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an Anderson "Deep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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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 Anderson "Deep River"

재휘애비.溢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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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0L9C4xRL3QE&list=PL23223785C05B0C98&index=2

Marian Anderson "Deep River" Live 1939

 

 

그가 태어난 1897년은 미국이 노예해방제도선언을 한지 불과 30년이 조금 지난 시기로 여전히 미국사회에서 흑백차별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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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 Anderson은 좋아진 세상에서 호사를 누린 Kathleen Battle과 정반대의 인생을 산 흑인성악가였다. Battle의 음역이 고음인 소프라노이지만 Anderson은 저음인 콘트랄토가수였다. 어렸을 때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교회를 통해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공통점을 지나면 Battle이 큰 어려움없이 Cincinnati 대학에 진학하여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지만, Anderson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진학이 거절되어 흑인사회의 지원으로 제도권교육 밖에서 음악을 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 사진 : 후배흑인성악가들과 함께, 가운데는 지휘자 James Levine, 1990년 >

  - 좌측에서부터 Jessy Norman, James Levine, Kathleen Battle - 

  - 사진출처 : http://www.metoperafamily.org/_post/education/marian-anderson/html

 

두 사람이 성악가로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무대에 데뷰한 이후 성장과정도 다르다. Anderson이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흑인이라는 것이 활동에 적지 않았던 제약을 받아왔지만, Battle은 데뷰하면서도 그의 검은 피부색이 크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차이는 무대 뒤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모두 무대 위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세계수준의 성악가로 인정을 받은 공통점이 있지만, 무대 뒤의 매너에서는 많은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는 Battle과 달리 Anderson은 인종차별의 장벽을 헤쳐나가며 사회활동도 활발히 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Battle과 Anderson의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이 5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도 있지만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차이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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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an Anderson의 워싱턴 Constitution Hall의 고별공연실황음반 (1964,10.24) >  

 

Anderson은 어려서 그가 태어난 필라델피아의 한 흑인교회에서 지원을 받아 음악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비싼 악기가 필요한 기악과는 달리 밑천이 들지 않는 성악은 당시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던 흑인들이 그나마 가장 쉽게 장벽을 넘을 수 있는 분야였던 것 같다. Anderson이 전문음악교육을 위해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부의 모든 학교에서 거절당하자 필라델피아의 흑인교회를 중심으로 Anderson을 후원하여 독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음악경연대회에 참여의 길은 열렸는지 Marian Anderson은 28살때 뉴욕필하모니가 후원하는 한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게 되어 1925년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게 되었다. 흑백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흑인이 일등을 하였다면 그의 실력이 월등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그 공연의 결과는 당연한 것으로 청중과 비평가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이를 계기로 Anderson은 뉴욕에 남아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1928년에는 카네기홀의 무대에도 서게 되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가 여전히 그의 활동에 발목을 잡는 일이 많았다.

 

Marian Anderson은 1930년 흑백차별이 덜한 유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유럽에서 Toscanini, Bruno Walter 등의 대가들과 만날 수 있었고 Toscanini로부터는 '100년에 한 명 나올 수 있는 목소리' 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Salzburg에서는 그의 Ave Maria를 듣고 짤츠버그 대주교는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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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부활절 일요일,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개최된 공연, 75000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  

  - 이 광장의 반대편(사진에서 멀리 보이는쪽)에서는 금년초 Obama대통령이 취임식을 하였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혼 후에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반열에 올랐지만 미국무대에서 흑인으로서의 한계는 여전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호텔투숙을 거절하는 호텔도 있었다고 한다. 1939년 Marian Anderson은 뉴욕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75000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Marian Anderson은 야외가 아닌 Constitution Hall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한 여성단체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의 반대로 무산되고 심지어는 학교의 대강당을 사용하려는 것도 워싱턴 D.C. 교육청의 반대로 거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대통령이던 Roosevelt의 부인을 포함한 다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링컨기념관 앞에서 공연을 하였던 것인데, 수백명이 모이는 실내공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무려 75,000명의 모여들었으니 이 공연은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라 Marian Anderson이 벌인 흑백차별에 대한 사회적은 시민운동의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후 같은 장소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 오바마가 대통령취임식을 하게 되었으니 링컨기념관에 세워진 링컨의 동상이 각각 노예해방을 선언한지 76년, 146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링컨기념관 앞 광장의 양 끝에서 노래를 부른 Marian Anderson과 대통령취임을 선서한 Obama대통령을 내려다 보고 자신의 최대업적인 노예해방의 결실을 함께 기뻐하였을 것 같다.

