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 가요] '꽃 피는 北滿線' - 최남용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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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꽃 피는 北滿線' - 최남용 노래

잠용(潛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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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北滿線'

박향민 작사/ 전기현 작곡/ 노래 최남용


< 1 >

꽃을 실은 기차냐, 봄을 실은 기차냐?
북만벌 천리 길에 새 고장의 해가 뜬다 

낭랑객 기타 우는 청춘의 고개 넘어

달려라 달려~ 아아아아 아아 아~

나부끼는 검은 연기 희망의 깃발이냐?


< 2 >

노래 실은 기차냐 춤을 실은 기차냐?
북만벌 개척지에 새 고장의 달이 뜬다
豊年鳥 두견 우는 축복의 물을 건너

달려라 달려~ 아아아아 아아 아~

구성진 기적 소리 황금의 軍號러냐?


< 3 >

웃음 실은 기차냐 감격 실은 기차냐?
북만벌 신 천지에 새 고장의 별이 좋다
農産隊 놀이 좋은 광명의 들을 지나

달려라 달려~ 아아아아 아아 아~

꾸냥의 웃음 소리 당연히 마음 편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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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냥: 중국어 姑娘에서 유래한 일본어 구냥 (クーニャン). 소녀, 아가씨라는 말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의리파 가수 최남용의 쓸쓸했던 삶 (상)


쌀 장사 하다가 고향 선배 이애리수 권유로 가요계 데뷔 

한국 가요사의 흐름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명성이나 활동의 내용이 상당히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가수 최남용(崔南鏞`1910∼1970)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한 번 유명가수로 고정된 분들의 이름은 줄곧 가요사에 등장하는데 최남용의 경우는 어떻게 해서 이토록 대중들의 기억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가수 최남용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1935년 10월에  당시의 인기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의 결과를 먼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투표의 결과에서 1위는 채규엽, 2위는 김용환, 3위는 고복수, 4위는 강홍식, 그리고 5위에 오른 가수가 바로 최남용입니다. 서양의 테너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를 연상시키는 맑고 깨끗한 미성에다 얼굴이 워낙 잘 생겨 희랍의 조각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꽃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최남용> 

 

최남용은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수완이 좋고 부유한 ‘송도상인’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성장기 때부터 내성적이고 감상적 기질이었던지라 문학, 음악 쪽으로 호감을 가졌었고, 송도고보를 다니던 중에는 달 밝은 밤에 기타와 바이올린을 들고 선죽교와 만월대로 가서악기연주와 가창연습에 심취했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이 기울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쌀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미곡상(米穀商)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최남용은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틈틈이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가 고향 개성을 다니러 왔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최남용에게 찾아와 서울로 가자고 권유했고, 이애리수는 그를 자신이 전속으로 활동하던 빅터레코드사 이기세(李基世) 문예부장에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최남용이 22세 되던 1932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빅터레코드사에는 이애리수 외에도 동향 선배인 작곡가 전수린 선생까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최남용은 오디션을 거친 다음 1932년 12월, 데뷔 작품으로 ‘갈대꽃’(이고범 작사`전수린 작곡), ‘마음의 거문고’(이고범 작사`김교성 작곡) 등 두 곡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빅터사에서 ‘덧없는 봄비’ ‘방아타령’ ‘산나물 가자’ ‘눈물과 거짓’ ‘서울소야곡’ ‘사공의 노래’ 등 30여 곡을 발표했습니다. 1935년 8월 ‘애달픈 피리’를 마지막 작품으로 발표하고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빅터레코드와 결별하게 되었지요. 빅터 시절에는 ‘홍작’(紅雀)이란 예명으로 일본 빅터사에서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빅터사에서 활동할 때 가장 콤비를 이루던 작사가는 이고범(이서구), 이하윤, 이현경 등입니다. 그 밖에도 시인 김안서, 김팔봉 등과 이벽성, 유백추, 고마부, 이청강, 박영호, 두견화 등과도 함께 했습니다. 콤비 작곡가로는 단연코 15곡의 김교성, 8곡의 전수린 등 두 분입니다. 그 밖에도 장익진, 정사인, 이하윤, 이경주, 조일천, 이경하 등이 있습니다.  

