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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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4)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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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4)

 

월폴라 라훌라 지음

마성 옮김

 

제2장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첫 번째 고귀한 진리: 둑카(Dukkha)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베나레스 근처 이씨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 현재의 사르나트)에서 옛 동료였던 다섯 고행자들에게 행한 첫 설법에서 자신이 해설한 네 가지 고귀한 진리(Cattāri Ariya saccāni, 四聖諦)에 있다.1) 이 법문에서는 우리가 원전에서 본 법문과 같이 네 가지 진리가 간략하게 설해져 있다. 하지만 초기 불교경전의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이 사성제는 자세히 그리고 여러 다른 방식으로 거듭 설명되었다. 이러한 참고문헌들과 설명의 도움으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공부하면, 우리는 원전에 따른 붓다의 근본교설에 대해 상당히 훌륭하고 정확한 설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

 

⑴ 고(苦, Dukkha)2): 괴로움

⑵ 집(集, Samudaya): 괴로움의 발생 혹은 원인

⑶ 멸(滅, Nirodha): 괴로움의 소멸

⑷ 도(道, Magga):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

 

첫 번째 고귀한 진리: 둑카

 

첫 번째 고귀한 진리(Dukkha-ariyasacca, 苦聖諦)는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로 대개 번역되었고, 불교에 의하면 인생은 괴로움과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번역과 해석 모두 대단히 만족스럽지 못하고 오도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간주하도록 오도되어진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한정된 마구잡이식의 손쉬운 번역과 피상적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yathābhūtaṁ, 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어떤 의사는 질병을 심각하게 과장하여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다른 어떤 의사는 질병이 없어 치료가 필요 없다고 무식하게 선언하여 그릇된 위안으로 환자를 속일 수 있다. 첫 번째 의사를 비관주의자로, 두 번째 의사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위험하다. 하지만 세 번째의 의사는 증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성질을 이해하고, 치료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서, 용기 있게 치료의 과정을 베풀어 그의 환자를 구제한다. 붓다는 이 마지막 의사와 같다. 그는 세상의 질병을 위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Bhisakka 혹은 Bhaiṣajya-guru)이다.

 

둑카의 의미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팔리어 둑카(dukkha, Sk. duḥkha)라는 말은 ‘행복’, ‘안락’, ‘평정(平靜)’을 뜻하는 수카(sukha)란 말과는 반대로 ‘괴로움’, ‘고통’, ‘슬픔’, ‘불행’을 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나타내는 첫 번째 고귀한 진리[苦聖諦]로서의 둑카라는 술어는 보다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대단히 광범위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첫 번째 고귀한 진리에서 술어 ‘둑카’는 분명히 ‘괴로움’의 일반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에 덧붙여 ‘불완전’, ‘무상(無常)’ ‘공(空)’ ‘무아(無我)’와 같은 보다 깊은 개념도 또한 포함하고 있음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고귀한 진리로서의 ‘둑카’란 술어의 전 개념을 껴안을 수 있는 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괴로움’ 혹은 ‘고통’과 같이 편리하게 번역함으로써 불충분하고 잘못된 개념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번역하지 않은 채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붓다가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했을 때, 인생에서의 행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을 위한 물질적․정신적 양면의 여러 다른 양식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팔리어로 씌어진 다섯 원전 전집 가운데 하나인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經典)에서는 가정생활의 행복과 출가 생활의 행복,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극기 자제(克己自制)의 행복, 애착의 행복과 탈속(脫俗)의 행복,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등과 같은 행복의 종류(sukkāni)들이 나열되어 있다.3)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둑카(dukkha)에 포함되어 있다. 높은 명상 수련에 의해 얻어지는 매우 순수한 정신적 상태인 선정(禪定, dhyāna), 이 낱말의 수용된 의미인 괴로움의 그림자조차 벗어난 자유의 경지, 순수한 행복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쾌(sukha)와 불쾌(dukkha)의 각각으로부터 벗어난 선정의 상태, 즉 오직 순수한 마음의 평정(平靜)과 자각의 상태, 이러한 매우 높은 정신적 상태까지 둑카(dukkha)에 포함된다. 다섯 팔리어 원전의 하나인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經典)에서 붓다는 이러한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aniccā dukkhā vipariṇāma dhammā)’라고 말했다.4) 둑카라는 말이 분명히 사용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 의미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yad aniccaṁ taṁ dukkhaṁ)이기 때문에 이것이 둑카(dukkha)이다.

