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세원 시인 / 생강나무에서 폭죽이 터질 때 외 6편

댓글수0 다음블로그 이동

◇ 시인과 시(현대)

엄세원 시인 / 생강나무에서 폭죽이 터질 때 외 6편

심 파스칼
댓글수0

엄세원 시인 / 생강나무에서 폭죽이 터질 때

 

 

 봉우리 치솟은 깊은 산속 이른 봄 조카는 군부대에서 산불을 끄러 갔네 난데없이 저기 한 군인이 지뢰를 밟았네 그 순간 조카는 많이도 다쳤네 생강나무의 생각에서 펑펑, 머리뼈에서 펑펑 불꽃이 일었네 생각나무는 불꽃놀이, 조카는 검붉은 불길에 휘감기고, 전날 밤 꿈을 꾼 언니는 그게 말이야, 시렁에 올려놓은 늙은 호박에 파편이 박혔어 상처가 곪았지 치마폭이 넘치도록 호박을 받아 안았어 아, 살았구나 살아냈구나 언니의 꿈땜으로 조카는 생명을 건졌을까 왼쪽 부서진 두개골과 두어 달 배 위로 꺼내놓은 장기들, 한 가닥 실오라기를 밀어 올리며 손가락 끝이 꿈틀대던 살붙이, 노랗게 봄을 태운 생강나무 그 너머 지뢰로부터 꼬박 일 년을 넘기고서야 생각나무에서 터지는 축포

 

 


 

 

엄세원 시인 / 배롱나무 콤플렉스

 

 

배롱나무 꽃 속에 백야와 극야가 있다

나무는 색으로 호흡할까

 

붉음이 타오른다

꽃불 하나 캐면 미치도록 꿈꾸고

꽃불 하나 지면 한 사람을 울게도 한다

 

절정의 끝은 겹과 겹으로 꽃눈을 가두는 것

 

더 꼬인 붉음에서 물기를 머금기도 한다

흩날리다 찢어지고 꽃물 뚝뚝

친애하는 추락

 

감당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이 엇갈린다

 

 


 

 

엄세원 시인 / 마침표가 물방울에 찍힌다

 

 

몇십 년 후 당신은 어디에 맺혀있을까

왜 한 방울이라고만 여겨질까

 

절벽에서 마침표로 떨어지는

그 순간

 

잎 하나에 걸쳐져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당신이라는 부호

 

무심이 절벽의 숨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가파른 숨

 

미래가 수많은 과거일 때

 

당신도 나도 한 방울 액체로 맺혀있다

 

 


 

 

엄세원 시인 / 혼몽

 

 

한밤중이 엎질러 있다

잠옷에 맨발인 채 집을 빠져나간다

 

사냥꾼과 숨죽인 불안이 뒤따라오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샛길로 격발을 끌고 간다

 

이내 총구를 턱 가까이 바짝 들이민다

 

쩍 금이 간 얼음 위로 화들짝 놀란 비오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몇 번째인가, 총소리를 따라 간 나는

발칸반도 장미처럼 점점이 번진 핏자국에 익숙하다

 

죽은 가지를 부여잡은 발자국이 어둡다

 

피 묻은 잠옷이 길 위를 걷고 있다

 

어느덧 사냥꾼은 없고

어둠 속에 수없는 미제들이 서있다

 

 


 

 

엄세원 시인 / 화두

 

 

풍경의 배후는 화두

어디로 갔는지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추녀에 묶어두었던 사슬만 선禪에 든다

 

지붕이 풍경을 보듬을 때

 

존재와 사라짐의 경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암자에서의 차 한 잔

 

찻잎이 찻잔에서 우려 나는 동안

내 안의 물고기가 일렁인다

 

풍경에 묶인 것일까요

찻잔 속으로 깊어지는 중일까요

 

어둑해질 때까지 풍경을 읽는데

 

망상에 갇힌 물고기는

헤엄칠 줄 모른다

 

 


 

 

엄세원 시인 / 4B

 

 

그날의 목격자는 4B 연필뿐이었다

칼날에서 심이 날리지 않도록 휴지 한 장이 배경이었다

 

거칠게 스케치하던 행위가 멈추는 순간

깊숙이 박힌 心이 빠진다

 

여자는 원근법을 사랑하는데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어서

너무 짙은 근시

끝내 알 수 없는 진심

 

그날 이후 4B는 슬플悲

팔목은 언제나 선을 긋고 싶었다

 

다 잊은 일이다 중얼거려보아도

이젤이 핼쑥하다, 일종의 경고다

 

손끝이 엇나갈 때 H의 스케치도 흑심이었을까

멀미가 캔버스로 쏟아지고 입술을 더듬는다

첫 키스가 재현되다 뭉개진다

 

나무속에는 구멍이 뚫려 헛헛한 여자가 갇혀 있다

가늘고 선명하게 표현된 명암 속으로

안간힘이 삽화를 붙든 채

 

구도가 흔들리고 있는 관계

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나무

 

점차 짧아져 쥘 수 없는 연애에

침을 삼킨 또 다른 HB가 기다리고 있을까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상상인, 2021) 중에서

 

 


 

 

엄세원 시인 / 지상의 책 한 권

 

 

물오른다는 건

책으로부터 지상으로 초록이 심어지는 것

가늘디가는 획들이 나뭇가지 끝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누운 아버지는 점점 목차로 간결해지셨다

내가 속을 꾹 누르고 눈만 껌뻑거리면

아가야, 괜찮다 넌 더 읽을 게 있잖니

 

슬픔이 점자처럼 더듬는 서녘 하늘

검붉게 변한 구름이 일렁거렸다

 

무감각으로 들판을 바라보면

아가야 봤지, 길도 존재하고 싶어서

일렁이는 끈이라도

붙잡고 일어서는구나

 

슬퍼도 웃고 기뻐도 웃어라

한 글자 한 글자에 굳이 박히지 마렴

눈빛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끝이 보일 거다

그게 네 모습인 거야

 

책 한 권이 통증으로 눌러질 때

아버지는 마지막 갈피끈을 내게 주셨다

81쪽을 펼치자 봄이 꽃을 밀어내고

다음 페이지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은기침을 하고

웃음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고딕체의 모자

벗은 봄이 공중에 섞여 들었다

 

아버지는 봄을 다 읽고 나서야

마지막 페이지가 되셨다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상상인, 2021) 중에서

 

 


 

엄세원 시인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강원문학》 시부문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 시집으로 『숨, 들고나는 내력』이 있음. 한국방송대학교 국문학과(文淵) 학술·문학 통합 대상, 사임당문학상, 홍성군 문화·관광 디카시 공모전 대상 수상.

 

맨위로

https://blog.daum.net/simjy/12026586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