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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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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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과 맞장 뜨려고 백련암 올라갔죠"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① 나를 찾는 길
17.06.13 09:28 | 글:김병기  오마이뉴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종교·문화·학술·시민사회계 원로 40여 명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명진 스님의 승적을 박탈한 조계종 총무원의 징계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명진 스님이 지나온 삶을 조명하는 5편의 글을 싣는다.[편집자말]
▲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이 지난해 11월 상원사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났을 때의 모습. ⓒ 정대희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 임현 의현의 말인데, 
부처님의 말씀조차 우리를 속박한다면 깨뜨려야 한다는 선의 정신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절대 부정을 통해 절대 긍정을 추구하는 불교 정신의 진수인데, 
그 어떤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자유를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여기 조계종 승적을 박탈당한 한 승려가 있다. 
명진 봉은사 전 주지. 그동안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판했다는 게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조계종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총무원은 2015년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해종 언론'(종단을 해치는 언론)으로 규정하고 출입, 광고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다. 
쓴소리에 귀를 막은 자승 총무원에게 살불살조의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야 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불교 용어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자비의 정신은 무작정 대상을 품는 게 아니다. 
명진 스님은 "힘없고, 탄압받고, 차별받는 생명에는 하염없이 측은지심을 품지만, 
그릇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죽비나 심지어 목탁으로 머리를 세게 내리쳐서 깨뜨려야 하는 게 자비심의 진수"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 때 그가 그랬다. 그는 무도한 정권의 등짝을 서슬 퍼런 죽비로 내리쳤다. 
자승 총무원장은 이명박 씨가 대통령 후보로 뛰었을 때, '747 불교지원단' 상임고문으로 도왔지만 그는 달랐다. 
선거운동 때 이 후보가 인사 차 봉은사에 오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거절했다. 
당선된 뒤에도 "이명박 정권은 파렴치, 몰염치, 후안무치한 삼치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그는 정권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당시 집권 여당 대표 안상수 씨의 '강남 좌파 스님을 내쫓아야 한다'는 발언이 공개됐다. 
국정원도 그를 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결국 자승 총무원장은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만들어 새 주지 임명을 강행했다. 
그는 주지를 내려놓고 혼자 걸망을 지고 봉은사를 나왔다.    
      
자승 총무원이 지난 4월 조계종 승적을 박탈한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을 최근 몇 번 만났다. 
지난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월악산 보광암에서 1박2일을 함께하면서 소쩍새와 휘파람새가 우는 늦은 밤까지 인터뷰를 했다. 
오마이뉴스에 매월 1만원 이상씩 자발적 구독료를 내는 10만인클럽 회원인 그는 최근 오마이뉴스 서교동 마당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써내갈 세 편의 글은 최근 만남의 대화 내용이자, 
'살불살조' '파사현정'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온 한 승려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이다. 
출가한 지 43년만에 조계종 승적을 빼앗긴 삶의 한 자락을 잠시 들춰본 뒤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자승 총무원은 그의 승복을 벗길 자격이 있는가?'
              
다음은 최근 인터뷰와 그의 저서 '스님은 사춘기'(이솔 출판)의 내용을 재구성 한 글이다. 

[어린 시절] 자살, 폭력... 그리고 물음

▲ 명진 스님의 중학교 시절 사진. ⓒ 명진 스님

"무덤을 덮고 있던 붉은 흙, 이게 뭐지 하며 서 있던 나." 

그의 기억은 6살 때부터이다. 아버지의 외도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던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 잊을 수 없단다. 
그 뒤 새어머니가 왔지만 불화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때 돈을 훔치지 않았는데 훔쳤다며 그를 때리는 아버지를 홧김에 축대 위에서 발로 밀어낸 뒤 마포대교 밑 한강 벼랑천에서 뛰어내렸다. 첫 자살시도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모래 배가 그를 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겨 다녔다. 
새 학교에 갔을 때마다 그는 제일 먼저 '학교 짱'과 악착같이 싸웠다. 그래야 그 뒤가 편했다. 

잠시 외가댁에 의탁했을 때 외할머니는 "너희 에미는 너희 애비 때문에 죽었다. 크면 꼭 에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친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항상 "쯔쯧, 독한 것, 저런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에서도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 내 마음 속엔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죽은 독한 사람, 아버지는 커서 원수를 갚아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다."(14쪽

'왜 나만 불행할까?'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나?' 유년 시절 그의 뇌리에 각인된 피해의식이었다. 
그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고란 사고는 죄다 치고 다녔다"면서 
"초등학교 4~5학년 때에는 고무줄 총을 만들어서 전등을 깨고 다니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황하던 그는 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전공한 큰외삼촌 댁 책장에 꽂혀있던 책속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좁은문>, <전쟁과 평화> <까르마초프의 형제들>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서 
심훈의 <상록수>, <무영탑> 같은 책들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 때만은 불안하고 거칠었던 마음이 가라앉고 안정이 되었다. 

분노의 질주

하지만 중학교 때에도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저주는 가시지 않았다. 
작은 말썽을 일으켰는데 감정적으로 뺨을 때리는 선생님에 맞서기도 했다. 
당진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뒤 2학년 때에는 외가댁이 있는 충청도로 전학을 갔다. 
외가댁은 부자였지만 차마 '학비를 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단다. 
그해 늦가을 학교 뒷산에 올라가 수면제 20알을 먹었다. 두 번째 자살 시도였다. 
다행히 새벽 산책을 나온 마을 사람에게 발견돼 위세척을 한 뒤에 간신히 살았다.  

공부할 새도 없이 쏘다녔던 그는 운(?)이 좋았다. 
당시 돈 없는 가정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던 서울공고 토목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철조망 클럽', '레인보우클럽', '청마클럽'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직을 만들어서 패싸움을 했다. 
당시 광화문 교원회관 지하 영다방과 을지로 킬리만자로 음악 다방을 주로 다녔는데 
가끔 DJ를 맡은 형이 바쁠 때는 대신 DJ를 보기도 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짤짜리'(동전 따먹기)하고 담배연기 자욱했던 다방에서도 인기가 좋았죠. 하-하-하." 

[청년기] 그의 머리를 내리친 '벼락 질문'
▲ 명진 스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왼쪽으로부터 두번째이다. ⓒ 명진스님

그는 이렇듯 "아무런 희망도 없이 문제아처럼 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사촌형님의 소개로 무주구천동의 관음사에 들어갔다. 
사촌형님은 '그냥 놔두면 사람 버리겠다'고 생각했는지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설득해 마지못해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인연, 그곳에서 한 스님과의 하루 밤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자기에게 말도 걸지 않고 면벽수행만 하다가 저녁 9시에 목침을 베고 누운 스님이 심상치 않았단다. 
당시 그의 표현을 빌면 '센 놈'같아 보였단다. 이런 상대와는 한 번 붙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냐고 물었더니, 대뜸 '학생은 뭐 때문에 절에 왔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입시 준비하러 왔다고 말했더니, 대학은 왜 가냐고 또 묻더라고요. 좋은 데 취직해서 잘 살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에 '그렇게 살다 죽는 거죠'라고 답했죠. 
그러자 그 스님은 '그렇게 살다 죽으려고 공부하냐'고 또 묻더군요. 

말문이 막혔습니다. 잠깐 있다가 스님이 '학생'이라고 불러서 '예'라고 대답을 하니 '무엇이 예라고 대답했소? 예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니 스님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영어를 공부하고 수학을 공부해서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하더군요."

그는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출가하려고 보따리를 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고등학교 졸업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6개월 뒤인 1969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섰다. 
한 때 출가한 적 있었던 사촌형님은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행자 생활] "무명 번뇌를 자를 보검을 구하러 왔습니다"

▲ 명진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 명진스님

"행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죠. 
무슨 취직을 하러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주문 앞에서 소개장을 찢어버렸습니다. 
백련암으로 곧장 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했어요. 
학생 시절 몸에 배인 성깔이 어디 가겠습니까? 가장 센 놈과 붙어야 한다는 근성이죠. 
'성철스님과 맞장을 뜨겠다'고 결심하고 백련암으로 올라갔죠."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보름 밖에 안 됐을 때였다. 
당시 성철 스님은 불교계를 통틀어서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등병도 아닌 훈련병이 육군 참모총장과 맞짱을 뜨려고 덤비는 꼴이었지요. 하-하."

스무 살 청년이었던 그는 구정물이 잔뜩 배인 작업복을 입고 성철 스님에게 삼배를 올린 뒤 이렇게 말했단다. 

"무명번뇌를 자를 보검을 구하러 왔습니다."
"하, 이놈 우낀 놈이네. 건방진 놈.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어디서 배웠노?"
    
그는 성철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3시간동안 절에 들어오기까지의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다시 해인사로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저녁 공양을 준비하려는데 원주 스님이 달려와서 '보따리를 싸라'고 하더라고요. 
성철 스님이 빨리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성철 스님의 상좌가 되려고 줄을 서던 시절인데, 암자에서 내려온 지 10분도 안돼서 스카우트가 된 거죠. 하-하." 

나를 찾는 길

성철 스님 밑에서의 행자 생활은 혹독했다. 경전 공부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잠시라도 졸 틈을 주지 않았다. 
한번은 매를 피해 도망갔다가 돌아오니 성철 스님은 그가 누웠던 자리를 곡괭이로 파놓았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피웠던 담배도 그 때 끊었다. 

"백련암 관음전 뒤쪽에서 일꾼들에게 빌린 담배를 피다가 걸렸어요. 
그때 저는 되레 '법당에서 피는 향과 담배 향이 뭐가 다르냐'고 대들었죠. 
엄청나게 혼이 났습니다. 3천배를 한 뒤에 담배를 끊었죠." 

당시 승려들은 행자 생활을 3년 정도 해야 '계'를 받았다. 
성철 스님은 청년 명진이 행자로 있은 지 1년도 안됐는데, 계를 주기로 결정하고 '원일'이라는 법명도 지어줬다. 
그는 5일 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던 큰 스님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승려들이 받고 싶어 하는 '훈장'과 같았다.  