 

경험의 세 가지 양상

붓다는 현실적이며 객관적이었다. 그는 생활과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함과 관련 지워 세 가지를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씀했다. 즉 ⑴ 유혹 혹은 향락(assāda, 樂味), ⑵ 나쁜 결과 혹은 위험 혹은 불만족(ādīnava, 危難), ⑶ 자유 혹은 해탈(nissaraṇa, 出離)이다.5) 호감이 가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그 남자(혹은 여자)를 좋아하고 이끌리게 되며, 그 사람을 자꾸 보는 것을 즐기고, 그 사람으로부터 즐거움과 만족을 얻게 된다. 이것이 낙미(assāda)이다. 이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낙미는 마치 그 사람과 그의 모든 매력 또한 영원한 것이 못되듯이 영원하지 못하다. 상황이 변하고, 당신이 그 사람을 볼 수 없고, 당신이 이 낙미를 빼앗겼을 때, 당신은 슬퍼할 것이고, 이성과 균형을 잃고 어리석게 행동할 것이다. 이것이 상황(ādīnava)이 나쁘고 불만족스럽고 위험한 측면이다. 이것도 역시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그 사람에게 애착심을 갖지 않고 완전히 초연 한다면 이것이 자유 · 해탈(nissaraṇa)인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것은 인생의 모든 기쁨과 관련하여 진실이다.

 

이 사실로부터, 불교가 염세주의나 낙천주의의 문제가 아님이 명백하지만 인생을 완전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은 물론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자유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실한 해탈이 가능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 비구들이여,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 즐거움이며, 감각적 쾌락의 불만족이 불만족이며,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이 해탈이라고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 자신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되거나 혹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 즐거움이며, 감각적 쾌락의 불만족이 불만족이며, 감각적 쾌락의 해탈이 해탈이라고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들 스스로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되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6)

 

괴로움의 세 가지 양상

둑카(dukkha)의 개념은 다음의 세 양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⑴ 일상적 괴로움인 둑카(dukkha-dukkha, 苦苦性), ⑵ 변화에 의해 생긴 둑카(vipariṇāma-dukkha, 壞苦性), ⑶ 조건 지어진 상태인 둑카(saṁkhāra-dukkha, 行苦性)이다.7)

 

생로병사, 싫은 사람들과 조건들과의 관련,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조건들과의 이별,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함, 슬픔, 비탄, 곤궁과 같은 삶에서의 모든 종류의 괴로움 -- 보편적으로 괴로움과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모든 형태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 일상적 괴로움인 둑카(苦苦性)에 포함된다.

 

인생에서의 행복한 감정과 행복한 상태는 영원하거나 영속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조만 간에 변한다. 이것이 변할 때 고통․괴로움․불행이 생긴다. 이러한 생의 변천이 변화에 의해 생긴 괴로움으로서의 둑카(壞苦性)에 포함된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괴로움을 이해하기는 쉽다. 그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첫 번째 고귀한 진리의 이러한 양상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보통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 지어진 상태로서의 세 번째 형태의 둑카(行苦性)는 첫 번째 고귀한 진리[苦聖諦]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양상으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 ‘개체’ 혹은 ‘나’로 여기는 것에 대한 약간의 분석적 설명이 필요하다.

 

존재란 무엇인가?

