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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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사적 -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앵봉(鶯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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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신풍루(新豊樓)

 

* 1790년(정조 14) 창건
*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행랑(行廊) :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화성행궁(華城行宮)

 

 

 

집사청(執事廳)

 

* 1790년(정조 14) 창건
* 2002년 복원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인

우화관에서 올릴 의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다.

집사청은 우화관 가까이에 있어 효율성을 고려하여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객사 : 조선 시대에 주로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공식 행사를 하던 곳

 

 

 

봉수당(奉壽堂)

 

* 1789년(정조 13) 창건
*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펼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월대(月臺) :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유여택(維與宅)

 

* 1790년(정조 14) 창건
* 1998년 복원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경룡관(景龍館)

 

* 1794년(정조 18) 창건
* 1997년 복원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장락당(長樂堂)

 

* 1794년(정조 18) 창건
* 1997년 복원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 툇간 : 집채의 안둘레간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

 

 

 

복내당(福內堂)

 

* 1789년(정조 13) 창건
* 1997년 복원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

 

 
 

득중정(得中亭)

 

* 1790년(정조 14) 창건
* 1998년 복원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사중 칙득위제후 사불중 칙불득위제후)’ 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본래 낙남헌 터에 있었으며 정조가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1794년에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를 특별히 마련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낙남헌(洛南軒)

 

* 1794년(정조 18) 창건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 월대 :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노래당(老來堂)

 

* 1794년(정조 18) 창건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며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출입문은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 이름 지었다.

노래당은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비장청(裨將廳)

 

* 1789년(정조 13) 창건
* 2002년 복원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화성 유수는 정 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비장청은 유수를 보좌하는 업무 성격에 맞게 고을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건물인 동헌(봉수당) 가까이에 두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1796년에 서리청의 건물을 수리해서 비장청으로 사용하였다.

 

 

 

서리청(書吏廳)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옮길 당시에는 장남헌 동쪽에 서리청을 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면서 서리청의 건물을 비장청으로 사용하고,

그 동쪽에 있던 금도청을 고쳐서 서리청으로 사용했다.

행궁 안의 건물들이 보통 10칸 내외 규모인데 비해 서리청은 22칸에 달한다.

서리청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창고가 있다.
* 금도청(禁盜廳) 도적이나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군사들이 머무는 건물

 

 

 

남군영(南軍營)

 

* 1794년(정조 18)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남군영과 북군영 건물을 짓고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봄, 가을로 두 번 시험을 치러서 수석을 차지한 군사에게는

곧바로 관직을 높여 주는 등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 정조의 친위 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북군영(北軍營)

 

* 1794년(정조 18) 창건
* 2002년 복원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을 증축하며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군영을 지었는데,

남쪽은 남군영, 북쪽은 북군영이라고 부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두 군영의 건물이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행궁전도」 그림을 보면 남군영은 일자형이고, 북군영은 ㄷ자형이다.

반면 <정리의궤>의 「행궁전도」에는 북군영이 ㄱ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이에 2002년 복원 시의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군영을 ㄱ자형으로 복원했다.

 

 

 

신풍교(新豐橋)

 

화성행궁은 정궁의 형태로 만들어진 궁궐로 팔달산으로부터 발원한 명당수가 정문 앞에 흐르고 있다..

명당수란 궁궐 앞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게 하여 출근하는 관리들이 그 맑은 물을 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올바른 업무를 보게 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명당수에는 악귀를 막기 위해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를 만드는데

화성행궁은 신풍루의 이름을 따서 신풍교라고 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와 홍살문과 신풍교가 일직선이 아닌 것은

국왕의 존엄성을 높이면서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기 위한 궁궐 건축 양식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신풍교(新豐橋)

누각을 나와 아래로 19보 가면 새로 놓은 돌다리가 있는데, 곧 홍살문 안에 있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길이가 14척(4.3m), 너비가 35척(10.7m)이며 역시 신풍교(新豐橋)라고 이름 지었다.

 

복원된 신풍교

2005. 3. 23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2006. 7. 16 문화유적 발굴조사 완료

2007. 3. 복원(신풍교 : 길이 4.3m, 폭 12m, 명당수 : 길이 84.4m, 폭 3m)

 

 

 

신풍교 복원 과정에서 발굴된 ‘신풍교 자재(新豐橋 資材)’

 

본 석재는 2007년 신풍교 주변을 발굴해서 나온 신풍교의 일부분이다.

T자형 석재(右)는 어도와 일반 다리 부분의 경계선을 나타내면서 그 양옆에 상판석을 놓았던 부분이고,

다른 석재(左)는 상판석의 일부분으로 원형 크기로 나온 2개의 상판석은 현재 신풍교 복원에 사용되었다.

 

 

 

화성행궁 하마비(華城行宮 下馬碑)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의 표석으로서

주로 궁궐, 향교 또는 유명한 성인들의 사당 앞에 세워 경의를 표하였다.

수원에는 화성행궁, 화령전, 수원향교, 지지대비 앞에 하마비가 있다.

 

 

 

행궁전도(行宮全圖) - 1797년 정리의궤(整理儀軌)

 
 
 

일제강점기 화성행궁

 
 
 

1980년대 경기도립병원 시절

화성행궁 자리에 수원의료원(도립병원), 수원경찰서, 여성회관 등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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