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여행]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이상화 시인 생가터 / 한옥카페 라일락뜨락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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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이상화 시인 생가터 / 한옥카페 라일락뜨락1956.

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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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생가터 라일릭뜨락1956 -

*이곳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항일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3길 7-20 : 지번 서문로 2가 11-3

전화 : ☎ 053-627-7009

영업시간 : 11:30 ~ 23:00

휴무 : 월요일

 

 

 

1. 이상화 선생이 이곳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대표작 '빼앗긴 들에고 봄은 오는가' 를 발표하여 민족의 의기를 드높인 역사적인 집터가 이곳에 있습니다.

 

2. 이상화 생가터 위치는 곽병원에서 서성네거리를 지나 서문시장 방향으로 큰 길을 걷다보면, 덕영치과 빌딩이 보입니다.

그 병원건물 뒤편 지상주차장 정문 맞은편에 작은 안내 팻말이 있는 골목으로 70m 들어가세요.

 

3. 좌측에 있는 3층건물이 당시 대대로 한문 공부를 한 사숙터입니다. 

 

4. 카페골목 우측에 있는 단층건물은 이상화 선생이 사랑채에서 1919년 대구 만세운동 인쇄물을 직접 만들었으며, 담교장이란 현판을 걸고 항일지사, 항리문사들과 식민지 현실에서 의기와 문담을 나누었던 터입니다.

 

5. 좌측 사숙터와 우측 담교장터 사이골목은 안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라이락뜨락1956 사장님께서 아상화 생가터 보전을 위해 사비를 들여서 오신 손님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있습니다.

 

6.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에 라일락뜨락1956 안내 간판이 있습니다.

이 카페는 이상화 시인의 생가 안채 마당에 있던 200년 된 수수꽃다리(토종 라일락)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답니다.

카페 이름 '라일락뜨락1956'은 그대로 풀이하면 1956년에 지어진 한옥 마당에 라일락이 있는 집입니다.

 

7. 안채로 들어가는 골목에 라일락뜨락1956 사장님이 좌측 담에는 벽화 우측에는 라일락 화분을 진열했습니다.

 

8. 안채로 들어가는 벽에 라일락뜨락1956 사장님이 당시 이상화생가터 상세한 배치도를 부착했습니다. 

 

9. 이상화 생가 한옥카페에 있는 200살 라일락 사진입니다.

 

10. 이상화, 권기옥 형수, 이상정형 사진입니다.

 

1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벽화입니다.

 

12. 이상화생가터 안채 라일락뜨락1956 대문입니다.

 

13. 우선 발열 체크후 방명록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죄측은 라일락뜨락1956 메뉴표입니다.

카페사장님은 디자인을 전공하신 분인데 우연히 대구골목투어에 나섰다가 이곳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라일락나무를 보고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이 곳을 구입하고 카페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14. 구수한 카페라떼 한잔 마시고 사장님과 담소도 나누었습니다.

 

15. 이 나무가 200살 라일락(수수꽃다리) 이상화나무입니다.

이 자리에서 이상화 시인의 탄생과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지켜보며, 소년 이상화에게 시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시로 저항한 시인과 같이 나무도 몸을 비틀어 일제에 저항한 것 같습니다.

 

16.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이상화시인 에게 한것 처럼 나무는 또 누군가에게 영감을 전하려고  해마다 상화가 간 봄날에 꽃을 피웁니다. 

     

17. 이상화나무 아래앤 작은 연못과 물길도 만들어놨으며, 금붕어 몇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습니다.

화단에는 국화와 숙부쟁이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18. 라일락뜨락1956은 민족 시인 이상화 선생의 생가 안채에 위치한 한옥카페입니다.

1956년에 완공된 한옥을 카페 및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였습니다.

안채가 있던 곳에 1956년 지어진 한옥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 후 멋진 카페로 거듭났습니다.