"사실 당시 저와는 맞지 않았어요. 스님은 계속 경전을 보라고 했는데, 저는 경전을 보려고 중이 된 게 아니었거든요. 
나를 찾고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구하러 온 거였어요. 
게다가 경전을 보려면 당시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많아서인지 일본어 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달마대사가 일본어 공부를 했습니까? 육조스님이 일본어를 공부했습니까? 저는 싫습니다'라고 했죠. 
그러다 동안거 해제하는 날, 새벽에 보따리 싸서 나왔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나를 찾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성철 스님과 쌍벽을 이뤘던 전강 스님의 문하에 들어가려고 용주사에 갔다가 헛걸음을 했고, 
영주 부석사 비로봉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다가 몸에 병이 들기도 했다. 

"그 때 사촌 형이 몇 번 연락이 왔어요. 성철 큰 스님이 '빨리 너를 데리고 오라고 호통을 치고 있다'고. 
그런데 얼마 뒤인 1971년 1월에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성철 큰 스님이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자기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 성철 큰 스님이 명진 스님의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사진. ⓒ 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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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머리 대신 스님 머리 삶을까요?"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② 운동권 스님
2017년6월17일 (토) 김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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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던 시절의 명진 스님. ⓒ 명진스님


운전대를 잡은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의 말이 자주 끊겼다. 

조수석에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의 말을 받아 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삭발은 했지만 그를 출가의 길로 인도했던 한 주검에 연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지난 5월 3일, 충북 제천의 월악산 보광암에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다음의 글은 "성철스님과 맞장 뜨려고 백련암 올라갔죠" 에 이어지는 그의 회상이다.

[동생의 죽음] 도대체 무엇이 왔다 가는가?

"제대를 했는데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형, 절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살자'는 내용이었죠."

4살 터울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함께 지낸 적이 없었다.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항상 그리워했던 유일한 혈육. 동생은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고등학교 밴드부 악장을 지냈다. 

그는 동생이 군에 갈 때에 소질을 살려주려고 해군 군악대를 추천했다. 

동생이 충치 때문에 군악대에서 떨어졌을 때에 해병대 헌병감실에 부탁해서 재입대를 시켰다. 

"제대한 뒤에 한 번 면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명동 근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해군 훈련병들이 훈련을 받다가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복해서 실종됐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설마, 내 동생이 거기에 있으리라고는... 밤 10시에 한남동 태평극장 뒤 무허가 판잣집에 들어가니 마당에 불이 훤하게 켜 있더라고요. 친척들이 다 올라와 있었습니다. 먹먹했죠. 세월호 부모님들의 마음을 10분의 1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건 그 때의 기억 때문입니다."

1974년 2월 22일이었다. 그는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시신을 찾은 뒤에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동생을 묻었다. 

49재를 지내는 동안 그는 4홉들이 소주를 들고 매일 동생 무덤을 찾았단다. 

헤어져서 떠돌았던 시절이 서러웠고, 해군 군악대를 추천한 자기가 미웠단다. 그는 비석을 부둥켜안고 절규했다. 

"도대체, 무엇이 왔다 가는 건가? 죽고 사는 게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는 불구덩이 같은 가슴 속에 이런 질문을 던지다가 49재를 지낸 뒤에 곧바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경북 구미 금강사였다. 

대처승(결혼한 스님)이지만 학식이 깊은 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철우 스님의 문하에 들어갔다. 

4~5개월 동안 수발을 하면서 다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공양이 끝나고 밤 8시 30분쯤에 뭘 여쭤볼 게 있어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데, 서둘러 끄고 숨기더라고요. 황당해 하는 내 표정을 읽고 '횟배가 있어서 담배를 핀다'고 말하는데,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감춥니까? 스님이 여자와 함께 자든, 담배를 피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감출 짓을 왜 해요?'라고 말한 뒤에 보따리를 싸서 나왔습니다."

그 뒤에 그는 법주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수계를 받고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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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반들과 비질을 하는 젊은 날의 명진스님 ⓒ 명진스님


[도를 찾아 나서다]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까요?"

그는 법주사에서 나와 불국사와 송광사 등의 큰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사춘기 때 품었던 물음,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좌충우돌했다. 

큰 스님들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질책을 받기 일쑤였지만, 그는 불가의 '더 센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당시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두 장면이 있다. '스님은 사춘기'에 적힌 내용과 스님의 말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장면 1. 핏물 떨어지는 소머리 들고 활보... 발칵

"저와 친한 도반 스님 소식을 듣고 안동 봉정사에 갔죠. 도반 스님의 혈색이 좋지 않았어요. 간염에 영양실조였습니다. 약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간염에는 소머리를 삶아먹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누비 장삼을 입은 채 안동 시장 정육점에서 소머리를 샀어요. 

정육점 주인이 잘 안 보이게 소머리를 포장했는데, 핏물이 나와 종이가 다 찢어지고 소뿔이 드러났습니다. 

중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들고 장터를 한참 돌아다녔더니 안동 시내가 발칵 뒤집혔죠. 

봉정사에 돌아와 솥에 집어넣고 불을 때고 있는데, 핏물을 빼지 않고 그냥 끊여서 누린내가 절 안에 진동했습니다. 

안동 시내 포교당의 주지스님과 신도들이 항의를 하러 왔더군요. 봉정사 주지스님도 저를 불러 따졌습니다. 

'도반 스님이 아파서 약이 된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그래도 어떻게 절에서 소머리를 삶는다는 말이요?'
'그럼 스님의 머리를 삶을까요?'

제 말에 스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 도반 스님은 소머리 국을 먹고 병이 나았어요."

#장면 2. "성철의 목을 쳐서 마당 밖에... 그 죄가 몇 근?"    

1978년 겨울이었다. 해인사에 들어가 '목숨 걸고 공부하자'고 결심을 했단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공부했다. 저녁 11시에 잠자리에 누웠다가 새벽 1시에 일어났다. 

하루 종일 벽을 보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절치부심해도 나를 알 수 없어 한밤중에 가야산 상봉에 올라가서 울기도 했단다. 

하지만 해탈하고자 하는 것, 견성하고자 하는 것마저도 탐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단다. 

마침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 스님이 법문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법거량'(法擧揚. 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을 할 결심을 했단다.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이 내려오셨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성철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하시려 할 때 내가 벌떡 일어났다. 

- 성철의 목을 한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 예? 뭐라고요?
'시끄럽다, 앉아라! 저노무 자슥, 열아홉 살 행자 때부터 알았네 몰랐네 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나, 사기꾼 같은 놈!'

빠른 진주 사투리로 '백골연산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백골이 산같이 쌓였다는 것으로 '일어서서 한마디 하는 순간 너는 이미 죽은 놈이다'라는 뜻이다."

(<스님은 사춘기>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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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권과 함께 운동권 스님으로 거듭나는 명진 스님. ⓒ 명진 스님


[운동권 스님] 감옥은 스님의 공부방 

"저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뉴스만 보고 5.18 광주를 폭도들의 난동 정도로 믿었어요. 85년에 대구 민통련 학생이 5.3 인천사태로 수배돼서 홍제암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때 참혹한 실상을 알았습니다. 부천 성고문 사건은 충격이었죠. 

문득, 이런 시국에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명진 스님은 당시 대구 민통련 사무국장이었던 권오국씨가 제안한 참선의 가장 좋은 장소에 솔깃했다고 했다.    

"스님 같은 고민을 가진 분들은 감옥에 갔다 와야 합니다. 독방도 주고, 공부하기도 아주 좋습니다."

사실 당시 기독교나 천주교의 사회 참여는 활발했다. 

목사와 신부들이 감옥에 가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불교는 침묵하던 때였다. 

그는 감옥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승려대회를 준비했다. 

불교재산관리법으로 권력에 종속된 불교의 자주화를 기치로 내건 행사였다. 

총무원의 방해 공작으로 무산됐지만 그는 승가대학생 대표자들을 만나 다시 설득했다.  

불자여 눈을 뜨라

1986년 9월7일 해인사에 전국의 승려 2000명이 모였다. 그는 사회자였다. 

"당시 대회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경내에서 끝낼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금산사의 지광 스님이 내 눈 앞에서 부엌칼로 자기 손을 내리쳐서 손가락 4개를 자른 뒤에 광목천을 꺼내 '불자여 눈을 뜨라'라고 혈서를 썼습니다. 

흥분한 제 입에서 '방언'이 터졌어요. 피를 토하듯 선동했죠. 

스님들과 함께 해인사 바깥으로 나가서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불을 질렀습니다. 

서울에서 온 승가대학교 스님들이 여기저기에 붉은 스프레이로 '이순자는 과부돼라'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분노의 행진은 안암동 로터리에서 막혔다.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섰고 경찰은 개운사까지 들어와서 15명을 잡아갔다. 몇 명의 승려는 수배됐다. 

현상금 50만원이 붙은 전단지가 거리에 나붙었다. 그 속에 명진 스님은 없었다. 

"기분 더럽게 나쁘더라고요. 대회를 기획하고 사회까지 봤는데 수배가 안 됐으니... 다른 스님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감옥 가서 공부하겠다는 그의 집념(?)은 집요했다. 

1986년에 전두환 정권이 사찰을 짓밟았던 10.27 법란 규탄대회를 조계사에서 열기로 하고 그는 감옥에 가기 적당한 직책인 위원장을 맡았다. 주변에서도 '이번엔 무조건 감옥에 간다'고 말했단다. 

시골에서 상경해서 대회 바로 전날에 낙원동의 여관에 묵었는데, 같이 활동하던 불교활동가가 '오늘 저녁 기분이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신랑이 신부방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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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도중 백골단에 끌려가는 명진 스님. ⓒ 명진스님


멋쟁이 스님

그는 봉은사에서 시국토론을 한 뒤 4차선 도로를 막고 연좌농성을 하다가 경찰 '백골단'에 끌려갔다.

"규탄대회 비용도 내가 마련했고, 플래카드도, 조직 동원도 내가 준비했다. 모든 걸 내가 했다고 했죠. 

