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적거지(尤菴 宋時烈 謫居地) - 장기유배문화체험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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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적거지(尤菴 宋時烈 謫居地) -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앵봉(鶯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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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적거지(尤菴 宋時烈 謫居地) -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우암 송시열 선생은 제2차 예송사건으로 덕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기로

유배되어 있다가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가기 전까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장기로 452 (서촌리)

 

 

 

장기현 지도 설명(長鬐縣 地圖 說明)

 

​18세기에 제작된 여지도(興地圖)에 실린 장기현 모습이다.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호미곶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

중산리, 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장기읍성(長鬐邑城) 내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치소의 서쪽에 위치한 거산(巨山:동악산)이다.

읍성은 평지가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석성(石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둘레는 2천 9백 80척이다.

읍성안 자봉산(紫鳳山)부근에 있던 자봉정과 욕일당은

1481년(성종 12년)에 현감 최영이 지은 것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소봉대(小蓬臺)는 모양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산이

한쪽은 육지에 접하고 있고, 삼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의 어느 왕자가 이곳 경치에 취해 3일 동안 놀았다 한다.​

북쪽에 위치한 동을배목장(冬乙背牧場)은 조선초기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이다.

뇌성봉수(磊城烽燧)는 북으로 발산봉수(鉢山烽燧)에 응하고, 남으로 복길봉수(卜吉烽燧)에 응한다.

모이산(毛里山)에 있는 모이현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 재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뇌성봉수가 있는 뇌성산(磊城山)에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성(石城)이 있고, 이 산에서는 뇌록(磊綠)과 인삼 등 7가지 보물이 난다고 한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독산(獨山)은 거북이 엎드린 것처럼 생겼다.

 

 

 

장기 유배지

 

조선시대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며,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라 불리웠다.

 

 

유배(流配)와 장기(長䰇)

 

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畓縣)인데, 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 관장하던 동해안의 중심지역이었다.

관내에는 신라 말에 설치한 시령산성. 만리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년(1011년)과 조선 세종 21년(1439년) 쌓았다는 장기읍성(長䰇邑城)이 있다.

장기는 조선시대 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로 유배형이 실시되고 세종 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3천리의 빈해(瀕海, 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

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모두 149회 211명(남자 172명. 여자 39명)으로 확인된다.

이는 단일 현(縣)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刑期)는 원칙적으로 종신형이었으며,

정치범으로 단죄된 유배자는 임금의 사면이나 권력의 변화,

정세의 변동이 없는 한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였다.

대부분 왕의 사면이나 정세의 변동으로 다시 되돌아가

정계에 복귀하여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많으나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홍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형벌제도로서 유배(流配)

 

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낸다라는 뜻이지만, 유(流)와 배(配)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流는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살게 한다는 뜻이며,

配는 자유로이 할 수 없도록 어느 곳에 짝지어 배속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세종 12년에는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정비하였다.

이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유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객관(濱海各官)에 해당되었다.

조선 후기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한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도

장기를 유배지로 지정함으로써 이곳이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한양 – 남태령 – 안성(죽산) - 충주 – 문경 – 상주 –

함창 – 의흥 – 신령 – 영천 – 경주 - 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고 하루에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방수령인 장기현감이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된다.

배소(配所) 및 그들을 맡아 보살펴 줄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고

유배인에 대한 정기적인 감시를 한다.

정기적인 감시를 점고(點考)라 하는데, 현감이 한 달에 2회씩 점고를 하여

유배인의 상태를 확인하며 관리를 하였다.

유배인을 맡은 보수주인은 주로 지역의 아전이나 군교, 관노 또는 지역의 유지들이 맡았다.

우암 송시열의 보수주인은 정기에서 오랫동안 선비로서 터를 일구어 온 오도전(吳道全) 이었고,

다산 정약용은 군교 출신인 성선봉(成善封)을 보수주인으로 삼았다.

 

 

 

조선 최고의 논객(論客)을 품었던 장기(長䰇)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치여 세력을 잃고 불우한 운명으로 유배된 관리 중에는

학문·사상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는 등 창작활동은 물론

지역에서 인재들을 양성하여 유배지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는 관리들까지

수많은 현량(賢良)과 학자들이 머물다 간 장기가 그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장기에 머물면서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연구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고, 그가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도 큰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120여 년 먼저 온 우암 송시열은 4년여 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 세력들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썼다.

