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4일 [나해]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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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4일 [나해]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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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아침기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2저녁기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2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293,1-3: PL 38,1327-13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교회는 요한의 탄생일을 축일로 지냅니다. 성인들 중에 이렇게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없습니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두 분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요한 세자입니다. 이 축일을 강론 없이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이 축일의 신비가 요구하는 만큼 설명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요한은 나이 많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그리스도는 나이 어린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요한이 태어나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가 나오시리라 믿었으므로 신앙 안에 주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 능력의 부족과 시간 관계로 우리 모두 이 깊은 신비를 제대로 캐내지 못한다면, 내가 없어도 여러분 안에 말씀하시는 분께서 더 잘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경건히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분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주님 친히 이것을 증언하십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끝난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구약의 대표자로서 나이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약의 예언자로서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예언자로 선언되었습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미약한 이해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그가 마침내 태어나 자기 이름을 받았을 때, 그 아버지의 혀는 다시 풀렸습니다. 이 사건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즈가리야는 주님의 선구자인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할 능력을 잃어 침묵을 지켰고 요한이 태어나고서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습니다. 즈가리야의 침묵은 무슨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감추어져 있던 예언이 그 침묵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예언의 대상이 도착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그 감추인 예언의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요한이 태어날 때 즈가리야의 입이 열리는 것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갈라진 것도 이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요한이 자기 사명을 전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즈가리야가 다시 입을 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즈가리야의 입은 풀리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전하고 있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하나의 "소리"이고 주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말씀"이십니다. 요한은  잠시 동안 외치는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신약성서의 인물: 실패한 혁명가인 세례자 요한
 
 
수많은 신약성서의 인물들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기에 이 글에서 첫 인물로 소개하고자 한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상식적으로 쉽게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상식적 이해 이면에 깔려 있는 그의 삶을 보면 참으로 처절하리만큼 이 시대의 징표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사제 즈가리아와 엘리사벳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요한은 당시 혼탁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불안 속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며, 그 소명을 민중들에게 선포하였다. 그 소명이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마르1,4)라는 광야에서의 외치는 소리였다. 광야에서의 그의 외침은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면서 민중들에게 새롭게 변화하는 삶을 갖도록 강한 요청인 것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계급이었던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고 했을 때 마음이 굳게 닫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고 요한은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라고 그들의 면전에 호되게 야간을 친다. 그들은 요한을 두고 위험한 인물로 앞으로 자신들의 신분에 위협을 줄 인물이며, 민중들을 선동할 체제 전복자일 것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요한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회개의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다시금 되돌아가도록 하는 실천적 긴박성을 알려준다.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의 부정한 행위에 대항한 것도 회개의 외침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헤로데는 교활하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영주였으며 민중을 수탈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군림하였다. 헤로데는 자신의 첫 부인을 버리고 조카이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 유다인의 율법에 의하면 이중적 간음으로 무거운 죄를 지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율법을 어겼다고 민중들에게 알렸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여 그의 독재정치에 대한 타격을 입혔다. 허영심이 많고 자신의 권력을 흔들어 놓은 요한에 대해 그는 용서를 할 수 없어 죽이고 싶었지만 민중들 그를 존경하였기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헤로데는 단지 그를 감옥에 가두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를 막으려 하였으며 살해의 음모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치가 벌어졌는 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계획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선물로 요구하였다.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 잔치 도중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다. 요한의 죽음은 마치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힘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이제 처참하게 한 여인의 계략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실패한 혁명가로 어이없이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광주 망월동에 갔다 온 적이 있다. 이제 역사의 한 마당이 되어버린 그 곳, 처음엔 왠지 낯설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갔던 것도 아닌데 왠지 새롭게 단장한 민주화 성지는 이전에 받았던 느낌은 없었고, 단지 국립묘지로서 아름답게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새롭게 단장한 묘지 뒤편에 이장하지 않은 구 묘지를 갔을 때 지난 20년의 시간들을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가슴을 뭉클거리게 했던 어느 희생자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민주라는 단어는 과거의 한 뒤전의 소리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짊어지고 "정의를 강물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아모 5,24) 해야할 현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단지 믿음의 외침이 아니라 헤로데의 부정의에 항거하여 죽음을 통해 주님의 오심을 알렸듯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 참 세상을 위해 희생한 분들의 죽음 역시 이 땅에 참된 정의의 실현을 갖도록 하였다. 비록 요한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 실패한 혁명가였고, 망월동에서 잠든 민주화 영혼들 역시 총뿌리 앞에서 힘없고 처참하게 죽었지만 이 땅에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생명의 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대상은 아마도 주일학교 교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 꼭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민주화 성지인 광주 망월동에 꼭 다녀 오시라는 것과 새롭게 단장한 곳에서 분향을 하시고 반드시 구묘역에 가서 비문들을 한 번 읽었으면 한다. 학생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 줌으로 인해 더 깊이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성서신학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성서의 인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처럼 당시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인물도 드물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한 시기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가 그야말로 희망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암흑기였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었으며 마지막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철저하게 고통으로 점철된 비극의 인물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사제인 즈가리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늦둥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인척이며 약 반년정도 먼저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요한이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 그의 말과 행동은 모든 이스라엘들의 마음속에서 폭발적인 힘과 에너지로 나타났다. 그의 출현에 대한 충격은 삽시간에 전 이스라엘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요한이라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정도로 시원하다니까."
 