조서를 만들던 경찰관이 당황해서 말리더라고요. '스님, 이러시면 너무 오래 감옥에서 삽니다'라고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멋쟁이 스님이 왔다면서 강남경찰서 여경과 시경에서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감옥은 스님의 공부방이었다.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 <해방 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 등 책을 보면서 근현대사 질곡에 눈을 떴다. 

친일 문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이 분단된 현실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해 왔고, 민중의 삶을 핍박해 왔는지를 알았단다. 과거 죄를 묻지 않으면 미래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단다.
  
"개인의 생로병사만이 고통인가? 사회적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사회적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죠. 

그러던 중 제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은 성철 스님은 '거기 놔두면 큰 골병이 드니, 해인사 곡간에 가둬 놓더라도 끌어오라'고 말하면서 변호사 수임료 3백만 원을 내줬고, 조영래 변호사가 제 변호사로 선임됐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매캐한 거리에서 승려를 보기 힘든 시기였기에 그는 출소한 뒤부터 '불교계 운동권 스타'로 떠올랐다. 

중앙승가대학교 학생들이 여러 번 개운사 주지로 와 달라고 간청해서 1987년 3월에 개운사 주지직을 맡았다.

"사람들은 개운사를 '제2의 명동성당'으로 불렀습니다. 절 안에서 반정부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시법 위반으로 여러 번 경찰서에 드나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았습니다. 백기완 선생, 리영희 교수, 함세웅 신부, 김중배 전 문화방송 사장, 염무웅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 등. 

1987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금이 해제됐을 때 첫 강연을 개운사에서 했죠. 전 그 강연을 강행한 책임을 지고 개운사 주지직을 내려놓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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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 스님은 감옥에서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다. ⓒ 명진스님


"부처를 도끼로 빠개... 어떤 게 진짜 부처냐"

당시의 인연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끈끈했다. 

이들은 지난달 31일 명진 스님의 승적박탈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사회원로 40여 명의 기자회견에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왜 명진 스님을 위해 모였을까? 

지난 2015년 6월 30일 '장산곶매 등산패 20주년 기념 산행'을 동행취재 했던 기자가 쓴 당시 기사([10만인리포트-아만남] 장산곶매 등산패 20주년 기념 산행②) 중에 명진 스님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오대산 산중 연설 발언을 발췌한다.

"이름은 없었지만 내공이 있는 스님(단하선사)인데 절에 들어가서 자려고 보니 방이 추워요. 

돌아다니면서 아궁이 군불을 때려고 장작을 찾으니 장작이 없어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니 보니 부처님이 목불이에요. 목불을 안고 나와서 아궁이 앞에서 도끼로 빡빡 빠개서 군불을 땝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뜨뜻하게 잤어요. 

그 다음날 주지가 새벽예불을 보러 나갔더니 법당에 부처님이 없어진 거예요. 

주지스님이 방 앞으로 가보니 도끼로 부처를 빠개서 땐 흔적이 남아 있는 거예요. 

방에 쫓아 들어가서 자고 있는 스님의 멱살을 붙잡고 '너 이놈아,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세상에 부처님을 빠개서 군불을 때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답니다. 

단하스님이 일어나서 '내가 어제 부처를 아궁이에 넣었단 말이냐? 나무부처가 산부처를 따뜻하게 해줬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답니다. 

'금부처는 용광로는 못 견디고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못 견디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에 들어가면 타버리는 데 어떤 게 진짜 부처냐? 너 이놈아! 부처를 바로 대봐라!' 이 말을 듣고 주지가 꽉 막혀 버립니다.

세상에 부처도 허상이고 모셔놓은 게 모두 헛된 것인데, 

헛된 것에 엎드려서 돈을 내놓고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간다고 좋아합니다. 천당과 극락이 그렇게 좋은가요? 

천당은 새가 울고 꿀이 흐르고 온갖 좋은 것을 모아놓은 곳인데 거기서 영생토록 못 나오면 시설 잘 된 감옥입니다.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은 종교가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협박, 공갈쳐서 돈을 뜯고 삥 뜯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 "아! 명진 잘한다") 

이런 종교는 있을 필요 없습니다. 남한테 악한 짓 안 하고 착한 일 하고 돈 생기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이게 자비심이고 사랑입니다. 생명을 긍휼하게 여기고 연민을 느끼는 게 종교입니다. 

종교는 친절이고 자비이고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겁니다. 나는 이걸 모르는 종교는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라는 추임새가 터져 나왔고 

한 등산객은 "명진 스님 팬"이라면서 "2부는 없나요?"라며 아쉬워했다. 

백 소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다들 만 원씩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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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 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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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으로 독재자 머리통 내리쳐야"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③ 깨달음에 대하여


17.06.23 10:58 | 글:김병기


▲ 보광암 별채 통유리 밖 풍경. ⓒ 김병기


휘파람새와 소쩍새가 울어댔다. 

스마트폰을 켜니 새벽 3시 30분.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과의 야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지 3시간 지났다. 

통유리로 된 창 밖은 캄캄했다. 눈을 감아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벌써 일어났어요?"

두 평 남짓한 법당

새벽 4시 30분경, 창 밖이 어슴푸레해지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니 월악산 보광암 법당 앞에 앉아 있던 스님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찬 새벽 기운이 가득한 월악산 자락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혼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흙벽 안에서 잤다. 두 평 남짓한 법당에 부처님을 모셔뒀고, 그 앞 미닫이문을 닫으면 한 평 공간이 그의 잠자리였다.

보광암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신륵사에서 산길을 올라 해발 500m에 있다. 

뒤쪽은 월악산에서 가장 험한 공룡능선이 펼쳐 있다. 멸종위기동물 1종, 천연기념물 217호 산양의 서식처. 산양이 가끔 암자로 내려와 물을 먹고 갈 때 눈을 마주친단다. 날 밝으면 공룡능선 끝에 월악산 영봉이 불끈 솟겠다. 

한두 달 지나면 '푸세식 화장실' 앞 커다란 먹배 나무에 흰 꽃이 흐드러지겠다.
   
새벽 산길을 걸었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덮치는 거미줄을 떼어냈다. 밤새워 쉬지 않고 작업을 했을 거미에게 미안했다. 

암자로 돌아오니 별채에 차린 상 위에 살짝 데친 두릅과 고추장, 고추 장조림, 김이 올랐다. 

명진 스님은 호박과 두부가 들어간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은 뒤, 물의 온도를 재면서 직접 커피를 우렸다.    
    
"이거 한 잔 먹고 시작하자고요."

법당 마당에 커다란 천막 4동을 세우고, 사람들이 앉아서 법문을 듣도록 은박 스티로폼 자리를 깔았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와 흙이 먼저 올라와 앉았다. 야외 법당 바닥을 비로 쓸고 물걸레로 두어 번 닦았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법당 앞쪽 나무 계단은 허물어져서 손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암자 마당에 햇살이 가득 찼다. 오전 9시가 되자 산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체온도 돌았다. 명진 스님은 암자로 올라온 아이들부터 맞았다. 가슴으로 안다가 그것도 시원치 않은지 무릎에 올려놓고 눈을 맞췄다. 

지난 5월 3일,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은 여느 절과 달랐다. 

법당 규모도 그랬지만, 멀리서 교통이 불편한 곳을 찾는 얼굴부터 달랐다. 

불교 신도만이 아니었다.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목사도 왔다. 다영, 창현, 민성, 민정이 아빠... 세월호와 용산참사 유가족도 왔다. 사회단체 인사와 언론인도 참석했다. 이들의 얼굴에서 명진 스님 삶의 궤적을 읽었다.    

부처님 우신 날

▲ 보광암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 명진 스님. ⓒ 김병기


명진 스님은 신륵사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보광암에 오르던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한마디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고 스님, 자승(조계종 총무원장)한테 쫓겨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조계종으로부터 제적당했는데, 중들은 전화를 하지 않네요. 대신 신부, 목사님들이 '축하한다'고 전화를 합디다. 

정상적인 조직이 아니라 엉망진창인 조직에서 징계를 받았으니 훌륭한 분이라는 겁니다. 

안 믿어지나요? 이건 거의 진실에 가까운 이야깁니다. 하-하-하-."

산골짝 암자 야외 법당에 150여명이 모였다. 

명진 스님의 법문은 다른 법당처럼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수시로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시작부터 달랐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우신 날입니다. 서울에서 연등 축제가 벌어졌죠. 종로통을 막고 각양각색 등을 밝히며 축하했는데... 연등축제의 연자는 연꽃 연, 등불 등이 아니라 태울 연, 등불 등입니다. 내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거죠. 

등은 인간이 가진 욕망과 집착, 그 속에서 용솟음치는 번뇌를 태우는 겁니다.(중략)

그런데 우리는 불나방처럼 욕망의 불빛이 자기 날개와 몸을 태우는 줄 모르고 권력과 돈을 향해 덤비고 있죠. 

대통령 될 욕심을 채우려던 '503번 박근혜', 펑펑 쓰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 더 욕심을 부리다 패가망신한 최순실... 

지금도 503번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엮여서 감옥에 왔다고 땅을 치고 있을 겁니다.(웃음) 우리 안에도 그들이 앉아 있죠. 

그래서 부처님이 우시는 것이고, 어둠을 밝히려면 종로통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등을 켜야 합니다."

쇠걸망

▲ 보광암 흙집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명진 스님. ⓒ 김병기


그날, 산나물이 가득한 비빔밥을 먹고 명진 스님 차에 오르기 전에 트렁크 속을 보니 

등산화와 1인용 텐트, 코펠... 언제든 산에 오르거나 노숙할 장비로 가득 찼다. 

- 아니, 무슨 짐을 이렇게 싣고 다니십니까?
"걸망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요? 이건 내 쇠걸망입니다. 하-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란 불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서울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노트북을 켠 뒤 독수리 타법으로 인터뷰 모드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명진 스님의 근황이었고, 다음부터는 스님의 이야기 1-2편에 이어지는 글이다.

