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 시인 / 못 갖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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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못 갖춘 이야기들

심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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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시인 / 못 갖춘 이야기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1.

 

 쉿! 을 추종하는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뒷산 관음보살의 신탁만으로는 도무지 창조되기 힘든 실재계의 최대화를 관음이라 이름 지었다. 내가 죈 종일 갓 부화된 병아리들의 이름을 짓거나 집 앞 봇도랑 생쥐와 눈싸움을 하거나 끼니도 거르고 도라지 밭에서 꽃봉오리를 터트리며 놀던 어린 날, 앞집 언니는 뒷집 아재의 손에 이끌려 자주 뒷산으로 갔다. 언니의 배가 봉분마냥 불룩해지자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는 죄라는 믿음이 일족의 약속이었다. 소리내야만할 때 절대 소리 내지 않는 집단적 비굴을 마을 사람들은 간혹 평온이라 우겼다. 언니가 동구 밖 고염나무에 까치밥처럼 매달렸을 때도 아재는 평범했고 일족은 냉정했다.

 

 2.

 

 어느 날은 학교에서 악마와 대면했다.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가르쳐준 건 얼마 전 새로 부임해 온 우리들의 다정한 교장이었다. 다행히 내겐 지나치게 친절한 건 잔인한 거니 피하라고 가르쳐준 엄마가 있었다. 그즈음 엄마도 없는 내 짝의 웃음이 사라졌다. 피 뭍은 치마를 잡고 엉엉 울던 내 짝은 더 이상 교장실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됐다. 아이가 셋이나 딸린 병신 같은 담임은 지나치게 윤리적이어서 입을 꾹꾹 다물었다. 아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야 했다. 그날의 일기는 그날을 기억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3.

 

 내 친구 옥순이의 아버지이자 석이의 아버지인 허氏는 윗 마실 영주 댁의 남편이자 아래마실 소실댁의 남편이기도 했다. 영주 댁은 옥순이보다 소실댁의 석이를 더 챙겼다. 옥순이가 좋아하던 분홍소시지는 늘 석이의 도시락에만 있어서 점심시간이면 누구랑 같이 먹을까 난감 했다. 남매이자 동급생인 옥순이와 석이는 늘 따로 놀았지만 옥순이 친구이자 석이의 친구인 나는 네 편 내편 없이 인형놀이도 전쟁놀이도 두루 섭렵했다. 칼싸움을 할 때마다 허를 찔린 석이는 계집애처럼 울었고 의기양양한 내게 엄마는 말했다. 선머슴처럼 여자애가 그러면 안 되지! 옥순이 엄마도 울 엄마도 여자이면서 자꾸만 여자를 강조하고 있었다. 오랜 후 왜 안 되는데? 혼자 묻곤 한다.

 

계간 『시현실』 2020년 봄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 법정대학원 졸업.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2015년 한중작가 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출간. 시집으로 『시인하다』와 『삼국유사대서사시ㅡ사랑편』 그리고 기타 저서로는 『Beautiful in Gyeongju-문두루비법을 찾아서』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문학동인Volume 고문,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북체육회 인권상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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