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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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사조 이야기/추상주의·추상파 미술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Doldosa 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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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1866. 12. 16(구력 12. 4) 모스크바~ 1944. 12. 13 프랑스 뇌이쉬르센. 러시아 태생의 미술가.

 


경력 1922년~1933년 바우하우스 교수
1911년 예술가집단 '청기사' 조직


대표작 동심원이 있는 정사각형, 검은선들, 말을 탄 연인

 

칸딘스키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비정형적이며 서정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칸딘스키는 미술도 음악처럼 점, 선, 면 등의 순수한 조형 요소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때문에 ‘음악파’라는 별칭도 갖게 되었다.

 

작품 ; 〈인상〉, 〈즉흥〉, 〈콤포지션〉

 

 

바실리 칸딘스키(1866.12.16, 모스크바 ~ 1944.12.13, 프랑스 뇌이쉬르센)

러시아어 정식 이름은 Vasily Vasilyevich Kandinsky.

 

현대 회화에서 처음으로 순수추상 작품을 제작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전위파(avant-garde) 전시회가 몇 차례 성공을 거둔 뒤 뮌헨의 주요그룹인 청기사파(1911~14, 靑騎士派·Der Blaue Reiter·(영)The Blue Rider)를 창립하여 매우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형태는 유연하고 유기적인 것에서 기하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형문자와 비슷한 모습(예를 들면 <잔잔한 열정 Tempered Élan>, 1944)으로 발전했다.

 

 

초기 생애

 

칸딘스키의 어머니는 모스크바 사람이었고 그의 한 증조모는 몽고의 공주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시베리아의 작은 도시인 키아크타 출신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칸딘스키는 부분적으로는 유럽의 전통문화에, 그리고 뚜렷하지는 않지만 일부는 아시아의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가문은 품위 있고 부유하며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카프카스 산맥, 크림 반도 등을 잘 알고 있었다. 1871년 그의 부모가 정착한 오데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하는 아마추어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는데, 색에는 각각 신비한 생명이 들어 있다는 그 당시의 신념이 후에 추상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86년 그는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색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 도시의 산뜻한 건축과 성상(聖像)들을 관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미술의 뿌리는 바로 이 성상들에서 찾을 수 있다. 1889년 모스크바대학교는 숲으로 뒤덮인 북부의 볼로그다 지방에 그를 민족지(民族誌)에 관한 연구원으로 보냈으며, 그는 거기에서 본 러시아 민속화의 화려하고 신비적인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궁에서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았으며, 뒤이어 파리를 방문하여 미술관을 돌아보았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여 1893년에 박사학위에 상당하는 학위를 받았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무렵 그는 사회과학에 대한 초기의 열정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이 '러시아인에게 금지된 사치품'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다가 결국 모스크바 인쇄소의 사진과 과장직을 받아들였다. 30번 째 생일을 앞둔 1896년에 그는 장차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당시 에스토니아의 도르파트대학교(뒤에는 타르투대학교라고 함)로부터 법학과 교수직을 제안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독일로 떠났다.

 

 

 

뮌헨 시기

 

 

 

당시 그는 이미 위풍 당당한 풍모를 갖추었으며 이것은 그가 나중에 선생으로 성공하는 데에도 보탬이 되었다.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데다가 단정한 옷차림에 코안경을 썼으며,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삼라만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외교관과 과학자와 몽골의 왕자를 합쳐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평범한 미술학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안톤 아즈베가 경영하는 뮌헨의 사립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아즈베 밑에서 2년을 공부한 뒤 1년간 혼자 활동하다가 뮌헨 아카데미의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의 학급에 등록했다. 칸딘스키는 1900년 학위를 받고 그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그 뒤 몇 년 동안 현대의 사조들과 접촉하면서 미술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처음에는 19세기의 리얼리즘에서 출발했지만, 뒤에는 인상주의와 아르 누보(Art Nouveau,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이라고 함)의 선과 장식적 효과, 신인상주의의 점묘법, 유럽 중부의 표현주의, 프랑스 야수파의 강렬하고 비사실적인 색채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성상들과 볼로그다의 민속미술의 요소도 자주 보여주었으며, 때때로 아시아인의 취향에 맞는 강렬한 색조의 무늬들을 즐겨 그렸다. 그는 뮌헨의 팔랑크스파, 베를린의 분리파, 드레스덴의 브뤼케파 등 유럽 전역에 열린 대규모 반아카데미적 전시회에 참가했다. 1903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 다음해에는 폴란드에서 2차례에 걸쳐 또다른 전시회를 열었다. 1903~08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멀리 남쪽의 튀니지까지, 파리에서 다시 러시아로 두루 여행을 다녔는데, 그 가운데 케루앙(튀니지)과 라팔로(이탈리아), 드레스덴, 파리 근교의 세브르, 베를린 등에서 각각 수개월씩 머물렀다.

