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 보고서 3 / 인터넷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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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보고서 3 / 인터넷 월간중앙

아름다운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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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조 보고서 - 명성황후 살해에 관한 일본정부의 공식 보고서. 자신들이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을 숨기고자 제3자에게 들은 것처럼 보고서를 꾸몄다.

그 보고서에 대한 작가 김진명의 글, 그에 대한 반론.

 

 

[현대사 俗說과 眞實(2)- ‘에조문서 435호’의 실체] “명성황후 ‘사망 전 능욕설’… 작가의 상상력 지나쳤다”

 

소설가 김진명이 주장한 ‘에조문서 435호’는 없다. ‘에이조의 편지’가 있을 뿐

金鍾旭 서지연구가

 

 

 

명성왕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인 미우라 고로 당시 일본 공사.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에조문서 435호’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중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

더구나 작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에조문서 435호가 실존하는 문서임을 주장한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명성황후의 ‘사망 전 능욕설’까지 펴고 있다.

과연 에조문서의 실체는? 사망 전 능욕설의 진위는? 에조문서의 원본으로 보이는 ‘에이조의 편지’ 전문을 함께 공개한다.



우리나라의 핵 무기 개발을 소재로 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로 일약 유명세를 탄 작가 김진명 씨가 지난 2001년 발표한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소설은 그렇잖아도 근대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사의 중심 인물이면서 일제의 만행에 비운의 최후를 마친 명성황후는 늘 필자에게 안타까움과 의혹의 대상이었다.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제목처럼 어느날 갑자기 일본의 황태자비가 납치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납치 사건의 본질이 100여 년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을미사변’과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국인 유학생이 을미사변을 둘러싼 의혹을 풀기 위해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건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핵심 모티프로 등장한다. 이름하여 ‘에조문서 435호’다. 소설에서 에조문서란 당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에조라는 일본인이 을미사변에 참여한 후 그 전말을 자신의 상관인 일본의 법무장관에게 보고하는 문서다.

그런데 일련의 보고서 중 유독 명성황후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한 435호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결국 황태자비 납치 사건의 목적은 이 문서를 찾아내 명성황후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혀내고, 이를 만천하에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진다.

소설은 작가의 개성 있는 문체에 힘입어 재미있게 읽혔다. 실제에서도 어느날 갑자기 고문서가 발견돼 그때까지의 역사를 바꿔 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얼마 후 필자는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를 들여다보다 가슴이 덜컹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단순히 소설적 허구라고 믿었던 에조문서가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기사는 바로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저자인 김진명 씨가 에조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한 것을 계기로 에조 문서의 작성 과정과 발견 경위, 내용 등에 대한 서술과 함께 김진명 씨의 인터뷰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사는 김진명 씨의 말을 빌려 명성황후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낭인들의 칼에 난자당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사망하기 전에 일인 낭인들에게 강간당한 후 살해됐다는 가설을 소개하고, 명성황후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자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네티즌 충격 속 김진명 씨는 답이 없었다

기사를 읽고 난 필자는 에조문서 435호의 원문 내용이 몹시 궁금해졌다. 에조문서가 사실이라니, 더욱이 명성황후가 사망 전에 능욕을 당하고 불태워졌다니…. 필자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문서가 발견되고,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문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실들이 나열돼 있다니 충격은 당연했다.

필자는 곧 김진명 씨에게 메일을 보내 문제의 문서를 보여줄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요청했다. 그러나 김진명 씨로부터는 끝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거의 비슷한 시점, 필자가 명성황후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네티즌들이 질문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내친 김에 직접 문서를 찾아나섰다.

네티즌들은 대부분 문서의 실체와 그 내용을 김진명 씨의 주장대로 믿고 있는 듯했다.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과 작가 김진명 씨의 인터뷰 내용은 네티즌들에게도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선 에조문서를 논하기 전에 소설에 등장하는 에조문서의 내용부터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김진명 씨는 소설에서 에조문서 435호의 내용을 이렇게 묘사했다.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建淸宮)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 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 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하권 208~209 쪽에서 전재.

문서는 그러나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인터뷰에서 김진명 씨가 문서의 소재까지 밝혔음에도 문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즈음 비슷한 이름의 인물이 같은 사건을 기술한 문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일본식 서간용 두루마리에 쓰인 것으로, ‘이토 백작 가문의 조선왕비 사건 관계자료(伊東伯爵家文書 朝鮮王妃事件關係資料)’의 하나였다.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에서 복사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이토 백작가 문서에는 이것 말고도 ‘조선왕비사건’이라는 별도의 문서를 5통 정도 더 소장하고 있다.

