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네 가지 왜곡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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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네 가지 왜곡된 견해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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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불교도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正見)를 갖추어야 한다. 올바른 견해에서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등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 邪見)에서는 그릇된 사유, 그릇된 언어, 그릇된 행위 등이 나올 수밖에 없다. 붓다는 성도 직후, 그릇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기는 느낌과 올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생기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올바른 견해가 먼저라고 말했다. “어떻게 올바른 견해가 먼저인가? 그릇된 견해를 그릇된 견해라고 꿰뚫어 알고, 올바른 견해를 올바른 견해라고 꿰뚫어 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이다.”(MN..71)

 

그러면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지혜이다. 이를 일러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MN..251) 요컨대 올바른 견해란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를 확실히 꿰뚫어 아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사성제를 통해 인생의 괴로움 전반에 대한 확실한 통찰이 있어야 진정한 수행이 시작되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른 견해는 올바른 통찰[正念]과 올바른 정진[正精進]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五蘊)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무상(無常)()무아(無我)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 있어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미혹하지 않게 되어 해탈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붓다의 모든 교설은 존재의 세 가지 특성[三特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은 덧없다[諸行無常], 모든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다[一切皆苦], 모든 법들은 자아가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붓다는 여기에 다시 현실의 세계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더하여, 현상계는 무상(無常)()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고 진단했다.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덧없고, 괴로움이며,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현실의 세계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 붓다가 바라본 현상계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계는 무상이 아니라 상()이고, 고가 아니라 낙()이며, 무아가 아니라 아()이고, 부정이 아니라 정()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네 가지 왜곡된 견해’, 즉 사전도견(四顚倒見)이라고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영원한 것을, 괴로움과 분리될 수 없는 것에서 행복을, 어떠한 자아와도 연결되지 않은 것에서 자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에서 기쁨을 찾거나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무상무아부정인 것을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이고,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을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라고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AN4:49)에서 붓다는 비구들이여, 무상에 대해서 영원하다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괴로움에 대해서 행복이라는 무아에 대해서 자아라는 부정한 것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N..52)고 했다.

 

이처럼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이고, 깨끗하다는 그릇된 견해를 일으킨다. 반면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무상을 무상이라고,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무아를 무아라고,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있는 그대로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른 견해를 갖추어야 비로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상()()()()을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부른다. 어떤 학자는 붓다의 심중에 상정이라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무상무아부정이라고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백보 양보하여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범부가 입으로 상락아정을 외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환상만 심어줄 뿐, 자기와 남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거지가 백만장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 허기진 상태에서 진수성찬을 먹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잠시 동안은 행복하겠지만, 그 환상에서 깨어나면 처참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지금 당장 배고픈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처럼 불확실한 기초 위에 이상을 세워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사실의 참모습인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가 열반의 경지인 상락아정을 배척하고 끝까지 무상무아부정을 부르짖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삶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현실을 떠나서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완전히 초월한 것처럼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깨닫기만 하면 배우지 않은 것도 모두 알 수 있고, 신통력까지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깨달음이라는 신기루와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깨달음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붓다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닌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르게 직시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붓다는 지나간 과거의 일에 매달리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오직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법보신문1559, 2020114, 13

 

불멸후 아쇼까(Aśoka, 阿育王)왕이 붓다의 탄생지, 지금의 네팔 룸비니(Lumbinī)를 방문하고, 그 기념으로 세운 석주(石柱)의 일부 모습이다. 19세기 말 이 석주가 발견되고, 석주에 새겨진 문장이 해독됨으로써 붓다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석주에 새겨진 문장은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다.(hida Budhe jate Sakyamuni)”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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