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괴물과 직면한 1차 대전 독일군의 대전차 대책<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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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병기들과 숨겨진 명품들

강철 괴물과 직면한 1차 대전 독일군의 대전차 대책<下>

봉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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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괴물과 직면한 1차 대전 독일군의 대전차 대책<下>



1916년 9월 15일 아침, 포병의 포격이 멈추고 호각 소리가 들린 직후, 할당된 참호선에 긴급히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무인지대 건너편 영국군의 참호선으로 부터 난생 처음 듣는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계식 엔진의 포효와 금속판의 꽉 끼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짙은 안개와 연기는 이 물체가 가까운 곳에 다가올 때까지 그 모습을 가렸다.


불안한 소리와 함께 대책없는 괴물이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강철의 짐승은 양측의 참호선을 가르는 무인 지대를 빠져 나와 철조망을 짓밟고, 몸체에 장착된 포와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많은 독일 병사들은 당황하여 후방으로 도망쳤기 시작했다.
용감한 혹은 무모한 병사들은 공중에 신호탄을 발사하여 포병의 발포를 유도했으며 공포로 얼어붙었던 이들은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전차가 처음 출연했을 당시 영국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는 꼴통이었던 것에 더해 자신이 기병 출신이었기에 전혀 전차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까지 그의 전략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게도 “선봉에 선 기병이 돌파구를 열어 후방을 분쇄하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전차가 출현할 때까지 기병이 전선에 돌파구를 연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헤이그는 이런 꼴통적 견해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솜므에서 탈탈 털리자 결국 그 직후에 1,000대의 마크(Mark) I 전차를 주문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 꼴통 영감도 대사고를 치고나자 어쩔수 없이..


이렇게 처절한 희생을 담보한 이후에야 전장에 등장한 듣보잡 강철 괴물에 맞서 독일군은 이에 대한 수류탄 공격과 함께 보병이 치명적인 인간 장벽을 만들어 전차에 접근하여 파괴하려는 초기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역시 즉석에서 급조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초기적 대처에 후방 본부에 앉아 에헴거리던 독일군 고위 장성들은 적 전차에 대한 이런 병사들의 육탄 저지에 요상하리만치 계속해서 만족했고, 최전선의 병사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휘한 이런 극단적 생존 지혜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자 인해 전차란 물건은 그다지 심각한 위협이 아니라는 황당한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꼴통들은 언제나..대전차 수류탄을 손에 쥔 채로 발굴된 소련군 병사..


어쨌든 장철 괴물을 직접 마주해야 했던 독일 군인들은 온갖 잔머리를 짜내어 속하게 추가적인 대전차 방어 장치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첫 번째는 어쩌면 당연했던 땅파기였다.


어쩌면 당연했던 땅파기..흑~~ ㅠ.ㅠ


그들은 최대한 전차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한 노가다를 실시하여 늪과 같은 구덩이들을 전차의 전진로에 만들고 추가로 전차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한 폭 3.6m, 깊이 4.5m 가량의 참호선을 만들어 전차의 접근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연합군은 신속하게 새로운 참호선 장벽을 넘을 수 있는 브리징 장비를 제공했는데 이들 중에는 초기의 나무집단을 참호에 던져 넣어 공간을 메우는 간단한 장비에서부터 실제 6.5m 길이의 임시교량이 장착된 전차를 투입하는 것까지 있었다.


참호를 메우거나 아니면 아예 다리를 놓아 건너 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전차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중에는 목제로 만든 방벽까지 있었는데 당연히 이 나무 장애물들은 초기의 허름한 전차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허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자 다음으로 그들은 전차 전체를 삼킬 수 있도록 설계된 대전차 함정(뚜껑으로 덮인 큰 구멍..)까지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2가지 요인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했다.
그들의 이런 필사적인 노력은 대개 이 시기부터 실용화되기 시작한 항공 정찰에 의해 금방 발각되어 전차는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대전차 함정들은 거의 매일 지속되는 대량의 포격에 의해 파괴되어 스스로 메워지기 일쑤였다.