불교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 ‘개체’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늘 변화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힘, 즉 원동력의 결합으로 다섯 가지 집합(pañcakkhandha, 五蘊)으로 나누어진다. 붓다는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집착의 다섯 가지 집합[五取蘊]이 둑카다’8)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도 붓다는 둑카는 오온이라고 명료하게 정의(定義)를 내렸다. “오! 비구들이여, 무엇이 둑카인가? 그것은 ‘집착의 오온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9) 여기서 둑카와 오온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온 자체가 둑카임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소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의 개념을 어느 정도 알 때 이 점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들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오온(五蘊)

첫째는 물질의 집합(Rūpakkhandha, 色蘊)이다. ‘물질의 집합’ 즉 색온이라는 이 술어에는 전통적인 사대(cattāri mahābhūtāni, 四大), 즉 고체성(地) · 유동성(水) · 열성(火) · 운동성(風)과 아울러 사대의 파생물(upādāya-rūpa, 所造色)이 포함된다.10) ‘사대요소의 소조색(所造色)’이란 술어에는 우리의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 기관[五根], 즉 눈 · 귀 · 코 · 혀 · 몸의 기관들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 세계의 대상(五境), 즉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과 아울러 마음 대상의 영역(dharmāyatana)에 있는 어떤 생각이나 관념 혹은 개념들이 포함된다. 이와 같이 내외적인 물질의 전 영역이 색온(色蘊)에 포함된다.11)

 

둘째는 감각의 집합(Vedanākkhandha, 受蘊)이다. 이 집합에는 육체적 정신적 기관들과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경험된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눈은 가시적 형태와,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유형물과, 그리고 마음(불교철학에서 마음은 여섯 번째 기관이다)은 마음의 대상이나 생각 혹은 관념과의 접촉을 통해 경험된 감각들이다.12)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은 이 집합에 포함된다.

 

불교철학에서 ‘마음’(manas)이란 술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여기서 한마디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마음은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이 아님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불교는 대부분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 수용되는 바와 같이 정신을 물질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마음은 단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 기관 혹은 근(indriya, 根)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기관과 마찬가지로 통제되거나 계발될 수 있으며, 붓다는 이 여섯 기관의 통제와 수련하는 가치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기관으로서 눈과 마음의 차이점은 전자는 색상과 가시적 형상의 세계를 감지하고, 후자는 세상의 관념과 생각, 그리고 정신적 대상을 지각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감각기관으로 세상의 다른 영역을 경험한다. 우리는 색을 들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우리는 소리를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인 눈․귀․코․혀․몸을 가지고 색․성․향․미․촉의 세계만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체 세계가 아닌 세계의 일부분만을 표현한다. 무엇이 관념과 생각인가? 이것도 또한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느낄 수 없으며, 눈․귀․코․혀․몸의 기관에 의해 감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기관, 즉 마음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다. 그런데 관념과 생각은 이들 신체의 다섯 감각 기관에 의해 경험된 세계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관념과 생각은 육체적 경험에 의존하고, 육체적 경험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그러므로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은 소리의 유추를 통하거나 다른 기관을 통해 경험된 다른 사물을 통해서가 아니면 색의 관념을 가질 수가 없다. 세상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관념이나 생각은 이와 같이 육체적 경험에 의해 생성되고 조건 지어지며, 마음에 의해 지각된다. 그래서 마음(manas)은 눈이나 귀와 같이 감각 기관 혹은 근(indriya)으로 간주된다.