"정말이야, 그분의 거칠 것 없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기분마저 들더라구요."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들으러 구름처럼 요르단 강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선포는 너무나 힘있고 분명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늘 외치던 메시지였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 그리고 사두가이파나 열혈 당원들이 외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들 모두의 주장과 가르침은 조금씩 달라도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율법에 대해서는 열성적이고 하느님의 주권과 왕권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요한은 예언자라는 점에서 당시의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이들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아에 대한 고대를 선포한 반면, 요한은 철저하게 재난과 멸망을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처참하게 멸망할 것이다."
 
그의 이런 선포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요한은 죄인으로 구분되는 그룹, 즉 창녀, 세리, 군인들뿐 아니라 율법학자, 바리사이에게도 회개를 호소했다. 자신들은 의인이라 자처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요한이라는 놈의 정체는 뭐야?"
 
그의 말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고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설득력 있었고 위엄이 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소문마저 생겨났다.
 
요한은 백성들의 지도자인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말했다.
 
"너희는 겉과 속이 다르고 백성들에게 짐만 지우는 놈들이다.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이다."
 
"뭐라고, 당신 말 다했어?"
 
심지어는 유다의 왕인 헤로데까지도 호되게 질책했다. 요한은 헤로데가 자신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처로 맞아들인 일과 그 밖의 잘못된 일을 비판했다. 이 소식이 헤로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노발대발하여 화를 가눌 수가 없었다.
 
"여봐라, 요한이란 발칙한 놈을 옥에 가두어라!"
 
결국 요한은 왕에게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한이 주장한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이 인격적으로 회개하는 것이었다. 백성의 지도자나 왕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모여들었다.
 
"저희들이 회개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들이 회개하려면 먼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회개의 표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례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일반 백성들에게 많은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요한은 당연히 정치 세력의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까지 서슴없는 말을 하여 참수를 당하고 만다.
 
■ 지도자는 비판의 소리 경청해야
 
세례자 요한은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정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옳은 소리를 외쳤던 에언자였다.
 
그의 용기는 당시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에도 깊은 인상을 준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옳은 소리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높은 자리나 명예를 누릴 때는 더욱 그렇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침묵을 지키는 소극적인 행동은 악을 동조하고 방조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람들은 비판의 소리를 듣기 싫어 한다. 오히려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박해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지도자는 귀에 역겨운 비판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과 재앙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은 비판의 소리를 겸허하게 귀 기울이고 달콤한 소리만을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평화신문, 제606호(2000년 12월 10일자),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주님은 커지고 자신은 작아지는 겸손(6월 24일)
 
 
어린이 놀이터에 가보면 여러 가지 놀이기구들이 있다. 그네도 있고 미끄럼틀, 철봉도 있다. 이런 것들은 혼자서 놀 수 있는 기구이다. 하지만 꼭 두 사람이 있어야 놀 수 있는 기구가 있다. 바로 시소이다. 시소는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끝 부분에 서로 마주앉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으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간다.
 
우리 전통 놀이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널뛰기가 그것이다. 시소와 조금 다른 점은 앉아서 하는 놀이가 아니라 서서 한다는 것이다. 또 기구에 붙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뛰면서 기구로부터 떨어지는 박진감이 있다는 것이다.
 
시소도 그렇고 널뛰기도 그렇듯이 서로 호흡이 맞아야 놀이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 한꺼번에 힘을 주거나 속도를 잘못 맞추면 제대로 놀 수가 없다. 한쪽이 힘을 주는 것에 맞추어 상대편에서 힘을 늦추어야 하고, 상대가 힘을 늦추는 것에 맞추어 이쪽에서 힘을 써야 한다. 그렇게 호흡을 잘 맞추면, 놀이는 참 재미있을 것이다.
 
세상 속의 이치도 시소나 널뛰기처럼 서로 밀고 당기고, 또 오르고 내리는 원리를 갖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특히 그렇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어둠이 물러난다. 또 해가 지면 어둠이 다가오고 밤은 더욱 깊어진다. 한 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인 듯 싶었는데, 어느새 초여름 문턱에 와있다. 따뜻한 공기가 다가오면 추운 겨울은 물러간다. 낮이 길어지자 밤이 어느새 짧아졌다. 또 낮이 짧아지면 밤이 길어질 것이다.
 
