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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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3)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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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반적으로 ‘신앙’ 혹은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saddhā, Skt. śraddhā)’라는 낱말이 있다. 하지만 삿다(saddhā)는 그러한 ‘신앙’이기보다는 오히려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가깝다. 대중 불교와 경전의 일반적인 용례에서 saddhā라는 말이 붓다(Buddha, 佛) · 담마(Dhamma, 法) · 상가(Saṅgha, 僧)에 귀의한다는 의미에서는 ‘신앙’의 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히 인정되어야만 한다.

 

서기 4세기의 위대한 불교철학자 아쌍가(Asaṅga, 無著)에 의하면, ‘쓰랏다(śraddhā)’에는 세 가지 양상이 있다고 한다. 즉 ⑴ 존재한다고 하는 완전하고 확고한 신념, ⑵ 좋은 특성에 대한 평온한 희열, ⑶ 객체를 성취하고자 하는 바램 혹은 열망 등이다.21)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대부분의 종교에 의해 이해되는 바로의 신앙 혹은 믿음은 불교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22)

 

이 낱말의 모든 의미에서의 봄이 없을 때 믿음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다. 보는 순간 믿음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만일 쥔 손바닥 안에 보석을 감추고 있다고 내가 당신에게 말한다면, 당신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다. 하지만 만일 내 주먹을 펴서 당신에게 그 보석을 보여주면, 당신이 직접 그것을 보고 난 후에는 믿음에 대한 의심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손바닥에 있는 보석을 보듯 깨달아라”라는 구절이 고대 불교경전에 있다.

 

무실라(Musīla)라는 붓다의 제자가 다른 스님에게 말했다. “벗 사빗타(Saviṭṭha)여, 귀의나 신앙이나 믿음도 없고,23) 좋아함이나 이끌림도 없고, 소문이나 전통도 없고, 명백한 이유의 숙고도 없고, 여러 견해를 추론할 때의 기쁨도 없이, 생성의 소멸이 열반이라고 나는 알고 보았다.”24)

 

그리고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들이여, 오욕과 번뇌의 소멸은 알고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다.”25)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해 언급한 불교 경전의 도처에서 사용된 표현법은 “티끌 없고 더럼 없는 진리의 눈(Dhamma-cakkhu, 法眼)을 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에 도달했고,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파악했으며, 의혹을 건너서 흔들림이 없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ṁ, 如是) 본다.”26) 등이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눈이 생기고, 통찰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과학적 지식이 생기고, 빛이 생겼다.”27) 깨달음은 언제나 지식 혹은 지혜(ñāṇa-dassana)를 통해 보는 것이지, 신앙을 통한 믿음이 아니다.

 

이는 바라문교의 전통과 권위를 의심 없이 유일한 진리로 믿고 받아들일 것을 바라문교 정설론자들이 편협 되게 역설하던 때였기에 더욱더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한때 학식 있고 저명한 바라문들의 한 무리가 붓다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토론을 가졌다. 그 무리의 한 사람인 까빠티까(Kāpaṭhika)라는 16세의 젊은 바라문이 특별히 총명한 인물로 간주되어서 붓다께 질문했다.28)

 

“고따마 존자시여, 중단 없는 구전으로 계통 있게 전해져 내려온 바라문의 고대 성스러운 경전이 있습니다. 그것에 관해서 바라문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절대적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고따마 존자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붓다는 되물었다. “바라문들 중에서 ‘이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개인적으로 알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바라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 젊은이는 솔직하여서 ‘아니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알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단 한 분의 스승이나,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때의 바라문의 스승들 중 단 한 분이나, 이러한 경전들의 원저작자들 중 어떤 한 분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각각이 앞선 사람을 붙들고 있는 장님들의 줄과 같다. 맨 처음의 사람이 보지 못하고, 가운데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 또한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저 바라문들의 상태는 장님들의 줄과 같이 나에게 비친다.”

 

그런 후 붓다는 바라문의 무리에게 매우 중요한 충고를 하였다. “진리를 지키는 현자가 ‘이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진리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진리 수호의 이념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젊은 바라문의 질문을 받고, 붓다는 말했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라고 한다면, 이제까지 그는 진리를 옹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서 ‘이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절대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그가 좋아하는 것을 믿고, ‘나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그는 진리를 존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 혹은 신앙 때문에 ‘그가 믿는 것만이 진리이고, 모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붓다가 말했다. “하나의 사물(하나의 관점)에 집착하여 다른 사물들(관점들)을 열등한 것으로 멸시하는 것, 이것을 현명한 사람들은 족쇄라고 부른다.”29)

 

한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인과의 교설을 설명했는데,30)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보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들이여, 이 견해가 아주 순수하고 명료하더라도, 만약 당신이 그것에 집착하거나 애착을 갖거나 소중히 여기고 매달린다면, 가르침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 닮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31)

 

뗏목의 비유

다른 곳에서도 붓다는 이 유명한 비유를 설명했는데, 여기서 그의 가르침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소유하여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 뗏목에 비유됐다.

