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괴한 그들..일본군의 삽질 대전차 전술 TO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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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 태평양

이제는 기괴한 그들..일본군의 삽질 대전차 전술 TOP 5..<8>

봉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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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괴한 그들..일본군의 삽질 대전차 전술 TOP 5..<8>



1945년 2월 말, 이니스 스위프트(Enis P. Swift) 중장의 미 제 1 군단이 루손 북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을 때, 이 지역을 담당한 일본 육군  제 14 방면군 상무 집단(尚武集団) 수뇌부들은 이들이 국도 11호선을 따라 바기오(Baguio) 정면으로 공격을 집중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미 제 1 군단이 오로지 이쪽 방면으로만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실제 전투 초기에 이쪽 방면을 담당한 미 제 33 사단은 불리한 지형에서 닥돌을 계속 시도하다 발목만 잡히며 희생은 점차 커져만 가고 있었다.


크흑..옆구리를..당시 필리핀 괴뢰정부 대갈들을 모아놓고 안심시키는 야마시타..

  

하지만 미군은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3번 국도상에는 일본군의 방어 병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더욱이 정찰 결과에 따르면 카바(Caba)에서 갈리아노(Galiano)에 이르는 도로는 건조한 날씨에 더해 공병 불도저를 동원해야만하는 과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결국 서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동쪽으로 꺾어 바기오를 점령한다는 계획이 점차 구체화 되었으며, 미 제 33 사단장 페르시 클락슨(Percy W. Clarkson) 소장은 3월 중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준비했다.


옆구리가 비었을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굿!.. 제 33 사단장 페르시 클락슨 소장..


당시 클락슨 소장은 바기오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인 11번 국도에서 일본군과 접촉을 계속 유지함과 동시에 도시로 신속하게 돌진하기 위해 9번 국도를 따라 나머지 병력을 집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판단이 든 직후, 그는 군단장인 스위프트 중장에게 4월 1일까지 그러한 노력에 힘을 쏟을 수 있다면 5월 15일 이전에 바기오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했고, 스위프트 중장 또한 클락슨 소장과 마찬가지로 바기오에 대한 서쪽 해안으로부터의 접근 방식이 11번 국도 또는 동쪽의 계곡을 따라 접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결론 내렸다.


거리는 짧다지만 쌩 식겁..좀 돌더라도 안전빵이 더 합리적이다!


당시 상무 집단은 9번 국도를 지키기 위해 부대를 재배치할 여유나 논리가 없었기 때문에 서부 해안 지역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바기오에 대한 주공이 11번 국도에 한정되고, 서쪽으로의 접근은 시도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일본군 수뇌부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제 1 군단장 스위프트 중장은 클락슨 소장의 작전을 승인하려 했었고 어쩌면 이 계획은 잘 작동했을 터였지만, 바기오 함락이라는 업적은 결코 클락슨 소장과 그의 제 33 사단 단독의 영광은 되지 못했다.


작전 초기 11번 국도에서 식겁한 제 33 사단에게 영광이 돌려질 수도 있었지만..


이미 미 제 6 군 사령부는 북부 루손에서 바기오를 향하는 3번째 루트를 개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이는 어쩌면 클락슨 소장에게는 불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본 육군 제 14 방면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1945년 4월 7일, 미 제 6 군 사령관 월터 크루거(Krueger) 중장은 맥아더 원수를 설득하여 마닐라 점령을 위해 차출되었던 제 37 사단을 복귀시켰고, 그는 이 부대가 루손 북부로 돌아오자마자 9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도록 명령했으며, 제 1 군단에게는 기존의 제 33 사단과 함께 복귀한 제 37 사단이 동시에 바기오를 향해 2차선 공격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가뜩이나 답이 없는데 마닐라에 투입되었던 37 사단까지 바기오 공략에 합류..

 

마침내 4월 12일, 이 2개 사단에 의한 서해안으로부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고, 그 선봉에 선 미 제 37 사단 제 129 보병연대는 4월 14일, 사블란(Sablan)의 일본군 방어선을 포병의 직접화력 지원과 셔먼 전차와의 협공으로 너끈히 돌파하기에 이른다.
다음 날, 제 148 보병연대는 칼롯(Calot)을 점령하고 국도 9선을 확보했으며, 이들은 당시 일본군 제 19 사단이 이곳에 남긴 많은 탄약 및 보급품들을 획득했는데, 당시 그들은 이 소중한 보급품들을 북쪽으로 이동시킬 시간도, 수단도 없었으며 결국 이 막대한 보급품의 손실은 훗날 필리핀 밀림 속의 거지떼, 즉, 그들의 노숙자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바기오를 향한 미군 2개 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입장에서 엄청나게 심각했던 점은 4월 11일에서 15일까지 이어진 제 37 사단의 공세로 인해 일본 독립혼성 제 58 여단 직속으로 41식 산포(四一式山砲) 18문을 보유한 여단 포병대를 비롯해 거의 모든 포병 세력이 탈탈 털려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허접하지만 야포 비스무리 하던 것 마저도 다 잃음..41식 산포..


