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 玄相允 1893~1950년 9월 15일)조선임전보국단 이사 ・ 중앙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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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 玄相允 1893~1950년 9월 15일)조선임전보국단 이사 ・ 중앙중학교 교장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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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 玄相允 1893~?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 중앙중학교 교장


1893년 6월 14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다. 아호는 소성(小星), 자는 집중(執中), 호는 기당(幾堂)이다.


1908년 평안북도 정주군 부호(鳧湖)육영학교를 졸업했고, 1909년 평양의 대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에 학교가 폐교되어 같은 해 경성 보성중학교로 전학해 1913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에 입학해 1918년에 대학부문학과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 도쿄에서 조직된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학지광(學之光)』에 1914년부터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고, 1917년 4월에는『학지광』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18년 1월 이광수(李光洙) ・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 단체인 조선학회의 조직에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서 1918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1938년 중앙중학교로 개칭)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낭독의 실무과정에 참여해 손병희(孫秉熙) 등의 관련자 48인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가, 1920년 10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1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의 조직에 참여했다. 1925년 3월 경성교육회 평의원을, 7월 조선체육회위원을 각각 맡았다. 10월에는 『동아일보』 감사역에 취임했고, 같은 달 폐결핵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사임한 후 수년간 요양했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 이사에 취임한 후, 1932년 5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재취임했다. 1934년 2월 과학데이실행위원회 실행위원을, 3월에는 설계부 위원을 맡았으며, 4월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를 맡았다가 다음 달인 5월에 선전부 이사를 맡았다.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인식 강화를 위한 제2차 시국순회강연회 강원도 지역 연사로 파견되어 6일부터 11일까지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춘천 ・ 철원 ・ 홍천 ・ 인제 ・ 양국 ・ 금화 ・ 화천군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1938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2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비상시 국민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해 총후 경제전에 대처한다는 취지로 조직되었으며, 제1부 의식주부, 제2부 의례 및 사회풍조 쇄신부, 제3부 부인부로 구성되었다. 다음 달인 11월, 그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시국의 협조와 생활의 쇄신'을 목표로 순회강연반을 조직했는데, 이 때 이승우(李升雨) ・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평안북도 지역 강사로 파견되었다. 이 기간 중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시국과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제목으로 장기전에 대한 시국 재인식과 국민 각오에 대한 내용의 강연을 했다. 다음 해인 1939년 9월 27일자 『매일신보』에는 같은 맥락에서 「쌀을 절약합시다. 떡과 함께 술도 없앨 것, 우리부터 실행하자」 라는 글을 기고해 비상시 쌀 절약을 위해 '추석에 쌀로 떡을 만들지 말자'는 등의 비상시 생활개선에 대해 강조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의 일환으로 민중을 지도 ・ 교화해 일본정신의 고양과 국가 총력의 발휘를 구현 ・ 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0년 3월 경성부 내의 중등 학교 교장들과 '창씨(創氏)에 관한 협의회'에 참석했다. 1941년 녹기연맹에 참여했고, 같은 해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로 활동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태평양전쟁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개편해 조선민중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고자 조직된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다.




1941년 7월 중일전쟁 발발기념일에 맞춰 중앙중학교 대표로 헌금했다. 다음 달인 8월 삼천리사 주최로 열린 임전대책협의회(임천대책협력회로 개칭)에 참석했다. 9월에는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한 전시 최대의 민간 정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0월 조직 결성과 함께 이사에 선임되었다. 12월에는 '전시주부의 수첩 ―― 생활전력' 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강연을 했고, 같은 달 중앙 중학교 전교생을 대표해 경성 종로경찰서에 헌금했다.