 

1909년 그는 독일 화가인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 1902년 이래로 그의 애인이 됨)와 함께 바이에른 지방 무르나우에 집을 얻었다. 무르나우와 뮌헨을 오가며 지내던 그는 처음에는 매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다가 마침내 순수 추상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가 받은 여러 가지 영향들은 점점 하나로 종합되었다. 대상을 완전히 없애려는 그의 생각은 단순히 미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것이 주요원인도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칸딘스키는 결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미술을 위한 미술'에 빠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유화물감과 안료의 특성을 잘 모르고도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위 타고난 화가도 아니었다. 그는 알아볼 수 있는 사물들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색·선·형태를 통해 생각을 표현하고 깊은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순수한 시각적 언어(순수한 음악적 언어와 마찬가지로)로 발전될 수 있는 유형의 그림을 추구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림과 음악의 유사성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왔으며, 많은 사상가들은 색·선·형태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상상적 표현성을 집대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고대의 벽화에서도 훌륭한 추상을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몇 년 동안에 구상 미술을 공격한 사람이 결코 칸딘스키 혼자만은 아니었다. 1909년경 입체파 화가들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분석하여 단편화시킨 모습으로 표현해 일반 관람객들을 당황시켰다. 1910~14년에는 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선구적인 추상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따라서 작품과 연대를 엄격히 조사해보면 칸딘스키가 비구상회화의 '창시자'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며 최소한 그를 유일한 창시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본다면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라 불리는 작품 〈무제〉는 1910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칸딘스키가 추상 미술의 선두로 간주되는 일반적 근거가 되어왔다. 그러나 1950년대에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보다 더 뒤에 그려진 것으로 1913년의 〈컴포지션 7 Composition Ⅶ〉을 위한 습작으로 여겨지는데, 어쨌든 이 작품은 칸딘스키의 발전과정에서 다만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푸른 산 Blue Mountain〉(1908)에서는 이미 비구상화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형태는 도식적이고 색채는 비자연적이며 전체 효과는 환상적인 풍경화를 생각나게 한다. 〈뾰족탑이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Steeple〉(1909,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향이 보이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초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1910년경의 〈즉흥 14 Improvisation ⅩⅣ〉는 그 음악적인 제목이 암시하듯이 사실상 추상화나 다름없으며, 1911년의 〈둘레 Encircled〉를 시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사물들을 묘사하는 대신 식별할 수 있는 출발점이 없는 유형의 그림이 출현했다. 그 뒤 1912~14년에 〈검은 아치가 있는 풍경 With the Black Arch〉·〈검은 선들 Black Lines〉·〈가을 Autumn〉 등의 주요작품이 등장했는데,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은 훗날 1950년대 미국의 뉴욕 추상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 붓을 단숨에 휘둘러 얼룩이 많이 생기는 극적인 양식으로 그린 이 그림들을 칸딘스키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뮌헨의 현대미술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1909년 신미술가협회(新美術家協會·Neue Künstlervereinigung·(영)New Artists' Association.)를 창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 그룹 내에 갈등이 생기자 칸딘스키와 독일의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1911년 이에 맞서 비공식적인 새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 그룹은 칸딘스키가 1903년에 그린 그림들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청기사파라고 했다.

