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기행](10)연산군-강화 교동도

댓글수0 다음블로그 이동

聽 雪

[유배지기행](10)연산군-강화 교동도

세발까마
댓글수0

[유배지기행](10)연산군-강화 교동도


입력 : 2005.02.24 15:50:48 경향신문




구경 삼아 강화도로 가는 길은 멀지 않다. 

그러나 유배지 ‘교동도’로 가는 길은 멀다. 이제 강화도는 연륙교 때문에 섬이라 부르기도 뭐하지만, 교동도는 아직도 멀기만 한 섬이다. 

육안 거리는 결코 멀지 않지만 마음으로 짚어보는 거리는 너무도 멀다. 

나는 왜 교동도가 먼 거리인지 연산군 유배지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교동도는 일단 강화도의 ‘황복마을’로 잘 알려져 있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오후 2시 카페리호가 막 떠날 참이어서 차를 싣고 배에 올랐는데,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교동도까지는 배로 불과 15분 거리였다. 

그런데 마침 썰물 때라 바닷물이 빠져나가 직선 거리를 놔두고 빙 돌아서 가야만 하기 때문에 50여분이나 걸린다고 했다. 


갑판 위에서 바라본 교동도의 하늘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며 교동도 하늘을 먹구름으로 뒤덮어놓고 있었다. 

가시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교동도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형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모에 연루된 왕실 친·인척들의 유배지가 되어 그곳에서 사사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동도로 유배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는 고려의 희종, 조선의 연산군 등 두 왕이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도 교동도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된 것은 1506년 9월이었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배다른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위로 세우는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유배당하게 된 것이다. 


일단 교동도 월선리 선착장에 내리긴 했으나, 연산군 유배지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연산군 유배지로 추정되는 곳이 세 군데나 있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교동읍성이 있는 읍내리, 신곡동 신골, 고구리 영산골 등이 모두 연산군 유배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연산군이 유배 당시 거처했다는 집터로 추측해 표석을 세워놓은 곳은 읍내리다. 

강화군청에서도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므로, 일단 그곳을 연산군 적거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연산군 적거지 표석이 서 있는 곳은 교동면 읍내리 270번지다. 

월선리 선착장에서 빠져나와 왼쪽 도로를 타고 가면 읍내리가 나온다. 

읍내리로 들어서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교동향교로 들어가는 곳이 보이는데, 연산군 적거지는 그 반대편 언덕배기에 있다. 

도로에 별도의 안내 표지판이 없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아야만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연산군 적거지는 교동읍성 내에 있는데, 성은 다 무너지고 남문만 겨우 모양새를 갖춘 채 남아 있다. 


교동읍성 남문을 지나 연산군 적거지에 도착할 때쯤부터 하늘에서 눈이 뿌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세차게 몰아쳐 눈발이 사선을 그으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댔다. 

연산군 적거지 표석이 회색 눈발 속에서 희미하게 눈에 잡혀왔다. 

밭둑에 초라하게 서 있는 표석과 그 옆에 강화군청에서 세운 조악하기 그지없는 안내판이 남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가을이 산야를 갈색으로 덮을 무렵인 9월에 교동도로 유배온 연산군이 초겨울 눈발이 내릴 때인 11월에 죽었으니, 

그가 죽는 날에도 이렇게 먹구름 속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는지 모를 일이다. 

연산군 적거지 밭둑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살아 움직이는 건 온통 눈보라뿐, 바다는 출렁임조차 멈춘 채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듯이 보인다. 

바닷가 마을도 인기척 하나 없이 숨을 죽이고 있다. 

오전만 해도 푸른색이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인 것은, 어쩌면 연산군의 죽은 넋이 울화를 터뜨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다시 배를 타고 교동도를 떠날 때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하늘에서 점차 먹구름이 때를 벗으면서 그 사이로 붉게 취한 석양이 내비치기도 했다. 

어쩌면 연산군도 저 석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수백 년 과거의 일을 사람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련만, 저 석양은 그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가·엄광용 www.aromabooks.com〉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여행길잡이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는 김포가도를 타고 가는 외길이므로 별도의 교통안내조차 필요 없는 곳이다. 

그러나 주말이면 수도권 차량들이 많이 몰리는 데다 외길이므로 교통체증이 극심한 구간이다. 

새벽 일찍 떠나서 강화도를 한 바퀴 돌고 오후 이른 시간에 귀경하는 것이 좋다. 

강화도에서 차를 배에 싣고 갈 수 있는 선착장이 두 곳 있는데,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건너가는 코스와 창후리에서 교동도로 가는 코스다. 

흔히 석모도는 사람들이 많이 배를 타고 건너가기 때문에 뱃길을 따라오는 갈매기들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교동도로 가는 뱃길에는 갈매기 그림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다. 

그만큼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이다.




맨위로

https://blog.daum.net/keiti/16545577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