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삼백수] 090. 經鄒魯祭孔子而嘆之(경추노제공자이탄지) - 唐 玄宗(당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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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 090. 經鄒魯祭孔子而嘆之(경추노제공자이탄지) - 唐 玄宗(당 현종)

재휘애비.溢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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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삼백수 권3 오언율시
090.經鄒魯祭孔子而嘆之(경추노제공자이탄지) - 唐 玄宗(당 현종)
추노(鄒魯)를 지나며 공자(孔子)에게 제사 드리고 탄식하다

 

經鄒魯祭孔子而嘆之

(경추노제공자이탄지)

 

- 唐 玄宗(당 현종) - 

 

夫子何爲者(부자하위자),

栖栖一代中(서서일대중).

 

선생께서는 무슨 연유로

일생을 그리 바쁘게 보내셨는가.

 

地猶鄹氏邑(지유추씨읍),

宅即魯王宮(택즉노왕궁).

 

땅은 여전히 추씨의 고을인데

집은 노공왕(魯恭王)의 궁궐이 되었구나.

 

歎鳳嗟身否(탄봉차신부),

傷麟怨道窮(상린원도궁).

 

봉황을 탄식하고 신세가 막힘을 한탄하며

기린의 죽음을 슬퍼하고 도가 없어짐을 원망했네.

 

今看兩楹奠(금간양영전),

當與夢時同(당여몽시동).

 

지금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것 보니

공자께서 꿈꾸던 때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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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經鄒魯祭孔子而歎之/ 作者李隆基  /

本作品收錄於:《全唐詩唐詩三百首 / 全唐詩 卷三.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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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공자께서는 무슨 연유로 일생 동안 그리도 바삐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던가. 지금 이곳은 여전히 추씨의 식읍이지만, 공자의 집은 당시 노공왕(魯恭王)이 허물어 자신의 궁실로 만들어버렸다. 봉황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자신의 신세가 막힘을 탄식하였으며, 기린이 잡혀 죽은 것을 슬퍼하고 자신의 도()가 더 이상 펼쳐지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였다. 지금 전당의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니, 공자가 꿈꾸던 때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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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 이 시는 개원(開元) 13(725) 당 현종이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행하고 長安으로 돌아오던 도중 곡부(曲阜)의 공자 고택에 행차하여 제사 지내면서 쓴 시이다. 공자가 일생 동안 불우하게 살며 곤액을 당했던 사실을 통해, 존경받던 성인(聖人)의 불행함을 반영하였는데, 여기에는 작자의 깊은 동정심뿐만이 아니라 공자에 대한 찬미(讚美)와 포양(襃揚)이 드러나 있다. 개원(開元) 27(789) 당 현종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에 봉하고, 그 제자들의 十哲(십철)’ 좌상(坐像)을 만들어 공묘(孔廟)에 배향한 후 공유(孔儒)를 존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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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鄒魯(추노) : ()나라 추읍(鄒邑)이라는 뜻이다. ()는 춘추(春秋)시대 국명(國名)이다. 여기서는 노나라의 도읍, 즉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을 지칭한다. 공자가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鄒邑) 출생이므로 鄒魯(추노)’라 하였다.

 

 夫子(부자) 공자를 높이어 이르는 말

 

 栖栖(서서) : 栖栖 棲棲와 같다. 論語≫ 〈憲問(헌문)편에 미생묘가 공자에게 말하기를 는 어찌하여 이리도 연연해하는가. 말재주를 구사하려는 것이 아닌가?’라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내 감히 말재주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요, 고집불통을 미워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者歟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라는 구절이 있다. 栖栖(서서)를 주자(朱子)는 의의(依依)로 해석하여 세상을 잊지 못하는 뜻으로 풀이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황황(遑遑)과 같은 뜻으로 보아 정처 없이 사방을 떠돌아다님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 : 고을 이름으로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동남쪽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 땅이며, 일찍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추읍의 대부였는데, 공자가 여기서 출생하였다.

 

 魯王宮(노왕궁) : 노왕(魯王)은 한() 경제(景帝)의 다섯 번째 아들인 노공왕(魯恭王)이다. 궁실을 짓기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공자의 고택(古宅)을 허물고, 그 궁을 넓힌 적이 있다.

 

 嘆鳳(탄봉) : 論語≫ 〈子罕(자한)편에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이제 끝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라 하였다.

 

 傷麟(상린) : 史記≫ 〈孔子世家(공자세가)에 의하면, () 애공(哀公) 14년에 노나라 사람이 기린(麒麟)을 잡았는데, 공자가 그것을 보고는 기린이 나왔으나 죽었으니, 나의 도()도 이제 다했다.’고 탄식하였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春秋를 기록할 적에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서술하고 그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兩楹奠(양영전) : 禮記≫ 〈檀弓(단궁)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저번 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대저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천하의 누가 나를 받들 것인가.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하시더니, 병으로 누우신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夫子曰 余疇昔之夜 夢坐奠于兩楹之間 夫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余 余殆將死也 盖寢疾七日而歿]”라 하였다. ()나라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을 두 기둥 사이에 놓는 제도가 있었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기 때문에 이러한 꿈을 꾸고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 여긴 것이다. ()은 전당(殿堂)의 기둥이며, 양영(兩楹)은 전당(殿堂)의 중간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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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이융기(玄宗 李隆基)

()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명 이융기(李隆基). 시호 명황(明皇무황(武皇). 무측천(武則天)의 아들인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687년에 주공(周公)으로 책봉된 이융기(李隆基)는 무측천이 690년 제위를 찬탈한 뒤인 693년 영주공(灵州公)으로 책봉되었고 무측천의 치세 말년에 궁궐내의 금위군(禁衛军)에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699년 무측천은 전황제 중종(中宗) 이현(李显)을 다시 태자로 삼았으며 705년 대신과 장군들의 위협에 굴복한 무측천은 황제위(皇帝位)를 이현(李显)에게 전하였고 중종은 당()의 국호를 회복하였다.

 

740년대 후반에는 이임보의 후원을 받은 안녹산(安祿山) 등 일부 절도사들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고 치세말기에 현종은 애첩 양귀비(杨貴妃)에게 빠져 6촌 오빠인 양국충(杨国忠) 등의 친인척들을 중용하였다. 752년 이임보가 죽고 양국충이 권력을 잡자 안녹산은 양국충의 노골적인 적대에 755년 말 반란을 일으켜 동북의 여러 성()을 격파하고 756년 여름에는 장안(长安)에 이르게 되었다. 

 

현종은 소수의 대신과 양귀비, 그리고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양국충의 세력기반인 사천으로 피난을 떠났으나 수행군이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살해하고, 양귀비를 자살케 하였다. 이때 장안의 서쪽인 영무(灵武)로 피난하였던 황태자가 황위에 등극하여 숙종(肅宗)이 되자 현종은 이를 수용하고 숙종에게 공식적으로 양위하였으며 현종은 762년에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종 이융기 [玄宗李隆基, Emperor Xuánzōng of Táng]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2011. 7. 1., 도서출판 황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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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시삼백수]經鄒魯祭孔子而嘆之(경추노제공자이탄지) - 唐 玄宗(당 현종)|작성자 swings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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