 가지가 서로 다르게 적혀 있거나 모두 다른 경우도 있다. 고서의 제목을 정할 때

 책의 권수제를 기본 전거로 한다. 권수제란 책의 각 권의 본문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쓴 제목을 말하며, '권두제'

라고도 하고, 표제를 '외제外題'라 할 경우 외제와 구별하여 '내제內題'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권수제에

가장 완전한 제목을 쓴다. 고서에서 제1권은 표지 다음에 바로 수록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서문과

목차, 경우에 따라서는 삽화를 수록한 다음에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고서의 제목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책을 펼쳐 몇 장 넘겨봐야 한다.

 

 

 

 

규장각 소장 《원본해공대홍포전》의 경우 서문, 목차, 삽화에 이어 11a면에 이르러서야 제 1권이 시작된다.

위의 경우 왼쪽면의 첫째 행에 "原本海公大紅抱傳卷一" 이라 제목을 썼다. 따라서 이 책의 권수제는 '원본해공

대홍포전原本海公大紅抱傳卷'이고 책의 공식 서명도 이를 따른다. 권수제는 극히 드믄 예외를 제외하면 제1권

뿐만 아니라 각 권이 시작될 때 모두 같게 쓰기 때문에 전질全帙 중에 제1권이 수록된 책이 일실되더라도 다른

권의 권수제를 참고하면 된다. 권수제가 없다면 각 권의 마지막에 써 넣은 권말제(권미제券尾題라고도 한다)

를 참고한다. 그런데 권말제는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표제는 책의 표제지標題紙, (표제면票題面이라고도 한다)에 적혀 있는 제목을 가리킨다.

표제지란 본문 앞, 주로 책의 첫째 장張의 앞면이나 뒷면, 혹은 표지 바로 뒷면에 제목, 저자나 편자, 간행년도,

간행지, 간행자, 판종 등을 인쇄해 넣은 면을 말한다. 이 표제지는 책의 얼굴에 해당하는 면이기 때문에 황색지를

써서 돋보이게 하거나 서예가에게 제목을 써달라고 해서 인쇄하는 경우도 많다. 표제지는 책의 표지를 넘기고

나서 가장 첫째 면에마치 속표지처럼 나오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에 전체 책을 '덮는 封면' 이라는

의미에서 '봉면封面', 혹은 '봉면지封面紙' 라 하기도 한다.

 

 

 

 

《원본해공대홍포전》의 표제지는 표지 바로 뒷면이다. 원래 인쇄할 때부터 표지 바로 뒷면이었을 수도 있으나

책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표지와 표제지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경우 표제지에 많은 것이 적혀 있다.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읽으면 "咸豊拾年春鐫함풍십년춘전" , "增加批評증가비평", "文德糖문덕당",

"原本海公大紅抱傳원본해공대홍포전", "依姑蘇原本의고소원본"이라 적혀 있다. 

"함풍십년춘전" 나머지 사항들은 이 책의 간행과 관련된 정보를 적은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이 함풍 10년(1860년)에 문덕당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고, 추가적으로 비평을

첨가했다는 ("증가비평")과 판은 고소원본을 썼다는 것("의고소원본")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작자, 편자, 평자評者의 이름이나, 표제를 제자題字한 사람의 이름을 적기도 한다.

표제 대신 표지 겉장의 안쪽에 제목을 적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이제'라고 하며

표제가 없는 경우 참고할 수 있다.

앞서 들었던 모든 제목들을 확인할 수 없다면 책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제목인 표제를 참고한다.

책의 바깥쪽에 있으므로 '외제'라 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책의 표지까지 인쇄하는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나중 일이고 전통시기에는 제목을 작은 종이나 비단에 따로 인쇄하거나 손으로 써서 표지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책의 표지에 직접 제목을 써 넣기도 했다.

 

 

 

 

규장각 소장 《회도월법전서繪圖越法戰書》의 경우 표지에 직접 제목을 써 넣었는데,

여기서는 "안법전기安法戰紀" 라고 하였다. 책의 권수제인 '회도월법전서繪圖越法戰書'와는 다른 제목이다.

"안安"은 베트남의 엣 명칭 '안남安南'의 첫 글자이다. 그 다음으로는 책의 판심版心에 적혀 있는 판심제를 참고한다.

