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세원 시인 / 생강나무에서 폭죽이 터질 때
봉우리 치솟은 깊은 산속 이른 봄 조카는 군부대에서 산불을 끄러 갔네 난데없이 저기 한 군인이 지뢰를 밟았네 그 순간 조카는 많이도 다쳤네 생강나무의 생각에서 펑펑, 머리뼈에서 펑펑 불꽃이 일었네 생각나무는 불꽃놀이, 조카는 검붉은 불길에 휘감기고, 전날 밤 꿈을 꾼 언니는 그게 말이야, 시렁에 올려놓은 늙은 호박에 파편이 박혔어 상처가 곪았지 치마폭이 넘치도록 호박을 받아 안았어 아, 살았구나 살아냈구나 언니의 꿈땜으로 조카는 생명을 건졌을까 왼쪽 부서진 두개골과 두어 달 배 위로 꺼내놓은 장기들, 한 가닥 실오라기를 밀어 올리며 손가락 끝이 꿈틀대던 살붙이, 노랗게 봄을 태운 생강나무 그 너머 지뢰로부터 꼬박 일 년을 넘기고서야 생각나무에서 터지는 축포
엄세원 시인 / 배롱나무 콤플렉스
배롱나무 꽃 속에 백야와 극야가 있다 나무는 색으로 호흡할까
붉음이 타오른다 꽃불 하나 캐면 미치도록 꿈꾸고 꽃불 하나 지면 한 사람을 울게도 한다
절정의 끝은 겹과 겹으로 꽃눈을 가두는 것
더 꼬인 붉음에서 물기를 머금기도 한다 흩날리다 찢어지고 꽃물 뚝뚝 친애하는 추락
감당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이 엇갈린다
엄세원 시인 / 마침표가 물방울에 찍힌다
몇십 년 후 당신은 어디에 맺혀있을까 왜 한 방울이라고만 여겨질까
절벽에서 마침표로 떨어지는 그 순간
잎 하나에 걸쳐져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당신이라는 부호
무심이 절벽의 숨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가파른 숨
미래가 수많은 과거일 때
당신도 나도 한 방울 액체로 맺혀있다
엄세원 시인 / 혼몽
한밤중이 엎질러 있다 잠옷에 맨발인 채 집을 빠져나간다
사냥꾼과 숨죽인 불안이 뒤따라오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샛길로 격발을 끌고 간다
이내 총구를 턱 가까이 바짝 들이민다
쩍 금이 간 얼음 위로 화들짝 놀란 비오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몇 번째인가, 총소리를 따라 간 나는 발칸반도 장미처럼 점점이 번진 핏자국에 익숙하다
죽은 가지를 부여잡은 발자국이 어둡다
피 묻은 잠옷이 길 위를 걷고 있다
어느덧 사냥꾼은 없고 어둠 속에 수없는 미제들이 서있다
엄세원 시인 / 화두
풍경의 배후는 화두 어디로 갔는지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추녀에 묶어두었던 사슬만 선禪에 든다
지붕이 풍경을 보듬을 때
존재와 사라짐의 경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암자에서의 차 한 잔
찻잎이 찻잔에서 우려 나는 동안 내 안의 물고기가 일렁인다
풍경에 묶인 것일까요 찻잔 속으로 깊어지는 중일까요
어둑해질 때까지 풍경을 읽는데
망상에 갇힌 물고기는 헤엄칠 줄 모른다
엄세원 시인 / 4B
그날의 목격자는 4B 연필뿐이었다 칼날에서 심이 날리지 않도록 휴지 한 장이 배경이었다
거칠게 스케치하던 행위가 멈추는 순간 깊숙이 박힌 心이 빠진다
여자는 원근법을 사랑하는데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어서 너무 짙은 근시 끝내 알 수 없는 진심
그날 이후 4B는 슬플悲 팔목은 언제나 선을 긋고 싶었다
다 잊은 일이다 중얼거려보아도 이젤이 핼쑥하다, 일종의 경고다
손끝이 엇나갈 때 H의 스케치도 흑심이었을까 멀미가 캔버스로 쏟아지고 입술을 더듬는다 첫 키스가 재현되다 뭉개진다
나무속에는 구멍이 뚫려 헛헛한 여자가 갇혀 있다 가늘고 선명하게 표현된 명암 속으로 안간힘이 삽화를 붙든 채
구도가 흔들리고 있는 관계 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나무
점차 짧아져 쥘 수 없는 연애에 침을 삼킨 또 다른 HB가 기다리고 있을까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상상인, 2021) 중에서
엄세원 시인 / 지상의 책 한 권
물오른다는 건 책으로부터 지상으로 초록이 심어지는 것 가늘디가는 획들이 나뭇가지 끝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누운 아버지는 점점 목차로 간결해지셨다 내가 속을 꾹 누르고 눈만 껌뻑거리면 아가야, 괜찮다 넌 더 읽을 게 있잖니
슬픔이 점자처럼 더듬는 서녘 하늘 검붉게 변한 구름이 일렁거렸다
무감각으로 들판을 바라보면 아가야 봤지, 길도 존재하고 싶어서 일렁이는 끈이라도 붙잡고 일어서는구나
슬퍼도 웃고 기뻐도 웃어라 한 글자 한 글자에 굳이 박히지 마렴 눈빛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끝이 보일 거다 그게 네 모습인 거야
책 한 권이 통증으로 눌러질 때 아버지는 마지막 갈피끈을 내게 주셨다 81쪽을 펼치자 봄이 꽃을 밀어내고 다음 페이지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은기침을 하고 웃음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고딕체의 모자 벗은 봄이 공중에 섞여 들었다
아버지는 봄을 다 읽고 나서야 마지막 페이지가 되셨다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상상인,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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