독일군이 노획한 전차를 이용해 대전차 참호를 테스트하는 모습..


이렇게 몇몇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참호와 구덩이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만으로는 전차의 진격을 확실히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독일군은 전차의 위협을 극복하기위한 다른 방식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것은 바로 대전차 지뢰였다.


솜므 전투에서 영국군의 전차가 최초로 등장한 지 몇 주 만에 대전차 지뢰가 설계되고 사용되었는데 당시 독일군이 사용한 최초의 대전차 지뢰는 야포탄이나 박격포탄을 급히 전용해 개조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즉석 폭발 장치는 너무 위험하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극히 일부만 만들어졌지만, 이러한 급조 지뢰의 사용은 전차가 심각한 위협이 아니라는 독일 육군 지휘관들의 태도 변화에 크게 일조했다.


급조한 대전차 지뢰가 효과를 보이자 또 다시 꼴통들은 이에 만족한다..


이 이상한 사고방식은 1917년 11월에 벌어진 캉브레(Cambrai) 전투 이후 크게 바뀌게 되는데 200대의 영국 전차들이 대량 투입되며 초기 공격을 주도하자 그제서야 전차의 구체적인 위협에 대해 독일군 사령관들은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반응은 더 나은 대전차 지뢰를 대량생산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이후 이 급조 대전차 지뢰는 대량 생산된 최초의 대전차 지뢰인 플라흐미네(Flachmine) 17로 발전하였으며, 이 지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3백만 개가 넘게 생산되었다.


대량 생산된 최초의 대전차 지뢰 플라흐미네(Flachmine) 17..


전차의 무게에 의해 눌려지면 지뢰가 폭발하도록 설계된 이 지뢰는 전차의 궤도를 손상시키고 차량을 전투에서 나가떨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했다.
독일군은 처음에는 지뢰들을 예측이 가능한 장소 즉, 중요한 방어 위치와 교차로 등에 매설했지만,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대전차 지뢰는 더욱 체계적으로 매설되었고, 여기서 놀라운 점은 연합군도 독일군도 1차 대전 내내 대전차 지뢰밭을 보호하기 위해 대인 지뢰를 함께 매설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조심해라! 대전차 지뢰다! 그러나 이놈만 매설하고 끝~~


1918년에 이르면 독일의 대전차 지뢰는 그 크기와 폭발력이 더욱 커졌고 45x35cm의 정사각형 나무 상자 형태의 대전차 지뢰들은 스프링이 달린 뚜껑이 전차의 무게에 의해 눌려지면 그 압력에 의해 기폭되었다.
그 파괴력은 1918년 9월, 미 육군 제 301 전차대대에 소속된 영국제 Mark V 전차 35대 중에 10대가 지뢰가 접촉해 궤도와 차량 바닥이 완전히 작살났다고 보고되었으며, 1918년 전투 기간 동안 미국 전차 손실의 15%가 지뢰에 의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 당시에도 대전차 지뢰는 심각한 위협이었다..당시의 피해 보고서..

 
한편,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독일군은 전차에 대한 가장 적합한 반격은 직접적인 화력의 투사라고 결정했고 1917년 초까지, 각 보병 연대에 대전차 방어에 사용하기 위한 2문의 야포를 요새화된 위치에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적의 공격에 의해 이런 고정 목표물은 곧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이따위 현실적이지 못한 명령은 최전선 지휘관들에 의해 거의 지켜지지 않았으며(이런 걸 멋도 모르면서 뒷방에 앉아 에헴거리는 지랄이라고..관저정치..) 당시 전선의 독일군 장교들은 전차에 대한 대책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화력투사용 병기에 훨씬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전차 잡는다고 최전선에 야포를 짱 박는다는 것은 곧 쓰잘데기 없음을 의미..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77mm FK 16 야포였다.


이전에 사용되던 77mm FK 96nA 야포는 가볍고 기동력이 높았지만, 1차 세계 대전이 참호전으로 전환되면서 그 기동력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고, 사거리 면에서 프랑스의 M1897 75mm 야포나 영국의 QF 18 파운드 포 등에 비해 떨어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이 야포였다.


