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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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

앵봉(鶯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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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

 

 

 

1. 신앙 내력과 성장과정

 

소년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의

김해김씨 집안에서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건은 일찍부터 순교하신 증조부와 종조부 및

무혈 순교자인 집안 어른들의 신앙과 성덕을 배웠다.

7~10살경(1827~1830년경) 양친을 따라

서울 청파와 용인 한덕동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하느님을 찾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2. 신학생으로 선발된 소년 김대건

 

소년 김대건이 15살 되던 1986년 7월 용인 은이 공소에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3. 조선을 떠나는 세 신학생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12월 2일 모방 신부 앞에서

신학생이 되기 전에 서약을 하고 다음날 서울을 떠나 마카오로 향하였다.

 

 

 

 

4. 대륙을 횡단하여 마카오에 도착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만주와 오송을 거쳐

1837년 6월 7일 중국 남쪽 지방인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5.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

 

파리 외방 선교회 마카오 대표부는 그곳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6.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의 죽음

 

고향이 홍주(홍성)인 최방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위열병(胃熱病)에 걸려 용기 있게 투병하다가

1837년 11월 마카오에서 “착한 예수! 착한 천주”라 되뇌어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7. 필리핀으로 피신

 

포루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마침내 1839년 4월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마카오를 떠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8. 마카오를 떠나는 김대건

 

1839년 11월 김대건과 최양업은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계속 신학교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에 가고자 하는 프랑스 함대의 선장 세실의 청으로 조선말 통역관을 찾자,

김대건은 스승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하여 1842년 2월 에리곤호에 승선하였다.

 

 

 

 

9.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남

 

1842년 8월 중국이 영국과 남경조약을 맺자

프랑스가 조선 진출을 포기하여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하선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은 홀로 육로를 통하여 조선 입국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10. 조선 입국과 탈출

 

김대건은 김 프란치스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압록강을 건너

조선 쪽의 책문으로 들어가는 소떼 틈에 끼어 1차 조선을 입국한다.

그러나 나흘 뒤(1842.12.31)에 객줏집에서 김대건을 수상쩍게 여기자

두려운 나머지 만주로 돌아가야만 했다.

 

 

 

 

11. 훈춘(琿春)으로의 여행

 

김대건은 다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1843년 1월 눈 쌓인 만주 북동쪽 벌판과 산악 지대를 가로질러

함경북도 경원에 도착하여 조선 교회 밀사와 접촉을 하였다.

그리고 2월에 다시 조선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조선 북방 입국로 개척을 위해 여행하였다.

 

 

 

 

12.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귀환

 

김대건은 1844년 3월 함경북도 경원에서 국제시장인 경원개시(慶源開市) 날

국경을 넘어가 조선 교우와 만나 입국 계획을 의논하였지만

북방 입국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13.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김대건은 1844년 12월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고

이듬해 1월 1일 압록강을 건너 보름 뒤에는 서울에 도착하였다.

며칠 후 병이나 호되게 앓다가 일어나 순교자들의 전기 정리와

예비 신학생 지도, 그리고 조선지도를 제작하였다.

 

 

 

 

14.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모친

 

김대건 부제님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사위 곽가의 밀고로 체포되어

천주님을 믿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냈다는 죄목으로

1839년 9월 26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 후 어머니 우르술라는 포졸들을 피하여 떠돌며 걸식하였다.

 

 

 

 

15. 서해의 풍랑을 헤치고

 

김대건 부제님은 1845년 4월 현석문외 11명의 교우와 외교인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황해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5일간 바다 가운데서 풍랑에 시달렸다.

 

 

 

 

16.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1845년 8월 김대건 부제님은 중국 상해 인근 금가항(金家港)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었다.

1주일 뒤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17. 고난의 라파엘호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조선인들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9월 28일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가

10월 12일에 상해를 떠난 지 40여 일 만에 강경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18. 10년 만에 모친 상봉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말부터

서울과 인근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봄에 10년 동안 헤어져 만나지 못한 어머니 우르술라를 골배마실에서 만났다.

 

 

 

19. 은이 공소에서 미사 집전

 

김대건 신부님은 주교님의 명을 받아 만주에 남아 있는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1846413일에 마지막으로 은이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20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는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5개월간 서울과 은이 공소에서 사목 하였다.

 

 

 

 

21. 순위도(巡威島,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체포됨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기 위해서

서울 마포를 떠나 황해도 앞바다로 향하였다.