[깨달음에 대하여 1] 독일에 간 '갱이 스님'

▲ 독일 일정을 마치고 유럽여행을 다니는 명진스님. ⓒ 명진스님


"개운사 신도들은 저를 '갱이 스님'으로 불렀어요. 민망하니까 앞 글자 '빨'을 뺐죠. 

제가 주지로 올 때 '운동권 스님이 왔다'면서 주지 교체 항의 시위를 벌였어요. 

주지를 그만둘 때에도 개운사 앞마당을 돌며 시위했죠. 사퇴를 말리는 데모였습니다. 그놈의 인기란... 하-하."

개운사에서 나온 그는 88년 4월 초에 대승불교승가회를 발족시켰다. 

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분열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거기서 얻은 뼈저린 교훈 때문이었다. 

"조영래 변호사가 연세대에서 열린 후보 단일화 촉구 집회 때 마이크를 잡으라고 요청했어요. 

저는 김영삼은 죽어도 양보를 안 할 것 같고 

민족 문제나 한반도 분단 현실 등에 대한 고뇌를 더 깊이 한 DJ가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봤습니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많았습니다. 가택연금이 해제됐을 때 첫 강연을 개운사에서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마이크를 잡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지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연설을 했단다.

"어린 아이를 놓고 싸우는 두 여인을 보고 솔로몬왕은 서로 잡아당겨서 이기는 여자를 친엄마로 인정하겠다고 했죠. 

둘이 잡아끌다가 아이가 아파하니까 한 여인이 손을 놓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여인을 친엄마로 인정했습니다. 

민주화라는 아이가 탄생하는 즈음에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 중 한 명이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부처님처럼 존경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보 두 명이 모두 선거에 나오면서 우리 사회가 반세기 정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면서 

"그 뒤 운동권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비판적 지지 세력과 후보단일화 세력으로 양분됐고 불교 운동판도 갈라졌다"고 말했다.

당시 비판적 지지 세력과 함께하는 불교단체로 정토구현전국승가회가 있었다. 

명진 스님은 사회과학이 아니라 불교적 관점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대승불교승가회를 출범시켰고,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단체를 띄우자마자 그해 4월 말에 문학평론가 염무웅씨의 제안으로 그는 독일에 갔다. 
  
"아니, 명진 스님 아녀요?"

싼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태국 에어포트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뒤 타이항공으로 갈아타는 데 소설가 황석영씨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 공항에 내렸는데, 염 선생이 부탁한 명진 스님 길잡이(재독민주화운동연합회 인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차를 계산하지 못해서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길이 어긋났단다.  

"스님, 그냥 우리랑 다니시죠."

황 작가가 제안했고 명진 스님은 동행했다. 재유럽 교민들이 진행하는 5.18 기념 행사장에도 따라갔다.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교민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의 무명 승복과 밀짚모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단다. 

고향에서 부모님 손잡고 절에 갔던 기억이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그때 사회자가 갑자기 마이크를 주면서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법당에서만 치는 목탁이 아니라 독재자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목탁으로 바꿔야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참석자들이 자지러지더군요. 하-하-. 

'전국 투어'를 해달랍디다. 그 뒤부터 교민들이 저를 택배처럼 배달했습니다. 

보쿰,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열차를 태워서 보내면 2~3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만났다. 

'운동권 스님'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인 고뇌가 국내 사회 정치 영역으로 확장됐고, 

독일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는 분단과 민족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민사회에서 민족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개인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인으로서 민족 분단에서 파생된 갈등과 증오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천주교와 기독교는 독재 권력에 맞서며 저항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원초적 문제인 분단 질곡을 해결하는데 불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결심했죠."  

그는 귀국한 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위원회 본부장을 맡았고, <민족21> 발행인을 하면서 통일운동을 했다.
  
[깨달음에 대하여 2] 봉암사 옥석대에서의 착각

▲ 명진스님은 젊은 시절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섰다. ⓒ 명진스님


대승불교승가회는 그가 독일에 간 사이 큰일을 저질렀다. 폭력을 동원해 강남 봉은사를 접수했다. 

그가 귀국해서 주모자를 제적시켰지만, 이미 기운 달이었다. 91년에 해산했다. 그는 걸망을 지고 길을 떠났다. 

'스님 오백 명이 살지 않으면 도적 오백 명이 살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기가 센 경북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 선방으로 들어갔다.   

봉암사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차를 먹는 다실 앞을 지나다가 그는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명진인가 하는 그 사람은 운동권도 했다가 선방에서 공부하는 척도 하다가... 수좌도 아니고 사판승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체 뭐여?" 

그날부터 그는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단다. '나는 누굴까?'에 대한 물음을 온몸에 채웠다. 1~2시간씩 잠을 잤는데도, 정신이 초롱초롱했단다. 누워도 잠이 안 오고, 밥 먹을 때도 간절한 물음으로 누가 먹는지도 몰랐단다. 

한 달간 용맹정진 하다가 밤에 혼자 봉암사 마애불이 조각된 옥석대까지 포행(산책)을 하고 내려오는데 세상이 확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음력 11월 12일이었을 겁니다. 달이 휘영청 밝았죠. '허공은 형상이 없다. 삼라만상도 다 허공에서 일어난 변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지나가지만 허공에 흔적이 없다. 허공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천년 물에 씻긴 바위 모습은 더 뚜렷하다. 마음이 허공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더 이상 구할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깨달았다고 생각한 그는 89년 11월에 걸망을 쌌다. 수경 스님이 택시를 부르고 봉암사 홍문정까지 배웅을 했다. 

수경 스님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송담 스님에게 가라'고 이르면서 엄청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지금 기분이 워뗘?'라고 물었단다.

"저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은 만상을 비추는데 달빛이 어디는 비추고 어디는 비추지 않겠다는 허물이 있겠는가? 

환하고 어두운 것은 사물의 경계일 뿐이지. 진리는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는데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야."

명진 스님은 수안보의 작은 모텔에 짐을 풀었다. 그날 오후 9시 뉴스를 보면서 자기가 깨달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단다.

"제가 약간 바뀌긴 했죠. 깨달은 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조금 안 것뿐이었어요. 

당시 저처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약간 달라진 것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착각하면서 설치다가 망하는 수행자가 많습니다. 

그 뒤부터 깨달음의 함정에 빠져 공부를 포기하죠.

산을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밑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개울, 빨간 기와집도 보이겠죠. 멈추지 말고 나가야 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보물을 찾아가다가 뒤돌아서면 돌로 변하는 대목이 있죠. 

뒤를 돌아보면 산에 오르기 전과 다른 견해가 생깁니다. 다른 게 보이니 신기하겠죠. 그럼 고정관념이 생기고 갇힙니다. 

당시 으스대던 저는 아마 2부, 3부 능선쯤?"

깨달았다고 느낀 그는 '센 스님'을 향해 칼을 들이댔다. 상대를 베든, 아니면 자기가 베이든 모두 배움의 길이라고 생각했단다. 당대 불교 최고봉인 성철 큰 스님과의 법거량(法擧揚. 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을 해보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하지만 성철 스님과 법거량을 할 기회를 놓쳤다. 

그는 다른 스님들과 겨루었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출판)에 있는 한 대목만 인용해 재구성하면 이런 식이었다.

"성철 대가리 터지는 소리, 법전 창시구 터지는 소리"

"해인사에서의 결재 해제법문을 성철 스님 대신 법전 스님이 했다. 

법문을 시작하자마자 명진 스님이 삼배를 올리고 여쭈었다.

-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세 번 전하셨습니다. 한 번만 전해도 되는데 왜 세 번을 전했습니까?
'그런 것은 방장 스님(성철 스님)에게 물어 봐.'

- 만약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면 법상에 올려 보낸 성철 스님도 대갈통이 깨지고 

법상에 올라가란다고 올라간 스님도 창시구가 끊어집니다. 대답을 하십시오.

스님은 묵묵히 앉아 계셨다. 

'성철이 대가리 터지는 소리, 법전이 창시구 터지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나도 누구에게 그렇게 당할지 모른다. 어느 보살에게 당할지 어느 사미에게 당할지 모른다. 

순간순간 들어오는 칼날과 공격을 막아내려면 항상 긴장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불법은 자비 속에 서릿발 같은 칼날이 숨겨져 있고 그 칼날 속에 또한 자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스님은 사춘기. 194~196쪽)

[깨달음에 대하여 3] 힘 빼!

▲ 젊은시절 명진스님. ⓒ 명진스님


얼마 전 한 모임이 그를 초청했다. 그 자리에 갔더니 세계 챔피언 3~4명이 앉아 있더란다. 

마라톤선수 황영조씨, 프로권투 챔피언 김지원씨, 가수 전인권씨 등. 한 마디 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말했단다.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죠. 가수 전인권씨도 목에서 완전히 힘을 빼야 자유자재로 음이 나옵니다. 

힘이 빠져야 부드러워지고, 순발력도 나옵니다. 

골프 같은 운동도 몸에서 힘을 빼야 순간적으로 파워가 나오고 정확한 방향으로 공이 날아갑니다. 

평상시 힘이 들어간 사람은 막상 힘을 쓸 때 힘을 줄 수가 없어요. 인생에서도 힘을 빼야 합니다. 

부처님도 완벽하게 마음의 힘을 뺀 분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빠졌기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모두 다 힘을 뺀 자들이죠. 여러분도 힘을 빼세요."

다음에 그 모임을 또 갖기로 했는데, 카톡방 이름을 '힘빼자'라고 지었단다.  

그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수영으로 알았단다. 

명진 스님은 1991년경, 봉암사에서 나온 뒤에 서울 남산의 한 집에 머물렀다.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면서 사회단체 인사들과 교류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미친 듯이 수영을 배웠습니다. 

한강을 건너겠다는 생각으로 팔당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물 속에 뛰어들었어요. 어렵지 않았습니다. 

뿌듯해 하면서 차 쪽으로 걸어가는 데 경찰차가 가로막았습니다. 

새벽에 머리 깎은 사람이 팬티만 걸치고 물안경을 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신고했나 봅니다. 

차 안의 승복을 보여주고 누명을 벗었습니다. 하-하-."