 

 

 

 

러시아 시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포고되자 칸딘스키는 가브리엘레 뮌터와의 관계를 끊고 스위스, 이탈리아, 발칸 반도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찍이 사촌과 한 결혼은 오랫동안의 별거 뒤에 결국 1910년 이혼으로 끝났으며, 1917년 그는 바로 전 해에 만난 모스크바 출신의 여자인 니나 안드레예프스카야와 결혼했다. 이때 그는 50세가 넘었고 신부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 그래서 그는 다시 러시아의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먹고 모스크바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는 그의 의지를 격려했으며, 전위파(avant-garde) 미술가들의 호의와 도움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1918년 그는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 겸 '공공교육을 위한 인민위원회'의 예술부 회원이 되었다. 그의 자전적 저서인 〈Rückblicke〉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모스크바 시당국에 의해 출간되었다. 1919년 그는 '미술문화협회'를 창설했고 모스크바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으며 소련 전역에 22개의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1920년 모스크바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그를 예우하여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21년 그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무렵 소비에트 정부는 전위파 미술에서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 해 말에 그와 아내는 모스크바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전쟁과 혁명 및 그가 맡은 공식 임무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에 머물렀던 이 짧은 기간에 계속 그림을 그렸으며 나아가 그의 미술을 과감히 변형하기 시작했다. 1914년말 뮌헨에서 그린 그의 작품에서는 아직 풍경과 관련된 형태가 더러 보이기도 하지만, 모스크바 시기에 그린 유화와 수채화들은 완전히 추상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점점 초기의 자연스럽고 서정적·유기적인 양식에서 더욱 의도적·논리적·구조적인 양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흰선 White Line〉·〈청색 분할 Blue Segment〉 같은 그림들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 시기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 법학과의 경제학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뮌헨에서는 그가 설립한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그리고 모스크바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항상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그는 1922년초 화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면서도 바이마르에 있는 유명한 건축·공예 학교인 바우하우스(Bauhaus)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을 때 곧바로 수락했던 것 같다. 처음에 그의 직무는 그의 개인적인 활동과 약간 동떨어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바우하우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화가'를 육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형태 요소들에 관해 강의하고 색채학 강의를 개설했으며 벽화 기법을 지도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1925년 이 학교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옮길 때까지 그는 '자유로운' 순수회화에 관한 과목을 가르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다소 틀에 박힌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았던 것 같다. 이러한 경향은 어느 정도의 금욕주의적 미학과 결합된 연구활동 및 예술 정신의 산물이었는데, 1914년 이전의 뮌헨 시기에 나타난 격정적 낭만주의와 비교할 때 이 경향은 지금까지 약간 모호하게 이해되어왔다.

 

칸딘스키는 대체로 기하학적인 추상화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예전의 휘두르는 듯한 붓질을 생각나게 하는 세부로 가득 찬 회화적 공간에 대한 취향과 역동성이 있었다. 칸딘스키가 이 시기에 이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1926년 그가 2번째 주요저서인 〈점·선·면 Punkt und Linie zu Fläche〉을 출간한 데에서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에서 특히 상상에 의한 색(色)의 표현을 강조했는데, 예를 들면 노란색은 트럼펫의 공격적·세속적인 소리에 비유하고 푸른색은 파이프 오르간의 성스러운 소리에 비유했다. 2번째 저서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드로잉의 추상적인 요소들이 나타내는 상상적 효과들을 분석했는데, 예를 들면 수평선은 차분한 것으로, 수직선은 격렬한 것으로 해석했다.

 

 

 

 

파리 시절

 

 

 

