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 이이(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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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

道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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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

 

                                                        - 기호 사림의 본향

 

 

# 율곡(栗谷) : 기호사림(畿湖士林)의 본향(本鄕), 경기도 파주

 

율곡 이이라면 신사임당과 강릉 오죽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이의 삶과 철학의 주요 무대는 경기도 파주의 율곡(栗谷)과 황해도 해주의 석담(石潭)이었다. 스스로 자호로 삼았을 만큼, 이 두 곳은 이이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장소다.

 

조선의 16세기는 사림(士林)의 시대였다. 사림의 역사는 멀리 포은(圃隱)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야은(冶隱) 길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길재는 경북 구미에 은둔했다. 이곳에서 길재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숙자였다. 김숙자는 다시 자신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김굉필은 다시 조광조에게 성리학의 학통을 넘겼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잇는 사림 세력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는,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 시대였다. 사림의 중앙 정계로의 진출에 물꼬를 튼 사람은 김종직과 김굉필이었다.

성리학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이념으로 삼은 사림파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 격렬한 갈등과 대립을 겪는데, 연산군 시대에 들어와 무오사화(戊午士禍, 戊午史禍)’갑자사화(甲子士禍)’를 거치며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사림 세력은 다시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했지만, 초기 중종의 후원 아래 추진한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훈구파의 거센 반격에 꺾이면서, 사림 세력은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재앙을 만나고 만다.

이후 사림 세력은 유배지와 향촌(鄕村) 등지에서 계속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비록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쫓겨났지만, 오히려 지방과 향촌에서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사림 세력은 인종과 명종 연간에 다시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외척 세력 간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을사사화(乙巳士禍)’정미사화(丁未士禍)’를 치르면서 또 다시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외척 정치의 수장격인 문정왕후(文定王后, 명종의 어머니)가 죽은 후, 사림 세력은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을 축출하고 마침내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사림은 조선의 정치권력과 학문 및 사상을 본격적으로 지배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6세기 중반인 1565년경이었다.

 

16세기에는 조선 유학사상 가장 걸출한 대학자가 여럿 배출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사림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501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그들보다 35년 늦게 태어난 율곡 이이 등이 있다.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과 예안(禮安), 남명 조식은 경남 진주와 합천, 율곡 이이는 경기도 파주와 황해도 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림은 그 지역적 기반과 학통 및 학맥에 따라 크게 영남사림(嶺南士林)과 기호사림(畿湖士林)으로 구분된다. 또한 퇴계 이황이 낙동강의 왼쪽인 안동과 예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강좌학파(江左學派)’, 남명 조식은 낙동강의 오른쪽인 진주와 합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강우학파(江右學派)’, 율곡 이이는 경기도 파주와 황해도 해주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서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조 때에 들어와 명종 시대 외척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영남 사림은 동인(東人)이 되고, 기호사림은 서인(西人)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 후 영남사림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뉘었는데, 남인은 이황, 북인은 조식의 문하생들이었다. 남인은 이황을 자신들의 종조(宗祖, 어떤 학파를 처음 세운 사람)로 삼았고, 북인은 조식을 자신들의 종조로 섬겼다.

서인의 주축을 이룬 기호사림은 대부분 이이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이이는 자연스럽게 서인의 종조가 되었다.

 

이이 사후 30여 년이 지난 1615, 그의 수제자였던 사계 김장생이 생전에 이이가 성리학을 강습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경기도 파주의 자운산(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소재)에 이이를 배향하는 자운서원을 세운 뒤부터, 율곡(栗谷)을 중심으로 한 파주 일대는 기호사림의 본향(本鄕)이자, 서인의 성지(聖地)로 숭배 대상이 되었다.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인이 종조로 삼은 이황, 조식, 이이는 사림의 당파 분열과 당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경기도 파주 파평면의 율곡(栗谷, 밤골 마을)’에는 이이의 직계 선조들이 살던 조상의 땅이었다. 이이는 8살 때 율곡으로 내려가 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이이는 율곡에 있는 명승지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어 일찍이 천재성을 드러냈다. 임진강 변에 있는 화석정 내부에는 지금도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이이는 19세가 되는 1554(명종 9) 우계(牛溪) 성혼을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는데, 성혼의 가계(家系)는 조광조를 계승한 사림의 적통(嫡統)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이와 성혼의 도의지교는 기호사림파에게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즉 정암(靜庵) 조광조의 학통이 이이와 성혼에게 계승되었다는 서인 세력의 적통론의 명분과 정당성을 십분 살려준 게 두 사람의 도의지교였다는 얘기다.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제자였다. 그는 조광조가 목숨을 잃은 기묘사화 이후 두문불출하다가, 경기도 파주에 은둔해 살았다. 성혼이 10세 무렵 파주의 우계(牛溪)에 집터를 정해 거주한 후,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직접 성혼을 가르쳤다.

성혼은 15세 때 이미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행실 또한 의로워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7세에 감시(監試)의 생원과와 진사과에 모두 합격했지만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않았고, 이후로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중단하고, 오로지 성리학을 배우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이와 성혼은 평생 동안 ‘도의(道義)’ 즉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큰 뜻을 공유하는 우정을 쌓았을 뿐 아니라,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이나 임진왜란 때 칠백의총(七百義塚)으로 유명한 중봉(重峯) 조헌과 같은 제자들 또한 함께 가르치고 길러냈다. 이 때문에 훗날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종사된 조선의 명현(名賢) 14명에 이이와 나란히 성혼의 이름이 올랐다. 이이와 더불어 성혼 또한 기호사림의 종조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이는 벼슬이나 출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출사한 이후 임금이나 조정에서 자신의 직언(直言)과 개혁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마다 미련 없이 사직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했고, 파주의 율곡을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연구 공간이자,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갈고닦는 수양의 장소로 삼았다.