4월 15일, 미 제 37 사단이 예기치 않은 속도로 서쪽 루트를 따라 접근해오기 시작하자 독립혼성 제 58 여단장 사토 분조(佐藤文蔵) 대좌는 칼롯(Calot) 남동쪽 9번 국도를 따라 방어선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칼롯에서 남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바리오(Barrio)에 보병 2개 중대를 급히 파견시켰으나 황당하게도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즈음엔 미 제 148 보병연대가 이 지점을 지난버린 이후였고, 남동쪽으로 1km 떨어진 야그야간(Yagyagan)까지도 통과해 버린 이후였다(-_-;;)



야그야간의 함락은 이제 바리오에서 갈리아노(Galiano) 도로를 따라 아신(Asin)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일본군이 저항할 수 있는 지형적 방어선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당시 남쪽에서 제 33 사단 제 130 연대가 아신 서쪽에서 일본군의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 그들은 제 37 사단이 확보한 루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제 130 연대의 일부는 국도 9호선으로 넘어가 아신의 일본군 방어선을 우회할 수 있게 되었다.


야그야간의 함락은 전방의 아신 방어선이 헛지랄이 됐다는 것을 의미..


이제 미 제 37 사단은 서해안에서 바기오에 이르는 국도 9호선의 대부분을 확보했고, 이제 남은 것은 야그야간에서 불과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이리산 강(Irisan River)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도로에 남겨진 일본군의 최후 방어선뿐이었다.


이 이리산 협곡이 뚫리더라도 후방에 바우앙(Bauang)과 바기오(Baguio)가 남아있었지만 사토 독립혼성 제 58 여단장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군 특유의 이상한 아집과 독선 그리고 순응 때문으로, 바기오 방어를 책임진 제 14 방면군 참모부장 우츠노미야 나오카타(宇都宮直賢) 소장이 이리산 강에서 최후를 맞으라고 명령함에 따라 그는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죽으라니 그러는 수밖에..당시 이리산 협곡의 다리..

 

여기에 더해 제 14 방면군은 바기오에 남아있던 유능한 병사들을 탈탈 털어 이곳으로 보냈고, 국도 11호선을 따라 전초 방어선을 구성하고 있는 병력들을 빼내 이곳에 투입하는 바람에 남쪽의 국도 11호선의 방어선은 그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약 1,500명 이상의  병력이 이리산 협곡으로 파견되었으나 질제로는 약 1/3 정도의 병력만이 원하는 시간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고..)


1,500명 이상의  병력이 이리산 협곡으로 파견되었으나..

  
이리산 협곡은 야그야간을 지나는 국도 9호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도로는 제 148 연대가 “A 고지(Ridge A)”라 이름붙인 가파른 산등성이의 남쪽과 동쪽 경사면이 아래로 흐르는 협곡의 측면을 가로막았다.
A 고지의 위치는 도로를 지배하는 위치였고 F 고지와 H 고지 위의 병력들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교량 위뿐만 아니라 도로 전체를 제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일본 육군 독립혼성 제 58 여단과 급히 보강된 지원 병력들은 대전차포가 설치된 일부 고장된 벙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동 방어를 선택했고, 이들은 지극히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서로 상호 지원하는 방어 방식을 구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리산 협곡의 지형도..수비측에 극히 유리했다..

 
이런 미군 공식 전사에 표현된 방법을 그대로 기술하면 “아..그래도 일본군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법으로 방어선을 유지하려 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내면을 조금만 깊이 파보면 이들의 광기어린 똘추 짓거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육군 제 2 전차사단의 전차 제 10 연대 제 5 ​​중대는 통칭 사쿠라이(桜井) 중대로 지네끼리 별명을 붙인 중대로, 전차 제 10 연대에서 바기오의 제 14 방면군 사령부로 파견돼 방면군 직할 부대(기존 연대의 명령이 아니라 방면군의 명령으로 움직이는..)가 된 부대였다.


제 2 전차사단 전차 제 10 연대 제 5 ​​중대는 통칭 사쿠라이(桜井) 중대..

 

당시 바기오 인근 삼림 지역에는 필리핀 게릴라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그들의 습격과 교전이 무수히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군 수뇌부는 전차 1개 중대가 있으면 빈약한 게릴라 무장 정도로 보아 전차를 회피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이들이 바기오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게릴라들 따위야 우리 전차를 보면 토까기 바쁘겠지? 흐음~~ -_-;;


하지만 파견이 결정된 전차 제 10 연대 제 5 중대는 필리핀에 도착할 때 수송선이 미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며 전차라고는 1대도 없었고 병사들은 구조되었지만, 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필리핀 현지에서 일부 보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필리핀 침공 당시 노획한 미군의 M3 경전차 일부를 건네받아 운용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이 시기가 되면 전부 엿 바꿔 먹었는지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는 97식 중전차(九七式中戦車) 3대, 95식 경전차(九五式軽戦車) 2대밖에 없었다(엿 바꿔 먹었다는 건 농담이고.. 이걸로 설마 딴지 거시지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몰겠지만 요딴 것 밖에는..95식 경전차 하고..


어쨌든 이들은 1944년 12월 5일, 바기오에 도착하였고 그 즉시 제 14 방면군 사령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www.britishpathe.com/gallery/ww2-bloodiest-battles/4
https://www.reddit.com/r/TankPorn/comments/6dqggw/chiha_tanks_during_the_battle_of_luzon/
http://www.skypoint.com/members/ande1054/greg/greg.htm
http://www.33rdinfantrydivision.org/maps.htm
http://www.ww2online.org/advanced-search?page=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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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mybrokenwing/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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