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하 시인 / 많은 눈이 내렸다

댓글수0 다음블로그 이동

◇ 시인과 시(현대)

박용하 시인 / 많은 눈이 내렸다

심 파스칼
댓글수0

박용하 시인 / 많은 눈이 내렸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직도 살아 삶을 탐할 수 있다는 게

네 몸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영광? 기적!

아니면 식은땀과 공포

그 젊었던 밤

담 위에서 추락했을 때도 이빨 두 대만 나갔다

범죄 타깃이 돼 공격 당하던 인사불성의 밤에도

있었다

누군가 있었다

꿈결 같이

숨결 같이

조금만 더 가스에 취했더라면

더는 더러운 꼴 안 봐도 되었을 텐데

살의를 가장하며

위악을 위장하며

버젓이 살아 발기하고 있다

식욕과 성욕과 물욕과 권력욕 위에

굴욕과 치욕과 모욕과 오욕 위에

가을볕 속으로 한창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게

가을의 끝에서 비에 찔릴 수 있다는 게

숙명? 우연!

아니면 여분과 잉여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있었다

심장이 있었다

심장을 꺼내 들고 다가온 별빛 시선이 있었다

슬픔을 안고, 분노를 이고, 사랑을 업고

다가간 게 아니었다

맞아 죽지 않고, 고문 당하지 않고, 대들지 않고 눈치 보다

남아 있게 된 것뿐이다

이미 저승으로 입장한 지인들도 여럿

한둘은 이따금 급습한다

어둠 속에 깨어나 앉아 그들을 회상하면 시간이 안 간다

사방이 죽을 곳이고

천지사방이 죽이는 곳인데

두 세기 위에

세 번째 행성 위에

한국 위에

늘 첫 시간 위에

이렇게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네 욕망을 욕망하는 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가

지금보다 훨씬 일찍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있었다

누군가 있었다

옆구리만큼 가까이 있었다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1월호 발표

 

 


 

박용하 시인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見者』,『한 남자』 등이 있음.

 

맨위로

https://blog.daum.net/simjy/12026575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