문서의 내용은 당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라는 일본인이 사건 직후 일본 법무부의 스에마쓰(末松) 법제국장 앞으로 보내는 서간(書簡) 형식의 글이었다. 글의 머리에는 ‘서간’이라는 글자가 분명하게 보인다. 또 발신일이 메이지 28년 10월9일(明治二八年十月九日附)이라고 적혀 있다.

작가의 상상상력과 문건 기록은 달라

영국공사가 1895년 10월12일자 보고서에 별첨한 사건 현장의 개념도. 현장 목격자의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필자는 이 문서와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 등장하는 에조문서 435호를 비교해 보았다. 내용이 상당히 비슷했다. 다시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내용과 재차 비교해 보았다. 두 문서는 뜻밖에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진명 씨가 몇 차례나 반복해서 읽은 뒤 나름대로 ‘명성황후 능욕설’을 주장했다는 바로 그 대목은 도저히 다른 문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앞에서 인용한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을 확대 해석해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김진명 씨가 인터뷰에서 인용한 에조문서 435호의 일부)

‘특히 낭인들(野次馬達)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질을 하고 나서(刃傷을 입히고 나서) 나체로 하고 국부검사(可笑又可怒, 웃기고 또한 화가 치민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 소실했다든가 참으로(誠히) 이것을 쓰기 염려가 됩니다. 차마 쓸 수 없습니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필자가 찾아내 나름대로 옮긴 이시즈카 에이조의 서간 일부)<상자 기사 ‘에이조의 서간’ 전문 참조>

필자는 끝내 에조문서 435호의 원문을 보지 못했다. 특히 일본어에도 밝지 못하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낸 에이조의 서간을 나름대로 번역해 본 결과 두 문서의 내용은 별개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흡사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낸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435호와 같은 일련번호가 매겨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필자는 김진명 씨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사실 여부를 규명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허구의 소산이므로…. 만약 김진명 씨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설에 인용한 에조문서 435호가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임과 그 문서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면, 필자 역시 잘 짜인 역사소설 한 편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 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김진명 씨가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수십만 부가 팔려 나가며 상당한 기간 동안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마이뉴스> 역시 많은 네티즌에게 노출된 인터넷 대중매체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로 해서 앞에서 예로 든 바와 같이 필자에게 메일을 보낸 네티즌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에조문서 435호를 사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필자가 김진명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참담했던 부분은 김진명 씨가 주장한 소위 ‘명성황후의 시해 전 능욕설’이다. 비명에 간 것도 억울한데 시간설이며, 사망 전 능욕설이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김진명 씨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일본 낭인들에게 능욕당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명성황후의 시해 전 능욕설을 주장한다. 그 부분을 옮겨본다. 이는 그가 소위 에조문서 435호를 근거로 새롭게 해석을 내린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屍姦)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민비 유해 곁에 ‘에조’라는 일본인 없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의 시위대와 훈련대의 갈등으로 비치게 하기 위해 훈련대를 포섭해 사건에 가담시킴으로써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 당시 시위대의 모습.
그러나 김진명 씨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당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김진명 씨가 발굴했다는 소위 에조문서 435호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러나 이 문장 어디에도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능욕당했다는 구체적 표현은 없다. 물론 명성황후가 칼에 맞아 즉사했다는 표현도 없다. 이에 대해 김진명 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 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먼저 앞의 말을 살펴보자. 김진명 씨는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먼저 가해자 중의 한 명이라는 부분이 의심이 간다.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의 기록 <일본의 한국 병합>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보인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편집자 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이 글을 보면 마치 에조가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유해 옆에서 다른 낭인들이 명성황후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조가 만약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어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해 스에마쓰에게 보냈다면 이 서찰은 더할 수 없는 사건 현장 목격기로서 중요한 자료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에이조의 서간에서는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에조’라고 하는 내용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진명 씨가 을미사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고, 많은 것을 알게 된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 암살>이라는 책에도 에조라는 일본인이 명성황후 저해(沮害) 직후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 부분은 나와 있지 않다.