고서는 양면 인쇄를 하지 않고, 한 장에 두 면을 좌우로 왼쇄한 다음 반을 접는다. 그렇게 하면 양면 인쇄를 하지

않아도 한 번 책을 찍을 때 두 면이 나오게 된다. 이때 한 장에서 오른쪽에 인쇄한 면이 앞면이 되고, 왼쪽에 인쇄한

면이 뒷면이 된다. 판심은 반으로 접힌 고서 책장에서 그 접힌 중안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앞면 본문 끝과 뒷면의

본문 첫머리 사이 부분에 판심이 있다. 반으로 접힌 책장들을 모아 장정할 때는 접었을 때

막힌 쪽이 아니라 트인 쪽을 실로 묶어서 제본한다.

 

 

 

 

 

판심은 책장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접으면서 앞면과 뒷면 각각에 반쪽씩만 보이게 된다.

따라서 판심제를 정확히 확인해 보려면 책장이 접힌 부분을 펼쳐봐야 한다.

판심의 윗부분에는 제목을, 아랫부분에는 책의 장수張數 등을 표시하기고 하고 장수의 아래에

각공刻工의 이름이나 판각한 곳의 이름을 적기도 한다. 또 판심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그대로 두거나 무늬만 넣는 경우도 많다.

 

원본해공대홍포전》의 판심제는 '대홍포전전大紅抱全傳'이다.

그림 9에서 왼쪽 면에 판심제의 오른쪽 반쪽이 오른쪽 면에 판심제의 왼쪽 반쪽이 보인다.

권수제인 '원본해공대홍포전'에 비해 제목이 짧아졌다.

 

 

 

 

 

판심제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판심제는 권수제 등 다른 제목보다 간략한 것이 보통이다.

이 밖에도 목록제, 포갑제, 서근제 등을 참고할 수 있다. 목록제란 책의 목록(목차) 앞에 적힌 제목으로

'목차제' 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원본해공대홍포전》의 목록의 제목은 '원본해공대홍포전전총목' 이다.

따라서 이 책의 목록제는 '원본해공대홍포전'으로, 권수제에서 '전全' 자가 첨가되었다.

 

 

 

 

 

포갑제는 책을 싸는 포갑에 따로 붙이거나 적어 넣은 제목이다.

《회도월법전서》의 경우에는 포갑제와 표제가 모두 '안법전기安法戰紀'로 일치하고 글자체도 같다.

서근제는 서가에 책을 두었을 때 찾기 편하도록 책의 아래쪽 단면인 서근에 손으로 쓴 제목으로 '근제根題'

라고도 한다. 근대 이후 출간된 책은 세워서 꽂으므로 서배(書背, 책등)에 제목을 적어야 편리하지만,

고서는 책을 눕혀서 보관하므로 서근제를 적어 두면 책을 꺼내지 않고도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의 제목인 서발제, 광곽匡郭 밖의 좌우 하단에 적은

난외제 등 다른 제목들을 참고할 수 있다.

 

 

 

1. 중국에서 출판된 서학 관련 서적 구입

 

1875년(고종 12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雲楊號)가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해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고종은 조선이 무력으로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이는 조선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해 개화 정책을 펼치는 계기가 된다. 이에 1880년 12월에는 개화의 중심 관부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1881년에는 개화를 위한 정보 수집을 위해 중국과 일본에 조사견문단

朝士見聞團 등 시찰단을 파견했으며, 1883년에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해 선진 문물을 견학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화 정책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고종은 서기西器 수용의 한 방식으로서 중국에서 출판된 서학 관련

서적을 적극적으로 구입했다. 왕조가 존폐 기로에 놓인 위기 속에서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중국 서적들을 수집한 것이다. 그 결과 외국 각국의 사정, 국제법과 외교, 군사와 무기, 지리

와 항해 등 다방면의 중국 서적들이 집옥재의 서가에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광업과 농업, 전기학, 의학에서

부터 수학, 물리하, 화학, 천문학, 역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서구 학문의 성과를 담은 학술 서적을

수집했다. 고종은 중국에서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책을 구매할 수 있는지 알아볼 정도로 중국 서적

수집에 열의를 보였고, 서적이 담고 있는 새로운 지식을 실제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고종이 수집한 이들

서적들은 대한제국 성립 후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하는 데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2. 강남기기제조총국江南機器製造總局의 번역관飜譯館

 

고종이 중국에서 사들여 온 서학 관련 서적 중 상당수는 강남기기제조총국의 번역관에서 서양 서적을 번역한

서적들이다. 강남기기제조총국은 1865년(동치童治 4년) 9월 상해에 설립된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군수 공장으로,

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계와 함선, 총포, 탄약, 기선 등을 제조했다.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적 자강

과 경제적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일환으로 중국번이 설립을 기획하고, 이홍장李鴻章이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았다. 당시 중국 최대의 군수 공장이었던 이곳에서는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줅여서 '강남제

조국', '상해제조국' 등으로도 불린다. 강남제조국이 설립된 지 2년 후인 1867년 중국번은 자신의 막료였던 서수徐壽,

화형방 등에게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 관련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고, 서수 등은 중국번에게 번역관을

설립하고 번역을 도와줄 서양인을 초빙할 것을 건의했다. 중국번은 이를 받아들여 1868년 강남제조국 내에 번역관을

설치하고, 존 프라이어, 영 존 알렌, 카를 트라우고트 크레이어 등 외국인을 초빙했다.

