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사적공원-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복천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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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사적공원-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복천동 고분군

낭만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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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북문. 바깥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두었다.

부산 역사의 뿌리, 동래읍성지를 찾아서...

 

8월 5일 (수), 날씨는 흐리지만 후덥지근함.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천천히 길을 나서기로 한다.

몸은 피곤하고 날이 더우니 돌아다니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에서 쉬다가 느지막히 길을 나선다......

차를 어디에 대나 고민하다가 북문 밖 동래문화회관 옆 주차장에 주차하고

슬슬 걸어 올라간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삐질삐질~ 숨은 가쁘고......

헉헉~ 오늘 관람은 아무래도 넘 힘들겠다~~~

이럴 땐 시원한 계곡에나 가야겠는데......

 

동래읍성 북문. 오름길 양쪽으로 편백나무 숲과 쉼 의자. 서장대 가는 길에는 시가 있는 오솔길이...
임진년 동래읍성 전투 이야기를 만난다.

임진년 동래읍성 전투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의 군사와 왜군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이곳 동래읍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임진년 첫 전투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1592년(임진년) 4월 14일 오후에 동래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왜군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는 목패로 최후통첩을 했고,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글을 쓴 목패를 적진에 던지며 결사 항전을 하게 된다.

4월 15일에는 왜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이에 동래 부사 송상현과 군·관·민은 힘을 합쳐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송상현은 남문루에서 지휘하였고 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세는 불리해졌다.

왜군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한 동북쪽 경사진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의 중심부로 대군을 이끌고 들어왔고,

성 안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백성들까지 낫, 괭이, 막대기로 결사 항전했지만 중과부적,

동래읍성은 백성들의 비명과 죽음으로 채워져갔다.

동래 부사 송상현도 적에게 포위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 계신 곳을 보고 네 번 절한 뒤에

부모님께 올릴 글을 부채에 쓴 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동래읍성이 함락되었다.

 

아래는 송상현의 글~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孤城月暈)

여러 다른 진영에서는 도와줄 기척이 없습니다. (列鎭高枕)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니 (君臣義重)

부자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 (父子恩輕)”

 

동래읍성 북문에 다다랐다.
동래읍성 북문 안쪽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현종 12년(1021)에 동래읍성을 수리하였으며,

그 뒤 우왕 13년(1387)에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13자라고 전한다.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 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7년(1731)에 다시 증축하여

당시 규모가 둘레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작게 꾸민 성문)을 은일루라 하였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평지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만 겨우 남아있다.

현재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북장대 방향~
마음 같아서는 웬만한 곳을 다 돌아보고 싶지만 날씨, 컨디션 등 여건이 좋지 않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 내주축성비 (萊州築城碑)

 

이 비문은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명에 의하면, 읍성은 둘레가 936cm, 높이가 3.9m였다.

1731년에 성터를 측량하고,

경상도 65개 군에서 52,0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연인원 417,050명, 쌀 4,585석, 베 1,552필, 전(錢) 13,454냥으로

4월에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때 완성된 성은 둘레 약 3.8㎞, 높이 5.1m이었다.

비문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비의 높이는 270cm, 넓이 107cm의 큰 비이다.

비두(碑頭)는 한 쌍의 이수(螭首)가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대(碑臺)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소박하다.

비문은 황산도 찰방 김광악(金光岳)이 짓고, 송광제(宋光濟)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현풍현감 유우기(兪宇基)의 글씨이다.

이 비석은 동래성 연구의 정확한 자료가 되며,

조선 후기 축성사(築城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본래 이 비는 동래성 남문 밖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금강공원 내 독진대아문 뒤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출처: 문화재청)

 

* 추가 설명

  - 내주축성비는 2012년 4월에 이곳(동래읍성 북문 안)으로 옮겨졌단다.

  - 일제강점기에 금강공원으로 옮겨졌던 독진대아문과 망미루는

동래부 동헌으로 다시 옮겨졌다고....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내주축성비

장영실 과학동산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였으나 뛰어난 기술이 세종께까지 전해져

궁궐로 들어가 여러 가지 과학기기를 만들어냈다.

이곳은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의 과학 업적을 기념하는 장소.

장영실 과학동산
장영실 과학동산. 장영실이 발명한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동래읍성 역사관

장영실 과학동산 아래로 내려가면 동래읍성 역사관을 만나게 된다.

마침 해설사님이 계셔서 동래읍성의 역사와 임진왜란 전투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동래의 역사~ 부산의 역사 전반까지~~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동래읍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읍성.

임진왜란때는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관에서는 조선 전기 동래읍성, 조선 후기의 동래읍성, 19세기 동래읍성 안의 가옥,

동래읍성의 해자로 추정되는 유구와 유물, 동래의 옛 풍경, 동래읍성의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동래읍성 역사관
동래읍성 축소 모형

역사관에서 한참동안 해설을 듣고 나와

동래읍성을 아주 간단하게만 돌아보기로 한다.

더위에 움직이기가 힘든 터라 가파른 북장대쪽은 피하고,

서장대~복천동 고분군을 돌아오기로.....

