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1919~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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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1919)

의열단 1919~1929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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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義烈圈)이 길림성에서 결성된 것은 1919년 11월 10일이었다. 결성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結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晙)이었으며, 김원봉을 ‘의백(義伯)’으로 추대하였다.


활동지침으로는 ‘공약 10조’·‘암살대상’·‘파괴대상’을 채택함과 동시에,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이상으로는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천명하였다.註 019


이로써 의열단의 항일투쟁 지향점은 제시되었고, 1920년 3월의 ‘밀양 폭탄반입 사건’ 이래 항일투쟁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1925년까지만 하여도 수백여 차례의 활동성과를 거두었다.註 020


 사진을 촬영하지 않고 간혹 기념촬영을 하는 경우에도 원판을 회수하는註 021 의열단원의 치밀함은 일제 정보망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표방하는 파괴·흉폭행위를 실제화시키는 자는 오직 의열단 뿐”註 022이라는 일제기관의 평가는 의열단의 투쟁역량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의열단의 투쟁노선은 임정 계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고, 이는 의열단의 진로가 ‘준비론’ 및 ‘외교론’과는 합치될 수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의열단의 단원확보와 조직체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일제기관은 1924년의 ‘정예단원’을 70여 명으로註 023 추정하고 있다. 또 조직은 수직체계로 설정되지 않았고 단원 상호 간의 관계 역시 평등을 표방하였다. 의열단의 재정기반은 김원봉이 장악하고 있었는데,註 024 주된 재원은 국내에서의 모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국내신문은 의열단 활동자금이 ‘기부’와 ‘모금’ 방법을 통해 확보되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는데,註 025 구체적인 모금조직이나 실태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1920년대 초반 이래 유입되기 시작하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은 한인독립운동가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새로운 조류 속에서 의열단이 특정한 이념체계의 틀 속으로 용해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론투쟁이나 파벌다툼에 몰두하지 않고 의열투쟁을 통한 실력항쟁에 전념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이념과의 접촉 기회가 빈번하였겠지만 이들은 이념투쟁 속으로 분화되기를 과감히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註 026


이 시기 의열단원의 진보적 사고 형성에는 유자명(柳子明)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는 무정부주의운동을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함에 있어서는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이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여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註 027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북경의 신채호를 방문,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완성 결과, 의열단은 항일투쟁 노선의 이념적 지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구체화된 민중직접혁명론은 의열단의 진로를 규정한 것이었으며 의열단원 자신이 민중직접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또한 이 규정은 의열단 노선의 재정립과 방향전환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923년은 의열단 활동의 검증과 결속을 확인하는 한 해가 되었다. 6월 말의 총회와 10월 12일의 ‘위로연’에서는 의열단 활동의 기본방침 이 재검증되었고 활동수칙 및 주의사항이 하달되었다.註 028 이는 창단 이래의 활동노선에 대한 재정비와 결속의 필요성이 적극 대두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같은 모색은 1924년 1월 광동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성립을 계기 로 가시화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선택의 폭은 넓지 못하였다. 김원봉은 “민중을 각성시키는 길은 오직 탁월한 지도이론이다. 교육과 선전이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다. 혁명은 곧 제도의 변혁이다. 몇몇 요인의 암살과 몇개 기관의 파괴로는 결코 제도를 변혁할 수 없다’고 의열투쟁 노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결국 전민중의 무장을 전제로 한 의열단원 자신의 성찰과 무장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셈이다. 유자명 등은 노선전환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다수 단원들은 투쟁역량의 재충전을 위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등의 입교를 선택하였다.註 029


1926년 봄 김원봉은 손두환(孫斗煥)·김성숙(金星淑) 등과 장개석 교장을 방문, 황포군관학교(이하 ‘황포군교’)의 입교를 허락받았다.註 030 그리하여 1926년 3월 김원봉·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이집중(李集中)·이기환(李箕煥)·김종(金鐘)·강평국(姜平國)·최영택(崔泳澤)·양검(楊儉)·노일룡(盧一龍)·권준(權晙)·노건(盧建) 등의 단원이 4기생에 입교하였다.註 031


