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규 시인 / 출렁이는 창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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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출렁이는 창문 외 4편

심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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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규 시인 / 출렁이는 창문

 

 

젖은 창이 이루는 화폭 속으로 밤 열차가 지나간다 나는 종종 열차의 구석진 자리, 습하고 어두운 뒤 칸에 앉아있다 가지런히 손을 모아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목들이, 절절하지도 않은 사건들이 유령처럼 창밖에 떠다닌다

 

한동안, 어떻게 세계가 확대되는지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함으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에 몰두한 적이 있다

사무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과 죽을 맡이 절실하다면 어떤 연애도 신파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어떤 결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밤 열차의 뒤 칸은 침묵으로 가득하고 비리고 쓰고 불운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간이역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드문드문 몇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있다

 

이 행보는 무례하지만 지극한 것, 열차는 환상과 기억의 조합, 혹은 내 창에 비치던 너의 슬픈 손짓 같은 것이다

 

이윽고 열차가 멎고, 너라는 커다란 획에 당도할 수 있다면 침묵의 자물쇠로 잠겨있던 입들의 빗장은 풀릴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어두운 열차에 오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는 내 안 가득 출렁이는 엄마 같아서, 눈 내리는 날의 창문 같아서

 

 


 

 

송종규 시인 / 다시, 화요일

 

 

내가 자꾸만 그 밤을 생각하니까

그 밤은 한없이 커졌다

내가 자꾸만 너를 생각하니까

너는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떤 경로로 어둠이 몰려오는지

어떤 이유로 사람이 커질 수 있는지 그러나

오늘은 가볍고 부드러운 구름

 

그날은 희미한 창밖으로

새벽이 오고 있는 화요일이었는데

수많은 화요일이 지나갔는데 덜컥, 화요일이

백양목 위에 걸려있었는데

오늘은 번들거리는 호수 위로 떠도는 물보라

 

너는 물론 동의하지 않겠지만

너를 생각했는데

네가 지워질 때까지

발바닥이 다 닳도록 화요일은 지치지 않고

화요일이 다 닳도록

너는 커지지

너는 도무지 쉬는 법도 없이

 

젊은 가수의 손가락에서 별들이 떨어져 내리는 저녁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울었다

빛들처럼 화요일이 수북 쌓이는 오늘은 다시, 화요일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벤치 위에 있는 사람

 

 

너는 나를 본 적이 있느냐

꼬박 새워 흐느끼던 그 밤을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 새벽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때

후두두둑 별들이 떨어져 내리던

사무치던 새벽의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느냐

희미하게 빛들의 어린 손이 창밖에서 어른거리고

기적소리가 실밥처럼 꼬리를 물고 따라오던

생의 변두리

의심으로 가득하던 내 스물을 본적이 있느냐

모든 결론이 다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자주 실패했고 아주 가끔씩 반짝이기도 했지만

한번이라도, 상수리나무 잎사귀 같던 내 마흔을 읽은 적이 있느냐

세월은 때로 구부정한 어깨로 당도하고

때로는 분홍 패랭이꽃처럼 당도하기도 한다

한 문장 안에 한 생애를 구겨 넣을 수는 없지만

달빛에 바랜 수북한 백지들을 너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지 않느냐

우두커니 겨울나무 곁에

화석이 된 사람이 벤치 위에 앉아있다

 

계간 『시인시대』 2021년 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후투티 때문에

 

 

저 꽃을 본 적 있다

분홍 바깥에 노란 테를 두른 꽃 잎

저 남자를 본 적 있다

저 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본 적 있다

봄볕을 핥던 고양이의 혀, 청춘을 관통하던 바람의 입술

 

수천 개의 기적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세계의 입구에서

저 모래의 구릉을 본 적 있다

바다의 저 거대한 아가미를 본 적 있다

나부끼는 금요일의 신호등, 과감한 구름의 발자국

 

나는 소매가 없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먼데서,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물이었을 때, 당신이 아직 수초였을 때

 

광활한 초원 아니면 노을에 둘러싸인 사막의 한 가운데서

저 의자를 본 적 있다 저 피아노를 만져 본 적 있다

나의 하나님 그 분이 다녀가시고 나서 덜컥, 빗장이 열렸고

나는 아주 높이 날아올랐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울었을 것이다

 

내가 물이었을 때, 당신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혹, 운무 때문인지 혹, 후투티 때문인지

겨드랑이는 아직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계간 『문하청춘』 2020년 여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두꺼운 책

 

 

빵에 마요네즈를 바르며 생각 한다

도대체 우리는 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포근하고 뜨거운 생애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이스트가 밀가루를 부풀어 올릴 때까지 고요히 기다려준 형광 불빛, 제비꽃

창밖의 구름, 그리고 오븐과 정오와 커다란 접시 모두

상관관계에 놓이지 않은 것이 없다

굳이 빵에 대해서 고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당신은 반문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물러날 곳이 없는 지점에서 빵은 완성 된다는 것이다

팽창과 추락과 불과 시간의 궁극에 가서야 이윽고 그는 초탈에 이른다

많은 것들이 이미 당신의 책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인데

당신이 간과한 것은 불빛과 소녀와 두근거리는 기다림, 그리고 창가의 히아신스이다

꿈속으로 느닷없이 당신이 걸어 들어오는 것과

호젓한 교외에서 잠시 노랑 꽃다지와 내통하는 것 모두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면, 기적적으로

빵은 지금 식탁 위에 놓여있다

의심과 마요네즈와 소녀는 구름과자처럼 곧 지워지겠지만

당신의 책은 더 두껍게 부풀어 오른다

 

계간 『시와 세계』 2020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1952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5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2021년 제14회 이상(李箱)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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