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대본산, 용주사(龍珠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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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대본산, 용주사(龍珠寺)

앵봉(鶯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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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대본산, 용주사(龍珠寺)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 031-234-0040

용주사 www.yongjoosa.or.kr/

 

 

 

용주사(龍珠寺)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상(四天王像)

 

용주사(龍珠寺)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다른 이름으로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용주사'에서는 현판을 '사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그냥 '용주사'라고 절의 이름을 내걸었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그 부하로는 견수(堅手)·지만(持鬘)·항교(恒憍)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의 아래쪽에 있다.

또한 사천왕은 이들 외에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쌍산(持雙山) 등

일곱 겹의 산맥과 태양·달 등도 지배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천왕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일정하지 않으나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광목천왕은 용·여의주 또는 새끼줄(絹索)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이 보편적이다.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건달바·부단나 등 두 신을 지배하여 동주(東洲)를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범어 Dhritarastra의 번역으로 치국천(治國天)이라고 한다.

지국천왕은 바른 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왼 손에 칼을 들고

갖가지 천의(天衣)로 장식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경전에 따라 도상의 차이가 약간씩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선 주로 왼손에 비파(琵琶) 등 악기를 들고 있다.

수미산(須彌山)에서 동쪽으로 약 1천 유순(由旬)을 가면

지국천왕(持國天王)이 거주하는 성(城)이 있는데,

그 성의 이름이 현상성(賢上城)이다.

성주인 지국천왕은 건달바와 비사도 신장을 영도하며,

동쪽의 인간 세계인 승신주(勝身洲)의 사람들을 보호한다.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용·비바사 등 두 신을 지배하여 서주(西洲)를 수호하는 광목천왕은

범어 Virupaksa의 번역으로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므로 광목(廣目)·악목(惡目)·악안(惡眼)이라고도 부르고,

여러 가지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굴복시키므로 잡어(雜語)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바른 손은 허리춤에서 용(龍)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여의주(如意珠) 같은 구슬을 쥔 채 팔을 들고 있다.

수미산(須彌山)의 서쪽으로 1천 유순을 가면 광목천(廣目天)이 있다.

여기에는 천왕이 사는 주라선견성(周羅善見城)이 있는데,

이 성의 크기는 6천 유순(由旬)이나 된다.

이곳의 광목천왕은 모든 용왕과 부단나 귀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 밑에 위치한 우화주(牛貨洲)의 인간계를 보호한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구반다·폐려다 등 두 신을 지배하여 남주(南洲)를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범어 Virudhaka의 번역으로 자타(自他)의 선근(善根)을 증진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바른 손은 칼을 들고 있다.

수미산(須彌山)에서 남쪽으로 약 1천 유순(由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 증장천왕이 거주하는 성이 있는데, 이름을 선견성(善見城)이라 한다.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 섬부주(贍部洲)의 인간계를 보호하고 있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야차·나찰 등 두 신을 지배하여 북주(北洲)를 수호하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범어 Dhanada 또는 Vaisravana의 번역으로 비사문(毘沙門)이라고도 쓰고

다른 이름으로 俱吠羅(Kuvera)라고도 한다.

북주(北洲)를 수호함은 물론이요,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옹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다문(多聞)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왼손은 항상 보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창을 쥐고 있다.

수미산(須彌山) 북쪽으로 1천 유순(由旬)을 떨어져 있는데,

이 천을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다문천왕이 거주하는 성은 가외성(可畏城), 천경성(天敬城),

중귀성(衆歸城) 등 세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성에서 다문천은 북의 구로주(瞿盧洲)를 수호한다.

 

 

 

용주사 홍살문(龍珠寺 紅箭門)

 

홍살문은 왕실의 능(陵), 원(園), 묘(墓), 궁전(宮殿), 관아(官衙) 등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쭉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敬意)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사진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龍珠寺)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혜궁경홍씨(獻敬王后,헌경왕후), 정조대왕(正祖大王),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위패를 모시고 일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때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2008년(무자년) 6월 24일 100년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護聖殿)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 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다 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용주사 삼문(龍珠寺 三門)

 

용주사 홍살문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3개의 문(三門)은 

다른 사찰에서는 만나보기 어려운 특이한 건물이다.

이곳 삼문에는 '용주사 불(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詩句)가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는데,

일제강점기 구한말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 1881~1950)의 글씨이다.

 

용주사 삼문(三門)의 주련 내용은

龍蟠華雲(용반화운) 영롱한 구름 속에 서려 있는 용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 무궁하도다.

寺門法禪(사문법선) 이 절의 법은 선법이니

佛下濟衆(불하제중) 부처님이 내려오셔 중생 제도하시네.

 

특히, 이 주련을 가로로 읽으면 용주사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龍珠寺佛(용주사불) 용주사 부처님께서는

蟠得門下(반득문하) 문 뒤에 감도시며

華造法濟(화조법제) 중생 제도하는 법 아름답게 만드시니

雲化禪衆(운화선중) 참선하는 중생 구름같이 모여드네.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용주사 삼문을 들어서면 천보루 앞에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는데,

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5층 석탑에는 부처님의 사리 2 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자리하는데 전각이 아닌 누각 앞에 있어서 특이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 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 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 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 갑석 위에는 옥신 고임으로 처리되었다.