그는 1928년 이래 독일 시민이 되었지만, 1933년 게슈타포가 강제로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자 파리로 이주했다. 그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는 차분한 분위기의 〈갈색의 전개 Development in Brown〉가 있는데, 이 제목은 아마 그의 추상미술을 '퇴폐적인 것'으로 여긴 갈색 제복의 나치 돌격대원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의 아파트에서 11년의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그의 후기 그림은 뮌헨 시기의 유기적인 양식과 바우하우스 시기의 기하학적인 양식을 어느 정도 종합한 것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추상적'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구상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1910년 이래로 추구해왔던 시각적 언어는 상형문자와 히에로글리프로 쓴 메시지처럼 보이는 기호들의 집합체로 바뀌었는데, 이 기호들의 상당수는 수생 유충과 비슷하며 때때로 구상적인 손이나 달 모양의 사람 얼굴이 보인다.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강렬한 보라빛 Violet Dominant〉·〈두드러진 곡선 Dominant Curve〉·〈15 Fifteen〉·〈중용 Moderation〉·〈잔잔한 열정〉 등이 있다. 그는 이 작품들과 함께 그것들에 대한 평론을 썼는데, 이 평론에서 과학에 대한 현대사회의 신념이 명백히 실패했으며 따라서 그가 '물리적 물질의 상징적 측면'이라고 부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칸딘스키는 1944년에 죽었다. 그가 20세기 미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며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R. McMullen 글<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칸딘스키의 생애와 업적

   

칸딘스키는 1866년 모스크바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과 정치,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지방 법률제도 조사단원으로 각지를 방문하면서 전통 민속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9년 에르타즈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에 감동을 받아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전에서 모네의 〈짚더미〉에 충격을 받았고 화가로서의 길을 걸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도르피트 대학의 법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인 화가 수업에 들어간 칸딘스키는 독일 아즈베 미술학교에 입학하였고 뮌헨 왕립 미술학교를 거쳤다.

 

1902년 베를린 ‘분리파전’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사실풍의 풍경을 그렸으나 점차 야수파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의 독특한 표현의 길을 찾게 되었다.

 

단순히 대상의 재현을 넘어 색채와 형태 자체의 표현력을 자유롭게 추구했던 칸딘스키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그룹을 결성하고 잡지를 발간했으며 많은 저술과 창작을 병행함으로써 자신이 개척한 추상미술에 이론적인 토대를 세워 나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는 순탄하지 못했다.

 

공산국가가 된 조국 러시아를 떠나 독일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국적 없는 설움을 받았고 작품 또한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 찍혀 박해 받게 되었다.

 

그는 1939년 프랑스 국적을 얻어 파리에 정착하여 만년의 정열을 창작에 불태웠다.

 

칸딘스키는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를 그린 이후 전통적인 기법을 대신하여 점, 선, 면 등으로 추상화를 그렸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창조의 정신세계를 확장시켰다.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짓게 한 체험

 

1908년 칸딘스키는 중요한 체험을 일기에 남겼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생각에 잠긴 채 화실 문을 연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주제가 없었고 알 수 없는 대상을 그렸으며 전체가 마치 불타는 것처럼 밝은 색채들의 반점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내 그림이 이젤 위에 거꾸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자기의 그림이 뒤집혀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칸딘스키는 이 체험에서 객관성이나 어떤 대상의 묘사라는 것은 불필요할뿐더러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우연한 발견은 대상이나 형체를 조금씩 지워나가게 했으며 결국 완전히 버리는 순수추상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명언

- 감동은 어떤 일이 있어도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순수 추상 회화의 선구자.

 

러시아 태생으로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1911년 독일 뮌헨에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여 표현주의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66년 모스크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인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색, 소리, 언어에 특출한 감각을 보여 그의 부모는 일찍부터 그에게 미술과 음악을 공부시켰다.

 

하지만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과 경제학, 민족학을 전공했고,

1892년에 같은 대학교에서 법학 강사가 되었다.

 

 

1896년 뮌헨의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파울 클레,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등 훗날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많은 예술가를 만났다.

 

1901년 전통적인 미술에 반기를 들고 ‘팔랑크스’라는 예술 단체를 설립해 미술 교육을 맡았다.

 

1903년 그의 초기 걸작 〈청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추상적인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1903년부터 1909년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예술적인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1909년 기존 예술에 반대하는 전위적인 미술가 단체인 ‘뮌헨 신미술가 협회(NKVM)’의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하지만 1911년 자신의 작품이 협회 연례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협회를 탈퇴하여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를 만들었다.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청기사파’는 체제를 갖춘 조직이라기보다는 유연한 형태의 모임에 가까웠다.

 

자신들의 예술을 정확히 알리고 소리와 색채 간의 상징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는 예술을 모색했다.