그는 "물 위에 누워서 잠을 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서 

"수영을 할 때 힘을 완전히 빼면 물에 뜨고 그 뒤에 천천히 나아가면 힘을 들이지 않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참선 수행에 적용을 했다.

"참선 공부도 마음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없애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정보,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알 수 없는 물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면 '안다'는 생각이 지워지고 '모름'만 남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한국 근대 선종의 끊어진 맥을 이은 경허 스님이 '참선곡'에서 설한 구절을 인용했다.

'어미 닭이 알 품듯이, 고양이가 쥐 잡듯이.'

물음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면 공적영지(空寂靈知)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공적'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영지'는 신령스러운 지혜가 샘솟는 것을 뜻합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와 같은 경지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묘한 게 나타나죠. 자기를 탁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종단개혁에 나서다] 원로스님들의 눈물

▲ 명진스님이 1994년 조계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종단개혁을 주장하면서 가사를 벗어 원로 스님들에게 바치는 장면. ⓒ 유튜브 화면 캡쳐


그는 1994년 3월 봉암사에서 용맹정진을 했다. 

수좌 32명을 그가 모았다. 21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앉아서 수행하기로 결의했다. 

2주 뒤에 서울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당시 개혁파 스님들이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이 3선에 나서는 것을 막는 싸움을 시작했는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당초 계획대로 21일 채운 뒤 4월에 종단개혁 대열에 섰다.

"그때만 해도 수좌들의 정의감이 살아 있었습니다. 

서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죠. 2000명이 모인 조계사에서 제가 대중연설을 했습니다. 

연단에 오르면서 고민했던 것은 총무원장을 끌어내리기 전까지 스님들을 조계사에 묶어두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행사 끝나고 각자 지방으로 내려가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죠. 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종단 개혁이 안 된다면 승복을 벗고 절 집안을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가사를 벗어 가지런히 갠 다음, 

원로 스님들 앞에 내려놓았다"면서 

"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원로 스님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비구니 스님들이 흐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종단개혁이 성공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단다. 

실제로 전국에서 몰려온 스님들은 자기 돈으로 여관을 잡고 4월 12일 총무원 청사를 접수할 때까지 함께했다. 

그는 당시 종단개혁 상임위원으로 활동을 했는데, 사표를 썼다. 

개혁 스님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개혁종단이 출범할 때 종회의원(조계종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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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저는 정말로 박근혜입니다"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④ 천일기도와 죽비소리

17.06.29 11:57 | 김병기 기자


▲ 명진스님(전 봉은사 주지) ⓒ 유병문


"주차장에서 안내하시는 분이 깍듯하게 인사 하더라고요. 이젠 '거사'(남자 불교 신도)인데 그러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조계종 스님이 아니라 국민 스님이 되셨다'고 말하더라고요. 

제 승복을 벗긴(승적박탈 징계) 자승 총무원장이 고마웠습니다. 하-하."

지난 23일 아침 북한산 진관사 주차장에서 만난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은 여전히 유쾌-통쾌했다. 

진관 스님 1주기 추모일이었다. 

명진 스님은 86년 종단개혁 승려대회, 10.27 법란 규탄 대회 때 등 진관 스님으로부터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단다. 

비구니계의 존경받는 스님이었기에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 맘에 드는 옷 입을 자유

진관사로 올라갈 때 명진 스님을 알아보는 신도들이 많았다. 

그에게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승적박탈 징계를 받아 승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뭐라 하는 사람은 없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의복도 입을 자유가 있죠. 

얼마 전엔 제 승복을 벗겼고 4년 전에는 적광 스님(운정 스님)을 무자비하게 패서 정신병원에 입원할 지경으로 만든 조계종 호법부도 제가 승복 입고 다니는 걸 막을 순 없습니다. 하-하-."

추모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 차 한잔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적광 스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마이뉴스>와 <불교닷컴>, <불교포커스>, <브레이크뉴스>가 공동으로 지난 17일 한 정신병원에서 적광 스님을 만나 인터뷰한 기사( 납치 폭행당한 스님, 지금은 정신병동에)가 나간 뒤 후원 모임이 결성됐다. 

박재동 화백과 우희종 서울대 교수, 허태곤 재가연대 공동대표가 후원모임의 공동대표로 나섰다. 

명진 스님도 이 모임을 돕고 있다.

사실 명진 스님이 승적 박탈의 징계를 받은 것도 이 모임과 관련이 있다. 

적광 스님을 폭행한 조계종 호법부의 소환 통보에 응하지 않았고 승적 박탈 징계가 확정됐다. 

명진 스님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두드려 패는 호법부에 갈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자비와 생명, 사랑, 평등 등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서 치장하는 조계종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수행한다는 집단이 자기 허물을 공개 발표(적광 스님이 자승 총무원장의 비리 혐의를 폭로하는 기자회견)하는 것을 막으려고 스님을 백주대낮에 납치 폭행한 것은 조폭과 다를 바 없죠. 조계종이 아니라 '조폭종'입니다.

당시 폭행한 사람은 법원에서 1000만원 벌금을 받았는데, 조계종은 징계를 안했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해 중앙종회(조계종의 국회격) 선거에서 서울교구에 출마해 최다 득표를 했죠. 

자승 총무원장은 그를 조계종 25개 본사 중의 하나인 선암사 주지로 임명했습니다. 

대신 폭행 피해자인 적광 스님을 제적시켰고, 지금은 정신병원에 있습니다. 

이에 책임을 묻지 않으면 조계종의 앞날이 없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으면서 직무유기를 한 경찰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비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덮였을까요?"


당초 명진 스님의 봉은사 주지 시절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나, 최근 현안부터 시작했다. 

진관 스님 추모 행사가 끝난 뒤, 명진 스님과 다시 마주 앉았다. 다음은 3편에 이어지는 글이다.

[봉은사 만남 1] 천일기도와 재정 공개

▲ 봉은사에서 천일기도 중에 잠시 쉬는 명진스님. ⓒ 명진스님


'절(寺)'이란 이름은 절(拜)을 많이 하는 공간이기에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처음에는 신도들 옆을 지나가도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강남 부자 절에 좌파-깡패 스님이 왔다고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가 150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천일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에도 싸늘했습니다. 

신도회에서는 '100일'을 걸고 밥 사주기 내기도 했답니다. 대부분이 중간에 포기할 거라고 걸었답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새벽 4시, 오전 10시, 저녁 6시 등 매번 3차례에 걸쳐 1000일 동안 매일 3시간씩 1000배를 올렸다. 처음 한 달간은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주지 임기 4년 중 3년간 산문을 나오지 않고 절을 한 횟수를 보면 무려 일백만 번이다. 

순수하게 절을 하는데 걸린 시간만도 '3000'시간이다. '125'일 동안 쉬지 않고 절을 한 셈이다.

100일, 200일, 300일이 지나도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단다. 500일 기념 법회 때 법당 안에 1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였다. 

그는 법문하기 전에 법상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말했단다.

"제가 혼자 천일기도를 했으면 열흘도 안돼서 그만뒀을 것인데, 

그동안 신도들이 저를 지켜주고 기도를 해 주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도님들의 절을 받을 게 아니라 제가 신도님들에게 3배를 하겠습니다."

3배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보니 울음바다였단다. 

과거 부자 절을 빼앗기 위한 잦은 폭력 사태 등을 경험하면서 스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봉은사 신도들의 차가운 마음이 녹아내린 것이다. 

주지를 맡으면서 실제 수행자다운 삶을 신도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그의 결심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그는 "수행자는 생로병사와 삶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정진하고 부처님 말씀을 신도들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다"면서 일요법회를 활성화했다.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주는 건 '공짜 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딱딱한 불교 교리를 신도들이 먹기 좋은 콘텐츠로 만드는 것도 스님의 역할이다. 

불교의 핵심을 재미있고 알아듣게 만들어 전달해야 했다. 

스님은 사춘기

"20년 동안 주말 등산을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남자 신도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법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일요법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 신도가 '등산을 못가서 배가 나왔다'면서 책임을 지라고 하더군요. 하-하."

처음 봉은사 주지로 왔을 때 150명이던 일요법회 참가자들은 1500~2000명으로 늘었다. 

그가 이명박 정권과 맞서 싸울 때에는 많게는 4000여 명이 모였다. 

그는 1년 반 동안 일요법회 때 한 수행 법문을 모아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을 냈고 5만부 이상 팔렸다.   

속세도 그렇지만 사찰 부패의 근원도 돈이다. 

몇 해 전 사회를 경악시킨 백양사 도박사건과 스님들의 해외 원정도박단 사건이 일어난 것도 불투명한 재정 운영에서 비롯됐다. 

그는 우리나라 대형 사찰로서는 처음으로 재정을 공개했다. 

수입 지출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매달 신도들에게 보고했다. 신도회 모임 때에는 재정 내용을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했다.

사찰 불전함에 넣는 돈은 주지 스님들의 비자금이자 쌈짓돈으로 쓰이기도 했다. 

종무소에 입금한 등값 등은 입출 기록이 남는데, 이 돈은 기록이 남지 않는 현찰이다. 

그는 불전함 관리도 신도들에게 넘겼다.

그가 주지로 들어갈 때 봉은사 연간 수입은 70억 원이었다. 4년 뒤 혼자 걸망 지고 나올 때에는 130억 원이었다.

그는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부처님 말씀과 수행자들의 올바른 삶이 살아 있는 최고의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봉은사 만남 2] "스님, 저 정말 박근혜입니다"

▲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이 비질을 하는 모습. ⓒ 명진스님


천일기도를 하면서 사찰 출입을 금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명진 스님이 봉은사의 다래헌에 앉아 있는데 '발신자 표시제한'이라는 문자가 뜨면서 핸드폰이 울렸단다.

"봉은사 명진 주지 스님이시죠?"
- 예.
"저는 한나라당 후보 박근혜입니다."
- 왜 박근혜가 전화를 해? 시끄럽다. 근데, 목소리는 진짜 똑같네. 너, 누구냐?
"스님, 저 정말 박근혜입니다."

진짜 박근혜씨였다. 나중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울먹하더란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던 2007년 8월 15일 모친 육영수씨가 사망한 날에 현충원에 갔다가 나오면서 전화를 했단다.  

