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 혜문스님 환속기

문화재제자리찾기에 몸 던져온 그가
승적 버리고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혜문(42·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조계종의 유명 승려 중 한명이었다. 일제 강점기 등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외부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 환수 운동에 앞장서온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조선왕실의궤, 대한제국 국새 등이 그의 노력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최근 혜문은 더이상 승려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를 쏙 빼닮은 아들도 낳았다. 거처인 봉선사에서도 하산했다. 주목받던 조계종의 승려 혜문은 왜 하산을 결심한 것일까. 환지본처(還至本處). 세상 만물 무엇이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재든 인간이든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혜문의 이러한 철학은 어쩌면 혼란스러운 최근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본 해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와의 인터뷰는 이달 두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그의 승려 생활 20여년, 문화재 운동 10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승려의 삶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것, 혹은 문화재운동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 대해 말했다.

‘비승비속’의 내 인생 3막은 인간제자리찾기운동

▶ 혜민이 아닙니다. 혜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 외부에 빼앗긴 문화재들이 참 많은데요, 이 문화재들을 되찾아오는 데 앞장서온 분이 혜문입니다. 그가 이제 승려직도 내려놓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사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그는 왜 승적을 버렸을까요. 그의 철학과 인생 이야기 같이 한번 들어보실까요.

지난달 17일 승려 혜문(42·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일제 때 무단 반출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의 반환과 관련해 일본 법원의 조정기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혜문은 율리사지 석탑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 오쿠라호텔 쪽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 요청을 한 상태다. 이날 아침 일찍 도쿄 시내 한 호텔에 묵고 있던 혜문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냥 알아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혜문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문화재청 관계자가 혜문에게 더는 스님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호칭을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혜문이 귀국하자마자 문화재청 관계자는 그를 찾아와 승적 정리 여부를 확인했다. “문화재청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니까 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보죠 뭐. 하하하.” 혜문은 호탕하게 웃었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승려 그만두는 것에 이렇게 민감한 거죠? 원효대사가 아들(설총) 낳았을 때도 이렇게 주목받았을까? 하하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적을 둔 승려 혜문은 지난 10여년간 우리의 빼앗긴 문화재 환수 운동의 선두에 서왔다. 2006년부터는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로 일했다. 2006년 일본 도쿄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47권) 환수부터 2011년 일왕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1205권) 환수까지 혜문이 관여하지 않은 문화재 반환운동은 없었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 때 가져온 대한제국 국새 또한 약탈 문화재라는 사실을 밝혀낸 혜문의 반환운동 덕분이었다. 단순히 우리 것이니까 돌려달라고 하기보다 자료를 통해 언제 어떻게 약탈되었는지 밝힌 뒤 지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썼다.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문화재 관련 사업을 진행한 그는 열정적인 시민운동가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친숙한 불교계 인사 중 한명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혜문은 2012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혜문은 이제 더 이상 승려가 아니다. ‘비승비속, 승도 아닌 속인도 아닌 그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5일 오후 혜문이 서울 종로구 경희궁 앞 서울역사박물관 앞뜰 연못가에 서자 그의 모습이 물 위로 비쳤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혜문은 이제 더 이상 승려가 아니다. ‘비승비속, 승도 아닌 속인도 아닌 그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5일 오후 혜문이 서울 종로구 경희궁 앞 서울역사박물관 앞뜰 연못가에 서자 그의 모습이 물 위로 비쳤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올해 초부터 혜문은 남양주시 흥국사에서 유출된 탱화의 제자리 찾기 운동에 앞장섰다. 유출 의혹의 책임자로는 과거 흥국사 주지였던 일면 스님(현 동국대 이사장)이 지목되고 있다. 탱화 유출을 문제 삼던 즈음 혜문은 20년 가까이 거처로 삼던 봉선사를 나왔다. 이어 더는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젊고 유능한 승려 혜문의 뜻밖의 행보에 조계종 안팎의 이목이 쏠렸지만 그는 구체적인 속사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왔다.