 

“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넓게 뻗친 물가에 이르렀다. 이쪽 기슭은 위험하지만 저쪽은 위험 없이 안전하다. 위험이 없고 안전한 저쪽 기슭으로 가는 배도 없고, 그곳으로 건너기 위한 다리도 없다. 그는 그 자신에게 말했다. ‘이 바닷물은 광대하고 이 쪽 기슭은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저 쪽 기슭은 안전하고 위험하지 않다. 저 쪽으로 갈 배가 없고, 건너기 위한 다리도 없다. 그러므로 뗏목을 만들기 위해 풀과 나무, 가지와 나뭇잎들을 모으고, 뗏목의 도움으로 손발로 힘을 써서 저편으로 안전하게 건너가면 좋을 것이다’ 오! 비구들이여, 그 다음 그 사람은 풀과 나무, 가지와 나뭇잎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그 뗏목의 도움으로 그 자신의 손과 발의 힘을 발휘하여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갔다. 건너가 다른 쪽에 도달한 후 그는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의 도움으로 손발의 힘을 발휘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지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지니고 가면 좋을 것이다.’

 

“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그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했다면 그가 뗏목을 올바르게 처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뗏목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저쪽으로 강을 건너간 다음에는 이렇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를 크게 도왔다. 이것의 도움으로 손발의 힘을 발휘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넜다. 이 뗏목을 기슭에 끌어올리거나 뗏목을 잡아매거나 물에 띄워 놓고 어디로든 나의 길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 사람은 그 뗏목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뗏목에 비유되는 교설을 가르쳤다. 이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운반하기 (문자 그대로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 뗏목과 같다는 것을 이해한 너희 비구들은 좋은 것(dhamma, 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것(adhamma, 非法)을 버려야 함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32)

 

이 비유담으로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안전, 평화, 행복, 평온, 열반의 성취로 인도하는데 그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붓다가 가르친 모든 교설은 이 목적으로 이끈다. 그는 단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적 스승이었으며, 오직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만을 가르쳤다.

 

상상적 공론은 불필요하다

붓다는 한때 꼬삼비(Kosambhi, 알라하바드 근처)에 있는 싱사빠(Siṁsapā)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손에 몇 잎의 나뭇잎들을 쥐고, 그의 제자들에게 물었다. “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느 것이 더 많겠는가? 나의 손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잎들과 여기 숲속에 있는 나뭇잎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의 손안에 있는 나뭇잎들은 아주 적습니다만 참으로 여기 싱사빠 숲에 있는 나뭇잎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는 것 중 너희들에게 말한 것은 조금 뿐이지만,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보다 많다는 점도 그와 같다. 그리고 왜 내가 그것들을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모두 말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고 …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내가 너희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말하지 않은 이유이다.”33)

 

실천적 태도

몇몇 학자들이 쓸데없이 시도하듯이 붓다가 알면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붓다는 불필요한 단지 사변적이고, 상상된 문제만을 만들어 내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황당무계한 견해’로 간주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제자들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유명한 열 가지 표준적인 질문을 붓다께 던지고 대답을 요구했던 말륭카뿟따(Māluṅkyaputta)라는 사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34)

 

유행자의 비유

어느 날 말륭카뿟따는 오후 명상을 마치고 일어나 붓다께 다가가서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서 설명하지 않고 제쳐 두고 거부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⑴우주는 영원한가. ⑵우주는 영원하지 않는가. ⑶우주는 유한한가. ⑷우주는 무한한가. ⑸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⑹영혼은 육체와 다른가. ⑺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⑻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⑼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⑽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을 세존께서 나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았으며, 나는 이를 감사할 수가 없다. 나는 세존께 가서 이 문제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그 의문들을 나에게 설명해 주면, 나는 그의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계속 따를 것이다. 만약 설명해 주지 않으면 나는 승단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우주는 영원하다고 알고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그렇게 설명하도록 할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우주는 영원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면 그렇게 말하게 할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우주는 영원한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면,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말륭카뿟따에게 해준 붓다의 답변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불필요하게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오늘날 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말륭카뿟따여, ‘오라, 말륭카뿟따여, 나의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라. 내가 너에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라고 너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말륭카뿟따여, 너 자신도 ‘세존이시여, 나는 세존의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것이고, 세존은 그러한 질문을 나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말륭카뿟따여, 지금도 나는 너에게 ‘오라 내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라.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너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도 나에게 ‘세존이시여, 나는 세존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것이며, 그는 이러한 질문을 나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여,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누가 누구를 거절하겠는가?35)

 