 

셋째는 지각의 집합(Saññākkhandha, 想蘊)이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지각 또한 여섯 종류로, 여섯 가지 내부 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여섯 외적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지각도 여섯 감각 기관의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지각이다.13)

 

넷째는 정신적 형성의 집합(Saṁkhārakkhanda, 行蘊)이다.14) 이 집합에는 선악(善惡)의 모든 의도적 행위가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까르마(Karma, 혹은 kamma, 業)라고 알려진 것은 이 집합에 속한다. 붓다 자신이 내린 업의 정의는 여기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지 작용(cetanā, 意圖)이다. 의도를 가지면 신체, 언어 및 마음을 통해 행동하게 된다.”15) 의도란 정신적 구축이며 정신적 활동이다. 의도의 기능은 선이나 악 혹은 중립적 활동 영역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데 있다.16) 감각 및 지각과 마찬가지로 의도도 여섯 가지 내부 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외부세계의 여섯 대상(육체적․정신적 양면)과 연결된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17) 감각과 인식은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들은 업의 결과(業報)를 낳지 않는다. 오직 업보를 낳는 작의(作意, manasikāra) · 의욕(意欲, chanda) · 신해(信解, adhimokkha, 확신) · 신심(信心, saddhā) · 삼매(三昧, samādhi) · 지혜(智慧, paññā) · 정진(精進, viriya) · 탐욕(貪欲, rāga) · 증오(憎惡, 瞋心, paṭigha) · 무명(無明, avijjā) · 만심(慢心, māna) ·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등과 같은 것만이 의도적 행위이다. 정신 형성의 집합을 이루는 52 가지의 정신 활동이 있다.

 

다섯째는 의식의 집합(Viññāṇakkhandha, 識蘊)이다.18) 의식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중 하나를 토대로 가지고 이에 대응하는 여섯 외적 현상(가시적 형상 · 소리 · 냄새 · 맛 · 유형물 · 생각)중 하나를 목표로 가지는 반응 혹은 응답이다. 예를 들면, 시각적 의식(cakkhu-viññāṇa, 眼識)은 눈을 토대로 가시적 형상을 대상으로 갖는다. 심식(心識, mano- viññāṇa)은 마음을 토대로 마음의 대상, 즉 관념이나 생각(法, dhamma)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 이렇게 의식은 다른 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감각, 지각 및 의지(의도적 행위)와 같이 의식도 여섯 가지 내부적 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적 대상과 연관된 여섯 종류로 되어 있다.19)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의식은 일종의 자각, 즉 대상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눈이 색상, 예를 들어 파란색과 접촉하게 되면 시각적 의식(眼識)이 일어나는데 이는 단순히 한 색상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하지만 의식이 파란색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는 인식이 없다. 이 색상이 파란색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지각(想蘊, 앞에서 설명한 세 번째 집합)이다. ‘안식(眼識)’이라는 용어는 일반적 낱말 ‘봄(見)’에 의해 전달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을 가리키는 철학적 표현이다. 봄은 인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반대되는 정신은 없다

불교철학에 따르면, 물질과 반대되는 ‘자아’, ‘영혼’, 혹은 ‘자기’로 간주될 수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정신은 없으며, 의식(viññāṇa)이 물질과 반대되는 ‘정신’으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여기서 되풀이되어야만 한다. 이 점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전 생애를 통해 영원한 실체로서 계속 존재할 자아나 영혼의 일종이라는 잘못된 개념이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직제자 중 한 사람인 사띠(Sati)는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하고 배회한다.’라고 스승이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붓다는 그에게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사띠는 “의식은 도처에서의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표현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놈, 누구에게라도 내가 이런 식으로 교설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봤느냐? 의식은 조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조건 없이 의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더냐.” 스승은 질책하였다. 그리고 난 뒤 붓다는 의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의식이란 그것을 일으키는 조건을 따라 이름 지어진다. 눈과 가시적 형상으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눈의 의식, 즉 안식이라고 한다. 귀와 소리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귀의 의식, 즉 이식(耳識)이라고 한다. 코와 냄새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코의 의식, 즉 비식(鼻識)이라고 한다. 혀와 맛으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혀의 의식, 즉 설식(舌識)이라고 한다. 몸과 유형물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몸의 의식, 즉 신식(身識)이라고 한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으로 인해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마음의 의식, 즉 심식(心識)이라고 한다.