혜문은 왜 갑자기 승려의 삶을 내려놓겠다는 것일까. 그가 조계종의 승려로서 바라본 조계종 내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극적으로 승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속사정이 궁금해 혜문을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5일과 19일 서울 종로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실에서 두차례 이뤄졌다. 혜문은 인터뷰 내내 밝게 웃었고 민감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일면 스님 상좌가 주지로 와 불편해져

-사람들이 호칭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내가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기 때문에 나를 스님으로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승려는 성스러운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호칭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원래 승려(僧侶)는 무슨 뜻이지?

“‘승’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상가(sangha)의 음역(한자를 이용해 외국어의 음을 표현)이다. 부처님 모시고 사는 출가한 대중의 모임이 상가다. ‘려’는 떠돌아다닌다는 뜻이지.”

-더 이상 승려가 아니라면 일반인으로 봐야 하나?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사람으로 알아달라. 승려도 아닌 속인(俗人·일반인)도 아닌 사람이다.”

-환속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환속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승려 아니면 속인, 속세 아니면 정토(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으로 번뇌의 구속에서 벗어난 세상)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그냥 하산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산에서 살았으니까.(웃음)”

-그럼 비승비속의 사람으로서 이제 자유롭게 살 것인가?

“수행자의 삶을 포기한 게 아니다. 그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다. 구도자란 무얼까. 진실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다. 
내가 20대 중반(1998년) 어느 날 그 진실을 찾으려고 갑자기 산으로 들어갔다면 이제는 그것을 세상에서 찾으려는 거다. 
내 껍데기가 승려이고 승려가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산속에서 부처님 모시고 벽 보고 있는 것도 구도이고, 세상에서 진실을 찾는 것도 구도이다. 
불교 사상의 핵심이 ‘불이(不二) 사상’이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다르지 않고, 중생과 승려가 다르지 않다.”

-좀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승려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을 아마 잘 못 봐서 그런 것 같다. 승려는 그러나 종신제가 아니다. 많은 승려가 중간에 승려 생활을 내려놓는다. 고은 시인도 원래 승려였다. 먼 과거 매월당 김시습(조선 초기 학자)이나 주원장(명나라 태조)도 승려였다.”

-승려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

“더 이상 계율을 지키고 사는 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엄격한 삶을 살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더는 계를 지키며 살 힘이 없다.(웃음) 인간의 감각기관이 눈·코·입처럼 열려 있으면 관심이 외물(外物)에 가게 되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부처님께서 육근(눈, 귀, 코, 혀, 몸, 잡념)이 도적이라 했다. 그것을 끊어야 수행이 가능하다. 방의 창문을 다 닫으면 외부가 아닌 방 내부에 집중하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 때문에 금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금욕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나?

“(일어서서 바지를 살짝 내리며) 불로 지졌다.”

그의 배 아래에는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의 상처가 나 있었다. “20대 후반에 그렇게 했는데.(웃음) (금욕 결심이 무너질까 싶어) 일부러 여자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여자가 두려웠다. 전화번호를 주면 일부러 안 받았다. 옷도 일부러 지저분하게 입고 다녔다. 내가 잘생기면 반할까봐.(웃음)”

-‘흥국사 탱화 반출’을 문제제기한 것 때문에 종단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가?

“그런 건 아니다. 탱화 반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일면 스님(자승 총무원장 측근)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일면 스님의 상좌(고승의 대를 잇는 중)가 봉선사 주지로 결정됐다. 