 

강남제조국 부설 번역관은 민간단체인 익지회, 격치서원, 광학회와 더불어 당시 서양서 번역의 핵심 기관으로서

근대 중국의 번역 기관 중 가장 많은 번역서를 출판했다. 번역관에서는 군사학, 정치학, 외교, 외국 사정, 수학, 물리학,

화학, 광물학, 야금학, 기계학, 천문학, 지리학, 동식물학, 농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약 170종의 번역서와 약

30종의 번각서를 출간했다. 이들 번역서는 중국어를 아는 외국인 번역관과 기본적 과학지식을 갖추고 한문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중국인 번역관이 협력해 이중 번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의 정확도가 높았으며, 당시 서양 학문을 중국에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 방대한 규모와 높은 영향력을 볼 때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출판한 번역서는

서구 개념의 번역과 번역관飜譯觀, 근대 지식 유통의 양상을 살펴보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연구 대상이다.

또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는 서양서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인 학자가 저술한 근대 학문 관련 서적을

출간했으며, 그 수량 역시 상당하다. 상해는 당시 동아시아 근대의 전초 기지이자 출판의 중심지였고, 상해에서

출판된 서적은 일본과 한국으로 유입되어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근대 지식이 유통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상해에서 출판된 강남제조국 출간 서적 역시 상당수가 국내에 유입되어 지식인들이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서적이 국내에 다수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내외적 혼란과 도전에 직면하여 해법을 찾고 있던

국내 지식인들의 분투를 잘 보여 준다.

 

특히 개화 정책을 펼쳤던 고종은 적극적으로 이들 서적을 구입했다.

그는 서기西器 수용의 한 방식으로서 중국에서 출판된 다양한 분야의 서양 학문 관련 서적을 적극적으로

수집했으며 그가 수집한 서적 중에는 강남제조국 출간 서적의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규장각, 장서각, 존경각 등 왕실 소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기관뿐 아니라 다른 소장 기관에도 해당 서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도 강남제조국 번역관 출간 서적을 구해 보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강남제조국 번역관 출간 서적은 이후 상해의 동문서국, 신보관, 상해서국, 문예재, 치수산방 등

여러 출판사에서 재차 간행했고 이들 서적은 다양한 경로로 국내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상해와 인천을 오가는

기선이 1883년 11월과 12월, 1884년 1월 총 세 차례에 걸쳐서, 그리고 다시 1888년 3월부터 1894년까지 7년간

정기적으로 운항되면서 상해에서 출판된 서적들이 서적상을 통해 다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이때 강남제조국 출간 서적 역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서학 西學

 

광석도설(磺石圖說)

광물학 입문서로서 광물의 분류와 종류별 형태 및 특징을 그림을 곁들여 간결하게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번역가로 활동한 영국인 존 프라이어가 집필했으며 1884년 상해에서 전체 12종의

초등 교과서 시리즈 《격물도설格物圖說》 중 하나로 출판되었다.

.........

고종은 서양 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연히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광물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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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도설' 외에도 강남기기제조총국에서 번역한 《보장흥언寶裝興焉》(12권)이라는 전문적인 광물학 서적과

더불어 《정광공정井磺程》, 《야금록冶金錄》, 《은양정론銀洋精論》 등 광물학 관련 서적을 다수 사들였다.

은양정론제외하고는 모두 존 프라이어가 서양 서적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고종이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에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속셈 중에는 조선의 지하자원을

개발해 이윤을 챙기려는 야욕이 숨어 있음을 간파했다면, 그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에서만

광물학 관련 서적을 사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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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지회도測地繪圖

지도를 만드는 두 가지 기술

 

《측지회도》는 중국 최초로 서양의 삼각측량과 사진 연판 인쇄를 소개한 번역서다.

삼각측량은 1617년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빌레브로르트 스넬이루스(1558~1626)가 창안한 지리

측량 방법으로 유럽의 지도 제작에 널리 활용되었다. 사진 연판 인쇄술은 1850년대에 영국 육군 소장 헨리

제임스(1803~1877)가 발명한 인쇄 기술로 정교한 삽화, 필사본, 동판화, 지도를 복제하는 데 쓰였다.