  

Battle은 데뷰초기 얼마 안 되어 28살에 오페라무대에 데뷰를 하여 미국과 유럽의 많은 오페라단과 공연을 하였지만 Anderson는 독창회나 오케스트라와 협연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기는 했어도 막상 오페라무대에 서 보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오페라무대가 흑인성악가로서 마지막 장벽이었다는 얘기와 함께 Anderson은 연기에 부담을 느껴 오페라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Anderson이 단 한 번 오페라무대에 선 것은 1955년, 그의 나이 58세에 뉴욕메트로폴리탄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에 오른 것인데 그 공연이 흑인으로서는 첫 번째 MET공연이라고 한다.

  

사실 Anderson한테 오페라에 설 기회는 MET보다 11년 앞선 1944년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뉴욕에 New York City Opera가 창단되었는데 그때 오페라측으로부터 출연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Anderson의 매니저 Sol Hurok은 Anderson과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는 그 신분에 맞는 무대에 서야한다며 신생오페라단의 출연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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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1955년, 뉴욕메트로폴리탄에서 베르디 가면무도회공연을 앞두고 >

  좌측   : MET 총감독인 Rudolf Bing과 함께 MET 무대에서   

  가운데 : 베르디오페라 가면무도회 리허설장면 

  우측   : 베르디오페라 가면무도회의 배역 점쟁이 Urlica 역으로 분장한 마리안앤더슨

* 사진출처 : 메트로폴리탄오페라 홈페이지 

             (http://www.metoperafamily.org/_post/education/marian-anderson/html)

 

1955년 Anderson의 MET 출연은 한 파티석상에서 MET의 총감독인 Rudolf Bing으로부터 MET에 출연할 것을 제의받아 성사되었다고 한다. Rudolf Bing은 오스트리아출생의 영국인으로 MET에 남아 있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기를 원했고 그 역할을 Anderson한테 제의한 것이다. 그가 출연한 가면무도회에서 맡은 역은 그의 명성에 비하면 단역에 지나지 않는 점쟁이 Ulrica역 이었다. 당시 출연료는 $1000로 당시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Rudolf Bing은 Anderson이 오페라무대에 선 경험이 없는 것을 고려하여 리허설때 부터 아주 세세한 것까지 배려하였다고 한다. 

 

Marian Anderson이 MET에 출연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순식간에 표는 매진이 되었고 청중들 중에는 Roosevelt대통령의 미망인 Elenor Roosevelt와 Truman 대통령의 딸인 Margaret Truman도 있었고 필라델피아의 Anderson 전가족이 초청되어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았다. 오페라의 2막이 시작되어 커튼이 오르고 Ulrica역을 맡은 Anderson이 모습을 들어 내자 열광을 하면서 박수소리가 무려 5분 동안 지속되어 공연이 잠시 끊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공연을 마치고 Anderson은 당시의 심정을 얘기하는데 평소에 무대에 설 때는 항상 확신과 자신감을 가졌는데 그날은 무척 긴장이 되고 떨렸다고 하는데 뉴욕공연을 마치고 필라델피아에서의 공연에는 만족하였다고 한다.

 

Anderson의 MET의 출연이후 Anderson은 더 이상 오페라무대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가면무도회 공연은 MET 뿐만 아니라 그의 오페라 데뷰무대이자 고별무대가 된 셈이며, MET의 공식사이트에는 17년간 주역으로 활약한 Kathleen Battle의 흔적은 없지만 단 한 차례의 공연을 한 Anderson의 'Anderson MET공연 50주년'특집페이지를 만들어 1955년의 MET공연관계기사 뿐만 아니라 Anderson의 일대기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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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사이트에 실린 Marian Anderson 공연기념 50주년 특집페이지 

  (Anderson은 1955년에 단 한번 Verdi의 가면무도회에 출연(6회 공연)하여 데뷰공연이자 고별공연이었다.)