이곳을 거쳐 간 유배인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다.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지만 중앙의 올곧은 관리들과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문화를 이어받아 장기면은 서원이 17개로 경북에서 가장 많은 고장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탈환에 일조를 한 이대임, 서방경, 서극인 등과 같은 의병장,

장헌문, 정치익 같은 구한말 의병, 애국지사 엄주동 같은 선열들이

이런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적비와 충효관을 건립하고,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330여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보듬으면서

그때의 사실과 정신을 일깨워 온 이곳 사람들 특유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역사의식은 현재까지도 살아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장기면의 유배문화 영향으로 후세에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글 이상준,이종길)

 

 

 

우암(尤菴)의 유배생활(流配生活)

 

○ 송자대전(宋子大全) 행력과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 제7원 연보에 따르면 우암은 장기 유배 동안

당대의 석학이자 정객답게 유배지에서도 수많은 문인들과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우암은 장기 도착 당시 동생들은 물론 부실(副室, 첩)과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했는데,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奴僕, 종)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 귀양살이 중에도 우암의 주변에는 두 동생인 시도와 시걸, 아들 기태, 그리고 손자 주석과

증손자 일원(왕자의 사부를 지냄)및 유언(교관을 지냄)이 자주 드나들며 수발을 들었다.

 

○ 우암 형제들은 유배길을 동행하고 귀양살이를 함께 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우암은 동생들과 함께 하면서 “비록 깊은 공부는 이루지 못했으나 온갖 근심을 잊어버리고,

많은 것들을 깨달아 나름대로 낙이 있었다.”며 고인들의 유배 생활과 비교하며 위안을 찾기도 했다.

 

○ 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고,

이로 인해 오도전은 장기현의 훈장이 되어 후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오도전의 원명은 오도전(吳道傳)이었는데,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우암이 도전(道全)으로 고치게 했다.

 

○ 늦은 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암꿩 한 마리를 우암에게 선물했다.

이를 받은 우암은 암꿩을 여러 차례 손으로 쓰다듬다가

“지금 한창 알을 낳고 새끼를 칠 시기인데 꿩을 잡아먹을 수 없다.”며 방생할 것을 요구했다.

꿩을 가져왔던 사람이 감동하여 숲에다 놓아주었더니

얼마 후 수많은 새끼를 데리고 산간을 왕래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우암(尤菴)의 배소(配所)

 

○ 숙종 원년(1675) 6월 10일 우암이 장기현 경계에 도착해 현내(縣內)의 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마산(馬山)이라고 대답했더니 “읍호(邑號)에‘ 기(鬐)’자가 ‘마(馬)’자와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마산에 거주하는 사인(士人) 오도전(吳道全)의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 윤휴가 조사기(趙嗣基) · 이무(李袤)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遠惡地, 서울에서 멀고도 살기가 어려운 곳)로 옮기기를 청하여

처음에는 웅천(熊川)으로 정했다가 곧 장기로 옮겨서 위리안치하게 한 것이다.

우암이 배소(配所)에 이르자, 심양필이 가시울타리 치는 일을 친히 감독하였는데,

자제들이 전례를 끌어대어 후문(後門)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이들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장기면 읍내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에는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자생하고 있으며,

이 학교의 교목 역시 은행나무이다.

 

○ 우암의 사관(舍館)은 해문(海門)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해풍을 막기 위해

우암이 거처하는 방 밖 처마 밑에 별도의 이중벽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었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해풍을 막기도 했다.

 

○ 우암은 뜰 앞에 자그마한 채전을 만들어 약초와 생강을 손수 심고 가꾸었고,

행단(杏亶)을 일구고 그 아래에 우물을 파서 붕어를 키웠으며,

창 밖에는 벌을 치면서 조석으로 즐겨 구경하기도 했다.