 

파주의 율곡은 이이에게 살과 피를 물려준 조상의 영혼이 서린 땅이었고, 자신의 철학과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애환(哀歡)의 땅이기도 했다. 또한 열여섯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던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유일한 스승인 신사임당이 묻힌 안식(安息)의 땅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남아 자신의 뜻을 기릴 기억(記憶)의 땅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이는 자신의 첫 번째 호이자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줄 호로 율곡(栗谷)’을 선택하였다.

 

# 석담(石潭) : 은병정사(隱屛精舍)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이이는 35(1570, 선조 3) 때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자신의 거듭된 주장에도 선조가 움직이지 않자, 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의 야두촌(野頭村)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거처로 삼은 까닭은 그의 처가인 노씨(盧氏)의 전장(田莊)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22살 때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했다. 노경린은 성격이 매우 준엄해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지만, 오직 이이에 대해서만은 아주 애중(愛重)하였고, 온갖 일에 간한 자문을 구하였다고 한다.

“장인은 적자(嫡子)가 없고 단지 첩의 자식 두 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재산을 분배하는데 적서(嫡庶)를 따져서 나누는 방법은 온당치 않고 똑같이 나눠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이는 사람들과 고산(高山)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에 놀러 갔다가, 그곳의 산세와 기운에 흠뻑 빠져 마침내 복거(卜居)할 계획을 정하고, 석담(石潭)自號로 삼았다.

41(1576, 선조 9) , 이이는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해주 석담으로 은거한다. 먼저 청계당(聽溪堂)을 세운 이후 다음 해에 일가 친족들을 불러 모아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짓고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때 해주 사람들과 더불어 향약(鄕約) 및 사창(社倉)을 의논해 세웠다.

 

청계당 동쪽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어 성리학의 본거지로 삼으려 하였다.

은병정사고산구곡가는 모두 성리학을 완성한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거처한 무이산(武夷山)과 관련되어 있다. 주자가 거처한 무이산의 산봉우리인 대은병(大隱屛)에서 은병을 취해 은병정사를 세웠고, 또한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 빗대어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이는 은병정사 학규(學規)’를 만들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양반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주었다. , 과거 시험을 공부할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 은병정사에 들어오는 규칙은 사족(士族, 양반 사대부)이나 서류(庶類, 서민 혹은 서얼)를 따지지 않고, 다만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허락한다.

* 독서를 할 때는 반드시 단정하게 손을 마주잡고 반듯하게 앉아서 오로지 배움의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품고, 궁리하고 탐구하는데 힘을 쏟을 뿐, 서로 돌아보며 잡담해서는 안 된다.

*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은병정사 안에서 읽을 수 없으나, 역사서만은 읽어도 좋다. 만약 과거 시험을 치르려고 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 익혀라.

                                                                                   - 율곡전서, 은병정사의 학규

 

이이가 주자의 武夷九曲歌에 빗대어 지은 석담의 高山九曲歌는 조선 시조의 미학을 찬연하게 빛낸 걸작 중의 하나다.

 

간이(簡易) 최립은 당시 이이가 석담에 은거해 은병정사를 세워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아울러 고산구곡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묘사한 구산구곡담기(高山九曲潭記)를 남겼다.

 

율곡전서(栗谷全書)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을 올린 이이의 제자는 모두 85명인데, 이들은 대개 기호사림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 우재(愚齋) : ‘어리석다[愚]’를 호로 삼은 까닭은

 

이이는 율곡과 석담 외에도 우재(愚齋)’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이는 한국사 최고의 유명 인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사 최고의 천재이기도 하다. 이이는 13세 어린 나이에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다시 강릉 외가로 내려온 이이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뜻과 의지를 담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자의 길을 밟게 된다.

 

한양의 집으로 돌아온 21세 때 책문(策文) 시험을 보았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23세 겨울에 치른 별시해(別試解)에서도 장원을 차지했다. 이때 이이가 제출한 답안지인 천도책(天道策)’을 본 심사관들은 우리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생각해야 비로소 이렇게 쓸 수 있는데, 이모(李某)는 짧은 시간에 쓴 대책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천재이다.”라고 감탄했다.

29세 때는 7월에 생원(生員진사(進士)에 합격하고,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해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제수받고, 다시 감시양장(監試兩場)과 문과발해(文科發解), 생원 및 문과 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뽑혀서, 장원만 아홉 번을 차지했다. 이에 사람들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이라고 칭찬하며 탄복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멀게는 유학의 종조(宗祖)인 공자와 맹자를, 가깝게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를 성인(聖人)의 모델로 삼았다.

학문이란 닦으면 닦을수록 그 깊고 넓음을 알게 되므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자기 수양이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어리석음[]’만 인식하게 된다. 백성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한 현실의 장벽 앞에 부딪히면 자신의 본래 뜻과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기 일쑤여서,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만 깨우칠 뿐이다.

 

이이는 자신이 세운 뜻과 목표를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을 언행난(言行難)’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토로하기까지 했다. 이 글에서 이이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자신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말과 행동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다. 이 대화에서 이이는 우재(愚齋)’라는 호를 사용해 자신의 뜻과 심정을 드러냈다.

 

이이는 성인이 되겠다는 삶의 길을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어리석다는 뜻의 ()’ 자로 호를 삼아 우재(愚齋)’라고 했다.

이이의 삶과 철학이란 평생 동안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일이었다.

역설적으로 어리석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평생의 다짐이자 각오가 서려있기도 한 장중한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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