 

삼각측량은 지리측량에서 삼각형 한 변의 길이와 그 양쪽의 각을 알면 남은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있는 삼각법을 이용해

각 지점 간의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측량법이다. 먼저 측량할 수 있는 기선基線을 정하고, 경위의經緯儀를 가지고

이 기선의 양 끝에서 특정 지점까지 이은 선과 기선이 이루는 내각을 측정하면, 기선에서 그 지점까지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측량 가능한 지점을 꼭짓점으로 하는 여러 개의 삼각형을 연쇄적으로 만들어 나가면,

측량할 수 는 지점의 거리와 각도를 계산으로 얻을 수 있다.

 

 

 

 

중국에서도 삼각측량이 있었다. 위진魏晉 시대의 명신이자 중국 고대 지도 제작학의 개척자인

배수(裵秀, 224~271)는 《우공지역도禹貢地域圖》(약 268~271년)에서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여섯 가지

원칙인 '제도육체製圖六體'를 제시했는데, 그 중 다섯 번째 원칙인 '방사方邪'는 경사의 각도 측정에 관한 것으로

삼각측량과 같은 원리다. 그가 제시한 제도법은 명 말에 서양의 지도 투영법이 도입되기까지 중국의 지도 제작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 위진 시대 수학자 류휘(劉徽, 225?~295?)의 《해도산경海島算經》(263년)에서는 측량

할 수 있는 장소의 거리와 각도를 활용해 접근 불가능한 장소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 역시 삼각

측량과 같은 원리다. 이러한 제도 및 수학 이론은 그 기본 원리에 있어서는 삼각측량과 같다. 그러나 유럽에서 발달

한 삼각측량은 여러 개의 삼각형들로 만들어진 삼각망을 활용해 광대한 지역을 측량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삼각측량은 18세기에 지도 제작이 유행하면서 보다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천문학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1625~1712)와 그의 자손들이 4대에 걸쳐

완성한 182장의 프랑스 전도(1745년 출간)는 삼각측량을 통해 만들어진 최초의 지도였다. 이후 삼각측량을 통한

지도 제작 기술은 대영 제국의 식민지 측량사업과 함께 더욱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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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측량은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해안선과 토지측량에 공을 들였다. 일본 육군이 측량과 지도 제작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육군참모총장 직속의 독립ㅁ 조직인 육지측량부를 만든 것이 1889년(고종 26년)의 일이다.

1894년에는 조선 지도 제작을 위한 임시측도부를 조직했고, 1911년에 이미 조선 전역을 담은 1:50000 축척의

지형도 <조선약도>를 간행했다. 일본 해군은 군함을 동원해 1878년에는 부산 연안을, 1879년에는 서해안 일대와

강화도를 측량했고, 1894년에 조선 연안의 항만, 항로, 부속 도서를 측량한 《조선수로지》를 간행했다.

그리고1899년 부터 1910년까지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조선 연안을 측량했다.

당시 그들이 사용한 측량법이 바로 독일에서 배워 온 삼각측량법이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 고종이 삼각측량을 다룬 책을 사들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본이 삼각측량으로 조선 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괴로운 일이다.

 

 

《측지회도》의 권1부터 권 11까지의 번역 저본은 영국 장군 에드워드 찰스 프롬)1802~1890)의

《삼각측량 수행 방법 요강》 제3판이고, 부록으로 수록된 「조인법」의 번역 저본은 1863년에 출간된

헨리 제임스의 《사진 연판 인쇄에 관하여》 제2판이다. 《삼각측량 수행 방법 요강》은 1840년에 제1판이,

1850년에 제2판이, 1862년에 제3판이, 1873년에 제4판이 출간되었다. 30여 년 동안 4판까지

출간되었음은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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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번역은 이중의 과정을 거쳤다. 먼저 존 프라이어가 원서를 읽고 입으로 번역하면

중국인 학자 서수와 강형江衡이이를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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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는 청말의 과학자로, 중국 근대 화학 이론의 선구자다. 서양의 자연과학을 널리 공부하여 1860년대에

근대 화학의 기초 지식을 중국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젊었을 때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경험이

있는 그는 팔고문八股文이 실용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대신 천문, 역법, 산수 등의 서적을 널리 섭렵하여 과학기술을 공부한 그는 동치 연간에 중국번의 막부에

있으면서 안경과 강녕의 기기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공정제조에 정통하여 화형방과 함께

목재 윤선인 황곡호를 시험 제작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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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지회도》는 1876년(광서 2년) 강남제조국에서 간행했다. 《강남제조국역인도서목록》에 따르면

이때 두 종의 장정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20년 뒤인 1896년(광서 22년)

상해의 해형당에서 석인본으로 재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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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소장본의 권수제, 표제, 포갑제는 모두 "측지회도"이고 판심젠즌 "측지"다.