"스님이 저를 좋게 보아주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불자는 아닌데요, 어머님은 독실한 불자여서, 살아계셨다면 스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스님 유머가 너무 세셔서...

명진 스님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사기 전과 14범인 이명박 후보를 비판하면서 박근혜씨를 상대적으로 호평한 것을 알고 전화를 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한 뒤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2009년 명진 스님이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기에서부터 날선 비판을 할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최고 실세였던 박근혜씨가 봉은사에 왔단다.

"한 시간 동안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통 말이 없더라고요. 

제가 말을 하면 웃으면서 호응했죠. 그래서 저는 '참, 겸손하고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죠. 하-하-하-. 

말을 안 하니 도통 사람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명진 스님이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둘렀던 이명박씨를 비판했더니, 박근혜씨가 너무 큰 소리로 웃어댔단다.

- 너무 소리 내서 웃지 마세요.
"그렇지요? 여자가 절에서 소리 내어 웃으면 실례지요?"
- 그게 아니고, 푸른 기와집에 사는 놈이 그 웃음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박근혜씨는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란다. 

그 뒤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이렇게 한 마디 했단다.
"스님, 유머가 너무 세셔서 제가 힘듭니다."

[봉은사 만남 3] "이명박을 신도들에게 인사시켜 달라고?"

▲ 봉은사에서의 법회. ⓒ 명진스님


2007년 10월 13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당시 조계종 국회의장격인 중앙종회 의장)이 이상득 국회 부의장을 데리고 봉은사에 왔다. 자승 총무원장은 이명박씨가 대통령 후보로 뛰었을 때, 선거캠프의 '747 불교지원단' 상임고문을 맡았다. 

그날 밥을 먹는 자리에서 이상득 부의장은 '초하루 날 법회 때 이명박 후보가 신도들에게 인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명진 스님은 이렇게 말했단다.

- 이상득 의원님은 소망교회 장로이시죠? 
"아니 저는 명예 장로이고, 이명박 후보는 장로입니다."
- 만약에 불교인으로 소문난 대선 후보가 소망교회 예배시간에 대통령 출마했으니 나 좀 찍어 달라고 인사를 해 달라고 한다면 예배시간에 목사가 시간을 내어주겠습니까? 

왜 소망교회 신도가 봉은사 신도들에게 인사를 합니까?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의 인기가 좋아서 후보로 확정되면 무난하게 대통령이 되는 분위기였다. 

명진 스님이 이상득 부의장의 요청을 거절하는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자승 원장도 한마디 했단다.

"선거는 투표함을 열어 봐야 하는데... 이명박 후보가 와서 인사를 하게 해주시죠."
- 이 사람이! 내 성격 알면서 그래!

명진 스님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점심 식사자리 분위기가 싸늘해졌다고 한다.

"제가 아부 신공을 제대로 연마하지 못해서... 그때 봉은사 주지직 모가지가 날아간 것이지요. 하-하-."

[봉은사 만남 4] 이명박과 싸우는 방법

▲ 봉은사에서 올린 이명박 정권 비판 애드벌룬. ⓒ 명진스님


봉은사는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있는 천년고찰이다. 

현대 아이파크와 코엑스 아셈타워, 인터콘티넨탈 호텔…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지금의 분위기는 다소 달라졌지만, 보수의 상징과 같은 지역이며 이명박씨의 표밭이었다.

그는 사실상 적진 깊숙한 곳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세찬 죽비소리를 날렸다. 

천일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절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사방이 겹겹으로 포위된 곳에서 그가 택한 싸움의 방법은 스티커와 현수막, 애드벌룬이었다.

봉은사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 건물과 7차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2008년 4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코엑스에서 열린 '법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경비가 삼엄했다. 

그곳에서 이 전 대통령은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치사를 했다. 

명진 스님은 이명박씨와 그날 참석자들이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아주 잘 보일 만한 위치에 대형 애드벌룬을 띄웠다. 

풍선 밑에 큼지막하게 쓴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십시오" 
"이명박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명진 스님은 "당시 봉은사에 왔던 법무부장관이 애드벌룬을 내리라고 지시했는데 

경찰들이 '그걸 건드리면 난리가 나니 모른 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반대해서 그냥 뒀다는 이야기를 경찰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2008년 8월 10일, 그는 봉은사에서 1천여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독선과 오만, 거짓 이명박 정권 규탄 시국법회'를 열었다. 신도들은 차량에 '거짓말하지 맙시다'라는 문구의 스티커를 차량에 부착했다. 

그때에도 '이명박 공개사과', '종교차별 금지입법',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 문구가 적힌 대형 애드벌룬을 띄웠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를 봉행할 때에도 사찰 일주문 앞 대로변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 상단에 적힌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대한민국 검찰 중수부 소속 검사들은 봉은사 출입을 삼가 주십시오" 

▲ 봉은사 앞 도로에 내건 검찰 출입금지 현수막. ⓒ 명진스님


그는 "봉은사 일주문 앞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 분향소를 만들었는데 몇 십만 명이 다녀갔다"면서 

"처음에 현수막 글씨로 '대한민국 검찰 중수부 검사들과 쥐새끼는 봉은사 출입을 금한다'라는 문구를 줬는데 

주변에서 반대해서 점잖은 글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때 한 검사가 제게 말해주더라고요. 검사들이 술집에 모이면 봉은사 주지만 욕한다고. 하-하-." 

그는 당시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도 이명박씨를 향해 세찬 죽비소리를 날렸다. 

"방패와 곤봉, 경찰력으로 지탱하는 정권... MB 시대정신은 몰염치, 파렴치, 후안무치"


결국 '강남 좌파 주지' 사건이 터졌다.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강남 좌파 스님을 내보내야 한다"고 자승 총무원장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 뒤 자승 총무원장은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것을 추진했고 명진 스님은 이에 맞섰다. 

그는 봉은사 앞에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 봉은사 앞에 내건 대형 현수막. ⓒ 명진스님

사건 직후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조계종에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사실상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천일기도와 재정 공개 등을 통한 사찰 개혁 모델 만들기 작업은 여기서 멈췄다. 
그는 결국 걸망을 지고 봉은사를 떠났다.

그에게 '왜 MB와 맞섰냐'고 물었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픕니다. 종교는 불의한 일이나 중생이 고통을 당할 때 아파해야 합니다.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미친 운전사가 차를 마구 몰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MB라는 운전자가 사람들을 치이고 죽이면 산중 법당에 앉아 극락가라고 기도하는 게 종교인의 역할일까요? 
차에 올라타서 미친놈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래서였어요."
  
[봉은사 만남 5] 아,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장면이다. 

명진 스님이 불교 추모 행사를 집전했다.

"천일기도를 마무리하려면 93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권양숙 여사가 영결식을 집전해 달라고 두 번이나 요청했어요. 

처음에는 천일기도 때문에 어렵다고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청을 받고 밤새워 고민을 했습니다. 

마음 편하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의 대통령이기에 영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천일기도 중 하루를 빼먹었습니다.           

그때 백원우 의원(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이명박씨에게 '어디서 분향해!'라고 고함쳐서 논란이 됐죠. 

저도 울컥해서 목탁을 집어던지려고 했습니다. 옆에 있던 종무원이 목탁을 빼앗아서 실패했죠. 하-하-."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집전하는 명진스님. ⓒ 명진스님


다음은 명진 스님의 영가축원 전문이다. 

"제16대 대통령 광주후인 노무현 영가시여! 노무현 영가시여! 노무현 영가시여! 
이제 당신의 육신은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흩어져 돌아갑니다. 흙으로, 물로, 불기운으로, 바람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그 육신을 움직이던 주인공, 영혼은 어느 곳에, 무엇으로 계십니까? 

일락서산 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입니다. 해가 서산에 지니 달은 동녘에 뜹니다. 

지는 해와 같이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의 고결한 정신은 떠오르는 달처럼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노무현 영가시여! 
당신은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마라'하셨습니다. 미안해하지 않겠습니다. '원망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불가(佛家)의 소신공양(燒身供養)처럼 온몸을 던져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그 뜻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고 나아갔던 당당함,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지역주의를 허물기 위해 몸을 던졌던 대원력 보살행,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도 사람답게 사는 평등세상의 꿈,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던 발걸음... 그 어느 것 하나도 잊지 않겠습니다. 

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비추듯이 당신의 참뜻은 천강에 달이 비추듯 우리 가슴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떠나시는 길, 이천만 불자의 정성을 모아서 반야심경 한 편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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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님 파이팅' 자승 원장이 황교안에게 보낸 문자 공개합니다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⑤ 다시 세상 속으로

17.07.10 16:09 | 김병기 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종교·문화·학술·시민사회계 원로 40여 명은 지난 5월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명진 스님의 승적을 박탈한 조계종 총무원의 징계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명진 스님이 지나온 삶을 조명하는 5편의 글을 싣는다. 

이 기사가 마지막 회인데,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13년 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문자를 최초로 공개한다. [편집자말]


▲ '허당 스님'이라고도 불리는 명진스님. ⓒ 명진스님


67세. 그는 사춘기다. 틈만 나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단다. 불의한 권력엔 사정없이 죽비소리를 날린다.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선 무릎 꿇고 눈물콧물도 흘린다. 신도들이 쌈짓돈을 보내면 그걸 모아 힘든 사람에게 쾌척한다. 

서울에 올라오면 찜질방에서 잔 적도 있다. 

이런 그를 어떤 신도는 '허당 스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드는 별명은 따로 있단다.
  
"백기완 선생님은 저를 깡패스님이라고 부르시는데, 제겐 최고의 찬사죠. 

부정하고 무도한 권력자들이 봤을 때 자기에게 거침없이 강펀치를 날리는 저는 깡패입니다. 하-하-하-."

지난달 28일 아침 서울 인사동의 한 숙소에서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을 만났다. 이번엔 번듯한 곳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휴대용 커피 핸드밀 손잡이를 돌렸다.

"전문가 숨결이 느껴지지요? 기가 막힌 커피 한잔 먹고 시작합시다."