다시 장영실 과학동산을 지나고...
북문루에 잠시 올라본다.

 

서장대로 이동하며 돌아보니 내주축성비와 장영실 과학동산, 복천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북장대쪽을 응시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야외 공연장~
성곽길 산책로에서 만난 동래 관련 자료들~
동래읍성 서장대
축성 당시에는 높은 곳이어서 주변이 잘 보였을 듯하나 지금은 주위에 나무가 우거져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산책길에서 만난 동래 이야기~~~
서장대에서 내려와 우성아파트를 끼고 돌아 복천동 고분군으로 향한다.
동래 얼쑤 옛길 안내도
동래읍성 변천사도 살펴보고...
길을 건너 복천동 고분군 산책로에 올라본다.
복천동 고분군과 야외 전시관

사적 제273호 부산 복천동 고분군 (釜山 福泉洞 古墳群)

부산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있는 가야 때 무덤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

땅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땅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복천동 무덤에서 보이는 새로운 무덤양식은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복천동 고분군과 고층 빌딩군의 조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더위 탓에 방문객도 없다... ㅠ.ㅠ...
복천동 고분군 야외전시관
야외전시관의 자료
복천동 54호분과 출토 유물
복천동 54호분과 출토 유물
복천동 53호분
복천동 53호분과 출토 유물
복천동 53호분과 출토 유물. 왼쪽은 순장자가 묻힌 자리인 듯...

복천동 고분군 조사과정

 

1969년 9월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1호묘를 조사하면서 학계에 알려졌고,

이후 1980년 부산시의 주택개량 사업지역으로 내정되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삼국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가야문화의 해명에 있어 중요한 고분군으로 확인되면서

부산시에서 고분군의 정화와 공원화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후 2차, 3차, 4차 발굴조사로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고 문화발전 과정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5차 발굴조사에서는 본격적인 보존 정화사업 추진에 따른 담장 설치지역과

후문지, 야외전시관 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96년 10월 5일에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을 개관하여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발굴한 유구들은 회양목을 심어 위치를 표시하였다.

이후 1997년과 1998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복천박물관 진입도로 및

주변도로 확장공사를 위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총 28기의 묘가 추가 확인되었다.

 

(출처: 북천 박물관)

 

복천동 고분군에서 복천 박물관을 바라보며... 저 산 위 북장대 못 가서 아쉬움... 가까워 보이는데...
복천동 고분군에서 복천 박물관을 바라보며... 북문도 바라보인다.
복천동 고분군 언덕을 바라보며...
안내 설명도 읽어 보고, 박물관으로 향한다
화려한 배롱나무꽃에 위안을 느끼면서 고분군과 박물관을 연결해주는 다리를 건넌다.
고분군과 박물관을 연결해주는 다리
복천박물관 가는 길에 영보단비를 만난다.
영보단비 설명
마침 복천박물관에서 '1969년 우연한 첫삽'이라는 주제전이 열린다는 안내막을 보게 되었다. 

'1969년 우연한 첫삽'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하니

잘 되었다 싶어 얼른 박물관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웬걸~ 온라인 사전예약자만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일 바로 예약은 안 된다고 하여서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

코로나19로 인해서 입장객을 제한하는 모양...

일일이 알아보지 않고 대충 왔기에 정보 부족...

또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며 돌아나온다.

이 거대한 건물이 복천 박물관.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는데.... 사전 예약자만 방문 가능이라네...

복천 박물관

복천박물관은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고전문박물관으로

1996년 10월 5일에 개관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덧널무덤(목곽묘),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앞트기식돌방무덤(황구식석실묘), 독널무덤(옹관묘)등

총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고,

다양한 형태의 가야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가지방울, 금동관, 목걸이 등

12,000여 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을 정리ㆍ복원하여 두 개의 대형전시실에 진열하고,

고분군 내에는 발굴 당시 무덤의 내부 모습을 보여주는 야외전시관을 마련하여

가야문화를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적 제273호로 지정된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풍부한 유물과 다양한 무덤 양식들은

아직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있는 가야의 신비를 푸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또한 복천박물관은 개관 이후로도 인근지역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여

부산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가야사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고 있다. 

 

(출처 : 복천 박물관)

 

 '동래에서 가야 재발견하기' 프로젝트 작품. 복천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 칠두령쉼터에서 쉬어간다.
잠시 쉬었다가 복천동 고분군을 바라보며 다시 도로쪽으로 내려가서 북문으로 향한다.
동래읍성임을 알려주는 표시
12간지 동물 이야기~
장대길에 배치된 12간지 동물의 위치를 알려주네...
'동래에서 가야 재발견하기' 프로젝트 작품도 만나며...

동래읍성 북문에 도착...
동래읍성 북문에 도착...

북문을 빠져나가며...

 

보는 거 좋아하는 나도 솔직히 지칠 지경이었으니 남편은 더했을 것이다.

계곡 생각이 절로 났던 날이었으니......

주변 여기저기 세세히 돌아보는 거는 포기해야겠다.

차로 이동해서 동래읍성 동헌과 충렬사나 잠시 들르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2020.8.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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