“말륭카뿟따여,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는 한, 세존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여래에 의해 대답되지 않는 이러한 질문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말륭카뿟따여, 가령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고,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그를 외과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고 하자. 가령 그 사람이 “나는 누가 나를 쏘았으며, 그가 끄싸뜨리야(Kṣatriya, 戰士 계급), 바라문(Brāhmaṇa, 성직자 계급), 바이샤(Vaiśya, 농상 계급) 혹은 수드라(Sudra, 노예 계급)인지, 그의 이름과 가문이 무엇인지, 그의 키가 큰지 작은지 혹은 중간인지, 그의 눈이 검은지 푸른지 혹은 황금색인지, 그가 마을, 읍 혹은 도시에서 왔는지 어떤지를 알 때까지 이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맞았던 활의 종류, 사용된 활시위의 종류, 화살의 모양, 화살에 사용했던 깃털의 종류와 함께 화살촉은 무슨 종류의 물질로 만들었는지 알 때까지 나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말륭카뿟따여, 그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말륭카뿟따여, 그렇고 말고,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길 ‘나는 이 우주가 영원한가 아닌가 등과 같은 이러한 질문들에 그가 대답할 때까지 세존 밑에서 성스러운 생활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는 여래에 의해서 대답되지 않는 그러한 질문들과 함께 그는 죽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붓다는 말륭카뿟따에게 성스러운 생활은 그러한 견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건, 태어남과 늙음, 쇠퇴, 죽음, 근심, 비탄, 고통, 슬픔, 고뇌가 있으며, ‘나는 금생에서 이러한 것들의 소멸(그것이 열반)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말륭카뿟따여, 내가 설명한 것은 설명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마음에 새겨라.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않은가 등(이러한 열 가지 견해들)은 내가 설명하지 않았다. 말륭카뿟따여, 왜 내가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적 성스러운 생활과 관련이 없고, 그것은 혐오(嫌惡) · 이욕(離欲) · 지멸(止滅) · 삼매(三昧) · 등각(等覺) · 열반(涅槃)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내가 그것에 대해서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런데, 말륭카뿟따여, 내가 설명했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설명했던 것은 괴로움(dukkha, 苦)이고, 고의 생성,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36) 말륭카뿟따여, 왜 내가 그것을 설명했겠는가? 그것은 유익하고, 근본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스러운 생활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혐오(嫌惡) · 이욕(離欲) · 지멸(止滅) · 삼매(三昧) · 등각(等覺) · 열반(涅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들을 설명했다.”37)

 

이제부터 붓다가 말륭카뿟따에게 설명했다고 말했던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살펴보자.

 

Notes:

21) Abhisamuc, p.6; 譯註: 無著菩薩造 唐玄奘譯, 『大乘阿毘達磨論集』(No.1605); “何等爲信. 謂於有體有德有能忍可淸淨希望爲體. 樂欲所依爲業.”[大正藏 31, p.664.]

22) Edith Rudowyk-Gyomroi이 지은 『초기 팔리문헌에서의 기적의 역할(The Role of the Miracle in Early Pali Literature)』에서 이 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박사학위 논문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주제에 관한 것은 세일론대학교 서평 Vol. 1, No. 1(봄, 1943), p.74 이하에서 동일 저자가 쓴 글을 볼 수 있다.

23) 여기에서 saddhā라는 말은 일반적인 ‘귀의 · 신앙 ·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24) S. Ⅱ(PTS), p.117.

25) S. Ⅲ(PTS), p.152.

26) E. g. S. Ⅴ, p.423; S. Ⅲ, p.103; M. Ⅲ, p.19.

27) S. Ⅴ, p.422; 譯註: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28) Caṅkī-sutta(商伽經), no.95 of M.

29) Sn.(PTS), p.151 (v.798). 譯註: "Taṁ vȃpi ganthaṁ kusalā vadanti, yaṁ nissito passati hīnam aññaṁ, tasmā hi diṭṭhaṁ va sutaṁ mutaṁ vā silabbataṁ bhikkhu na nissayeyya." "The experts say that it is a bond to depend on what one associates with and to see everything else as inferior. Therefore, the disciplined one should not trust in things seen, heard or felt or in rules and rites." (tr. by H. Saddhatissa.) “사람이 어떤 일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유치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대단한 장애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구들은 본 것, 배운 것, 사색한 것, 또는 계율이나 도덕에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Sn.798.)

30) In the Mahātaṇhāsaṅkhaya-sutta(愛盡大經), no. 38 of M.

31) M. Ⅰ(PTS), p.260.

32) M. Ⅰ(PTS), pp.134-135. 여기서 담마(dhamma, 法)은 주석서에 의하면, 높은 정신적 성취는 물론 순수한 견해와 관념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아무리 높고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악과 나쁜 것에 대해서야 두말할 것도 없다. MA. Ⅱ(PTS), p.109.

33) S. Ⅴ(PTS), p.437.

34) Cūla-Māluṅkya-sutta, no. 63 of M.

35) 그것은 양쪽 모두 자유로우며,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의무를 지우고 있지 않다.

36) 이들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는 다음의 네 장에서 설명했다.

37) 붓다의 이 충고는 말륭카뿟따에게 훌륭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그는 가르침을 위해 붓다에게 다시 접근했다는 보고가 있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그가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A. (Colombo, 1929), pp.345-346; S. Ⅳ(PTS), p.72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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