중국 어부들에게 편지와 지도를 건네고 돌아오다

6월 5일 타고 온 배를 징발하려는 관헌과 순위도에서 언쟁을 하다 체포되었다.

 

 

 

 

22. 포도청에서 옥중 세례를 베풂

 

체포된 김대건 신부님은 등산 진영장에게 차이고 뜯기며 수모를 겪다가

해주 감사에게 보내어져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1846년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 감금되었다.

 

 

 

 

23.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묘당 회의

 

김대건 신부님이 옥중에 있던 1846년 8월 1842년에 동행하려 했던

프랑스 함장 세실이 3척의 배를 이끌고 외연도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연유를 묻는 서한을 남기고 돌아갔다.
9월 5일에 조선 조정에서는 묘당 회의를 열어 서양 배의 출몰에 대하여 논의하다

김대건 신부님의 ‘조속한 처형’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24. 효수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이 내려짐

 

1846년 9월 15일 헌종은 어전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을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임금은 김대건 님의 목을 잘라 매달아

백성들을 경계심을 품게 하라는 ‘효수경중’(梟首警衆)을 윤허하였다.

 

 

 

 

25. 김대건 신부의 순교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오전에 서울 한강 모래밭 형장인 새남터로 끌려나갔다.

어영대장이 사형 집행문을 읽자 김대건 신부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26. 시복(諡福)과 시성(諡聖)

 

순교자 김대건 신부님은 1858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복자품(福者品, Beatus)에,

1984년에는 성인품(聖人品, Sanctus)에 올려졌다.

 

 

 

 

김대건 신부 연혁(History of St, Father Kim Dae-gun)

 

1540년 이후 10대 선조 희현(希賢) 아산 현감 제수 후 충청도에 거주 시작

1563년 이후 9대 선조 의직(義直)이 충청 병마절도사로 임진란에 참전하여 가문이 토지와 벼슬을 받음.

1612년 이후 성 김대건 신부 7대 선조 김수완(金守完)이 솔뫼에 정착함.

1784년 3월 이후 조부 김택현이 형제들과 증조부 김진후(비오)와 함께 입교함.

1791년 신해박해로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체포됨.

1795년 성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순교)이 솔뫼에서 출생함.

1801년 신유박해로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체포됨. 공주에서 삭탈관직. 평민 강등. 유배됨.

1805년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체포됨. 평민 신분으로 해미 군영에서 옥 생활을 시작함.

1814년 12월 1일 증조부 김진후(비오) 76세로 옥중에서 순교함.

1816년 12월 26일 작은 증조부 김한현(종한, 안드레아)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함.

1821년 8월 21일 김대건(아명 再福)이 솔뫼에서 탄생함.

1824년 당고모 데레사의 남편 손연욱(요셉)이 해미에서 순교함.

1830년경 김대건이 부친과 함께 서울을 거쳐 용인 산중으로 피신함.

1836년 초 김대건(안드레아)이 용인에서 모방 신부에게 영세 후 신학생으로 선발됨.

1836년 12월 3일 세 신학생이 서울을 떠나 의주 변문으로 출발함.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함.

1839년 9월 26일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이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함.

1840년 1월 9일 당고모 김 데레사가 포청 옥에서 교수 순교함.

1842~1844년 마카오에서부터 만주 소팔가자를 통해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함.

1844년 12월 25일 만주 소팔가자에서 부제 서품을 받음.

1845년 1월 1일 압록강을 거쳐 귀국에 성공하여 같은 달 15일 서울에 잠입함.

1945년 4월 30일 조선 교우 11명과 함께 제물포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4일 해로로 상해에 도착함.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

1845년 10월 12일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여 귀국함.

1845년 11~12월 서울 및 은이 공소를 순방함. 모친 고 우르슬라와 아우 난식 상봉.

1846년 5월 14일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떠나 서해로 출발함.

1846년 6월 5일 백령도 인근 등산진에서 체포됨. 같은 달 9일 해두 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음

1846년 6월 21일 서울 포청에서 이송된 후 40여 차례 공초를 받음.

1846년 8월 29일 최후 서한 회유문 ‘교우들 보아라’를 기록함.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26세에 순교함.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加敬者, Venerabilis)란 칭호를 받음.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福者, Beatus) 품에 오름.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 Sanctus) 품에 오름.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있는 김대건 성인  - 임수현 작 -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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