 

 

 

장기(長䰇)와 유배(流配)

 

○ 장기는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 다산 등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으로

장기에서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우암에게 날아든 아내의 부음(訃音),

그 소식을 접하고도 애통한 마음만을 슬픈 제문에 실어 손자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장기는 제주도와 전남 강진, 경남 남해 등과 함께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한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장기현은 서울과 864리 떨어져,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현은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유배형의 종류에는 유2,000리, 유2,500리, 유3000리가 있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법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

영조 21년 12월 18일, 영조 31년 5월 14일 등에 작성된 승정원일기에

장기는 기장, 영해 등과 함께 서울에서 유3천리 정도의 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기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유배인은 태조1년(1392년) 설장수이고,

이후 이승조, 이원강, 홍여방, 최윤복,조말생, 송시열, 김수흥, 이광필, 이상묵, 윤석주,

조정상, 송영, 노성중, 정약용 등이 속속 장기로 유배 왔었다.

이렇게 장기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거물 학자와 정객들이 머물렀다가 간 곳으로 독특한 유배문화가 간직된 곳이다.

 

○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는 범속한 풍속을 가진,

즉 기층문화를 가진 고을이었지만 조선조 실세 정객과 학자들이 유배 와서

중앙의 고급문화와 최고 수준의 학문(儒學)을 유포해 유향(儒鄕)으로 변화했다.

그런 영향으로 동일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창건되었다.

장기는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바닷가 작은 고을에 불과했지만

중앙의 학식과 지조를 갖춘 학자와 정객, 그리고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 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슬기롭게 소화하여 충절과 유향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유배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지역 선비들을 교육시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남겼다.

이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중히 여기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고, 이런 풍토는 은연 중 학자 내지는

관직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 그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

 

우암은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숙종 원년(1675) 6월 19일조에 기술된

경상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675년 6월 10일 장기에 도착해

장기성 동문 밖 마산리 사인(士人)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 되었다.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4년여 장기에 머문 우암은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정치, 문화,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국로거유(國老巨儒)답게

변방의 범속한 풍속을 가졌던 장기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우암 유배 4년 동안 중앙의 우암 인맥들이 장기를 무수히 방문했다.

(예로서 1676년 2월 3일 소론의 영수 윤증 尹拯의 방문)

이들의 방문은 장기 사람들에게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정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를 조성시켰다.

그리고 그는 영남지역 전체에도 영향력을 미쳤는데, 인근 고을의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문안을 올리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암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4년을 보냈을까 하는 부분이다.

 

 

 

유배과정(流配過程)

 

 

유배길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고 개인적으로 노비(奴婢)를 거느릴 수가 있었다.

유배인은 관직자일 때에는 국가에서 말(馬)을 지급하고,

유배 길목의 수령들은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양반 관료들인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 홍성민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과 의식을 장만하는데 가산을 털어야만 했다.

유배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이동을 하는데,

며칠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하루에 평균 80리~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신분 및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

 

 

 

윤증(尹拯)이 장기(長鬐)에 온 이유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은 동문(同門)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효종(孝宗, 1649~1659)이 죽은 후 벌어진 예송(禮訟) 문제로 갈등을 겪게되자

윤선거는 윤휴(尹鑴)와 함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고,

나중에 윤선거가 죽자 우암 송시열에게 묘비명(墓碑銘)을 부탁하였다.

이에 우암은 자기는 윤선거에 대하여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朴世采)의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묘비명을 적어 주었지만 그 내용이 풍자적이고 진실성이 부족한 것을 알고,

그 내용을 수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675년 6월에 장기로 귀양지를 옮긴 우암에게 비문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

윤증이 1676년 봄, 장기로 오는 도중 추풍령에서 지은 시(詩)이다.

 

往長鬐。行三日。宿秋風驛

장기(長鬐)로 가면서 사흘만에 추풍역(秋風驛)에서 자다.