옥개석은 처마 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 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진시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리탑은 용주사를 참배하는

모든 불자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 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 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다.

 

 

 

용주사 천보루(龍珠寺 天保樓)

 

용주사 천보루는 대웅보전의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루(門樓)인데,

일반적인 사찰의 건축양식보다는 궁궐이나 대갓집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용주사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건물 밖의 현판에는 '천보루', 안의 현판에는 '홍제루(弘濟樓)'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들이 불성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라는 의미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앞쪽으로 1칸만큼 돌출되어 있다.

 

 

 

용주사 만수리실(龍珠寺 曼殊利室)

 

용주사 만수리실(曼殊利室)은 천보루와 서쪽으로 연결된 전각으로 1790년 지어졌다.

이 전각은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형태로

안쪽에 정원(庭園)이 있는 ‘ㅁ’ 형의 독특한 구조의 집으로

참선을 하는 선방(仙堂 또는 禪堂)과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어 왔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한다.

만수리실은 만수실리(曼殊室利)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으로

만수실리는 범어 Manjusri의 음역으로 문수사리(文殊師利) 즉 문수보살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때문에 만수리실에서 수행하시는 스님들은

모두 문수보살의 지혜를 얻는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 전각 중심에 연잎 모양의 흰 현판에 만수리실이라는 편액을 걸어두었다.

이 전각의 전면 4 기둥에는 용주사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강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주련으로 엮어서 걸었다.

전강 선사는 선종의 맥을 이어준 한국불교의 큰 스승으로

용주사에 머무르시며 조계종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다.

용주사는 신라 말 한국 선종의 초조(初祖) 도의국사 - 2조(二祖) 염거 화상 -

고려 초 혜거 국사의 선맥을 이어받았으며 

근세에는 경허 성우 - 만공 월면 - 전강 영신으로 이어져 현재 송담 선사에 이르는

한국 선종의 적자(嫡子)를 이루며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밝히고 있다.

 

전강 선사는 판치생모(板齒生毛)의 공안을 타파 23세에 견성하여

깨달음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 창밖엔 갈대꽃 피니 가을이로구나.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 부처님과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나유타료(那由他寮)

 

나유타료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 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으며 한편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부처가 알지 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과정일 뿐이니
다시 부모 미생 전의 한 구절로 도는 시험해보세.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현재 대중회의 때 사용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큰 방 내부의 중앙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는데,

용상방은 결제(結制)나 큰 불사가 있을 때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 직책과 해당자를 명시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이다.

내용을 보니 조실(祖室) 고(故)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 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 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직명과

스님 이름이 적혀있어 중앙선원을 중심으로 한 편제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전강 대선사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선원장인 송담 선사께서 당신 생존까지는 선사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던 까닭이라 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성이라 하겠다.

 

 

 

홍제루(弘濟樓)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 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다.

밖에서는 천보루(天保樓),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 개로 불려진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주사 대웅보전(龍珠寺 大雄寶殿) - 보물

 

용주사의 가람 구조에서 가장 중심 되는 곳으로

흔히 사찰 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 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이름하였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 스님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 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다음과 같으니,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 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 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

 

그 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 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비운(飛雲)·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절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융릉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졌던 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공장(工匠)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원 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 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 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 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침으로써

불전 내부의 성역 공간과 외부의 세속 공간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 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다.

2017년 8월 14일 보물 제1942호로 지정되었다.

 

 

용주사 동종(龍珠寺 銅) - 국보 제120호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범종으로,

높이 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윗 문양 띠(上帶)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를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연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연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연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아래쪽으로 치우쳐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원형의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아래 띠(下帶)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윗띠(上帶)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연뢰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용주사 천불전(龍珠寺 千佛殿)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이 자리에 최근 3년 동안 법당 불사를 하여

19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 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건물은 석조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 단은 건물의 평방 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다.

 

 

 

 

용주사 시방칠등각(龍珠寺 十方七燈閣)

 

용주사의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 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 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 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 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한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써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선잠(雪岑) 스님이었고,

전각 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 순(雪順) 스님 등이 제작 봉안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이 걸려있었는데 글귀는 아래와 같다.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

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으로 아담한 규모이고 문은 띠살문이다.

건물 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 탱화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있다.

 

 

 

용주사 법고각(龍珠寺 法鼓閣)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한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 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낸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 보고 서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용주사에는 늘 각종 새가 끊이지 않고 날아든다.

 

 

 

 

용주사 지장전(龍珠寺 地藏殿)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원력의 보살이며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을 이어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중생들을 구해주고

특히 병든 이를 위하여 스스로 약초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워 원력의 보살이라 부른다.

보통 지옥세계 중생들이 모두 구제될 때까지 지옥에서 함께 고통을 받으며

중생을 구하겠다는 서원을 세워 악세 중생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른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에

도명 존 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 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이밖에 판관(判官)·녹사(錄事), 그리고 입구에 장군(將軍) 등을 모시게 된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육도(六道)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면서 악도에서 헤매거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에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이르기도 한다.

이 지장보살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용주사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건물의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架構) 형식을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 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이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무독귀왕의 지장 삼존상을 마주하게 된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하여 움츠린 듯한 인상을 준다.

도명 존 자와 무독귀왕의 좌우에는 명부 시왕 10구와 판관 4구,

사자(使者) 2구,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는데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하여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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