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시인 / 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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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 외 1편

심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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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시인 / 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

 

 

나는 가끔 금 밖으로 나간 어머니를 제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어머니, 자꾸 아버지의 땅을 침범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나라에는 무시무시한 우박이 떨어져 앞이 안 보여요 (피고름 나는 무릎과 술병들, 낭설들과 빚 독촉장들이 출연하는 한밤의 뮤지컬이 은밀히 공연된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차단한 불청객인 줄 아셔야 해요 우는 어머니에게서 울음소리를 빼앗아 조개껍질 속에 버렸다

 

거인들이 인간을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나라, 유령들이 인간을 조종하며 깔깔대는 나라, 거기에 숨어들어 나는 찰흙 인형처럼 모양이 바뀌는 아버지를 보았다 저렇게 신기한 연기를 해내는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가 아닐지도 몰라 아버지는 질질 끌려다니거나 조리돌림을 당하며 대사를 쳤다 내 고통은 내게서 그만, 내 가족에게는 손대지 마! 그들은 손뼉을 치며 아버지를 실컷 비웃었다 이제 목이 쉰 아버지, 당신은 아버지 나라의 왕이 아니었군요 어두운 무대 위 한 남자의 통점이 여러 지점에서 신음으로 터졌다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우리는 산소통도 없이 해저 깊이 숨어들고 있어 너무 숨이 차요 우리 이불 속으로 들어오세요

 

그 이후 우리는 귀를 한쪽씩 잘라버리고 칠흑 같은 등을 보여주며 해저에 누웠다 그 자세로 굳어 천년 후에 진주로 태어나기로 했다

 

계간 『파란』2021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 오후 세 시에는 40킬로의 용기가 필요해

 

 

골목에 식자재 트럭 종이 울리면

잠들었던 사물들이 먼저 눈을 뜨고

어떤 냄비는 지난한 맨살을 드러낸다

 

긁히고 벗겨진 냄비의 속성을

어제에 기생하는 화상 자국이라고 한다면

오후 세 시의 배고픔은 차라리 천사의 경고음

 

끙, 끙

무명작가의 팔리지 않는 저서 육십오 페이지로 들어가

 

하루 중 입술이 가장 바싹 마른 때를 골라

형벌 같은 슬픔을 불러 모으는 소리, 끙, 끙

 

이번이 죽음 전 만찬이 될 지 모른다고 중얼거려도

작가는 문장을 바로 잡지 않고 내버려두네

 

걸어도 걸어도 입구가 나오지 않는

기나긴 동굴 속에서

히치하이킹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온 악몽을 헤매느라 오늘을 겨우 대출받은 여자가

촉수를 잃어버린 벌레처럼

휘청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선다

 

가족도 없는 집에 속살을 나눈 그릇들은

여자의 페이지 십팔 행에 죽 한 그릇 남기려고 벌써 바빠진다

 

오후를 여러 개로 나누면 행운의 지분이 생겨

동굴의 입구에 닿을 수 있을까?

천사가 남긴 지도가 정말 거기에 있을까?  

 

계간 『생명과 문학』2021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등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와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21 전국 계간 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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