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Tanit, Tinith, Tinnit, Tint,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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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Tanit, Tinith, Tinnit, Tint, 튀니지)

배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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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페테(도벳) 신전, 페니키아이의 신 바알함몬과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를 모시던 성역이다.

 

타니트 [Tanit, Tinith, Tinnit, Tint)는 아스타르테(아스다롯)와 맞먹는 카르타고의 주요신이다. 하늘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신(母神)이기도 해서 흔히 다산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카르타고의 주요신인 바알 함몬(또는 아몬)의 배우자였으며 '바알의 얼굴'이라 불리기도 했다. BC 5세기 이후에야 등장했지만등장하자마자 전부터 숭배되어왔던 바알 함몬의 제사를 능가했으며, 적어도 카르타고 지역에서는 기념비에 바알 함몬보다 더 중요하게 기록되곤 했다. 타니트와 바알 함몬을 섬기는 제사에서는 아이들 특히 첫째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 여기에 관한 증거들은 타니트의 관할구역이었던 서부 카르타고에 남아 있어 이 지역에서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소였던 토페트가 발견되었다. 타니트는 몰타와 사르데냐, 그리고 스페인에서도 숭배되었다. (daum 백과사전)

 

토페테(도벳) 신전           (출처http://hyderay.blog.me/150024365459)

 

카르타고에서 최고의 신은 하늘의 신인 바알 함몬과 그의 동료인 타니트로, 학자들은 타니트를 바알의 배우자 또는 '그림자'로 추정한다. 바알은 페니키아 모국에서 익숙한 신인 데 비해 타니트는 그렇지 않았다. 바알은 기원전 5세기경 카르타고에 도입된 이후 아스타르테를 대신하는 주요 신으로 섬겨졌다. 바알은 다소 고립적이고 무서운 신으로 외딴 언덕이나 산꼭대기, 풍요로운 들판의 신이었고 하늘의 주인, 바꿔 말하자면 전 우주의 신이었다. 타니트도 하늘의 여신이었으며 농경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비를 내렸다. 그녀는 카르타고의 주요 수호신이기도 하다. 바알과 타니트를 위해 카르타고인들은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제사는 도벳이라 불리는 신성한 야외에서 치러졌다. 그런데 카르타고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도벳비문을 보면 숭배와 제사의 초점은 주로 타니트였다. 그런데 도벳이란 용어는 성서에서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페니키아의 장소를 자리키는 말이다. 카르타고의 도벳은 1921년 카르타고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는 인공 항구로부터 서쪽으로 5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면적은 약 6,000제곱미터이다. 이곳에서 화장된 유해를 담은 단지들이 수천 개 출토되었는데 조약돌로 만든 칸막이에 하나씩 묻혀 있었다. 카르타고의 도벳 제사는 기원전 8세기 중반에서 기원전 146년 도시가 파괴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는데, 매년 약 100개의 납골 단지가 매장되었고 모두 6만개 가량으로 추정된다. 1970년 카르타코 도벳에 대한 상세한 연구 자료가 발표되었다. 화장된 뼈에는 사람의 것과 짐승의 것이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인신제물이 짐승제물로 대체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초기에 짐승제물은 전체의 약 3분의 1이었는데 기원전 4세기에는 이 비율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즉 이 시기 제물의 90퍼센트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기원전 8~6세기에는 사산아나 신생아를 주로 제물로 바쳤는데 기원전 4세기부터는 한 살에서 세 살 정도의 아이를 주로 바쳤다. 더군다나 한 납골단지에 아이 두 세 명이 있는 경우가 3분의 1이나 되었다.

 

토페테(도벳) 신전

 


타니트 여신을 위해 희생된 자들의 비석   

 

수만 명이 넘는 어린아이들의 목숨이 카르타고의 신을 위해 사라졌다. 가히 지옥의 신전(神殿)이라 할 수 있겠다. 카르타고에서 인신제물을 왜 선호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생아 대신 유아를 제물로 바친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카르타코의 지배층에서는 첫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도루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기에 그들은 신에게 고위층 시민들의 아들을을 제물로 바쳤다. 나중에는 고위층 시민들이 비밀스럽게 제물용으로 아이들을 사서 키운 다음, 제물로 바쳤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카르타고인들은 미신과 같은 불안감에 잠겼다. 그들은 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그들은 고위층 시민들의 아이들 중 200명을 골라 공개적으로 제물을 바쳤다. 그러자 구설에 올라 있던 다른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희생했는데, 그 수가 300명보다 많았다. 도시에는 크로노스의 청동 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입상이 뻗친 손바닥 위에 아이들이 올라가면 불이 타오르는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원치 않은 아이를 산에 버려 죽게 했다는 스파르타 관습과 비슷하게 유아 제물을 일종의 산아제한으로 보기도 하지만 조금 자란 아이까지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볼 때 이 설명은 다소 미흡하다. 임신 중에 타니트에게 봉헌되기로 정해진 아이가 사산할 경우 집안의 다른 아이로 대신했다는 주장도 있다. 법의학자인 샬롯 로버츠는 모티아 도벳에서 발견된 아기 유골 20구를 조사한 결과 질병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뒤에도 바알과 타니트의 숭배는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인신제사의 관습만은 로마가 모든 곳에서 금지했으므로 기원전 146년을 기점으로 카르타고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도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원후 3세기에도 인신제사가 이루어졌음을 테르툴리아누스는 전하고 있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의 묘지(작은 묘비들)       (출처http://hyderay.blog.me/150024365459)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의 모자이크

 

아포트로파이온에 있는 바닥 모자이크 . 흰 대리석으로 표현한 것은 카르타고의 수호신 타니트 이다. 페니키아인의 종교적 유물이나 상업상의 산물에서 이러한 도형을 볼수있다.

 

카르타고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人)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灣)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이다.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全)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알함몬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百人會:실제인원은 104명), 시민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BC 264-BC 241)는 시칠리아에 있는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시칠리아를 주전장(主戰場)으로 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제2차(BC 218-BC 201)는 에스파냐에서 멀리 이탈리아로 진격,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마전투에서 로마의 대(大)스키피오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제3차(BC 149-BC 146)에서는 로마의 장군 소(小)스키피오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카르타고도 멸망하였다. 그 후 카르타고의 영역은 전부 로마의 속주(屬州) 아프리카로 전락하였으나, 카르타고의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수사학(修辭學)·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主敎都市)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人)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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