 

다음 붓다는 예를 들어가며 더욱 자세히 의식을 설명하셨다. “불이란 타는 물질에 따라 이름 지어진다. 불이 나무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섶에 의해서 탈수도 있는데 그 때는 ‘섶 불’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의식이란 그것이 생겨나게 되는 조건에 따라서 이름 지어진다.”20)

 

훌륭한 주석자(註釋者)인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는 이 점을 숙고한 후 이렇게 설명한다. “ … 나무에서 일어나는 불은 나무가 공급될 때만 탄다. 그러나 더 이상 나무가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꺼진다.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은 장작개비로 옮아 붙어 장작개비 불이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과 가시적 형상으로 인해 생겨난 의식일지라도 눈과 가시적 형상과 빛과 주의력 등이 있을 때에만 그 감각 기관의 문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들이 사라지면 눈의 의식도 사라지는데, 그것도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 귀로 옮겨가서 청각적 의식이 되지는 않는다.”21)

 

붓다는 의식은 물질, 감각(느낌), 인식 및 정신 형성에 의존하며, 이것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명료한 언어로 밝혔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의식은 물질을 그 수단으로 삼고(rūpupāyaṁ, 色手段), 물질을 그 대상으로 삼고(rūpārammaṇaṁ, 色所緣), 물질을 그 뒷받침으로 삼아(rūpapatiṭṭhaṁ, 色依所) 성립할 수 있으며, 즐거움을 추구하며 의식은 자라고 증가하고 발전한다. 혹은 의식은 느낌[감각]을 그 수단으로 삼고(受手段), …… 또는 인식을 그 수단으로 삼고(想手段), …… 또는 정신적 형성을 그 수단으로 삼고(行手段), 정신적 형성을 그 대상으로 삼고(行所緣), 정신적 형성을 그 뒷받침으로 삼아(行依所) 성립할 수 있으며, 즐거움을 추구하며 의식은 자라고 증가하고 발전한다.”

 

“만약 물질, 감각, 지각 및 정신적 형성과 동떨어진 의식의 생성, 진행, 사멸, 발생, 성장, 증가 혹은 발전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22)

 

흐름

이것은 오온을 매우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 혹은 ‘개체’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이러한 오온의 결합에 붙인 편리한 명칭이나 표식이다. 그것들은 모두 무상(無常)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둑카이다(Yad aniccaṁ taṁ dukkaṁ). ‘한마디로 오온에 대한 집착이 둑카이다.’ 이것이 붓다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오온은 두 연속되는 순간동안에도 동일하지 않다. A는 A와 동일하지 않다.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 속에 있다.

 

“오! 바라문이여,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을 휩쓸고 가면서 멀리 그리고 빠르게 흐르는 산 속의 강물과 같다. 강물은 흐름을 멈추는 단 한 순간도 찰나도 단 일초도 없이 계속 흐르고 지속한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산 속의 강물과 같다.”23) 붓다가 랏타빨라(Raṭṭhapāla)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세상은 끊임없이 흐르고 또한 무상하다.’

 

인과의 연쇄 속에서 다음 사물의 출현은 조건 지워지며 한 사물이 사라진다. 그 속에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그 뒤에는 영원한 자아(Ātman), 개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 혹은 ‘나’라고 실제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질도 감각도 인식도 정신적 활동 중 어떤 것도, 그리고 의식도 실제로 ‘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24) 하지만 상호 의존하는 이 다섯 가지 육체적 정신적 집합이 하나의 심신의 기계25)로서 결합하여 작용할 때 비로소 ‘나’라는 개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개념, 정신적 형성에 불과하며, 이미 논의하였던 오온의 52가지 정신적 형성 가운데 하나이다. 즉 이것이 자아의 개념(Sakkāya-diṭṭhi, 有身見)이다.