그렇다. 지난 겨울 우리는 ’동지’를 지냈다. 동지는 밤이 가장 짧은 때이다. 그 다음부터 해가 길어지면서 주님이신 ’예수 탄생 대축일’을 지냈다. 이제 여름을 눈앞에 두고 ’하지’를 맞게 된다. 하지는 한 해 가운데 가장 해가 길고 밤이 짧은 날이다. 이날이 지나면, 낮은 점차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게 된다.
 
이렇게 동지 다음에 주님의 탄생을 경축하였다면, 하지 다음에는 무엇을 경축하면 좋을까? 교회는 일찍부터 주님의 탄생처럼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념하고 경축하였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비추어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지 다음에 지내게 된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세례자 요한 자신이 이야기하였다.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그것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다. 루가 복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 예수님과 요한의 상반된 탄생 경위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예수님의 전교 활동 이야기 등과 같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일찍이 초세기 때부터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축일을 지냈다. 복음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세상의 지배자에게 박해를 받아 순교한 분이다. 초대교회는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공경하였다. 세례자 요한도 그들의 표양이 되는 분이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를 닦은 사도들도 공경했지만 요한을 더욱 공경하였다. 중세에는 수많은 신심단체들과 지역교회들이 요한의 전구를 바라며 그를 수호 성인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대축일’로 정해 크게 경축하고 기뻐한다. 요한은 주님을 우리 안에 크게 모시기 위해 자신을 작게 만드는 겸손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겸손한 모습은 우리 믿는 이들이, 특히 현대 사회에서 따라야 할 커다란 모범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흔히 정보화 시대라고 말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이를 알리려 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더욱더 자신을 알리고 자신의 일을 선전하고 자신의 것들을 광고한다. 내면의 충실함보다 얼굴 알리기에 더 신경 쓰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자기 자랑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더 많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수고의 땀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낮추어 작게 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더 크게 보여주셨듯이, 나를 내세운 모습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내보여야 할 ’주님’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맞아 그의 낮추어진 모습을 묵상해 보자. 세상을 하느님 뜻에 따라 바꾸어 복음화하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내가 작아지고 주님을 내세우는 겸손에서 시작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그렇게 닦고 준비하는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성서의 세계 - 신약] 그리스도를 가리킨 손가락 : 요한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1947년 베두인족의 한 목자가 유다 광야의 한 동굴에서 다소의 두루마리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리고 이 두루마리가 몇몇 학자들의 손에 들어간 때부터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켰던 광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발굴은 상대적으로 미소한 숫자의 두루마리로 제한되었으나 모두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고 거의 완전한 것이었다.
 
뒤이은 발굴들은 막대한 양의 기록들을 빛 보게 했으나 그 대부분이 내용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작은 단편들로 남아 있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완전한 상태로든 단편적인 상태로든 발견된 많은 기록들에 의해 일종의 수도원 도서관이 발굴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동굴의 주변에서 어쨌든 수도원 건물의 폐허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탐사를 하게 되었다. 꿈란의 가까운 언덕에서 발굴이 이루어졌고, 결국 건물 전체의 폐허가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보아 수도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집회를 위한 큰 방, 공동 식당, 부엌, 도서관의 두루마리가 제작된 연구실, 몇 개의 작업장, 상당히 큰 다양한 목욕탕, 그리고 수도원 묘지가 확인되었다.
 
앞서 말한 건물의 일부는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비록 짧은 공백 기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기원후 1세기 혹은 2세기까지 전부가 거주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이전의 히브리 수도원 공동체로 간주했다.
 
발견된 두루마리들 가운데서 이른바 공동체의 ‘생활 규칙서’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수도자들의 이상과 생활 방식, 즉 히브리의 종교적 이상을 추론할 수 있다. 상황에 압박을 받은 이 이상주의자들은 요르단강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거의 정점에 있는, 유다의 황량한 광야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외적인 희생 없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져 있었다.
 
예리고만 빼고는 모든 생활이 불가능하고, 사해 연안에 있으면서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음울한 침묵이 지배하는 이 광야에서 고대의 수도원적인 이상은 우리 현대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구약 성서로부터만 그들의 열정을 끌어내야 했던 이 고행자들의 냉엄하고 희생적인 삶은 오늘의 인간에게 낯설게 나타난다. 그것이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이 수도원 공동체의 다양한 기록들이, 특히 외경과 고대의 성서 두루마리들이 다서 울리고 있다. 이 기록들 안에서 광야는 참으로 우리 시대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동일한 광야에서 그리고 거의 같은 지점에서 대림의 목소리, 요한 세례자가 부각된다. 그의 인격 안에서 광야는 고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요르단강 주변의 모든 지방과 온 예루살렘이 그의 소리를 들으려고 달려왔다. 그들은 열광적이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하였으며 세례자가 바로 누구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의 온 사명과 그의 전존재는 그의 독특한 응답으로 이렇게 설명되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요한 1,23).
 