[주: 2015.9.3 산중총회에서 봉선사 주지에 단독입후보한 일관스님 (불암사 주지) 선출

 일관스님은 일면스님(불암사 회주)을 은사로 출가, 1979년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80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보현사와 불암사주지, 포교원 포교부장, 종립학교 관리위원장, 14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일면 스님을 모시는 분들이 봉선사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절에 있기 불편해졌다.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데 마침 부처님 불상을 바라보면서 ‘사내대장부가 쫓겨 다니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생 3막을 열자’고 결심을 한 것뿐이다. 
세상살이는 연극처럼 막(幕)이 있다. 1막은 누구나 비슷하다. 태어나서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과정이다. 2막은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대개 2막에서 인생을 끝내지만 간혹 3막을 여는 사람이 있다. 나의 2막이 승려의 삶이었다면 3막은 ‘비승비속’의 삶이다. 2막에 빌붙어 살면 적당히 명예도 유지하면서 살겠지만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2006년 도쿄의 조선왕조실록서
2014년 오바마의 국새 반환까지
50개 넘는 문화재 환수 주도
최근엔 흥국사 탱화 제자리찾기
그가 승려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서 귀국하자마자 문화재청서
승적 정리 여부 확인하는 전화
“왜 제 승적에 민감히 반응하죠?
원효대사가 설총 낳았을 때도
이렇게 주목받았을까? 하하하”

고개 돌린 에이칸도 부처상의 울림

혜문 대표의 집무실에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려 뒤를 보고 있는 부처상 사진이 놓여 있다. 
그는 지난해 가을 이 부처상을 발견하고 자신의 갈 길을 또한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일본 교토의 에이칸도(永觀堂. 정식 명칭은 선림사이지만 보통 에이칸도로 불린다)에서 고개를 돌린 부처상을 발견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가 열반(세상을 뜸)한 뒤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뼛가루를 흙에 개어서 소조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고 한다. 그 소조상이 뒤를 돌아보는 상이었고 에이칸도의 부처상이 이와 유사하다. 이 부처상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원효가 왜 뒤를 돌아본 것일까. 혈육 때문이었을까. 수행자는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걸까. 높은 곳인가 중생인가 등등. 결국 내가 비승비속의 삶을 택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한 게 이 에이칸도 부처상이다.”

최근 아이를 낳고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혜문 제공
최근 아이를 낳고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혜문 제공
-최근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하던데 모두 사실인가?

“그렇다. 사내아이를 낳았다. 더 이상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한 건 지난해 초부터다. 모두 그즈음 벌어진 일이다. 결혼은 나와 함께 문화재 운동을 하던 이와 했다. 문화재 운동을 시작하며 10년간 50개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다짐했던 적 있다. 조선왕조실록, 대한제국 국새, (현충사 등) 일본식 조경 철거 등의 일을 2013년 하반기까지 끝냈는데 그중 60%를 지금의 처와 만난 뒤 해냈다. 유능한 사람이어서 큰 도움이 됐고 서로 온갖 일을 겪으며 호감을 갖게 됐다.”

혜문은 최근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부인과 함께 갓 낳은 아기를 안고있는 혜문의 사진이다.

-아버지가 뭐라시던가?

“손주 보신 것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문화재 운동을 늘 응원해오셨는데 아들 낳은 게 내가 대한제국 옥새를 찾아온 것보다 더 큰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법화경에 삼계화택의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가 불난 집에 갇힌 아들을 구하러 들어가는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데 아버지가 되는 게 종교적으로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생각한다. 석가모니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불경에 아버지와 관련한 비유가 많다. 어쩌면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게 다 부처님의 뜻일 수도 있겠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이제 다시 승려로 돌아오는 건 어렵겠다.

“부처의 제자 중에는 7번이나 출가한 사람이 있다.(웃음) 수행을 위해 출가했다가 자손을 잇는 문제 때문에 다시 속세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게 사실 이상한 게 아닌데, 현대 사회는 속세와 연을 맺는 게 돈과 권력과 연관이 되니까 그걸 금지하는 경향이 있다. 타이(태국)도 그렇고 소승불교는 누구나 출가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렇게 한다. 우리의 태고종도 그렇고. 승려가 종신제라는 건 일종의 편견이다.”

-아들 이름은 뭐라고 지었나?

“자겸이라고 지었다. 대학(大學: 경전의 하나)에 여호호색 여오악취(如好好色 如惡惡臭)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 하라는 건데, 군자는 스스로를 속이듯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 아들이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았으면 한다. 내가 아들 낳은 걸 숨기지 않고 이렇게 공개하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원래 이름이 뭔가?