이곳에서 야외공연도 자주열립니다,

 

19. 갤러리 라일락에는 마침 정재옥 작가님의 천개의 꿈 천개의 부엉이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20.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에는 숙부쟁이와 대상화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21. 라일락1956 방엔 리모델링시 대형 종이 장미형상으로 만든 네일등이 특이합니다.

 

22. 라일락1956방 우측엔 실물 중절모와 중절모를 쓴 이상화 시인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3. 라일락 꽃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꽃이 피는 봄 4월에에 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24.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와 가족사진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25. 라일락 책방에는 채형복교수님외 여러분이 기증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카페 곳곳에 걸려있는 만개한 라일락 사진을 보니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네이버지도에 라일락뜨락1956 표시해주세요.

 

 

 

*유튜브 동영상 링크 바로가기 : 화면 좌측 하단 다음에서보기 눌러주세요!

https://youtu.be/oFYSV9sQ_Ak

 

 

 

*이상화 생가터

이곳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항일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대표작 '빼앗긴 들에고 봄은 오는가' 를 발표하여 민족의 의기를 드높인 역사적인 집터가 이곳에 있습니다.

생가터는 서문로 2가 11번지 이지만 1956년 4개의 번지로  토지분할 되었습니다.

선생은 사랑채(11-1)에서 1919년 대구 만세운동 인쇄물을 직접 만들었으며, 담교장이란 현판을 걸고 항일지사, 항리문사들과 식민지 현실에서 의기와 문담을 나누었습니다.

안채(11-3번지) 마당에는 생전 그자리에 수수꽃다리(한국산 라일락) 나무가 여전히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500m 거리에는 선생이 말년(1939년~1943년)을 보낸 이상화 고택(계산동 2가 84번지 계산성당 남쪽)이 2008년 8월 12일 개관되어 나라사랑을 위한 학습장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민족시인 이상화, 독립투사 이상정 생가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 근대문학의 발상지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입니다.

한옥카페 라일락뜨락1956은 이상화생가 안채에 있습니다,

이상화 생가는 현위치 서문로2가 11번지(약400여평)이며 1956년에 11번지가 4곳으로 분할이 되었습니다. 

현재 라일락뜨락1956이 있는 장소가 11-3번지로써 생가의 안채에 해당합니다.

마당에 있는 200살 라일락나무는 상화와 그의 형제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아직도 해마다 라일락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린 소년을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던 나무로써 담교장과 더불어 잘 가꾸어 후대에 물려주어아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상화 시인은 자신이 거처하던 사랑채(11-1번지)를 담교장 이라 이름짓고 독립지사와 문인들을 불러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후 가세가 기울어 이사를 다니다가 계산성당 옆 계산동 고택에서 생의 마지막 4년(1939~1943)을 보냈습니다. 

 

 

*이상화나무[200살 라일락(수수꽃다리)]

이상화나무는 이 자리에서 이상화 시인의 탄생과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지켜보며, 소년 이상화에게 시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시로 저항한 시인과 같이 나무도 몸을 비틀어 일제에 저항한 것 같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이상화시인 에게 한것 처럼 나무는 또 누군가에게 영감을 전하려고  해마다 상화가 간 봄날에 꽃을 피웁니다.         

 

 

*이상화 시인 생가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동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이 있고, 아래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인 이상백과 이상오(李相旿)가 있었습니다.

7살되던 190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습니다. 1914년 한문 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일본어·산술·박물 등의 신학문을 배우다가 이듬해인 1915년 상경하여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1918년 자퇴하고 그해 7월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습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친구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계성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3월 8일 서문 밖 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당시 모였던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때 사전에 주동 인물들이 검속되자 경성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여 투옥을 면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이상화는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강권으로 공주군 출신의달성 서씨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하였습니다.서순애는 공주 유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었는데, 서한보는 1917년 1월 24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기념품을 기증하고, 1918년 1월 30일에는 충청남도참사에 임명된 자로서, 다소 친일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홍사용·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됴쿄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 수료하였습니다.