 

당시 가수들은 한 레코드사에서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조만간 다른 회사로 소속을 옮길 계획이 있는 가운데서도 두 회사 이름으로 제각기 음반을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최남용도 이에 해당합니다. 1935년 1월에 ‘즐거운 연가’와 ‘거리의 향기’ 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을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합니다. 소속사를 완전히 옮긴 다음에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노라면 바로 이 음반이 태평에서 발표했던 첫 앨범으로 기록이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는 구룡포(具龍布)란 예명과 최남용이란 본명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의리파 가수 최남용의 쓸쓸했던 삶 (하)


남 돕는 데 앞장섰지만 정작 자신은 곤궁한 생활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최남용 앨범의 곡목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돈바람 분다’ ‘황금광(黃金狂) 조선’ ‘조선의 봄’ ‘비오는 선창’ 등 80여 곡이나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마지막 곡은 1938년 6월의 ‘홍등야화’(紅燈夜話)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30여 곡을 발표했던 빅터사보다 무려 여든 곡 넘게 발표했던 태평레코드사가 가수 최남용의 실질적인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9년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통사정’ 등 4곡을 발표합니다. 1939년 12월에 발표한 ‘눈 쌓인 십자로’가 최남용이 가수로서 발표했던 마지막 곡입니다. 그러니까 최남용이 식민지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도합 7년 남짓한 세월입니다.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박기채 감독이 이광수의 원작소설 ‘무정’(無情)을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남용은 형식의 배역을 맡아 주연배우로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시인 김안서가 작사한 주제가 ‘무정’을 직접 불렀습니다. 여주인공 영채 역에는 배우 한은진이 출연했고, 그 밖에 조연으로는 김신재, 이금룡, 김일해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이후 일제 말에는 주로 영화계와 그 주변에서 머물며 친일영화 ‘반도의 봄’(1941) 주제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지난날 특별한 사랑을 받던 가수로서의 기억은 점차 그 자취가 엷어져가기만 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최남용은 무궁화악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다녔습니다. 말하자면 극장 쇼 무대의 프로모터로서 남다른 기질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당시 1세대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몹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남용은 선배가수를 돕는 공연을 열었는데 그 수익으로 채규엽의 삶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1946년 7월에는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궁화악극단 주최로 특별한 공연 하나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던 여성가수 박향림(朴響林) 추모공연입니다. 이 공연의 전체기획과 진행을 가수 최남용 선생이 맡았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용은 대구로 피란 내려와 당시 대구 육군본부 휼병감실(恤兵監室) 소속의 군예대(KAS) 조직사업에 앞장섰고, 정훈공작대의 기획실장으로도 일했습니다. 이후 영화제작 일을 계속하게 되었을 때 배우지망생 김경자가 최남용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김경자가 정식으로 예명을 만들게 되었을 때 은인이었던 최남용을 아버지처럼 생각해서 최지희(崔智姬)로 지었다고 합니다.

 

최남용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고보 학업을 채 못 마친 상태에서 쌀장사를 하다가 문득 가수의 길로 접어들어 빅터, 태평 두 레코드사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계로 활동 방향을 바꾸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평소 남을 돕는 의리파로서의 명성은 높았어도 정작 자신의 삶은 늘 곤궁하고 쪼들리기만 했습니다. 1967년 최남용은 회갑도 되기 전에 뇌일혈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던 최남용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슬하에는 일점혈육도 없는 채로 1970년, 쓸쓸한 병상에서 회갑을 맞이한 최남용은 오직 부인 윤난성(尹蘭星) 여사 혼자서만 머리맡을 지키며 흐느끼는 가운데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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