유다 광야에서의 발굴은 세례자의 모습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 그가 꿈란과 접촉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는 사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출현한다. 또한 그의 삶은 꿈란의 이상과 유사성을 지닌다. 광야의 수도자들 역시 메뚜기를 먹었고 포도주를 삼갔다는 사실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도 베두인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비야(Abia)의 사제 계급의 아들이 성전에서의 봉사보다 광야를 선호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눈에 띈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기 위하여 아직 어렸을 때에 광야에 갔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미 그보다 먼저 광야를 이상으로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인도되었는가? 다음의 가정이 더 그럴듯한 것으로 보인다.
 
꿈란의 이상과 처음으로 접촉한 뒤에 요한이 거기서 떨어져 나갔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사실 예수가 출현할 때 요한은 이미 자신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세례는 수도원 공동체에서 사용되던 것과 다른 내용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는 그에게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전한다. 그러나 그가 단지 작은 제자 집단만 데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몇은 후에 예수의 추종자로 넘어간다.
 
따라서 유사성과 차이점은 초기에 요한이 수도원적 이상과 접촉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 최초의 접촉 후에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려오고,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된다.
 
 
요한의 세례
 
요한의 모습이 엄격하게 유다적인 공동체와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하듯이 - 요한은 그리스도를 환기시키고 가리킨 소리요 손가락이었다. - 그의 세례는 구약의 세례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세례에 길을 마련하는 과도기의 현상이다.
 
꿈란 공동체에서도, 수도원의 폐허 주변과 또한 그 내부에서 아직도 눈에 띄는 다양한 크기의 많은 목욕탕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듯이, 세례를 알고 있었다. 건조하고 무더운 나라에서 우기(雨期)에 고원의 “와디”(wadi)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여러 개의 우물에 모으려고 애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모든 저장소가 커다란 돌 계단으로 마련되어 있어 그곳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그 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물로 “내려가는 것”은, 우리 손에까지 들어온 “생활 규칙서”가 확실히 드러내고 있듯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것은 영혼의 정화를 의미했다. “생활 규칙서”는 죄로부터의 세정(洗淨), 정화수를 통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말한다. 이 외적인 정화는 그러나 내적인 정리를 요구했다. “그 죄악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화되지 못하리라.” 나아가, 회개하지 않으면 물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 그러한 의도에서 의식적인 세정은 꿈란 공동체에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가깝고 먼 전(全)중동에서는 이미 먼 옛날부터 목욕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례적인 정화에 대한 그리스적인 표현들이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고, 이집트적인 표현은 기원전 7세기부터, 바빌론적인 표현은 기원전 2500년부터 있었다. 나일, 유프라테스, 갠지스처럼 큰 강들은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그러한 인간적인 경향을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하는 모든 인간은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원의를 마음속에 갖고 있다. 그러한 원의는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표현되며, 옛날에 대한 정화를 잘 표현하고 쇄신의 기회를 주는 이러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는 다소 완전한 세정이다. 잘못에 대한 확인이 더욱 잦을 경우, 쉽게 자주 정화에로 나아간다. 구약 성서는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인 세정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그러한 것들은 불순한 사람을 깨끗한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그런데 상징주의에로 상당히 기울어 있는 중동인들은 쉽게 그러한 행위로 표현한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꿈란의 종교 공동체에서 새로운 생활의 초기에 세정이 시작의 - 그리스도교가 인식하는 것처럼 세례의 - 의미를 가졌는지 밝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당시의 다른 공동체들이나 유다 종파의 경우에도 그러한 “결정적인 세례”를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이 죄에 대한 용서로 회개의 세례를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유다인은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아마도 점령군의 비(非)유다 군인들은 세례자에게 생활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베풀도록 맡긴 사람은 누구나가, 분명히 과거와 함께 그것을 끊을 작정이었다.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자에게 거절당했다. 세례자는 바로 꿈란의 생활 규범과 마찬가지로 의향의 청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세례에 관한 그의 설교에 의거해 요한이 꿈란의 수도원 생활을 알고 있었거나 참여했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세례는 널리 퍼져 있었고,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자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세례 의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에 있어서 새롭고 독특한 것은 그의 결정적인 성격이었다. 즉 요한이 원한 침례로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첫인상에 세례자의 세례는 단 한번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맞다면 그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와 같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비롯했느냐? 하늘에서 비롯했느냐, 사람들에게서 비롯했느냐?’(마태 21,25)는 예수의 질문에 하늘에서 비롯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보편적으로 인간다운 표명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한 준비가 된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6월호]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9-06-24&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6-24&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6-24&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6-24&stype=m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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