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지 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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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지 권30, 겹장본, 사침선장본, 70P, 19X26.8cm, 필사본                                                        

                                                                                                    (한국속기록학연구원 소장자료)

 

 

 

 

 

 

부여(夫餘)     

부여(夫餘)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菟)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高句麗), 동쪽은 읍루(挹婁),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

그곳 사람들은 토착(土著)생활을 하며, 궁실(宮室)과 창고 및 감옥이 있다.
산과 언덕(山陵), 넓은 들이 많아서 동이(東夷)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평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나지 않는다.

그곳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약탈이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고, 모두 여섯 짐승(六畜)의 이름으로 관직명(官名)을 정하여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豪民)이 있으며, 하호(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奴僕)이 되었다. 
제가(諸加)들은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가(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가(家)였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합(會合)을 할 때에는 술잔을 주고(拜爵) 술잔을 닦는(洗爵) 예(禮)가 있으며,
오르고 내릴 때(出入)는 주객(主客) 사이에 읍양(揖讓)하는 예(禮)가 있다.

은력정월(殷曆 正月)에 지내는 제천행사(祭天行事)는 국중(國中)의 대회

(大會)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 이 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국내(國內)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外國)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수(繡)놓은 옷·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삵괭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은 적몰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케 했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南山)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형(兄)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흉노(匈奴)의 풍습과 같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名馬)와 적옥(赤玉), 담비와 원숭이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酸棗) 만하다.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네들이 옛날에 다른 곳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성책(城柵)은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적군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 모두 얼음을 사용했다. 
사람을 죽여서 순장(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槨)은 사용하나 관(棺)은 쓰지 않는다. 

위략(魏略): 그 나라의 습속(習俗)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상주(喪主)는 빨리 장사 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권(强勸)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서 예절로 삼는다.
상(喪)을 입는 동안에는 남녀 모두 순백색(純白色)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面衣)를 착용하며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제거하니,
상복을 입는 예(禮)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부여(夫餘)는 본래 현도(玄菟)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말년에 공손탁(公孫度)이 해동(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外夷)들을
위력(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때에 고구려(高句麗)와 선비(鮮卑)가 강성해지자,
공손탁(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동맹(同盟)을 맺으려고 일족(一族)의 딸을 그 왕(王)에게 시집보내었다.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王)이 되었다.
간위거(簡位居)에게는 적자(適子)가 없고 서자(庶子)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위거(簡位居)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麻余)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位居)였는데,
대사(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국인(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위(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쳤다.

정시(正始) 연간(A.D.240~248; 고구려 동천왕 14~중천왕1(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 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이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부여(夫餘)에 파견하였다.

위거(位居)는 대가(大加)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왕기(王頎)를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位居)의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位居)는 계부(季父) 부자(父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적몰,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簿歛)을 만들어 관(官)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五穀)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王)에게 돌려 ‘왕(王)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麻余)가 죽고,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依慮)를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한(漢)나라 때에는 부여왕(夫餘王)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玉匣)을 현도군(玄菟郡)에 미리 갖다 두었다가 왕(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현도군(玄菟郡)의 창고에는 옥갑일구(玉匣 一具)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玉)으로 만든 벽(璧)·규(珪)·찬(瓚)등 여러 대(代)를 전해 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先代)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략(魏略):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 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위략(魏略):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자, 왕(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王)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을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에 음식은 아껴 먹으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이 있으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과 피리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부경(桴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장을 잘 담고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고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와 안제 연간(106-124년)에 고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司馬懿)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은 관구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濆活國

 


**고구려를 침공한 위(魏)나라의 무장 관구검(毌丘儉, ? ~ 255년) 또는 무구검(毋丘儉)

  여기서는 관구검(毌邱儉). 무구검(毋邱儉)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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