 

생각하는 자와 생각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라 부르는 이러한 오온의 총체가 괴로움 그 자체(saṁkhāra-dukkha, 行苦性)이다. 이 오온의 너머에서 괴로움을 체험하는 그 어떤 다른 ‘존재’나 ‘나’는 없다. 붓다고사(Buddh- aghos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괴로움은 존재하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26)

 

운동 너머에 움직이지 않는 운동자는 없다. 오직 운동일 뿐이다. 인생은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인생은 움직임 그 자체이다. 삶과 운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 너머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생각 그 자체가 생각하는 자이다. 만약 생각을 제거하면 생각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이 불교적 견해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와 정반대의 견해라는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삶은 시작이 있는가?

여기서 삶은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생명체(有情)의 인생 유전의 시작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에 의한 인생 창조를 믿는 사람은 이러한 대답에 경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신자에게 ‘신의 기원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신은 기원이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그는 자신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오! 비구들이여, 이 윤회의 사슬(saṁsāra)은 가시적 마감이 없으며 배회하고 순환하는 존재의 최초 시작은 무명(avijjā)에 쌓이고, 갈애(taṇhā)의 족쇄에 묶여 있어서 인식될 수 없다”고 말했다.27) 나아가 붓다는 인생 윤회의 주원인인 무명(無明)에 관해서 말했다. “어떤 한계점 너머에 무명은 없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무명의 최초 시작이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28) 그러므로 어떤 분명한 한계점 너머에는 삶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간략하게 설명한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의 의미이다. 붓다가 말씀한 바와 같이 ‘고를 본 사람은 또한 고의 원인과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본다.’라는 명확한 이유 때문에, 이 첫 번째 고귀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29)

 

일부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이 점이 불교도의 삶을 우울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진실한 불교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공포와 근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하며, 변화와 재난에 의해서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붓다는 절대 우울하고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붓다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늘 미소 짓는 이(Mihita-pubbaṁgama, 微笑先導)’로 묘사되었다. 불교 회화와 조각에서 붓다는 언제나 행복하고, 평온하며, 만족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괴로움이나 고민 혹은 고통의 흔적은 결코 찾아 볼 수 없다.30)

 

불교 예술과 건축, 불교 사원은 결코 우울하고 슬픈 인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기쁨의 정취를 풍긴다.

 

비록 생활에 괴로움이 있더라도 불교도는 이를 우울해 해서는 안 되며, 이를 두고 화를 내거나 참지 못해서도 안 된다. 불교에 의하면, 삶의 주된 악 가운데 하나가 ‘증오’와 ‘혐오’이다. 증오(pratigha)는 유정에 대한 악의, 괴로움에 관한 악의, 괴로움에 속한 일들에 대한 악의로 설명된다. 혐오의 기능은 불행한 상태와 나쁜 행실의 원천을 만드는 것이다.31) 그러므로 괴로움을 참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고 괴로움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렇게 하면 자신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미 불유쾌한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필요한 것은 화나 짜증이 아니라 괴로움이 어떻게 왔으며, 이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와 같은 괴로움의 문제에 대한 이해이고, 그 다음 이해한 바에 따라 인내, 지혜, 결단력 및 활력을 가지고 해결하는 것이다.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와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라고 불리는 고대 불교문헌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했던 붓다의 남녀 제자들의 즐거움에 찬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꼬살라(Kosala)의 왕은 붓다께 “다른 종교의 많은 제자들이 초췌하고, 조악(粗惡)하며, 창백하고, 여위었으며, 호감을 주지 못하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붓다의 제자들은 ‘즐겁고 의기양양하며, 기쁨과 환희에 넘치며, 정신적 삶을 즐기며, 기쁨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평온하고, 평화스러우며, 가젤(아프리카 영양의 일종)의 마음 즉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왕은 덧붙여, “이러한 건전한 기질은 이들 존경할만한 분들이 세존의 가르침의 훌륭하고 완전한 의미를 분명히 깨달았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다.”32)라고 말했다.