같은 해「나의 친실로」를 발표했는데, 그해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이듬해 3월 귀국하였으며, 경성부가회동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짓기에만 전념했습니다. 1924년 고향 친구 박태원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해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하였습니다.

1925년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를 낭독하였고, 같은 해 8월 박영희·김기진 등과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시경향은 퇴폐주의에 해당하는 편이었는데,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빼앗긴 들에고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또 이 시기,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의 주간이 되어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의 시와 논저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로 있던 중,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며, 곧 구류취소 처분을 받아 출옥하였습니다. 이 시기 그는 서문로에 있던 자택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했는데,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인사들이 출입하곤 했습니다.

1930년 잡지 별건곤에「대구행진곡」을 발표하였고, 1932년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서문로 자택을 처분하고 서천대천정(현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사하였습니다. 1933년 8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교남학교 강사 인가를 받고 근무를 시작했으며, 본 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권투 등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사직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반딧불」과「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을 발표하였습니다.

1934년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하였고, 대구부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 35번지)으로 이사하였습니다. 1935년 잡지 <시원>에 시 「역천」을, <조강>에「나는 해를 먹다」를 발표하였고, 그해 큰아버지인 이일우가 별세하였습니다.

1936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베이징·상하이 등지를 3개월간 유람한 후 귀국하였습니다. 이때 형과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었는데, 귀국 후 이듬해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석방되었습니다. 그해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였고, 경정2정목(현 중구 종로2가 72번지)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39년 6월 명치정2정목(현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로 이사하였고,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를 비롯해 1929년 별세한 친구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하였습니다. 1940년 김소운이 번역한 『조선시집』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되었으며, 1941년에는 잡지 <문장>에 시 「서러운 해조」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명치정2정목의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향년 42세.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슬하에 세 아들 용희(龍熙) 충희(忠熙) 태희(太熙)를 두었습니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건데, 그의 무덤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13-1번지에 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대곡역 3번 출구에서 200m 정도 올라가거나 대곡역 항목의 환승 가능한 시내버스 문단에 있는 버스 들을 타고 대곡역 정류장에서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면 동쪽에 야산이 있습니다. 조금만 올라가면 월성 이씨 재실과 제각이 보이고 바로 뒷편으로 문중 묘소가 있습니다. 이 곳에 이상화를 포함해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큰아버지 이일우, 형 이상정, 동생 이상백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한 달서3번 이나 달서5번을 타고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에서 내려서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뒷산을 타고 올라가도 나옵니다. 참고로 달서3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정문에, 달서5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후문에 정차합니다. 아니면 836번, 달서1번, 달서4(-1)번, 성서1(-1)번, 급행7번을 타고 유천교 정류장에서 하차 후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옵니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 인근에 매일신문사와 계산성당 뒷편,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대구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 이 골목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구 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곳에서 3월 8일날 만세 운동을 시작한 곳입니다. 대구광역시에서 근대골목체험 코스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택에 비하여 생가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성로의 대구산업공구골목 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그 생가터 일부를 매입하여 라일락뜨락1956이란 카페가 지어져 있으며, 이 카페는 이상화 시인의 홍보를 겸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입니다.

이 카페는 이상화 시인의 생가 안채 마당에 있던 200년 된 수수꽃다리(토종 라일락)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답니다. 안채가 있던 곳에 1956년 지어진 한옥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 후 멋진 카페로 거듭났습니다.

카페사장님의 이력도 독특합니다. 디자인을 전공하신 분인데 우연히 대구골목투어에 나섰다가 이곳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라일락 나무를 보고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이 곳을 구입하고 카페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카페 이름 '라일락뜨락1956'은 그대로 풀이하면 1956년에 지어진 한옥 마당에 라일락이 있는 집입니다.

카페 안뜰 중앙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아주 멋드러진 200년 된 라일락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말해주듯 비틀려 있습니다. 나무 아래엔 작은 연못과 물길도 만들어놨는데 금붕어 몇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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