 황포군교에서 이들이 이수한 근대적 군사·정치교육은 이 시기 황포군교를 둘러싸고 전개되던 국공합작의 현장체험과 더불어 이들의 혁명관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특히 황포군교 내의 국공간의 대립·갈등은 의열단원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원들 역시 공산주의 혁명론에 관심을 갖게되고, 일부는 중공당 활동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국공합작의 필연성과 모순점을 직시하며 항일투쟁 과정에서 제기되는 민족문제와 이념문제의 혼돈 속에서 곤혹스러워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6개월 동안 황포군교에서 습득한 체계적인 군사지식과 국공합작의 현장체험은 이들의 혁명관을 한층 심화된 모습으로 형상화시 켰음에는 틀림이 없다.1926년 10월 5일 졸업한 4기생들은 국민혁명군에 배속되었고, 한인 졸업생 역시 그 일원으로서 북벌전에 참전하였으나, 김원봉은 박효삼·강평국과 함께 황포군교에 잔류, 광동에 머물렀다.


이후 김원봉은 한인독립운동가들과의 동지적 유대를 강화하며, 김성숙 등 진보적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 의열단 활동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후 광동은 의열단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註 032


의열단은 1926년 겨울 광주(廣州)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오성륜(吳成崙)·김산(金山)·유자명 등이 참석하였으며 수차례의 토론 결과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시킬 것을 결의하였다註 033


 그런데 이 회의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의열단이 통일된 민족주의정당의 중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되고 있음이 그것인데, 이때 결정된 새로운 활동방향과 지침은 의열단 노선의 변화를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1933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상해파견원의 정보 보고서에서는 1926년 말 이후 의열단 활동의 변화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요지는 “의열단은……1926년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장정(章程)을 개정하고 구체적인 강령을 작성하여……전력을 대중적 혁명조직에 경주하고 또 다수의 동지를 소연방 및 중국군사정치학교에 파견하여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함으로써 혁명전쟁의 실지경험을 습득하고 국내외의 노동단체로 하여금……유격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초를 확립케 한다. 이는 의열단이 초민중적 조직체를 범민중화하려 한 시기라고 애기할 만하다”註 034는 것이다.


이같은 의열단의 1920년대 후반기 활동기조는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영향, 황포군교 수학 경험, 김성숙·오성륜·김산·유자명 등 진보적 인물들의 합류, 국·공 분열의 현장체험 등의 소산이었을 것이지만, 그 맹아는 1926년 겨울의 전체회의에서 비롯되고 있었음을 이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의열단이 1927년 초 광동에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를, 상해·무창·남경에 지방집행위원회를 각각 설치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아도 1926년 겨울의 전체회의에서는 중국 국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중시하고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를 강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 의열단의 조직 재정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1927년 4월에 작성한 광동주재 일본총영사관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광동본부에는 김원봉·김성숙·최원(崔圓)·김산·이영준(李英俊)·김건웅(金建雄)·최영암(崔永岩)·해유재(海維才)·김택(金澤)·노건(盧建)·김필립(金弼立)·김유광(金有光)·박효삼·강평국·오성륜·이유곤(李柳昆)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무창지부에는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입교 중인 진공목(陳公木)·진갑수(陳甲壽)·박태섭(朴泰燮)·유원도(劉元道)·백계(白桂)·최승년(崔承年)·이벽파(李碧波)·박시창(朴始昌)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남창지부에는 노일룡·이집중·왕자량·이기환·김권준(金權晙)·이기삼(李奇三)·최영택(崔泳澤)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註 035


의열단의 조직정비와 활동강화 움직임은 1927년 5월에 발표된 「독립당 촉성운동에 대한 선언」에 의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제창으로 이어졌다. 의열단은 이 선언을 통해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희생적 노력’을 감내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이어서 의열단은 ‘대독립당 촉성운동’ 전개를 위한 “파벌주의자와의 결합을 배격한다. 타협적 비혁명자 및 그 운동을 배격한다. 독립당 조직촉성회에 가입한다. 독립당을 완성한다”는 슬로건을 채택하였다.註 036 이로써 의열단의 1920년대 후반기 활동 기조는 ‘대독립당’ 조직을 지향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집약되었다.