 

Marian Anderson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흑백차별의 장벽을 스스로 헤쳐나가고 인권을 신장하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미국의 정치가들이 가장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 실제 미국의 많은 정치가들이 그의 이미지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Eisenhower 대통령과 J.F.Kennedy대통령의 취임식때 축가를 부르기도 하고 역대 대통령들은 빠짐없이 Anderson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였다고 한다. 물론 Anderson을 초청한 역대 대통령들이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았으니 그가 정치적인 색채를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미국과 유엔을 대표하는 친선대사역할도 마다 하지 않아 1965년 음악가로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사회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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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 루즈벨트대통령부인 (1939), 존슨대통령 (1963), 부쉬대통령부처(1992)와 함께 >

  * 사진출처 http://www.metoperafamily.org/_post/education/marian-anderson/html

 

Marian Anderson은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미국과 유럽의 화려한 무대에만 등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동안 참전한 미군병사를 위한 위문공연도 펼쳐서 1953년 전쟁중에 제대로 된 공연장 하나 없던 부산을 방문하여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연을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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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방한모습 : 좌측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모습과 우측은 이화여대에서 명예박사학위수여식장면 >

 - 자료출처 - 대한뉴스 133호 동영상캡쳐    

 

1957년에는 국무성의 주선으로 아시아국가들의 순회공연에 나섰는데 그해 8월 한국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당시 대한뉴스필름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접견하는 장면과 이대에서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MET 홈페이지에 소개된 특집에는 Anderson의 1955년 이스라엘공연을 가졌을 때의 일화도 소개되고 있다. Anderson은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브람스의 Alto Rhapsody를 공연하는데 독일어는 이스라엘에서 기피하는 언어라 합창부분은 독일어 원가사가 히브리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Anderson의 독창가사는 그가 원래 가사인 독일어로 부른다고 해도 별 수가 없는 일인데, Anderson은 자신이 부를 가사도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불러 이스라엘청중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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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고별공연 (카네기홀,1965년)에서 피아노 반주자 Franz Rupp (좌), 매니저 Sol Hurok (우) >

 - 전설적인 매니저 Sol Hurok은 1934년 앤더슨의 파리공연을 보고 매니저를 자청하여 31년간 함께했으며

   피아니스트 Franz Rupp는 1941년 만나 음악생활을 함께 하였다. 

 - 사진출처 :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홈페이지

              http://www.metoperafamily.org/_post/education/marian-anderson/html

 

Marian Anderson은 1964년부터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고별연주여행의 첫 무대는 25년전 그의 공연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던 워싱턴 DC의 Constitution Hall에서 1964년 10월에 시작하였고, 1965년 4월19일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마지막 고별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은퇴한 이후에도 그가 많은 상을 수상한 것은 단순한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그가 음악을 통하여 흑백차별과 더 나아가 인권을 위해 많은 일을 이루어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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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 Anderson의 음반은 지구레코드에서 RCA 라이센스로 흑인영가집(1973년), 고별공연(1979년) 두 장이 소개되었으며 그 중간에는 한참 대학에서 공부에 전념할 때라 음반을 열심히 챙기지 못하여 그의 음반이 더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중 고별공연음반은 Farewell Recital Tour의 첫 공연인 워싱턴 DC. Constitution Hall에서 연주실황을 녹음한 것이다.

 

오늘의 모닥불콘서트는 마리안앤더슨의 흑인영가집에 실린 Deep River와, Farewell Concert Tour의 실황음반에 실린 곡 중에서 Schubert의 Suleika와 흑인영가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를 소개한다.  

 

 

 

자료출처 :

http://www.metoperafamily.org/education  (New York Metropolitan Opera, Education page)

http://www.lkwdpl.org/wihohio/index.html (Women in History by Ohio Lake Wood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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