 

단체의 이름은 칸딘스키 작품에서 온 것이지만 ‘말’, ‘푸른색’ 등 다른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이름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해체될 때까지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이는 독일을 넘어 유럽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특히 1911년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선과, 색, 구성으로 이루어진 추상 예술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전쟁을 피해 약 2년 동안 스위스, 스웨덴에서 보낸 그는 1916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 절대주의 추상 화가들과 교류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러시아 예술계가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하면서 칸딘스키의 추상 예술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21년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해 건축과 응용 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응용 미술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원, 직선, 사각형, 삼각형 등 기하학적인 요소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1926년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점, 선, 면》을 발표하며 구성주의 추상 미술 예술론을 완성했다.

 

 

1928년 독일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1933년 집권한 나치 정권이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파리 시절 그의 작품은 점차 유기적이고 구상적인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그는 파리에서도 예술 이론 연구와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지만 입체파, 초현실주의 미술이 대세를 이루며 차츰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멀어져 갔다.

 

 

심지어 1937년에는 나치가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고 쉰일곱 점을 압수했다.

 

미국의 철강 재벌 상속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솔로몬 구겐하임은 구겐하임 재단을 세우고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백쉰 점 가까이 사들였다.

 

이때 모았던 칸딘스키 작품들은 세계 메이저 미술관 중 하나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설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색과 선의 근원적인 관계와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정신적인 교감을 중요시했던 그의 작품과 예술 이론들은 20세기 미술 전반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에게 영향을 주면서 미국 추상 표현주의가 발전하는 데도 기여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7706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19XX34100118

 

 

 

 

바실리 칸딘스키 - 색의 소리를 들어봐

   

   

인상파 이후에 고흐와 고갱이 선보다는 색을 강조한 그림을 들고 나왔다.

 

이 때부터 현대미술은 아주아주 복잡하게 전개된다.

 

자고 일어나면 그들끼리 헤쳐모여를 반복하여 새로운 파를 형성하고, 같은 작가라도

 

몇 년 만에 확 다른 화풍으로 등장한다.

 

사진으로 인해 실물과 똑같은 그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고,

과연 화가들은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야수파는 고흐나 고갱보다 더 강렬한 색을 들고 나타났고,

브라크와 피카소는 입체파라는 이름으로 그림에 해체되어 다시 조립된 사물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남은 일은? 완전히 자연을 버리는 일,

 

그림에서 완전히 사물의 형태를 버리는 일만 남았다.

 

(무언가를 버린 다는 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를 얻을 수 있음을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보여줬다 )

   

자,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

 

칸딘스키는 어느 날 거꾸로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

 

형체가 없음에도 색채만으로 그림의 감동이 전해져왔다.  

이미 너무 많은 추상미술을 본 우리는 칸딘스키의 기분을 잘 모른다.  

어쨌거나 칸딘스키는 이제 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 된다.

 

 

"최초의 순수 추상화가"

 

미술이 추상으로 가야함을 암시한 입체파.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것이 1907년이고,

칸딘스키가 추상을 내세운 것 1910년이었다.

 

나이는 칸딘스키가 훨씬 많았지만, 그들은 같은 시대였다.

 

피카소는 완전히 사물의 형태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칸딘스키는 형체를 완전히 버린 것이다.  

칸딘스키가 추상을 들고 나올 때 이제 몬드리안은 나무를 추상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년 쯤 지나자, 이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추상의 대표자가 된다.

 

 

칸딘스키는 명확한 색깔로 아주 다이나믹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색의 음악이다.

 

그의 작품은 구성(composition)과 즉흥(improvisation)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구성은 기하학적 형태를 의.식.적으로 배열한 것이고

즉흥은 의식 통제없이 자유로운 구사를 의미한다.

 

 

http://blog.naver.com/guarneri/30023276989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의  작품 세계 모음

 

1944년(78세)
12월 13일 파리에서 동맥경화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Tempered Elan. 1944.
Oil on cardboard. 42 x 58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그외의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섬세한 고정

'예술가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다. 즉 그에겐 책무(責務)를 면하고 살 권리가 없다. 그는 종종 그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와 감정과 사상, 이들 모두가 섬세하여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고, 거기서부터 자기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유로운 것은 인생에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예술에 있어서라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한다.' 라고 자각한 그대로 칸딘스키는 실천에 옮겼다.