이와 함께 의열단은 국내조직 기반 확충을 위해 “기호·영남지방의 학생조직을 바탕으로 지방지부의 설치를 기도하였다”註 037고 하지만, 김원봉의 광동 체류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의 이른바 ‘반혁명청당운동(상해쿠데타)’을 계기로 국민당의 중공당 탄압이 본격화되었고 4월 18일에는 ‘남경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의 결렬은 한인독립운동에도 그 영향이 파급되어, 다수의 한인 혁명가들이 이 해 8월 1일의 ‘남창봉기(南昌蜂起)’와 12월 11일의 ‘광주봉기(廣州蜂起)’의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의열단원의 남창봉기·광주봉기시 행적은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광주봉기에는 다수의 의열단원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앞의 무한지부의 일부 단원은 무한분교의 한인입교생 및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卾韓國革命靑年會) 회원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여하였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였던 안광천(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註 038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난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민주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민족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제창한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 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註 039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함으로써 의열단이 항일투쟁 단체로서 뿐만 아니라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정치단체’임을 표방하였다.


창립 당시의 공약 10조에 비해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 이 선언은 1926년 겨울 결의된 ‘혁명정당으로의 전환’ 방침을 구체화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1927년 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한 자체 정비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의열단의 협동전선운동은 자기혁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셈인데, 그 요강은 다음달인 11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의 내용으로 포괄되었다.


의열단의 협동전선론이 ‘실천을 통한 진전’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는 이 문건은 향후 의열단의 진로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집중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그 원동력을 광범위한 대중의 혁명적 욕구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강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협동통일’뿐이라고 규정하였다. 때문에 “모든 주의에 의한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조선혁명운동도 세계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어야 한다”고 협동전선 결성의 필연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협동전선의 성격을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것이며, 우경적인 것이 아니고 전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 계급적 기초를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며 가장 혁명적인 노동대중’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협동전선의 방향 설정에 대해서는 “현재 급속히 진전되는 조선 노동계급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하여 노동·농민운동의 고양을 중시하는 한편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독립당’을 제안하였다. ‘전투회피자’·‘폭력부인자’·‘점진주의자’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있는 이 선언문은 의열단의 향후 활동 역점이 대중투쟁에 있을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였다.註 040


그러나 이후 의열단의 활동은 침체국면에 처했던 것 같다.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註 041 1929년 이후 의열단 활동에 대한 구체적 정황은 규명되지 못하고 있지만, 민족유일당 결성을 표방한 ‘촉성회운동(促成會運動)’의 실패와 제1차 국공합작의 파국·코민테른의 ‘12월 테제’발표 등 중국 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의열단의 노선 재정립을 위한 노력은 지속되었다.



의열단 상해지부에서는 1929년 12월 2일 해체성명서를 통해, 의열단 조직이 계급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인정적 반공개 결합’에 불과한 것이어서 분산적이었고, 통일적 지도이론이 확립되지 않았음으로 인해 조직의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특정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 형태로의 전환을 재촉구하며, 노선 재정립 논의를 위한 전체대회 소집을 요구하였음을 환기시켰다.註 042


이처럼 1920년대 말 의열단 활동은 1928년 11월의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를 토대로 협동전선운동의 주체를 국내의 농민·노동자·학생으로 설정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통일적 독립당’ 결성을 시도하는 한편, 국내활동의 기반을 확보하려 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의열단의 협동전선론에 입각한 대중투쟁 노선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9월 본격화된 일제의 대륙침략은 재중 한인독립운동 진영이 항일투쟁 전열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열단은 1931년 10월 제5차 임시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국내외 정세변화와 항일투쟁의 전략·전술을 재검토하였다.註 043 의열단 활동의 일차적인 과제는 한중연합을 통한 항일투쟁 역량의 확충으로 집약되어갔다. 의열단 지도부가 남경으로 이동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고,註 044 국민당정부 수도 남경은 한인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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