이때 눈에 띈 것이 경량에 운반성이 좋은 77mm FK 16..

   
사정거리 10,700m에 철갑탄을 사용했고, 1.3톤이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로 인해 마차 나 트럭으로 운반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선 75mm M15 산포 같은 경량 야포처럼 병사에 의해 직접 운반 및 운영하는 것이 가능해 캉브레(Cambrai) 전투에서 대전차병기로써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후 전차 킬러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독일군은 기존의 박격포를 직사포로 변경시켜 전차에 대항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놈으로는 7.58mm 미넨배르퍼(Minenwerfer) 박격포가 있었다.


1905년의 러일 전쟁은 현대적 요새에 대한 박격포의 가치를 보여 주었고 독일군은 제 1 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련의 신형 박격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라인메탈(Rheinmetall) 사에서 개발한 박격포가 바로 이놈이었다.
이 박격포는 포신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는 복좌기와 반동을 완충시키는 주퇴기을 가지고 있었으며 1916년에 채택된 개량형은 360도 회전이 가능한 받침대가 추가되었고 또한 140cm의 장포신을 가진 타입은 앙각 0~ 27° 사이에서 4.6kg의 포탄을 평사 및 직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원래는 박격포로 개발되었던 7.58mm 미넨배르퍼..


이에 따라 평탄도와 뛰어난 정확도를 가진 이 가벼운 참호용 박격포는 영국의 전차 승무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악명을 떨쳤지만, 대전차용으로 수평사격을 실시하면 그 사거리가 약 500m에 불과해 사격 직후나 미리 그 위치가 발각될 시, 생존성면에서 상당히 취약했다.


박격포가 아니라 전차잡는 직사포로~~!! 요즘 말하면 무반동총이랑 비스무리..

  
따라서 전쟁 중에 이놈을 대체하기 위해 독일군은 수많은 대전차 병기들을 개발하고 제작하였으며 연합군의 전차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독일군의 이런 대전차 전용 무기 중 단연 인상 깊은 놈을 꼽자면 바로 전쟁 후반에 제작된 37mm TAK 대전차포를 들 수 있겠다.


뒤늦게 서야 독일 최고 사령부는 새로운 대전차 무기의 효용성을 만족스럽게 받아 들였지만, 이때까지도 그들은 일반적인 무기와 개선된 전술로 여전히 전차라는 철갑 괴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단 하나의 실제 효과적인 대전차 병기가 일찌감치 개발되었지만 그것은 별 효과적이지 않았던 것에 더해 병사들 사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었던 13mm 탕크게베르 대전차총이었다.


효과가 떨어지며 별로 인기가 없었던 13mm 탕크게베르 대전차총..어께 빠진다..


하지만 1918년 여름에 이르면 이전의 방식이 틀렸다고 인식한 연합군이 전차의 진정한 효과를 발휘시키기 위하여 이 강철 괴물을 한 지역에 집중해 대량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18년 7월에 벌어진 소와송(Soissons)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전차 480여대(주로 FT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마침내 독일 최고 사령부(OHL..Oberste Heeresleitung) 꼴통들의 사고를 무력화시켰으며 결국 전차를 원거리에서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대전차 무기를 신속하게 개발하도록 가속화시켰다.


소와송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자 무대책이 된다..


영국이 새로운 비밀 무기를 처음 사용한 후, 그 여파로 독일은 이 전쟁 기계들을 물리치기위해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 나섰는데 처음에는 보병들에게 철갑탄인 K-탄을 더 많이 보급한 다음, 포병들을 재교육하여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요구했다.


이후 대전차용 참호를 넓히고 최전방 바로 뒤에서 대전차 역할의 77mm FK 16 야포를 통합한 새로운 수비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또한 마우저(Mauser)가 생산한 대전차총 탕크게베르(Tankgewehr) M1918을 사용해 이를 전차 방어 전술에 특화된 전술과 결합하면 전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독일 최고 사령부는 생각했다.