1942년 5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징병제도실시 감사축하대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는 일제가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발표한 후, 조선에서 징병제도 실시를 축하하고, '황국신민'으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친일단체 활동과 강연뿐만 아니라 언론매체에 많은 친일 글을 기고해 전쟁협력을 강조했다. 1942년 11월호『춘추』에 기고한「징병제와 학원의 결의 ―― 정신과 체력 방면에 유의한다」에서는 "정신에 있어서는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토대로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국어(일본어) 상용을 철저히 하는 것이 첫길인 줄 생각한다. 체력에 있어서는 교련은 2, 3학년을 매주 세 시간씩, 그 외는 2시간씩하며 총검술을 훈련시키고 있다. 학교의 6할은 지방 출신이기에 대개는 지방의 유산계급이며 따라서 일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므로 더욱 근로작업에 힘을 다하고 있다." 라며 중앙중학교의 교과과정이 징병제 실시에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42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는 의무 교육제도가 실시된다는 발표가 있은 후「고대고대(苦待苦待)했다」는 인터뷰를 통해, 교육가로서 반가운 소식임을 전제한 후 "내지(일본)의 예를 보아 의무교육 실시가 오늘과 같은 제국의 흥륭에 기여한 바 막대함을 돌이켜 생각할 때 우리들도 발분하여 충량한 황민교육에 한층 더 발분할 것을 기(期)합니다." 라며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를 역설했다. 1943년 11월 1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학도여 성전에 나서라(5) ―― ‘사(士)는 국지원기(國之元氣) 멸사, 구원(滅私, 久遠)의 생(生)을 찾자」라는 글을 통해 “내가 현재 교편을 잡고 있는 중앙학교는 아직 직접 군인으로서 적령자가 없고, ······ 장차 적령기에 달할 것이므로, 지금부터 철저한 군대식 훈련과 결전정신을 양성하여, 일단 무인으로 군문(軍門)에 나설 때는 훌륭한 군인되어, 곧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도록 기(期)하고 있다. ······ 이미 중학을 졸업한 다음 각 상급학교에 입학한 졸업자에 대하여서도, 금반 임시특별지원병 채용규칙이 공포된 이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권고 지도하고 있는데, 지난 4일에는 특히 나의 명의로 우리 중앙중학 졸업자로서 현재 대학, 고등전문 각 학교에 재학 중인 자에게는 궐기의 결문을 발(發)하여 그들의 장도를 축복하고 아울러 결의를 촉(促)하였던 것이다.”라며 구체적으로 지원병 지원을 돌려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이어 “국가는 금차 특별지원병규칙에 의하여 (청년학도) 제군의 갈 길을 활연(闊然)히 열어주었다. 제군도 내지인 학도와 함께 대오를 같이하여 용약 결전장을 향하여 출진하게 되었음은 황국신민으로서, 또는 국가의 원기(元氣)인 사(士)된 자의 한 사람으로서 무상(無上)의 광영이 아닐 수 없다. 이 위대한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 제군이 바치는 그 적성(赤誠)에 넘치는 충혼은 황은에 봉보(奉報)하는 국민의 절대한 의무일뿐더러 일면 반도 청년학도의 약동하는 생(生)의 표징일 것이다.”라며 특별지원병제를 찬양하고 선전 ・ 선동했다. 1944년 8월 1일자『매일신보』에 기고한 「신총독(新總督)에게 기대(5) ―― 교육기관을 확충」이라는 글에서는 총독에게 교육기관의 확충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일반 국민도 국체의 본의를 잘 파악해 총독이 기대하는 ‘성전(聖戰)완수’에 과감한 돌격을 주장했다. 1944년 12월 12일자 『매일신보』‘전열(戰列) 제4년의 각오’를 듣는 란에서는 ‘정신부난(挺身赴難)’ 이라는 휘호와 함께「승리는 정신력, 신취(神鷲)를 따르자 반도청년」이라는 글을 통해



“나는 모든 정세로 보아 황국의 절대적인 승리를 여기에 단언한다. ······ 전승의 요결은 결국 정신력에 있는 것이다. ······ 보라! 요즘 매일같이 보도되는 ‘신풍특별공격대’의 장렬한 훈공을 ······ 전국이 증대하여 갈수록 청년의 책임은 나날이 증대하여 간다. 대동아전쟁을 이기고 못 이기는 것은 그 책임이 우리 청장년들이 몸을 바쳐 국난을 담당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동아전쟁 발발 아래 반도청년의 충의는 여실히 나타나 마쓰이(松井) 오장과 가네하라(金原) 군조는 반도청년들의 갈 바를 몸소 지시하였다. 반도의 청년들아! 이 선배의 뒤를 따라서 몇 천 몇 만의 마쓰이와 가네하라가 나와 주기를 바란다.”



라며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일본의 특공대로 전사한 이들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경성대학 예과과장에 임명되었다가,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보성전문학교가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로 인가되면서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0년 6월 6 ・ 25전쟁 중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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