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정치와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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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정치와 진정성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입력 : 2018.05.07 21:27:0 경향신문


‘판문점선언’이 발표되자 제1야당은 이를 “김정은이 불러준 대로 받아 적은 위장평화쇼”라고 비난하며, 국회에서 비준할 수 없다면서 어깃장을 놓는다. 이른바 보수계의 지도인사라는 사람들도 덩달아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선언 발표 직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를 보면 88.4%가 이번 선언이 ‘잘됐다’고 평가했고, ‘잘못되었다’는 평가는 7.7%에 불과했다. 또 보수 지지층 81.6%도 판문점선언을 긍정 평가했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의 진정성에는 ‘신뢰한다’ 64.5%, ‘신뢰 못한다’ 29.8%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번 선언에 보여준 국민의 높은 신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송두율 칼럼]정치와 진정성

일반적으로 우리가 진정성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문제 대상은 정치다. 평화주의자로서 나치를 피해 영국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했던 빈 출신의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있다. 그는 프랑스혁명 때 민중의 증오를 한몸에 받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담은 전기적 소설을 썼다. 이 작품 속에 “진정성과 정치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드물다”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유대인대량학살범으로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악의 일상성’이라는 개념을 제기한 여성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도 진정성은 정치적 덕목에 결코 속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권모술수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정치와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다고 생각되는 진정성은 그러면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진정성은 우선 말한 내용 자체의 진위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 대신에 말하는 주체의 인격적인 통일성을 전제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의 진정성이 평가되기 때문에 진정성은 의무나 책임 같은 문제를 당연히 제기하게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아홉번째 계율에 이어 거짓은 곧 ‘영혼의 죽음’이며 진리의 근거는 신밖에 없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은 기독교문화권의 진정성 이해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올려 놓은 근대 계몽사상은 진정성을 이성적 존재의 의무로 보았다. 특히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을 요청했던 칸트의 실천이성은 이 같은 진정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했다. 정신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서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도 알고 선악의 구분도 한다’는 <논어> 속의 가르침이 있다. 인간의 본래적 속성인 수치심에 의거해서 사회관계를 파악한 유교문화권의 진정성에 대한 대표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성의 이러한 규범적인 논의를 강하게 비판한 사상적 흐름도 있다. 이런 흐름은 진정성의 과도한 정당화는 단지 진정성으로 포장된 힘의 관계를 숨기려는 의도라고 비판한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거짓말을 못하는 자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며 언어를 매개로 해서 굳어진 관습에 따라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의무’를 역설적으로 비판했다. 비슷하게 노자의 무명(無名)사상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시비선악의 판단이나 진정성도 사실은 사회적 명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이나 지적이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문화 현실을 보다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도 종종 받는다. 기성정치가 표방했던 진정성에 대해 냉소적인 분위기를 지금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소용돌이 속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은 더욱 심해졌으며, 살 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이주민과 난민의 긴 행렬은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불안과 공포, 선동과 증오가 정치의 주요내용을 채우고 있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 유럽 여러 나라에서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공약을 내세운 극우정당들의 약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 등이 지구촌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지킬 수 있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지닌 많은 투쟁이 지구적 연대 속에서 벌어지고 있고, 깨어난 세계시민들의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지적 노력 역시 활발하다. 진정성에 의거한 정치의 복원을 위한 기획은 그래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우리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자. 정치에 건 기대나 희망보다는 기피와 멸시, 아니면 체념과 냉소가 지배한 분단체제에서 정치의 진정성이 숨쉴 공간이 과연 있느냐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본다. 적어도 ‘4·19의거’(1960), ‘5·18민주화운동’(1980), ‘6월항쟁’(1987) 그리고 ‘촛불혁명’이 그런 체험공간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가운데 내가 우리 땅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건은 4·19의거였고 나머지는 모두 먼 외국땅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특히 눈여겨본 우리의 정치공간은 촛불혁명과 이를 뒤따른 판문점선언이다. 부패와 무능한 정권을 주권자가 평화적인 수단으로 몰아내어 정치에 있어서 진정성을 회복하고, 전쟁의 먹구름도 걷어내면서 평화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는 밝은 전망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땅에서 정치적인 것의 함의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70여년을 증오와 불신 속에서 시달려왔던 남과 북이 과연 서로 간에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앞으로 자주 만나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고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을 여전히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김 위원장의 정치적 결단에서 나온, 진정성을 담은 발언이라고 판단한다. 직접 대화를 나누었던 문 대통령도 상대방의 이러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약하는 판문점선언에 서명했다고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한 비방이 서로 오갔던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도 진정성 있는 대화와 협상도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1차세계대전의 재앙을 체험한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서 정치인의 덕목으로 정열,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을 꼽았다. 나는 여기에 진정성을 추가하고 싶다. 정치와 가장 인연이 먼 덕목일 수도 있는 진정성을 내가 꼽는 이유는 평화와 번영을 분명히 약속할 수 있는 한반도 땅에 정치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랫동안 불신과 증오, 실망과 냉소를 심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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