기존 대전차 대책으로 충분하다 생각했건만..이런 걸 상상력의 한계라고..

 
그러나 1918년 여름, 기존 전술을 완전히 갈아엎은 연합군이 전차를 한꺼번에 대량 운용하면서부터 독일 측에겐 이에 대처할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1918년 7월, 독일 최고 사령부는 독일 군수 산업의 양대 축인 크룹(Krupp)과 라인메탈(Rheinmetall) 두 회사에게 구형 37mm 개틀링식 회전 기관총의 포신과 7.58mm 미넨배르퍼(Minenwerfer) 박격포의 포대를 사용한 새로운 형식의 대전차포를 개발하도록 요청했다.


구식 개틀링 기관총을 이용해서 뭔가 만들어 주오..


개발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다음 달인 8월, 쿰머스도르프(Kummersdorf) 시험장에서 시제품의 테스트가 벌어졌고 라인메탈은 3.7cm 모델 3개와 2cm 모델 1개, 크룹은 3.7cm 1개 모델을 제시했다.
테스트에는 일련의 이동 및 배치 시연, 200m 및 500m 거리의 정밀 사격 및 200m 거리에서의 관통력 테스트가 포함되었고, 이 시험 이후 독일 최고 사령부는 두 회사의 1개 모델씩 두 가지 모델을 긴급 생산하도록 결정했다.


쿰머스도르프 시험장의 시제품 3.7cm TAK 대전차포..

   
이 두 가지 모델 모두 465g의 철갑탄을 사용해 500m 거리에서 15mm 두께의 장갑판을 관통하는 성능을 보여주었으며 크룹에 250문, 라인메탈에 350문이 주문되어 각각 12문이 9월 중순까지 납품되어 군이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치되었다.
하지만 크룹의 디자인은 그 복잡성으로 인해 제시기에 납품할 수 없었기에 라인메탈의 단순한 디자인이 독일군의 유일한 대전차포로 선택되었고,이렇게 선정된 3.7cm TAK 대전차포의 주문은 처음의 300문에서 1,200문으로 증가되었다.


간단한 디자인으로 인해 생산성이 지극히 높았다..

 
라인메탈은 단순한 디자인으로 짧은 시간에 이놈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는데, 그 개발기간이 달랑 2개월로 이는 현대 무기 역사상 가장 빠른 프로그램 중 하나이며 1918년 11월, 종전 무렵에는 이미 약 600문이 생산되어 그중 많은 수가 최전선에 있었다.
이 신형 대전차포가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할 즈음, 이미 전쟁은 독일의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따라서 그 활약도도 크게 떨어져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전차포의 명맥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종전 무렵에는 약 600문이 생산되어 그중 이미 많은 수가 최전선에 배치..

 
1차 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 체제하인 1925년, 독일 국방군(Reichswehr)이 비밀리에 대전차 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을 때, 국방군 병기국(Heerswaffenamt)은 라인메탈 사에게 이 대전차포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을 생산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이 대전차포를 경량화하여 기동성을 강화하고 현대화시킨 것이 바로 3.7cm TAK L/45, 즉,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 대전차포인 3.7cm Pak 36이었다.


개량형이 그 유명한 3.7cm Pak 36 대전차포..

  
이렇게 제 1 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에 의해 사용된 결정적이고 어쩌면 독창적인 대책에도 불구하고 전차는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약 20년 후, 제 2 차 세계 대전에서 그들은 이때까지 독일군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창에서 그 끝을 뒤집어 연합국을 향해 겨누게 된다.


<사진 출처>

http://www.firstworldwar.com/photos/tanks.htm
https://www.flickr.com/photos/osborne_villas/2328034129/
https://ww1machinery.weebly.com/tanks-and-u-boats.html
https://www.reddit.com/r/TankPorn/comments/5cpi84/german_army_testing_captured_british_tanks_during/
https://www.awm.gov.au/collection/C22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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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mybrokenwing/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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