 

불교는 진리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우울하고, 슬프며, 회오하고 침울한 마음 자세와는 정반대이다. 한편 희열(pīta)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계발해야 할 본질적인 성질인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bojjhaṁga)33) 가운데 하나임을 여기서 되새기는 것은 흥미롭다.

 

Notes:

1) Dhammacakkappavattana-sutta(轉法輪經). Mhvg.(Alutgama, 1922), p.9ff; S. Ⅴ, p.420ff.

2) 영어에 상당하는 이 술어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했다.

3) A. (Colombo, 1929), p.49.

4) Mahādukkhakkhandha-sutta(大苦蘊經), M. Ⅰ(PTS), p.90.

5) M. Ⅰ(PTS), p.85ff; S. Ⅲ(PTS), p.27ff.

6) M.Ⅰ(PTS), p.87.

7) Vism (PTS), p.499; Abhisamuc, p.38.

8) Saṁ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 S. Ⅴ(PTS), p.421.

9) S. Ⅲ(PTS), p.158.

10) S. Ⅲ(PTS), p.59.

11) Abhisamuc(阿毘達磨集論), p.4; Vibh. p.72; Dhs. p.133; v.594.

12) S. Ⅲ(PTS), p.59.

13) S. Ⅲ(PTS), p.60.

14) ‘정신적 형성’이란 용어가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오온에 나열된 saṁkhāra(行)이라는 넓은 의미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saṁkhāra는 다른 문장에서는 조건 지어진 것은 어느 것이나 세상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모든 오온이 saṁkhāra라는 의미이다.

15) A. (Colombo, 1929), p.590; "Cetanā'baṁ bhikkhave kammaṁ vadāmi. Cetayitvā kammaṁ karoti kāyena vācā manasā."

16) Abhisamuc, p.6.

17) S. Ⅲ(PTS), p.60.

18) 대승불교 철학에 의하면, 식온(識蘊)은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심(心, citta) · 의(意, manas) · 식(識, vijñāṇa)이다. 그리고 아뢰야식(Ālaya- vijñāṇa, 八識, 일반적으로 藏識으로 번역되었다) 이 蘊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비교 연구는 현대의 저자가 쓴 불교철학에 관한 근간 서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 S. Ⅲ(PTS), p.61.

20) Mahātaṇhāsaṁkhya-sutta(愛盡大經), M. Ⅰ(PTS), p.256ff.

21) MA Ⅱ(PTS), pp.306-307.

22) S. Ⅲ(PTS), p.58.

23) A. (Colombo, 1929), p.700 이 말은 붓다가 탐욕에서는 벗어났지만 애매한 과거 속에서 사는 아라까(Araka)라고 불리는 敎師(Satthā)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흐름의 상태에 있다고 이야기한 헤라크리투스(Heraclitus; 500 B.C.)의 “당신은 두 번 다시 같은 강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같은 강물은 다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24) 무아(Anatta, 無我)의 교설은 제6장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25) 사실 붓다고사는 ‘존재’를 ‘나무로 만든 기계’(dāruyanta)로 비유했다. Vism (PTS), pp.594-595.

26) Vism (PTS), p.513.

27) S. Ⅱ(PTS), pp.178-179; Ⅲ, pp.149-151.

28) A. Ⅴ(PTS), p.113.

29) S. Ⅴ(PTS), p.437. 사실 붓다는 사성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보는 사람은 다른 세 가지 역시 본다고 말했다. 이 사성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30) 고따마(Gotama)를 묘사하는데 갈비뼈를 드러낸 고행자적인 여윈 모습으로 조각한 간다라의 조상과 중국 푸커엔의 조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붓다가 된 후에는 좋지 않게 생각했던, 엄격한 고행적 수련에 몰두하던 때, 그러니까 깨닫기 이전의 모습이다.

31) Abhisamuc, p.7.

32) M. Ⅱ(PTS), p.121.

33)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七菩提分)에 대해서는 명상의 장, p.7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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