그는 '자뻑'이 생활화된 스님이다. 

그럴 때마다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수 있는 건, 권위를 내려놓는 솔직함과 소탈함 때문이다. 

송곳처럼 정곡을 찌르면서 웃음 한 자락을 펼치는 여유를 잊지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2013년 평택 시청 앞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자 집회 때였다. 김제동씨와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해고는 살인'이라고 말했죠. 

대책 없는 해고는 노동자 가족들을 길바닥에 내모는 것이고 '이명박 쥐박이'가 노동자들을 탄압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연설 끝부분에 이렇게 자문자답했습니다. '쥐구멍에도 볕이 들 날이 있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저는 쥐구멍에 펄펄 끊는 물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박장대소하더군요. 

김제동씨가 '스님이 저리 말씀하시니 저는 할 말이 없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제가 말은 겁나게 잘합니다. 하-하-."

그와 잠깐이라도 함께 하면 촌철살인과 풍자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선방에서 '모기 주둥이로 무쇠 솥뚜껑을 뚫는' 것과 같은 집중력, 지구력을 쌓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유롭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그의 말에 뼈가 있고 감동이 있는 건, 이런 삶 때문이다. 

여기에 사람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자비와 죽비의 염주 한 알씩 세상에 던지는 것이다.

이날 그를 만난 건 조계종 호계원(조계종의 사법기관-법원격)이 승적을 박탈한 뒤 진행한 명진 스님 연재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회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었고, 나는 바닥에 앉아 의자를 책상 삼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단지불회] 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이 법문을 하는 모습. ⓒ 명진스님


2011년 3월 6일, 그는 '강남 좌파 스님'으로 찍혀 봉은사를 나왔다. 그 전에 천일기도를 하면서 절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3년 동안 매일 1000배씩 총 100만 번 절을 하면서 도심 속 수행 도량으로 공을 들였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사찰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곳이다. 

사찰 운영에 신도들을 참여시켰다. 스님 중심에서 민주적인 사찰로 거듭나려고 부단히 애썼던 곳이다.

그곳에서 쫓겨나던 날, 1000여명의 신도들이 그를 막았다. 

걸망을 짊어진 그의 승복을 잡아당기며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신도들은 그 앞에서 절을 하면서 발길을 막았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마른 뺨에 눈물을 보였다.

봉은사에서 매주 1000여명이 넘는 신도들과 일요법회를 열었던 그는 한 달 뒤인 4월 10일 남산 하얏트 호텔 주변 소나무 숲에서 야외 법회를 했다. 800여명이 참여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도 이 정도 규모의 일요법회는 거의 없다. 

법회가 끝난 뒤 흩어지지 않고 남산 팔각정까지 올라가면서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눴다.

"무슨 모임이든 끝에 '회'자가 붙는데, 우리도 '단지불회'라고 정합시다."

그가 머물었던 봉은사 다례헌에도 항상 '但知不會(단지불회)'라고 쓴 액자를 걸어 두었다.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이 써준 글귀다.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은 고려시대 보조 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 나오는 구절인데, 

'다만 알지 못함을 아는가, 그것이 깨달음이다'라는 뜻이다.

"모름의 상태는 어떤 판단이나 규정을 짓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만이 옳다고 확신하지 않고 이것이 옳은가 묻는 성찰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모름 자체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미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모름의 자리에, 알 수 없는 그 자리에 너와 내가 어디 있으며 늙음과 젊음이 어디 있으며 생과 사가 어디 있는가. 

그 자리는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잘못 보는 인식 틀을 깨버린 자리이고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을 떠난 자리이다."

(스님은 사춘기 252쪽)

단지불회 모임에는 봉은사 신도들만 참여한 게 아니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부 등 다른 종교인들도 참석해서 일요법회를 들었다. 

모임을 발족하고 보름 뒤인 4월 27일 백범 기념관에서 연 '스님은 사춘기' 출판기념회 때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한 불교계 신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를 지켜본 이들은 '마치 대선 출정식 같다'고도 했고 '아이돌 스타의 팬 미팅을 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제주에서, 경상도에서, 전라도 끄트머리 가거도에서 달려온 사람도 있었고, 근무 중에 틈을 내서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맨 앞줄에 앉은 스님들만 아니라면, 재야인사와 몇몇 정치인들, 보수언론의 유력자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분들의 가족들,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 등 참석자 면면으로 볼 때, 영락없는 출정식으로 오해를 받을 법했다."

그는 장소가 없어서 한동안은 서울 중구청이나 성동구청 청소년수련관에서 매월 한 번씩 떠돌이 일요법회를 이어갔다. 

나중에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에 있는 월악산 보광암에서 법회를 열었다. 

초파일 법회 때에는 산골짝 암자에 가려고 관광버스 20여대가 몰려왔다. 

700여명을 앉힐 공간이 없어서 보광암 아래 신륵사에서 초파일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때 신도들이 등 값으로 낸 보시금이 5000여만 원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첩첩산중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각 지역 이장들로 구성된 장학금 지급 위원회는 매년 대학생 10명과 중고등학생 20명을 뽑았다. 

부모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다. 성적순도 아니었다. 최저 소득 순이었다.

"신도들이 돈을 내는 건 중과 목사들의 배를 채워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좋은 일 하고 싶은데 어디로 할지 모르고 돈이 적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죠. 

사찰 보수에 쓰이기도 하지만 어려운 이웃에게 써야 합니다. 

성직자는 돈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교통순경 역할이죠.

신도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락 가고 천당에 가려고 부처님과 하느님을 믿는 건 아니어야 합니다. 

착한 일 하면서 이웃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은 좋은 데 갑니다. 돈을 많이 내도 악한 짓을 하면 지옥에 가야지요.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절에 보시했다고 극락가고 천당에 간다면 부처님과 하나님을 뇌물죄로 구속 수사해야 합니다. 하-하-하."

단지불회 모임은 2013년 활동을 멈췄다. 

하지만 최근 조계종 승적을 박탈당했다는 그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흩어졌던 단지불회 회원들이 모이고 있다. 

불교 신도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와 목사, 천주교 신부와 수녀 등 범종교 회원 조직이 꿈틀대고 있다.

[용산 참사부터 세월호, 촛불까지] 위대한 '역행보살'

▲ 명진 스님이 문재인 대통령(당시 국회의원)과 함께 쌍용자동차 해고자 고공농성 철탑에 올라가는 모습. ⓒ 불교닷컴


그가 봉은사에서 나오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2009년 8월 30일은 그가 천일기도를 마치는 날(회향식)이었다. 당시 변호사였던 박원순 서울시장도 참석했다. 

그날 봉은사 신도회 간부 30명을 관광버스에 싣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용산참사 현장이었다. 

이명박 공권력의 살인적인 폭력 진압에 희생된 서민들이 그곳에 있었다.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게 용산참사였습니다. 당시 제겐 가장 큰 빚이었습니다. 

신도들이 천일기도 한다고 약값으로, 보시금으로 제게 가져다 준 돈을 다 모았더니 1억원 정도 됐습니다. 

한남동 순천향병원에 들러 유가족들을 만난 뒤에 용산 농성 현장에 가서 유족분들께 그걸 다 드렸지요. 

그 인연으로 요즘도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보광암에 반찬도 보내줍니다. 그냥 식구처럼 지내죠."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주검의 행렬을 이어갈 때에도 그들 곁으로 갔다. 

2011년부터 인연을 맺어 2013년 3월에는 문재인 대통령(당시 국회의원) 등과 농성철탑에 올라갔다. 

'스님은 사춘기' 책 인세 1000만원을 이들에게 보냈고, 김진숙씨가 한진중공업 고공농성을 할 때도 1000만원을 '극비'에 지원했는데 한 인사가 트위터에 올리는 바람에 알려졌다.

"그때부터 제 주머니에 돈이 말랐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가끔 쌈짓돈을 보내주던 신도들이 저를 '허당 스님'이랍니다. 

돈이 생기면 엉뚱한 데에다 쓴다고. 하-하-. 그 뒤부터는 돈 대신 쌀과 반찬, 운동화 등 현물을 보냅디다."

그는 2년 동안 '가짜 간첩단 두목'으로 활동했다. 

봉은사 주지 시절에 정혜신 박사가 진행한 정신 치유모임 장소를 제공한 게 인연이 됐다. 

안기부(국정원) 등의 간첩 조작 사건으로 20~30년 고통 당한 20여명의 '가짜 간첩'은 법원으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들이 국가보상금 10%씩을 모아 만든 게 '진실의 힘' 재단이다. 

'고통 받았던' 이들은 '고통 받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했다. 

그는 2년 동안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 명진 스님이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서 만난 김영호씨. ⓒ 명진스님


세월호 참사는 그를 출가의 길로 이끈 가장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1974년 2월 22일 세계 해군사에서 전쟁 아닌 평화 시 최대 참사가 벌어졌다.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예인정을 타고 훈련하던 300여명 중 159명이 물에 빠져 사망 혹은 실종됐다. 그 속에 동생이 있었다. 

그때도 박정희 정권은 진실을 덮었다. 

그는 3일만에 동생 시신을 수습했고, 그 길로 출가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농성장에 자주 갔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죠. 

젊은 날의 저처럼, 고통 속에서 추운 날에 고생하시는 분들을 보면 미안했습니다. 

몽골텐트도 구해주고, 미싱과 청소기도 보내줬죠. 그냥 친척처럼 지냅니다. 

제가 문경 봉암사 선방에 있으면 가끔 내려오시고, 얼마 전 초파일 행사 때에도 보광암에 유가족들이 올라왔죠." 

그도 지난 겨울 1300만 촛불 중의 하나였다. 

그는 동안거를 하러 봉암사 선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강원도에서 직접 차를 몰고 촛불집회에 개근했다. 

시민 틈 속에서 촛불 하나를 들려고 왕복 7~8시간 거리를 달렸다. 

딱 한 번 마이크를 잡았다. 청와대로 진격하는 차량 위에서다. 이렇게 말했단다.