“김영준이다. 혜문은 법명(승려가 된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혜문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에이칸도 부처상’ 액자를 들고 있다. 그는 지난해 이 부처상을 발견하고 승려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혜문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에이칸도 부처상’ 액자를 들고 있다. 그는 지난해 이 부처상을 발견하고 승려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터져버린 고막과 어떤 특별한 능력

혜문은 1998년 출가한 뒤 조계종이 승려가 되기 위해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절차를 이수하지 않았다. 
조계종 누리집의 승려 교육 과정에는 ‘출가 뒤 6개월간 행자 수련기간을 거쳐 사미(남자), 사미니(여자)가 된 다음 4년간의 승가대학 과정을 거쳐 비구(남자) 250계, 비구니(여자) 348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된다’고 게재돼 있다.

-비구계를 받지 않았던데 이유는 뭔가?

“존경하는 노스님(월운) 곁에서 매일같이 방 닦고 옆에서 공부하고 그런 게 좋았다. 어디 가라고 해도 싫었다. 자기가 앉아 있는 그곳에서 수행을 통해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 어디 가서 스펙을 쌓는다고 세상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건방진 생각을(웃음) 했다.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나중에 어르신들이 특별 비구계를 주려고 많이 노력하시긴 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대중에게 존경받는 스님들 가운데에서도 비구계를 받지 않은 분들이 많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불기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군자는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걸 찾고 그 길을 따르며 살고 싶다.”

혜문의 초등학교 입학 때 모습. 사진 혜문 제공
혜문의 초등학교 입학 때 모습. 사진 혜문 제공
혜문의 대학 시절 모습. 사진 혜문 제공
혜문의 대학 시절 모습. 사진 혜문 제공
-어쩌다 승려의 길을 걷게 됐는지?

“원래는 나도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할 뻔했다. 95년 졸업(성균관대 사학과)하고 한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안 맞아서 1년 만에 그만두고 대학원(국문학)에 진학했다. 그때 유충엽 선생(승려·역술인)을 알게 됐다. 그분이 오행과 주역을 정리해줄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냥 컴퓨터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돕게 됐다. 유충엽 선생의 대필 작업을 하면서 소위 ‘명리’라는 학문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유충엽 선생 댁에 고은 시인도 찾아오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내가 승려에 호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출가를 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

“98년 어느 날 갑자기 승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발심자경문>이라는 책이 있다. 중이 되면 처음 읽게 되는 책이다. 여기에 ‘나의 말을 들으라’는 구절이 있다. 어느 날 자기 마음속의 진실한 자아가 헛껍데기인 자신에게 말을 거는데 그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선생(유충엽)께서 ‘자네가 머리를 깎으면 마흔둘에 산에서 내려올 거’라고 그러셨는데 정말 그러네. 희한한 분이야. 역시.(웃음)”

-출가 뒤 어떤 깨달음의 순간 같은 게 있었나?

“서른살 되던 해였던 것 같은데 선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버렸다. 인간 이성의 어떤 단계를 넘어갈 때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지면 그렇게 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내가 그랬다. 2002년 1월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왼쪽 귀 고막이 터져버렸다. 뻥 소리가 나더라. 옆에 있던 스님이 내게 귀에서 피가 난다고 해서 고막이 터진 것을 알았다.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그 에너지가 폭발한 탓 같은데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3년간 광인(미치광이)이 되었다. 사람을 패기도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불경을 읽으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봉선사 월운 스님이 내 스승인데 그런 때일수록 불경을 읽으라 했다. 회암사에 앉아 3년간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살폈다. 부처님이 49년간 편 일대시교(一代時敎: 부처가 열반할 때까지 전한 가르침)를 3년간 다 보게 된 거지. 그러다 2004년께 광증이 걷혔다. 그 이전에는 금강경이나 원각경 같은 불경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됐는데 그때 이해가 됐다. 벽돌에 뭔가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불경을 보며 한발 한발 내딛는데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하는 능력 같은 게 생겼다.”

-그게 뭔가?

“텍스트를 보는 힘. 뭔가를 읽으면 스캔하듯 머릿속에 자동 저장되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바로 머릿속에 저장이 됐다. ‘불보살의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힘을 줌)’ 같은 종교의 힘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