야마베의 ‘사체를 능욕했다’ 한국에서 정설화

후사코 여사는 단지 에조의 보고서를 한두 줄 간략하게 인용한 것 외에는 그 글을 인용한 출전만 들어있을 뿐 어떠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후사코 여사 역시 <민비 암살>을 저술할 때 이 부분은 야마베 겐타로의 <일한합병소사>에 수록된 그 내용을 다시 옮겨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는 특히 야마베 겐타로의 1966년 저작 <일한합병소사>에서 ‘사체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 썼는데 이것이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마베는 그의 저작에서 에조의 보고서를 부분적으로 참고했을 뿐 중요한 자료로 인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쓰노다 후사코와 야마베 겐타로의 저작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왕비는 일본인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왕비의 얼굴을 몰랐으므로 확실히 왕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궁녀와 왕태자 이척(李拓)을 연행해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살해한 후 사사 마사유키는 왕비의 몸에 달려있는 향(香)주머니와 기타 귀중한 물품을 빼앗아 가고 다른 난입자(亂入者)도 또한 왕비 방에서 각종 물품을 빼앗아 갔다(<王妃殺害> 諸第 57號)고 우치다는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왕비를 끌어내어 2, 3 군데 인상(刃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 可笑又可怒-原注)를 했다고까지 전해지고 있다.(<日本의 韓國倂合>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 太平出版社 1966년. pp. 51~52)

그때 미우라는 입궐하여 국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사후 처리의 지시를 긴급히 요구했으므로 미우라는 알현 도중에 자리를 떠나 왕비의 사체(死體)를 확인하고 하기하라에게 급히 치우라고 명령하고 다시 알현실로 되돌아가고 있다.(<太山巖> 第4卷. p. 432)

그래서 하기하라는 왕비를 옥호루 동쪽 정원에 장작을 쌓아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것은 죄악의 증적(證迹)을 인멸(湮滅)하기 위해서(<王妃殺害> 公信 第 98號)였다.

위의 문서 외에도 사건 당시를 기록한 문서는 많다. 심지어 을미사변 당시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은 모두 48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들 48명 가운데서도 에조라는 이름은 물론 에이조라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진명 씨의 시해 전 능욕설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김진명 씨의 말을 더 들어보자.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야마베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결국 김진명 씨의 시해 전 능욕설은 에조문서에서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구체적 표현이 없다는 데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김진명 씨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칼로 난자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가 나중에 능욕 후 불태워 죽였다는 것이 된다.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소위 에조문서의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는 부분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지금까지 에조문서의 존재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김진명 씨의 ‘명성황후 사망 전 능욕설’ 에 대해 그 가능성을 짚어봤다. 그렇다면 과연 에조문서 433, 434, 435호는 존재하는가? 김진명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프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했다. 과연 필자가 찾아낸 에이조 서찰 외에 에조문서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우선 에조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필자는 김진명 씨가 찾아낸 에조문서의 주인공 에조와 필자가 찾아낸 에이조 서찰의 주인공 에이조가 어느 한쪽의 번역상의 오류일 뿐 같은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거론하는 에조 혹은 에이조는 우리 발음으로 석총영장(石塚英藏)으로 읽히는 인물한 명뿐이다.

이스즈카 에이조가 한국에 온 것은 을미사변이 발발하기 직전인 1895년 8월14일. 조선 정부가 그를 내부 고문관직으로 임명함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국 사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고종이나 명성황후를 알현하기에는 너무 미천한 일개 무관일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진명 씨가 언급한 것처럼 에이조가 왕비를 시해하기 위해 결성된 낭인배의 한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맡고 있었던 한국정부 내부 고문직은 위장술에 불과한 헛된 직분도 아니었다.

‘에조’는 조선 정부의 고문 ‘에이조’

에이조는 미처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10월8일의 대사건을 맞게 되었다. 사건 당일까지도 에이조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배의 급습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이는 그의 서찰의 문구가 제3자의 말을 인용하는 투로 표현됐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그에게 총리대신 사이온지(寺園)의 명령을 받은 스에마쓰(末松)가 사건의 전말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급전(急電)을 띄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에이조는 급조된 보고서를 스에마쓰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에이조’가 을미사변이 발발한 그 다음날 본국으로 보낸 간찰 형식의 보고서다.

필자 역시 에조문서를 찾기 위해 무던 애를 썼음을 밝힌다. 그러나 미욱함 때문인지 필자는 끝내 에이조의 서찰 외에 따로 에조문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필자는 에이조가 초안한 을미사변 관계의 보고문은 이것 한 가지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필자의 견해는 에조문서 435호는 필자가 찾아낸 에이조의 서간과 동일한 문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에조문서 435호’는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에이조의 편지에 허구의 당의(糖衣)를 입힌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진명 씨는 인터뷰에서 “이 문서 내용에 서명 날인, 도장이 찍혀있느니, 433호, 434호는 찾았는데 결코 압권이라 할 수 있는 435호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2004년 12월호 | 입력날짜 2004.11.19

 

 

* 출처 :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59,aid%252D217219%252Dservcode%252D9500500,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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