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림 시인 / 베로니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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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채림 시인 / 베로니카* 외 1편

심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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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림 시인 / 베로니카*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을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 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환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환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에 최대한 수줍게 웃으면서 악수 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내가 나랑 또 나랑 나들이랑 손에 손잡고 귓속말로 내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동안 살비듬이 떨어져나가듯 내가 또 한움큼 세상에 나동그라졌어요.꽉잡아. 이런 말할 새도 없었죠. 스무개 서른개씩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왕창 흘리고 다녔어요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방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다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장난말.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끄시슈또프 끼에슬롭끼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박채림 시인 / 맛있는 입술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경멸하는 얼굴이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당신의 부끄러운 표정은 견딜 수가 없으니 그냥 무심하게 만져보세요. 간지럽지 않아요. 할퀴거나 하지 않을게요. 우리 주인님 손톱 끝에 매달린 무수한 눈알들은 매번 붉게 충혈되어서는 도로록 도로록 빨주노추 검은자위를 굴리고는 했는데요. 내 털을 헤치고 맨살로 만져지는 시선들 때문에 나는 밤새 간지러워서 몸서리를 치곤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뭣하면 보답하는 뜻에서 오늘밤 부엌 창문을 살짝 열어두는 것도 좋겠네요.

 

나는 그냥 고양이고요, 두 개의 코트를 입고 있어요.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교차할 때마다 밤과 낮이, 어제와 오늘이, 주인님과 당신들이 자꾸만 몸을 바꿨어요. 무수히 내 몸을 애무하는 당신들과 주인님과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가난한 표정을 내 몸에 돋을새김할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기꺼이 죽었어요. 그러고는 꿈 한자락에 내 웃음소리를 묻혀갔잖아요. 주인님과 당신들은 자꾸만 악몽이라고 나를 원망했지만요.

 

주인님이 풍선 불 듯 내 항문에 공기를 불어넣어요. 말랑말랑한 내 몸이 애드벌룬처럼 마구 부풀어오르네요. 생선 비린내 진동하는 내 얄미운 입술에 입 맞춘 주인님 때문에 나는 또 간지러워서, 둥실둥실 떠올라요. 발밑의 지구는 슬프고 황홀한 오렌지빛이에요.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비슷한 모양새라서 더 슬픈걸요. 저기 긴 실타래 풀고 있는 주인님의 얼굴이 보여요. 따뜻한 달에 입 맞추려고 나는 더 높이 높이 떠올라요. 주인님의 저 순진한 눈알들이 보이나요. 저 슬픈 상상들을 포식하는 달의 작은 입술에선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요. 부럽다고 데룩데룩 소리치는 눈알들은 사실 내 뱃속에 모두 있어요.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내게 입 맞춰도 괜찮아요. 창문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 분홍색 배를 뒤집어 귀를 대봐요. 괜찮아요. 세상에 맛없는 욕망들도 있는 법이죠. 달도 눈알도 악몽도 모두 내 뱃속에 집어넣고 휘휘 저었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저기요. 뭣하면 그 입술 잠깐 베어 물어도 괜찮나요. 아주 잠깐인데요 뭐. 아주 짧은 키스라고 생각하면 되는걸요. 네. 아주 잠깐만요

    

 


 

박채림 시인

1984년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2007년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에「베로니카」외 3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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