 

명재 윤증(1629-1714) 지음

 

細雨行人濕(세우행인습) / 가랑비가 길손의 옷을 적시고
秋風驛路窮(추풍역로궁) / 추풍에 역로는 궁벽하여라
谷平川似倒(곡평천사도) / 골이 평평해도 내는 거꾸러질 듯하고
山斷嶺還通(산단령환통) / 산은 끊겼다가도 잿마루 길 이어지네
但使誠能感(단사성능감) / 정성을 다하면 감동있는 법인데
何憂理未公(하우리미공) / 이치가 공정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悠悠扶病骨(유유부병골) /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는 몸
無與話心中(무여화심중) / 마음속의 말 함께 나눌 이 없네

 

 

 

 

示孫兒輩(시손아배) / 여러 손자들에게

- 우암 송시열 지음 -

 

聖德寬臣罪(성덕관신죄) / 임금님은 혜신의 죄를 너그러이 봐
朱炎自北移(주염자북이) / 여름 날 북에서 이곳으로 옮겨주셨네
三時梳短髮(삼시소단발) / 빗질할 때마다 머리는 짧아지는데
五月在長鬐(오월재장기) / 장기에 온 지도 어언 다섯 달
書展茅簷讀(서전모첨독) / 초가집 처마 아래 책 펼쳐 읽지만
心傷杞國危(심상기국위) / 마음은 나라의 위태함을 걱정했노라.
汝曺休咎怨(여조휴구원) / 너희들은 남을 원망하지 말라
生死匪人爲(생사비인위) / 살고 죽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乙卯 十月 某日 / 을묘(1675) 십월 모일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3권,

망실(亡室)이씨(李氏)에게 올린제문(祭文)

 

아, 나와 당신이 부부(夫婦)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殃禍)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夭折)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禍)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이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 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을 않는다 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 내겠습니까.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尤菴 長䰇 流配生活)

 

우암(尤菴) 송시열은 제2차 예송사건(禮訟事件)으로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년) 6월 10일 장기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장기에 도착한 우암은 장기읍성 동문 밖 마산리 사인(士人) 오도전(吳道全)의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로부터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우암는 4년 여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우암이 장기에 유배를 올 때 부실(副室, 첩)과 노복(奴僕, 종)들 뿐 만 아니라,

두 동생인 시도와 시걸, 아들 기태, 그리고 손자 주석과 증손자 일원 및 유원을 데리고 왔다.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다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장기면 읍내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자생하고 있다.

 

 

장기(長鬐)는 조선 후기 정치 1번지

 

우암이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조정의 관리는 물론

재야에 묻힌 수많은 인맥들이 장기를 찾아와 우암의 배소를 드나들었다.

지역의 토호들은 물론 심지어 인근 관아의 수령들도 앞 다투어 장기를 방문하는 등

장기는 그야말로 조선 후기 야당 정치의 1번지였다.

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장기현의 훈장이 되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8년 만에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오도전, 오도종,

황보헌, 이동철, 오시좌, 김연, 서유원, 오도징 등 장기 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 전극화 등이 주축이 되어 죽림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들은 장기에서 노론 인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인맥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까지 존속되었다.

죽림서원(竹林書院, 포항 장기면)에는 우암의 영정과 문집,

그리고 이곳에 유배를 왔다가 객사를 한 퇴우당 김수흥(영의정)의 문집이 있었지만

서원이 훼철된 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우암의 창작활동

 

우암의 배소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비치되어 있었고, 독서를 하는 여가에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들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자 속에 고이 간직했다.

4년간의 장기현 유배생활 중에 수많은 저작을 했다.

특히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라는 명저 뿐 아니라

1675년 6월에는 취성도(聚星圖)를 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문충공포은정선생신도비문(文忠公圃隱鄭先生神道碑文) 외에

300수 내외의 시와 글을 지어 다양한 심회를 형상화 했다.

 

 

우암의 유풍(儒風)과 장기고을 풍속변화

 

17세기 후반 조선 사회를 정치. 문화.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국로거유(國老巨儒) 우암이

장기로 유배를 와 4년간 생활했던 것은 장기 뿐 아니라

영남지역 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미쳤다.

한양에서 윤증(尹拯)을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과 인근 고을의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찾아와서 문안을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던 사실들에서 영향력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해 유학의 진수와 중앙 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우암으로부터 수학한 향림들을 중심으로 장기에 우암 인맥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장기고을은 보잘 것 없던 황량한 변방의 범속한 풍속이 바뀌어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현(儒賢)의 고을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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