수직과 수평으로 평행해서 달리는 직선의 교차와 간단한 형상들을 되풀 이해서 그려 놓은 이 작품은 어딘가 건축 장식의 에스키스를 연상케 하나, 각각의 다른 음색이 서로 겹쳐지면서 몇 가지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의 악곡을 스케치한 것처럼 보인다.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빨간 형태

'내가 자연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구하는 길은 '색을 파괴하는 일인 것이다' 라는 비평을 듣고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뮌헨의 비평(부분적이 긴 하지만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은 나의 색채의 화려함을 내가 비잔틴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러시아 비평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난폭한 표현으로 비방을 했다. 내가 뮌헨 미술의 영향으로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는 아주 뻔뻔스럽고, 심술궂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사실은 반대로 말하면 영리한 예술가는 악의가 있는 비평에 견디어 낼 만큼의 냉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칸딘스키가 걸은 길은 시대와 역사를 앞선 외로운 개척의 길이었다.

 


 

둘 사이

1932년에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부득이 옮긴 바우하우스는 더 한층 심해진 나치스 정권의 억압 때문에 33년 3월에 마침내 폐쇄당하고 말았다. 이 때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최후를 끝까지 본 후 파리 근교인 누이이 쉬르 센에 영주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67세나 되었다. 칸딘스키가 오랫동안 고대했던 해외 여행의 실현으로 고대 동양 세계로부터 그리스, 로마, 그리고 근대 회화의 발상지 파리에 안착하기까지 이 귀중한 체험과 여러 가지 시도, 실험 등이 파리 시대로 옮김과 동시에 그의 예술은 '대종합 시대'를 맞고 현란하게 비치는 커다란 한 송이의 꽃을 차례로 피우게 되는 것이다. 불규칙적인 두 개의 형태를 대립적으로 대치시켜 긴장과 역학적 구조로 이끌면서 개개의 형태가 자립하여 제각기의 위치에서 응결하고 있다.

 


 

伴奏가 딸린 중심

노란색을 주조로 하여 바탕에 칠한 다음 복잡한 형태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으나, 매우 정리되고 단순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칸딘스키의 회화의 구도가 평면성의 강조를 기본으로 하고, 형태의 도상학적(圖像學的)인 배치를 목표로 삼고 있는데 대해서는 러시아의 이콘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사실 칸딘스키는 '나의 예술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원천, 그것은 오직 러시아의 이콘이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또한 이 해에는 나치스 정부는 칸딘스키 작품 57점을 '퇴폐 예술'이라고 압수했다. 칸딘스키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뭉크도 같은 일을 겪었는데, 만년에 접어든 예술가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칸딘스키가 질주하는 기마(騎馬)를 작품의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말을 좋아해서 그렸다기보다는 화면에 속도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말이라는 대상물을 차용한 듯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인가. 화면에는 사선으로 비탈길 같은 것을 설정하여 한층 속도감을 고취시키면서 터치 또한 온통 사선으로 경사지게 표현하고 있다. 붉은 점으로 나타낸 태양과 주위의 점들은 엑조틱한 분위기를 짙게 감돌게 하며, 여러 방향에 걸쳐 실험적인 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흥을 되도록 강렬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그것은 '내적 필연성'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흥> 시리즈와 <인상> 시리즈와 아울러 <콤포지션>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 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콤포지션>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1909년 3월에 야울렌스키의 노력으로 뮌헨에서 신(新) 예술가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칸딘스키가 의장이 되어 제 1회 전람회와 제 2회 전람회를 열었다. 이 때에 피카소, 브라크, 브라망크, 루오 등도 출품하여 국제 전위 미술 전람회의 성격을 보였으나, 제 3회 때 의견 대립이 생겨 신 예술가 동맹에서 탈퇴하여, 곧 새로운 그룹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靑騎士>)'를 결성한 해에 제작된 작품이다. '공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으나 구상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평면적으로 용해시켜 전개함과 동시에, 임의 곡선과 두 개의 힘이 교대로 작용하는 각(角)이 있는 선의 등장 등은 자기의 사색에 확신을 가지는 시기였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회화에 새로운 표현이 전개될 것을 비쳐 보이고 있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연속