"경찰들이 차벽을 설치한 것은 우리가 청와대로 가는 것을 막은 게 아닙니다. 

저 안에 있는 미친 사람이 차벽을 넘어 우리를 해칠까봐 막고 있는 겁니다." 

("'무안무치'한 박근혜, 철판 깔 얼굴조차 없다" )

촛불도 웃고, 방패를 든 경찰도 따라 웃었다.

"보수 세력이란 표현은 잘못됐습니다. 부패세력이죠. 썩을 대로 썩었는데, 무식하고 용감합니다. 

이들이 더 교묘했으면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주물렀겠죠. 

박근혜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거기에 최순실이 붙고, 정치 검찰 등 적폐세력들이 합세해서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을 대오각성 시킨 위대한 '역행보살'입니다."  

[승적 박탈] 자승 원장은 자격이 있는가?

▲ 촛불집회에 참석한 명진 스님. ⓒ 명진스님


촛불은 정권을 교체했지만, 조계종단 권력은 그대로다. 자승 총무원장이 8년째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자승 총무원은 정권이 교체된 직후 그의 승복을 벗겼다. 

명진 스님이 그동안 여러 매체 등에 출연해서 조계종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게 이유 중의 하나였다.

명진 스님 일대기를 시작하면서, 1편에서 '자승 총무원이 그의 승복을 벗길 자격이 있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4편에서는 2007년 이명박 선거캠프의 '747 불교지원단' 상임고문을 맡았던 자승 총무원장이 당시 이상득 국회 부의장과 함께 봉은사 명진 주지스님을 찾아와 사실상 선거운동을 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자승 총무원장은 자기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려던 승려(적광 스님)를 호법부 스님들이 납치 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징계하지 않았다. 

폭행에 가담한 승려는 1000만원 벌금형을 받았는데, 조계종 25개 본사 중의 하나인 사찰 주지로 임명했다. 

그는 중앙종회 의원(조계종의 국회격)으로 당선돼 활동하고 있다.

관련 기사: 납치 폭행당한 스님, 지금은 정신병동에

폭행 피해자인 적광 스님은 명진 스님처럼 승복을 벗겼다.

명진 스님의 승적 박탈과 관련한 여러 쟁점이 있지만, 생략한다. 지금 굳이 들추지 않아도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다. 

그는 또 성철 큰 스님 앞에서 "성철의 목을 한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라고 법거량(法擧揚. 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을 하기도 했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을 추구하는 게 불가의 풍토인데, 그가 종정 스님을 비판했다고 승복까지 벗길 일일까? 

'그릇된 것을 깨야 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자승 총무원장은 조계종단에 드리운 정치권력의 먹장구름을 깨려고 온몸으로 맞서왔던 그를 내칠 자격이 있는가? 

자승 총무원장의 자격을 묻는 두 가지 의혹 사례를 추가하자면 이렇다.

#사례 1. "장관님 화이팅 하세요" 문자 vs. "사실 무근"?

2013년 10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법사위 국정감사에 

윤석렬 전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지검장)이 출석했다. 

윤 전 수사팀장은 당시 의욕적으로 수사를 벌이다가 징계를 당한 상태였다. 

윤 검사는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야당의원들의 질문을 받고 사실상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수사 외압을 폭로했다.

"윤석렬 국정원 수사 초기부터 외압...실체는 황교안 법무장관 폭로"(서울신문 22자 기사 제목)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같은 사실을 보도했고, 

자승 총무원장이 이날 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 격려 문자를 보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명진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승 원장이 황 장관에게 '장관님 화이팅하세요'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조작사건'으로 떠들썩했던 때죠. 

불자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부글부글하던 때인데 조계종의 수장이 왜 이런 문자를 보냈을까요? 

정권과 조계종단의 유착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윤 검사를 징계한 황교안씨는 사실 총리로 임명될 당시 불교계에서 삭발 투쟁까지 하면서 반대했던 인사였어요. 

그는 사회법보다 교회법이 우선한다고 말했던 광신적인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죠."

이와 관련 <오마이뉴스>는 지난 5일 자승 원장과 조계종 총무원 효신 홍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또 두 인사에게 핸드폰 문자로 반론을 요청했는데, 홍보국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신 문자가 왔다.

"질의하신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보도에 따른 민형사상 법적 책임은 귀 언론사에 있습니다."  

최근 문자 의혹과 관련, <불교닷컴>측의 해명 요청에 자승 원장은 

"사실무근"이라며 "보도시 엄중 대응할 것"이라고 답변해 왔다.

<오마이뉴스>가 그간 논란이 됐던 '자승 원장의 문자'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조계종 총무원이 <오마이뉴스>에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아래의 문자를 확인해 주기 바란다.

▲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13년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문자. ⓒ 오마이뉴스


#사례 2. "각하, 컵에 먼지가 들어갈까 봐..." vs. "사실이 아니다"

2013년 4월 15일 (사)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자승 스님)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호텔에서 '한반도 평화와 국민행복을 위한 기원대법회'를 열었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 등 1000여명이 모인 법회에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박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한 연설 내용만 보도했다.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우리 정부는 지원과 협력을 통해 공동발전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연설을 마친 뒤에 7~8명이 앉아 있는 원탁 테이블로 내려왔다. 

명진 스님이 당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은 이렇다.

"그때 자승 총무원장이 일어나 박 전 대통령의 물 컵 위에 덮어놓은 팸플릿을 치우면서 

'각하, 컵에 먼지 들어갈까 봐 덮어놨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걸 목격했던 사람들은 '낯 뜨겁고 창피해서 혼났다'고 말합디다. 

종교계의 지도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요?"

도정 스님(제주 남선사 주지)도 

"당시 자승 원장의 지근거리에 있던 한 스님이 행사를 마친 뒤에 되돌아와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몇몇 스님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분이 자존심도 없이 권력에 아부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효신 홍보국장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을 암시하는 짧은 문자를 보내왔다. 

당시 행사에 참석해서 이 이야기를 전해줬다는 스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를 통한 확인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 기사가 보도된 이후에라도 총무원측으로부터 당시 정황에 대한 추가 답변이 온다면 기사에 적극 반영하겠다.

[다시 묻는다] 쇠에서 나온 녹이 그 쇠를 먹는다

▲ 지난 겨울 촛불집회 때 촛불을 든 명진 스님. ⓒ 명진스님


'쇠에서 나온 녹이 그 쇠를 먹는다.'

명진 스님은 불교 초기 경전인 법구경에 나온 이 문구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욕망이 사람의 몸을 망치고 있습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이 됐는데, 절집안도 돈이 주인이 됐죠. 

물질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인데, 

돈으로 주지 자리를 사고 팔고, 선거 때만 되면 돈으로 표를 사는 비극의 악순환입니다. 

도를 구하는 게 아니라 돈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계종의 일부 권력승들은 템플스테이 등 국가 예산을 받으려고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이걸 비판하는 언론은 '해종 언론'으로 규정해서 사찰 출입을 봉쇄했다"면서 

"국민 고통을 위로해줄 종교가 국민 손가락질을 받기에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검은 구름이 흩어지면 달이 드러나듯이 자승 총무원장 8년 세월의 적폐들이 드러나면 건강한 종단을 향한 길이 보일 겁니다. 저의 승적 박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종단 권력의 문제입니다.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모든 게 드러날 때까지. 

그 뒤에 좋은 산에 올라가 달밤에 텐트치고 하룻밤씩 자고 싶습니다. 배낭을 메고 혼자 걷고 싶습니다. 

삶이란 뭘까? 43년 전 출가할 때의 물음을 달빛처럼 제 온몸에 채우고 싶습니다. 

어릴 때에는 해답을 구하려고 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치열하게 물을 것입니다. 그 물음 속에 답이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겠어요? 생각하면 나는 엄청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요. 하-하-하-."

[명진 스님 연재를 마치며] 석고대죄 

▲ 보광암 흙집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명진 스님. ⓒ 김병기


초파일 하루 전인 지난 5월 2일이었다. 충북 제천시 덕산면 보광암에 올라가 명진 스님을 만났다. 

- 우짠 일로 여기 산골짝까지 왔는감?
"석고대죄하러 왔습니다."

그의 승적박탈의 도화선이 된 것은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였다. 

"박근혜 청와대는 추악한 '범죄 소굴'... 경찰은 수갑 들고 촛불시민과 진격하자"
"촛불은 거대한 정화조이자 쓰나미, 광화문 촛불 바다 속에서 소름 돋았다"

조계종의 호법부는 이 기사에서 총무원에 대한 비판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고 징계절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진 스님은 "과거 적광스님을 폭행한 호법부에 출석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두 번의 소환 통보에 응하지 않았고, 

호계원은 승적 제적 징계를 확정됐다.

그래서였다. 수박 한 덩이 짊어지고 초파일 행사 전날 그를 찾아간 것은. 인터뷰를 작정한 길은 아니었다. 

월악산 흙집 법당에 하얀 별빛이 쏟아졌다. 휘파람새 지저귀는 소리가 어둠을 채웠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웃음 속에 절망이, 눈물 속에 환희가 있었다. 

깨달음과 연민, 자비와 죽비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누군가와 그 삶을 나누고 싶었다.

명진 스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 

'다음 편은 언제 나오냐'며 전화를 주신 독자도 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활자에선 향기가 나지 않는다. 오롯이 그의 삶에서 우러나는 향기이다. 

많이 부족했기에 스님의 치열한 삶을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매번 글을 올리면서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했다. 

기자는 이명박씨가 '한반도대운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부터 10여 년간 4대강 문제에 매달려 왔다. 

촛불은 정권을 교체했지만 4대강 적폐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기자로서 제2의 과제를 조계종 적폐청산으로 정하고 그곳에 촛불 한 개 켜두겠다. 

그게 석고대죄 하는 길이며, 사회가 부패할 때 종교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4대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든 이명박 정권은 그를 절(봉은사)에서 쫓아냈고, 조계종단은 이제 그의 승복을 벗겼다. 

정권 교체가 되면서 4대강 적폐는 이제 청산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지만, 조계종 적폐는 건재하다. 

검은 구름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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