규장각 소장본의 간행처와 간행 시기는 미상이고, 1876년 강남제조국에서 간행한 판본이 아님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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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학圖學

 

화형도설畵形圖說

1. 서화동점西畵東漸과 원근법의 도입

 

서양화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명대 후기다.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상딘 미켈레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가

각각 1579년과 1582년 중국에 올 때 「그리스도상」, 「성모자 상」 등 유럽의 성상화聖像畵를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서양화와 서양 화법이 중국에 소개되었다. 그후 청대 중엽에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사실적이고 정밀한 서양 화법을 선보였고,

다른 궁정화가들에게 서양 화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서양화와 서양 화법이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인들 사이에서는 서양화의 사실적 표현 기법을 신기한 기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중국의 전통화가 더 높은 수준에 있다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청말 서세동점의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인들은 차차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서양화와

서양 화법도 비로소 학습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인들이 서양 화법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당시 중국으로 들어온 서양 서적에 수록된 삽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양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보조 수단으로서 삽화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당시 출간된 서학 관련 서적은 삽화를 수록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 삽화는 사물을 실제에 가깝게 표현한 것으로 중국의 전통화와는 화법이 달랐다.

 

..........

 

동양의 전통 화법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서양 화법은 새로운 것이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했다.

움직이지 않는 객체를 평면에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원근법은 서양에서 배태된 문화적 관습의

산물로서 단번에 그 핵심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원근범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과 과정과 이에 맞는 교재가 필요했다.

 

원근법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시각 주체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그 주위에 펼쳐진 대상을 주제와 떨어뜨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화와는 뿌리를 달리하는 미학적 입장이다. 동양의 산수화,

중국 전통 목판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멀리 있어도 크게 그린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와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우리는 물체의 크기를 주관적으로 왜곡해서 바라보기도 하고 선택적으로

한 부분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원근법은 주관적 시각 경험을 과학과

수학을 동원해 객관적인 것으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화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혼용을 중시하고, 다시점多視點이 허용되며, 사물의 배후에 있는 정수를

전달하는 전신傳神을추구한다. 따라서 동양 화법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원근법을 배운다는 것이

단순히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종은 상해에서 출간된 화보에 관심이 많았다. 상해에서 출간된 다양한 화보가 거의 모두 집옥재에

유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상해에서는 서양의 원근법의 영향을 받은 화풍이 유행했다.

따라서 상해 화보를 좋아했던 고종도 자연히 서양 화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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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근법과 입체 도형 그리기

《화형도설》은 정육면체, 원통, 원뿔 등 입체 도형을 그리는 방법을 예시 그림에 다라 그리면서 익힐 수

있도록 설명한 교재이다. 제목의 "화형畵形"은 '형체를 그린다'라는 뜻이고, "도설圖說"은

이 책이 그림을 덧붙여 해설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화형도설》의 본론에서는 원근법의 기본 원리를 설명한 후 실습을 안내하는 구성을 취했다.

먼저 개론에 해당하는 「화형도설」에서 통시지법通視之法의 대강을 설명했다. '통시지법'이란 오늘날의

원근법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당시에는 '원근법'을 '통시지법', '통시법', '시학법視學法'이라고 불렀다.

 

.......

 

 

여기서 원근법의 두 가지 요점을 설명했다. 첫째, 전체 물체나 결합된 물체의 계선은 사람의 눈에서

멀어질수록 더 작게 보인다. 둘째, 사람 눈보다 위에 있는 선은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사람 눈보다

아래에 있는 선은 위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설명에 이어 다시 문이 주체 쪽으로 열려 있는

그림(제삼소도)과 문이 시각 주체보다 먼 쪽으로 열려 있는 그림(제사소도)에 대한 해설을 통해

원근법의 원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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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도설」에 이어서 수록된 본론은 실습을 위한 상세한 설명으로, 「제일폭도설」에서 「제십이폭도설」까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글은 책의 권수에 수록된 삽화를 보면서 삽화와 똑같이 따라 그리는 방법을

설명했다. 삽화는 다양한 입체도형의 투시도다. 이러한 그림을 연습하는 것은 물론 소묘나 풍경화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주요 목적은 설계도면 등의 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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