칸딘스키의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음의 강약은 선이 가지는 날카로움의 증감 내 지는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활(弓)에 가해지는 손의 가감은 연필에 가해지는 손 힘의 경우와 완전히 일치한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음악의 도형적 표현-기보법(記譜法)-이 점, 선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조합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 있는 일이며, 또한 특기할 일이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 와 색이 만들어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 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결합

1928년에 그로피우스가 사직하고 마이어가 교장이 되는 한편, 기능주의로 방향을 바꾼 바우하우스는 30년에 마이어로부터 미이스 판 델 로에로 다시 교장이 바뀌어 처음의 이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시렌머, 클레 등 주요 스텝이 잇달아 떠나고, 강대해진 나치스의 압박도 심해져서 고난의 길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곤란한 가운데서도 칸딘스키의 화풍은 무르익어 갔다. 이 작품은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힘차고 간결한 구성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구성은 잘 계산되어져 훌륭히 짜여져 있지만, 칸딘스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설정되지 않아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큼직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유기적으로 교착하여 하나의 구조를 얻고 있는 색다른 부류의 작품이다.

 

 

 

정확한 대비

지나치게 정선되어 단조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복잡한 형태가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놓여져 있다. 중앙에 강조된 율동적인 커다란 형태의 내부에 즉흥적으로 보이는 묘선과 아무 생각없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은 기호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을 철저히 검토하고 논리 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점, 선, 면' 등의 저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칸딘스키가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그의 조형 언어를 확인하고 검증해 보이고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로부터 표현주의, 비구상 표현에서부터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현형식을 변화시킨 칸딘스키가 만년에 기호적 배열까지 나타낸 화풍은 고향에서의 체험으로 회귀해 갔다고 하겠다.

 

 

 

여자들이 있는 무르나우의 거리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 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예나 지금 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 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주관을 강하 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나무줄기가 있는 풍경

이 작품에서는 공간감의 표현과 형의 대조로써 원근법적 묘사를 기피하고 화면에 수직으로 내린 굵은 나무 가지와, 중앙 부분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색 면, 그것들이 교차하는 십자형(十字型)의 강조는 화면에 큰 구조를 느끼게 한다. 아직 대상은 남아 있으나,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되고 색채는 매우 절제되어 단순하고 간결함을 본다. 빨강·노랑·파랑·초록 등 색채들이 어울리고 있는 점은, 독일에서 그렸지만, 유럽적인 아니면 러시아 적이라고 할까. 어딘지 짙은 노스탤지어가 스며 있어 모스크바의 황혼, 붉은 환상의 지붕들을 연상시켜 향수와 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차원 높은 조화는 독창적인 세계의 구축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검은 원 속에  

 

 

 

 

 

 

 

 

 

 

 

 

 

 

 

 

 

 

 

 

 

 

 

 

 

 

 

 

 

 

 

 

 

 

 

 

 

 

 

 

 

 

 

 

 

 

 

 

 

 

 

 

 

 

 

 

 

 

 

 

 

 

 

 

 

 

 

 

 

 

 

 

 

 

 

 

 

 

 

 

 

 

 

 

 

 

 

 

 

 

 

 

 

 

 

 

 

 

 

 

 

 

 

 

 

 

 

 

 

 

 

 

 

 

 

 

 

 

 

 

 

 

 

 

 

 

 

 

 

 

 

 

 

 

 

 

 

 

 

 

 

 

 

 

 

 

 

 

 

 

 

 

 

 

 

 

 

 

 

 

 

 

 

 

 

 

 

 

 

 

 

 

 

 

 

 

 

 

 

 

 

 

 

 

 

 

 

 

출처; http://blog.naver.com/hyh1822/20129901783

www.abcgallery.com/K/kandinsky/kandinsky.html

http://2proo.net/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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